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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하늘 나라 우리 님
글쓴이: 노숙 김 영진
늘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라며 아들인 저에게 근심이 많으셨던 어머니
저의 어머니는 오직 우리 7남매 자식만 바라보며 살아 오셨는데
삶의 고통이 너무 크셨는지 2002년 7월 14일 (음력 6월5일)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어머니 돌아가시는날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습니다
대구에서 대기업 다닐때 너무 가난하여 사글세 20만원부터 결혼생활하였으며
딸까지 태어나면서 열심히 살아겠다는 욕심에 회사일에 코피가 날정도로
돈을 벌기위하여 신경을 썼으며 시간내어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찾아
용돈 드리며 맛있는것 사드시라고 하였지만 어머니께서는 그돈이 아까운지
한푼 쓰지 않고 장롱속에 꼬깃 꼬깃 넣어있는것을 돌아 가신후 알았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몸매가 날씬하고 다리가 이뻐셨는데 손수 칼슘이 많은
우유하나 사드시지 않고 오직 자식 걱정만하다가 골다공증으로 걷지 못하고
병석에 누워 계시다가 결국 합병증으로 인하여 돌아가셨습니다
그까짓 우유한개 얼마한다고 어머니의 건강을 챙겨드리지 못한
이 불효 막심한 청개구리는 비만 오면
어머니 생각이 나서 강가에 나가 목놓아 웁니다 ,
우리 7남매 길러 내신 박사 어머니 ,
1987년 대학 졸업식날 정든 교정을 떠나면서 ...
1928년 일제 강점기에 농부의 딸로 태어난 울 엄마는
친정이 너무 가난하여 배곯던 시절에 요즘으로 말하면
중학교 3학년인 16살때 저의집에 시집을 왔습니다 .
저의 증조 할아버지께서는 부자였는데
저의 할아버지가 부국교에 빠져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가산 탕진하자 부모님께서는 적은 땅마지기로
농사지어 울육남매 입에 풀칠하기가 막막하여
막내 여동생만 데리고 점촌 읍내로
선술집을 하기위하여 이사를 갔습니다 ,
저는 세살때 부터 아버지의 정과 어머니의 젖한번 빨아보지 못하고
어머니의 사랑이 그리웠지만 할머니의 젖을 만지며 잠이 들곤했습니다 .
제가 울때면 할머니께서는 곶감을 주시고 또울면
"울면 호랑이가 잡아간다 ,일본 순사온다"
는 소리에 울음을 뚝 그치곤하였지요 .
할아버지께서는 농사도 짓고 소도 먹이며
열심히 살았지만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잣날 없다고
매일 매일 살아가면서 보릿고개를 걸어야만 했습니다 ,
할머니께서는 부업으로 누에를 쳐서 고치를 따서 팔고
할아버지께서는 닥나무를 삶아 건조시켜
문종우를 팔아 생활 필수품을 읍내에가서
바꾸어 와서 생활에 보탬을 하곤했지요
어머니가 낳은 6남1녀중에 5째아들로 태어난 저는
개구쟁이 여서 동네 친구들과 형들과 어울려
밤에 남의집 무우도 훔쳐먹고 남의 과수원밭에
수박 참외도 몰래 훔쳐먹다가 주인에게 들키면
도망갔다가 할아버지의 불호령에 많이 꾸중을 듣곤하였습니다
산골 마을이라 소년때에는 버스도 한대 다녔고
병원 약국도 없어 이빨이 아프면 호롱불
에사용하는 석유를 솜에 묻혀 잇빨에 대면 안아프고
잇빨이 흔들리면 실로 감아 빼든가 다치면 무조건
된장을 바르든가 아까징기가 만병 통치약이 였죠
그당시 막갈리가 대세였던 암울한 시기에
아버지는 탁배기(막걸리) 직조장,
어머니께서는 상주에서 기생을 불러다가
선술집을 하여 부자가 되었으나
아버지께서 욕심에 눈이 어두워 탁배기 직조장을
작은 아버지에게 물려주고
버스 사업에 손을 대기시작하였습니다
차가 거의 없던 시절 저의 아버지는
사장으로 이름이 나서 호황기를 맞았으나
등뜨시고 배부르면 엉뚱한 생각난다고
젊은 여자를 꼬셔 살림을 차려 어머니 눈에 눈물 나게 하였지요
버스 중고차를 구입하여 그런지 고장이 자주 나고
방탕한 생활에 사업은 기울고 아버지는 쫄짱망했습니다 .
