나의 인연, 문학과의 만남
천태봉
요즘 젊은이들은 연예나 스포츠를 좋아해서 관심이 그쪽으로 많이 쏠리고 있는 것 같다. 놀이로써도 인기가 있고, 가수나 배우, 운동선수를 지망하는 청소년들도 많다. 삼사십년 전, 그때는 활자매체가 대세를 이루며, 요즘의 영상매체처럼 세상의 정신문화를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젊은이들은 시인을 동경하고 소설가를 선망하면서 문학청년이랍시고 폼을 잡곤 했었다.
나도 친구들에 질세라 혼신의 열정을 다해 글 한 편을 써서, 글을 가르치는 선배를 찾아 갔었다. 선배는 가까운 후배가 뜻밖으로 글을 썼다는 것에 반색하는 것 같았다. 기대 섞인 눈빛으로 읽어보던 선배는 표정이 차츰 담담해지더니 “잘 썼네!”하고는 원고를 덮었다. 그렇게 짧게 한 마디하고는 입을 꾹 닫은 채 원고를 되밀어 주었다. 나는 낙심을 해서 목이 메는 것만 같았다. 서둘러 원고뭉치를 챙겨서 돌아오고 말았다.
나는 그 원고를 상처 입은 자식처럼 끌어안고는 문학에의 열정을 더욱 뜨겁게 달구어 갔다. 문학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였다. 일기가 그렇듯, 그것은 남에게 내놓기 이전에 나 자신과의 대화이며 스스로를 일깨우고 나아가게 하는 스승이었다. 문학의 탐구성과 성문成文성은 사람이 세계의 궁극을 밝히게 하고 나 개체의 근원적 정체성을 구축해주는 기능을 한다. 문학이야말로 인간 개명開明의 시작이며 세상 마지막 승천의 날개가 될 것이라 여겨졌다. 소외감에 젖어서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한 채, 고뇌가 많았던 성장 과정을 보냈었다. 세상을 공상하고 인생을 상상하고 청춘의 번민이 많았었던 나는 그 생각들이 밑천이 돼서 글을 잘 쓸 것 같았다. 인생에 별 희망도 없던 나의 젊은 시절에 문학은 그렇게 내 잿빛 삶을 구원해 줄 푸른 여명이 되었다.
신춘문예 당선작이 발표되는 신문들을 보면서 머지않아 거기에 내 이름이 있을 것 같았다. 그 시절은 문학의 위상이 지금과 달라서 등단을 하면 당시 각광 받던 사짜들, 변호사 박사 의사 못지않은 선망의 지식인으로 나도 세상에 화려하게 등극하는 것이었다. 마음을 독하게 먹고 나도 산 속의 절로 들어갔다. 그때는 공부를 좀 하겠다는 사람들은 다들 산사로 들어가곤 했다. 고시 공부하는 친구들 옆에서, 일리아드나 삼국지를 넘어서 세상의 근원을 그려내는 작품을 써보겠노라며 나는 피천득의 문장을 필사하곤 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외진 산속에서 내 평생의 웬수를 만날 줄이야. 나는 입산의 뜻을 싹도 틔워 보지 못한 채 하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정을 꾸리고 직업생활로 내몰리어 문학이라는 인생의 원대한 날개를 접고 말았다.
이제, 세월이 흘러서 육십 갑년이 돌아왔고, 어느 덧 그 생업을 졸업했다. 예전 같으면 한 세상 다 산 나이지만 공부할 시간이 생겨서 좋다. 우리 교수님은 스스로 연세 드셔서 늦게 등단하신 것이 잘 한 일이라고 하셨다. 나도 퇴직을 하고 되돌아볼 인생이 생긴 지금이 글공부하기 좋은 때인지 모른다. 내 문학의 날개를 꺽은 웬수가 아니라, 분수도 모르고 날뛰던 내 젊은 야망의 망아지 고삐를 붙들어준 아내가 고마워진다. 그 동안 글공부를 못했지만 문학에 대한 노후의 꿈만으로 내 인생의 공부가 많이 되었다. 문청 시절처럼 뜨겁지는 않아도 살아온 삶을 반성하면서 진지하고 정성스런 마음으로 차분한 노후의 글공부를 하고 싶다.