1972년 초등학교 4학년때
화병으로 할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고
우리는 향수가 서려있는 고향땅을 아쉬움을 뒤로한채
눈물맺힌 얼굴로 고향사람들과 작별하고 점촌 읍내로 이사를 했습니다
사업에 실패하여 돈을 울가낼 곳이 없는 내연녀는
서울로 3살난 아들을 데리고 이사를 갔습니다
아버지는 믿음이 가지 않아 서울에 가보았는데
내연녀는 술집을 하면서 3살난 아들을 방치하여
성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점촌으로 데리고 내려왔습니다
아버지께서는 3살난 동생을 보고 붛쌍하다며
잘보살피라고 하셨습니다
나또한 창구에서 점촌으로 이사와서 9살이었을때 철이 없어
뭔말인지는 모르고 귀여운 동생을 잘보살피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벌이도 적은데 성모마리아였기에
"저아이가 무슨 죄가 있냐 " 십자가 지듯 짊어 지셨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로 가득찬 장남은
공부는 뒷전이고 방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당시는 선생이 많이 부족한 시기여서
초등학교 나와도 선생을 할수 있었습니다
후에 부정 선생이이라하여 모두 퇴출시켜
지게 지러간 저의 초등학교때 장길성 담임선생님도 계시지만 ...
공부에 관계없이 안동 교대 원서만 내면
아주 꼴통만 아니면 다들어가는데
장남은 시험치러 가라고 어머니께서 신신당부하였지만
거부하고 술집에서 기생하고 놀다가 왔다고 합니다 .
장남은 어머니의 희망이었는데
어머니께서는 하루 종일 눈물로 세상을 원망하였다고 합니다 .
어머니께서는 훌륭한 분입니다
나는 6학년 졸업때 헌옷을 입었지만
내연녀가 방치한 내동생은 6학년 졸업때 새옷을 입히였습니다
못된 어머니 같았으면 자신이 낳은 6남매만 보듬을 텐데
내 남동생을 우리와 똑같이 먹이고 어머니가 낳은 아들은
헌옷을 입어도 내남동생은 새옷을 입히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나는 왜 헌옷만 입어야 하냐며 "
어머니에게 따졌지만 어머니께서는 혹시 남들이
내가 낳은 자식만 보듬는다고 욕할수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당시는 철이 없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되어 보니 어머니의 심정을 알것만 같았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다닐때 다떨어진 헌옷을 입어
선생님까지도 성질날때 "거지같은 놈이 "라고 말할때 충격이었고
거지소리를 들어가면서 극빈자에게 주는 눈물의 빵을 삼켜야만 했습니다
초등학교 육학년때 경주 수학 여행이 있었는데
저혼자 가난하여 빠져야만 했습니다
어려 철없는 마음에 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엄마 , 친구들은 모두 수학여행 가는데 왜 나만 못가는 거야 ?? "
어머니에게 울면서 대들때 어머니께서는
나를 꼭 껴안아 주시며 달래주신기억이 납니다
저의 형은 타고난 천재였기에 시험만 보면
백점 맞아서 전교 일등하였지만
책가방을 고생 보따리라고 생각한 저는
책한번 꺼내 읽어 본적이 없고 공부가 정말 싫었고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게 취미였기에
초등학교때에는 공부시간에 침 질질 흘리며
엎드려 자다가 선생님에게 들켜 꾸중도 많이
들었고 늘 꼴찌를 하였습니다
저의 형은 술집 기생 니나노 소리가 싫은지
동네 독서실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여 늘 전교 일등을 하였고
서울 대학교 합격했을때 어머니께서는 환하게 웃으시며
모든 고생의 시름을 내려 놓으셨습니다 .
사업에 연속 실패하시고 삶에 의욕이 없는 아버지는
저보고 중학교 마치고 취직하러 가라고 하셨습니다 .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에게 화를 내시며
"내가 벌어 아이들 공부 다시킬테니까 아무말씀 하지 마세요 ..."
하시며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더이상 실망시켜드리지 않기위해
중학교때부터는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저에게 늘 말씀하셨습니다
"영진아 ,기술이 좋아야 돈많이 벌어 성공한데이 ..."
저는 중학교 내신성적이 좋았기에
인문계보다도 경쟁률이 더 심한 포항 제철공고에 당당히 합격했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머리가 영리한데도
초등학교 교문에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무학이지만 어깨너머로 한글을 깨우치셨는지
고등학교 다닐때 저에게 편지를 보내곤 하셨지요
" 영진아 ,바다 (받아 )보아라 .
공부한다고 고상(고생) 만재(많지) ..
용돈 부첫신디 (부쳤으니) 그리 아그라 (그렇게 알아라 )
몸 건강하고 잘이거래이 (잘있거라 )
점촌에서 엄마가 씃데이 (썼다) "
추사 김정희체는 아니지만 지렁이 꿈틀그리는 글이였지만
어머니께서는 연필 심에 침을 묻혀 아들을 상상하며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정성스레 쓴 소중한 글이기에
빚바랜 편지이지만 어머니의 유품이기에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기술을 배워 포항 제철에 들어가야 했는데
형처럼 대학에 진학해야겠다는 욕심에 포항제철을 거부하고
대학 영문과에 응시했으나 실업계 고등학교에서는
교양과목외에는 인문과목을 배우지 않기에
인문계 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습니다
차라리 대구 경북대 응시하여 기술계를 지원했더라면
그당시는 정원의 30 (%)를 실업계에 혜택을 주었기에
당당히 합격했을텐데 저의 아둔함이 어머니를 실망시켜드렸습니다.
재수를 한답시고 대구 유신학원까지 가서 공부를 하였지만
실업계 고등학교를 나와서 인문 과목에 기초가 없어 지방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대학 다닐때 과에서 일등을 하여야만
전액 장학금을 받아 학교 다닐수있기에 축제때에도
메모지 들고다니며 공부한 세상에서 가장 멋없는 학생이었습니다
대학 졸업후 공무원 시험 ,대기업 모두 합격했는데
그당시는 공무원은 박봉이었고
대기업 월급의 반밖에 안되었기에 대기업을 선택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기업에 들어가 회사를 내집같이
제품을 내몸같이 열심히 일하여 상장도 많이 받고
모범상패도 여러번 받았지만
순간의 선택이 30년을 보장받는데 그것또한 저의 실수 였습니다
8년전 대기업 구조 조정으로 60 (%)을 감원하는
엄돌설한 시퍼런 칼날에 빽(인맥)이 없이는
버터낼 힘이 없어 결국 거리에 쫒겨나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 주식으로 다말아먹어 노숙자 생활하며
세상이 싫어 농약먹고 자살하려 했으나
그당시 저의 두딸이 사춘기여서 학교서 아빠없는
딸이라 왕따 당할가봐 그렇게 할수 없었습니다
죽을 정도로 용기로 세상을 산다면 무엇이든 못하겠습니까
대기업의 앨리트라는 자존심 버린지 오래고
아이들 학교 찾아가 저의 형편 이야기를
담임 선생에게 하였더니 아이들 공납금 ,급식비
모두 면제 시켜 준다는 말에 희망을 얻었습니다
그당시 남학생도 아니고 고등학생,중학생인 두딸이
여고,여중까지 30분거리를 통근 버스비가 없어
걸어다니는 모습을 보고 아빠로서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인생은 실패해서 끝나는게 아니라 포기함으써 끝나는것입니다
폭풍이 지난들에도 꽃은 피고 지진에 무너진 대지에도 맑은 샘이 솟는다