바둑기사 조치훈은 바둑 한수 한수를 목숨을 걸고 둔다고 했다. 동양의 정신사에서 바둑 한 수와 검도 일합과 문장의 글자 한 자는 동급이라 했다. 무사들의 칼싸움에서는 일합 일합에 생사가 오고간다. 고사성어 “촌철살인寸鐵殺人”은 그러한 칼의 끝이라는 뜻에서, 문제의 정곡을 찌르는 말이나 글 자구의 적확성을 비유하는 말로 바뀌었다. 플로베르의 일물일어一物一語설은 글쓰기를 삼가 두렵게 하는 말이다. 어떤 사물을 표현하는 말은 세상에 딱 한 개의 용어가 있을 뿐이란다. 이 단어를 쓸 수도 있고, 저 구절로 바꾸어도 되는 것이 아니란다. 오직 그 한 개의 말을 찾아서 요철凹凸로 꼭 끼워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바둑은 돌을 적소에 놓기만 하고, 검도는 예리한 것만으로 이길 수 있다. 그러나 문장은 엄정함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을 녹이기 위해서는 그 날카로운 칼끝을 부드럽게 감싸서 따뜻하게 다가가야 한다. 사람 마음을 위무하고 치유하는 데는 애정과 진실과 정성 외에 달리 묘약이 있겠는가. 정곡을 찌르는 칼날이지만 어머니의 손길같이 정다워야 한다. 그런 문장을 얻기 위해 우리는 절차탁마의 수련을 한다. 그러나 정작 그러한 문장을 얻고 나면 그것은 하나의 그릇일 뿐이다. 문학을 도자기에 비유해서 문장 자체가 곧 작품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릇이 아름다워도 밥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꽃은 화사하게 피어서 나비를 유혹하여 열매를 맺어놓고는 스러져 간다. 꽃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열매를 내기 위해서 꽃잎은 살랑거린 것이다. 이제 문장은 잊어버리고 그것에 담을 주제만을 생각해야 한다. 더욱이 요즘 문학은 주제가 약해서 외면 받는지 모른다. 문장에 너무 매혹되니 주제가 풀이 죽는 것일까.
주제는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중요한 진리나 아름다운 사랑, 또는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세상 가치의 진수 진선미眞善美의 어떤 개념이나 명제, 혹은 이야기 하나가 문장이라는 그릇에 담기고 작품이라는 옷을 입고서 글의 아들로 탄생하는 것이다. 그 아들은 또한 이목구비 수려한 왕자이지만 군계일학 두드러져서는 안 된다. 부드럽고 촉촉하고 수수하여 저자거리에서도 표나지 않는 평범하고 서민적인 옆집 아저씨여야 한다. 수필은 정답고 친절한 것이 생명이고 튀는 것은 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 이 점에서, 나는 나를 자랑하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을 달래야 하는 숙제가 있다. 세상 왕따로 자라서 마음속에서 그 보상심리가 종종 꿈틀거리는 나에게는 이것이 쉽지 않다. 한 구절 써놓고는 그 구절에 스스로 대견하고 감동해서 글 전체 조화에는 눈이 멀어 나중에 보면 주제에서 벗어나거나 돌출된 문장이 씌어 있곤 하는 일이 많다. 지금 이 글에도 그런 면이 있다.
그 주씨 아저씨는 엎드린듯하지만 또 한 죽어 있어서는 안 된다. 생명의 기운이 푸르고 초롱해야 한다. 고려청자 이조백자가 아름다운 것은 튀지 않은 은근한 생명의 기운이 신비하게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명력을 문장에 불어넣는 것은 주제를 미학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이다. 성경에 하느님이 흙덩이에 생명을 불어넣어 인간이 되게 했다는 창조의 이야기는 그 상징성이 심장하다. 나도 글에다 사람을 사랑하는 내 정다운 마음을 담고 싶고, 진실에 경건한 영혼을 불어넣고 싶다. 아니 나 자체가 몽땅 다 들어가고 싶다. 일생을 바칠 일을 만나는 것이 최대의 행복이라 했다. 그리하여 ‘나’는 없어지고 독자의 가슴에 작품으로 소생하고 싶다. 그것이 작가의 최고 행복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요즈음 책 읽는 사람이 줄고 활자문화가 퇴조해가는 시대적 흐름에 동조되어 글공부에 맥이 빠지기도 한다.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가 받는 환호를 질시나 하면서, 나는 노력을 그들의 절반도 하지 않는다. 문학이 소외되는 분위기는 내 게으름의 빌미가 돼서 혼자서는 공부를 열심히 하기가 쉽지 않다. 여기 수필교실의 문우님들에게서 타성에 젖어드는 내 열정을 자극받고 어려움의 격려를 주고받으며 진지하게 수련해서 글공부가 인생의 공부로 이어지는 도량이 되기를 기대한다.
첫댓글 문학이 문학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생각과 문장을 통해서 구현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떤 장르의 예술이든 마찬가지이리라. 공허한 음풍농월은 술자리에서나 가벼운 사교에서나 적절한 것이다. 그래서 위의 글은 가치성을 가진다. 사람을 대할 때나 자신이 추구하는 일을 대할 때 천태봉 작가의 저런 진지한 태도야말로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 올바른 시도라고 생각한다.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