는 절망이 없다는 것을 세상에 실의 빠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위해
아니 두딸에게 산교육을 시키기위해 낮에는 아파트 관리일하고
밤에는 세상에서 가장 천한일 파지 ,고물 줍는 일을
하루 2~3 시간 잠자고 3년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미친듯이 양아치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밤에 고물 주울때 거지같은 놈이라고 비웃는 사람도 있었지만
제가 불쌍해 보였는지 추운 엄동설한에 몸좀 녹이라고
커피숕에 들어 오라는 손님도 있었고 제몸에 땀 냄새나서 싫다고 하니까
손수 따끈 따끈한 정이 물씬나는 커피 한잔 들고 나오시며
마시라고 하는 마음착한 분도 있고
통닭집 앞을 지날때면 주인이 통닭한마니 튀긴것을
공짜로 먹으라고 주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울큰딸 청이가 초딩때 "공든탑"을 글짓기하여
체신부 청장상을 받았듯이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했나요
가진 사람이 보면 하루 아침 해장국값도 안되겠지만
저에게는 피와와 땀으로 모은 보석이기에
짜장면 집을 지날때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찌르지만
침 굴떡삼키고 참아야만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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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어머니께서 선술집을 하실때
너무 가난하여 짜장면을 먹고 싶어도
용돈이 십원한푼 없기에 억수로 먹고 싶은 때가 있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낮잠을 잠시 주무실때
어머니 앞치마에 손을 넣어 돈 이백원을 훔쳐
여동생하고 같이 중국집 자장면집에 가서
자장면 두그릇을 사먹은 적이 있는데
한그릇에 백원하는 자장면이지만 면발이 수타를 쳐서 굵고
시장이 반찬이라고 너무 배가 고파 먹은 자장면이였기에
그것도 매맞을 각오하고 어머니 앞치마에 돈이백원 훔쳐
사먹은 자장면이기에 제가 50여년 가량 세상 살았지만
제게는 어느 자장면보다 맛있는 최대의 만찬이었습니다
꼴깍 ~~
그러나 어머니께서는 가끔씩 시장 사람들을 상대로
자장면을 가끔 만들어 팔았는데
우동국수에 어머니가 따장을 볶아 만든 짜장을 넣어
만든 자장면을 먹어 본적이 있는데
어머니의 손맛이 자장면집에서 먹은것 보다 백배 맛있었습니다
꼴깍 ~~~꼴깍 ~~
초등학교 5학년때인가
학교만 가면 아이들이 더러운 다떨어진
옷입었다고 거지라고 놀리는 것입니다
어린마음에 그래도 남자라는 자존심에
이인간들에게 뭔가를 보여줄려고 어머니 장롱에 돈 만원을 훔쳐
시장에 가서 새옷을 하나 사입었습니다
내일이면 친구들 주댕이를 납작하게 해준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입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뿔싸 이게 왠 날벼락이란 말인가 ..
어머니께서 새옷 왠거냐고 물으셨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돈 훔쳐서 샀기에 도둑놈 지발 저린다고
바짝쫄은 모기만한 목소리로
『엄마 ,학교 갔다가 오다가 길가서 돈 만원 주워서 샀어 ...』
어머니께서는 화난 얼굴로 장롱속에 돈 오만원이 없어 졌다면서
회초리를 들고 오시며 바른데로 말안하면 나쁜 어린이라고 하셨습니다 .
사실 나는 어머니 장롱속에 돈을 훔쳐서
어머니가 낳은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하고 다니면서
만화방에 가서 김일 레스링도 보고 극장도 가고 맛나는 음식도 사먹고
만화책도 빌려보고 다쓰고 그날 새옷도 한벌 사입은 것이였습니다
어머니의 엄한 문초에 (물고문은 아님)
눈에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항복하고 이실직고 하였습니다 .
『 엄마 ,잘못했어요 , 다시는 안그럴께요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 엉엉 ~~ 』
『나머지 사만원은 어쨌어 ? 당장 가져오지 못해 ...』
어머니의 불호령에 벌벌 떨면서
『 동생하고 일주일 동안 다썼어요 ...엉엉 ~~』
어머니께서는 바른말 하는 저의 종아리를
회초리로 사정없이 때릴줄 알았는데
가난한게 죄라며 돈 만원으로 가족의 생계를 위해 쌀을 사야된다며
새옷을 갖다주고 돈으로 바꾸어 오라고 하셨습니다 ..
내일 학교가서 친구들에게 거지소리를
들어야하니 하늘이 무너지는줄 알았습니다
차라리 매를 하루 종일 맞더라도 새옷을
한번 입어보는게 소원이었습니다,
나는 억울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새옷을 갖다주고
헌옷을 다시 입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밥을 굶으면서도 자식들 입에 밥들어가는것을 보고 늘 흐뭇해 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열손가락 깨물어 안아픈 손가락
없다하시면서도 어린 시절 제가 귀여운지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시며
『 울아들 정말 장생겼네 ,,아이고 내새끼 ! 』
하시며 함박웃음을 지으시면서도
어머니는 막내 아들이라고 늘 물가에
내놓은 아이같다며 늘 근심이 많으셨습니다.
제게는 세상을 지켜준 버팀목이였는데
2002년 고생의 휴유증으로 향년 72세로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대기업 다닐때 바쁘다는 핑계로 어머니에게
따뜻한 밥상 한번 차려드리지 못한
불효 막심한 청개구리였기에 비만오면
강가에 나가 어머니 생각이나서 목놓아 웁니다
어머니 돌아가신후 금덩어리로 밥을 해놓은들
어머니께서는 이승에 없기에 드시지 못합니다
그시절의 어머님들은 왜 그렇게 힘들게 사셔야 했을까요
저의 아버지는제가4살때돌아가셨습니다 49년전
우리5남매 배곯을까 이것저것 않해 본일 없으셨던 어머니
아버지없는 자식소리 듣지않게 하시려고 너무 엄하게 키우셨고
막내인 제동생 유복자로 태어나서 불쌍하다고 대학원까지 시키셨답니다
결혼 다 시키시고고향청주로내려가서 조그마한식당하시다가
어느날 교통사고로 자식얼굴 아무도보지 못하고 눈을 감으셨습니다
고생 고생 하시다가 살만 하니까 돌아 가셨어요
지식된 도리 제대로 못하고 살아가는 제가 어떻게 가슴에 한이 남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요양원 복지관 다나면서 어르신들을 만나 노래로 봉사하는겁니다
김연옥님 글 읽어보니 눈시울이 붉어지네요
님의 어머님이 오남매 키우느라 고생 많이 하셨겠네요
왜 고아원 ,교도소 ,요양원 ..복지관 다니며 효도 공연하시는지 알수 있겠어염
저도 친정 어머님이 부산에 계시는데 여든하나 이거든요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 뵙지못해 송구스러워요
영진님의 글에 제 맘이 숙연해 집니다.
어린시절 고생 않했던 분이 어디 있겠습닌까? 그런데 해도해도 너무 고생을 하셨네요...
눈물이 나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글을 남깁니다. 어머니의 크신 사랑을 모르고 사는 지금... 어버이 날이 다가와 엊그제
일요일에 어머니 뵙고 왔는데...살아 생전에 열심히 뵈러 다녀야 겠네요. 돌아 가신 후 효도 해야 무슨 소용...
영진님! 힘내시고 이젠 어머님 대신 그동안 고생 하셨던 일들을 버팀목으로 삼아 더욱더 열심히 사시기 바랍니다.
강아영님
얼굴만 이쁜줄 알았는데 맘씨도 너무 고우세요 ~~ㅎㅎ
부모님 돌아 가신후에 진수 성찬 차려놓고 제사 진낸들 부모님이 드시지 않지염
살아계실제 따쓰한 밥한그릇이라도 차려드릴수 있다면 그분이 바로 효자 ,효녀일게에요
바다새님 살아실적 전화한통화자주하시고
시간날때 자주찾아뵈어요
않계실적 후회해도 소용이없더군요
요양원 공연 갈때 항시 눈시울 적시고 돌아 온답니다
가수 최린님
님의 어머님이 돌아 가셨군요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극락왕생을 바라겠습니다
저도 어머니가 십년전에 돌아가셨지만 살아생전 울 육남매 키우느라
고생만하다가 돌아 가셨고 바쁘다는 핑계로 따스한 밥상한번 차려드리지 못한
불효자이기에 제가 쓴글 <운영자 창작글방~하늘나라 우리님>만 보면
자꾸만 후회의 눈물이 나옵니다 , 최란님 부부의 봉사 활동에 감동받으며
기장에서 하시는 자장면 사업 잘되시길 바랍니다
영진님
한다고해도 남는게 후회뿐인 날들이네요
조금만, 이라는 아쉬움이 자꾸 남아서 ...
가냘픈 몸매에 사뿐사뿐 걸어 다니시던 모습이 눈앞에 선한데...
이제 다시 그모습을 볼수없다는걸 아직 실감하치 못하고
매일 옆에서 지켜주지못한 마음이,세상이 배려하지못한 삶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살아생전 39홉 나이에 하나님 품으로 들어가셔서 39년을 하나님만 찾으시던 어머니,
그 어머니를 만질수도 느낄수도없는 슬픔으로 남았고 세상끝, 먼길을 떠나신 어머니
어머님이 간절히 원하셨던 세상, 하나님의나라에서 평안하시길 자식된도리로서 빌뿐입니다
사랑으로 생을 사시는 노숙님께 많이 배웁니다. 사랑이넘치는 행복한 가정 되세요.
5월8일이 원래 어머니의 날인데 전국의 아버님들이 같은 부모인데
섭섭하다하여 어버이의 날로 된것이지요
어머니의 사랑은 아카페적 사랑(헌신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합니다
열달 배앓이를 하여 낳은 자식이 어머니이고 씨만 뿌려 낳은 자식이 아버지이기에
자식 사랑하는 강도는 제가 보기엔 어머니가 좀더 바다보다깊고 하늘보다 높다고 봅니다
그래서 논산 훈련소에서 빡시게 훈련받고 눈물 고개라는데서 "어머니의 은혜"노래를
부를데 다큰 대한의 아들들이 엉엉 울며 눈물을 보이는것이겠지요
저또한 두딸을 키우는 아빠이고 자식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지만
아내인 바다새가 자식을 바라보는 눈높이에 비하면 어딘지 모르게 2(%) 부족하답니다
저의 어머니도 십여년전에 돌아가셨지만 어머니 생각만하면 왜 자꾸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사업실패로 세상을 방황할때 어머니께서 우리 육남매 보듬어 주시며
온갖 가시밭길 마다하고 어머니께서는 굶으면서도 어린 자식입에 밥들어가는것을
보고 마냥 웃으시는 성모마리아 이기때문일겁니다
호랑이도 나온다는 문경 깊은 산골에서 형이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 서울대학교 합격할때
춤을 덩실 덩실 추시며 눈물을 보이며 웃는 어머니의 모습이 그립습니다
외출하려다가 잠시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오늘에서야 김영진 님에 대해서 어떤분인가 알게됐습니다 살아온 세월이 정말 어렵고 한이 많았던 세월이웠습니다 꿋꿋하게 역경을 헤치며 살아오신 김영진님을 존경합니다 저도 2년전에 83세의 나이로 세상뜨신 어머니가 왜일렇게 그립고 보고싶은 마음에 이 글을 읽으면서 너무나 공감하고 한참이나 흐느껴 울었네요 여름 무더위에 장마비가 한 차례 후들기고 지나갑니다 속시원히 저도 눈물 흘려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