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십자가와 좌우의 두 강도의
죽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예수님 혼자만이 아니고 좌우의
두 강도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서 죽게 되는 거대 사형집행장이었다.
사형집행장!
그렇다. 나는
지금 이 세상이 온통 거대 사형집행장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비유가 아닌 것이 없고
상징적인 것이
아닌 것이 없다. 모두 비유이며 상징적인 것이다.
즉 여기서 예수님의
죽음이 비유이며 상징적인 것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하늘의
영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하나님의 본성으로
오신 사람하나님을
뜻하는 시나리오요, 그리고 좌우의 두 강도는
세상의 일반사람
전부를 뜻하는 각본으로 세워진 상징적인
거대 사형집행장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그러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고 그냥 상징이냐고
크게 반박하겠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왜냐면 반드시
죽으셨기 때문이다. 다만 그 죽으심이 단순한 죽으심으로
끝난 게 아니고,
그 죽으심이 엄청난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상징성을
추가하여 가졌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예수님이 죽게 된 세상적 자자부리한 이유야
많지만, 또 좌우의
두 강도가 죽어야 하는 세상적 이유도 명백하지만
다 생략하고 본론적
하늘의 큰 사건을 들어 말하리라.
그게 우리가 알아야할
본론적 참 진리가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현신인데 하나님이신 그분이
왜 죽어야만 하는가?
그리고 온 인류를 상징하는 좌우의 두 강도는
왜 죽어야만 하는가?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죽어야 하고
창조주가 지으신
온 인류도 죽어야 하다니
이것이 무슨 변괴이며
무슨 곡절이 숨어 있단 말인가?
창세기 1-3장은
모든 성경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 있는 성경에 대한
키워드이다.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라고 알려주고
있다.
땅이 혼돈 공허하다는
것은 아직 창조직전 상태를 말한다.
창조직전 상태에서
흑암이 깊음위에 있다고 했으며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한다고
했다. 깊음 위란, 물위를 뜻한다.
따라서 흑암도
물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도 물위에 있다.
이로 볼 때,
하나님의 근본은 사망의 흑암(사탄마귀)도 되고
빛나는 생명의 신도 됨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야누스와
같은 두 얼굴의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두 얼굴이므로
하나님은 빛나는 생명의 빛을 창조하시며 동시에
사망의 흑암도
드러나는 것이었으니 하나님이 첫째날
빛을 창조하시자
그 빛을 즉시 어둠과 나누었다고 알려주고
있지 않던가?(창1:3)
그리고 이사야에서는
이 점을 더욱 노골적으로
[사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라고 알려주고
있다.
이렇게 하나님은
두 얼굴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러한 자신을
일컬어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셨던 것이다. 알파는 시작이요,
오메가는 마침이다.
알파는 시작이므로
창조미완이며 흑암한 사망이다(사망의 흙).
오메가는 마침이므로
창조완성이며 빛나는 영생이다(영생하는 생명).
남자는 일의 시작인
알파요(1),
여자는 남자를
돕는 배필로서 남자를 도와 완성시키는 오메가이다(2).
따라서 하나님은
알파인 아담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라고 했던 것이다.
흙으로 돌아가라는
아담은 남자이므로 이것은 지금까지 인류가 사망을
당해온 남성시대를
살아왔음을 뜻하며, 하나님의 처음 하늘 처음 땅인
알파시대를 뜻한다.
처음의 미완성 알파시대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알파는 두번째 완성의 오메가시대를 불러내기 위한
전조의 필연이며
궁여지책인 것이다.
알파시대의 인류역사에서
아무리 하나님을 잘 믿고 그 충성심이 입증된
자라 할지라도
어느 누가 영생하는 자가 있었던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심지어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까지 예외 없이 죽어야만 했던 것이니,
이것이 곧 예수님의
십자가와 좌우의 두 강도의 거대 사형집행장이 된다.
창조주 하나님은
단번에 창조완성으로 마침이 되지 아니한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죽음이란 있을래야 있을 수 없게 된다.
단번에 창조가
완성됨이 아니고 처음 시작은 미미한 창조의 미완성이므로
죽음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중에
창조완성의 영생이 있게 되는데 이 때는 여성시대가 된다.
왜냐면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지으실 때 남자까지는 사망의
흙으로 지으셨으나
여자만은 유일하게 흙으로 짓지 아니하셨다.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지으셨다. 그리고 아담에게 말씀하시길
[창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몸을 이룰지로다] 라고 하셨던 것이다.
모든 만물은 흙으로
지어졌으므로 사망의 종말을 맞는다. 남자도 흙으로
지어졌으므로 알파시대요,
남성시대까지는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망이었다. 그러나
아담의 아내만큼은 갈비뼈로 지어졌으므로 사망이
아니고 영생의
몸이다.
여자는 영생하는
몸이기 때문에 남자도 영생하기 위해서는 아담에게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몸이 되라고 당부하신 것이었다.
이는 다시 말해
사망을 당하는 알파요, 남성시대의 인류가
영생하는 오메가요,
여성시대인 그 아내에게 옮겨가라는 뜻이 되기 때문에
사망의 인류가
영생의 인류로 대전환되리라는 뜻이었다.
이렇게 성경문자는
그 한자 한자가 하나님의 창조역사가 되고 그것은
동시에 인류역사로
나타나는 현상계를 이루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창조현상이요, 하나님의 진리를 목격함이 된다.
따라서 마음이
정직한 자라면 성경을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진리로
가득한 세상에 몸 담아 있고 진리가 곧 손에 잡혀지고
있음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그에 관련된 자들의 일거수 일투족 하나 하나는
엄청난 창조의
비밀이 숨겨진 하늘의 진리인 것이지 땅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 믿는 기독신자들은
반드시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죄,
죄, 죄가 있어서 죄의 삯인 사망이 왔고, 예수님은
우리죄를 대신해서
죽어주셨고 따라서 우리는 죽지만 영혼만은
천당에 간다고
야단법석을 떨어댄다.
그리고 예수님은
재림하셔서 미쳐 따라가지 못한 육체를 저 천당으로
끌어올려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옛뱀 사도바울의
거짓 교리로 집단
세뇌된 앵무새소리들일 뿐이다.
그리고 성경을
배척하고 세상의 온갖 예언서들에만 심취하는 소위
동양의 도인들은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은 아담을
향하여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했으니 성경은
인류에게 구원을
약속한 게 아니고 죽음만을 안겨줄 뿐인 쓰레기
잡기장이라고 희롱하며
야유를 퍼부어댄다.
그리고 그의 아내에
대해선 남자의 돕는 배필일 뿐 여자는 아무런
존재가치가 없다고
주장한다.
알파와 오메가를
모르니 돕는 배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리 없고
세상적으로 무가치한
존재요, 심지어는 여자는 본래 없어야 하는
존재라는 주장까지
서슴없이 해댄다.
유식한자 한문을
써서
“陽來陰退” 라고 주장하면서 여자는 가치 없어서 남자만이 여자를
처첩으로 수십명씩
거느리고 성욕을 불태우며 세상을 독차지한단다.
그게 동양예언서라나
뭐라나.
그러면 “陽來陰退” 가 진정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추천수 팍팍 올라간다.
마치 자기들은
죽음도 모르고 고생도 모르고 오염된 땅도 모르고 오직
신선들의 도포자락에
응석받이로 안겨노는 금자동이 은자동이처럼 행세한다.
즉 세상살이에서
죽음의 현실을 창조의 세계로 인정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현실이 창조와는 아무 상관도 없이 저 무릉도원으로
살폿이 오신다는
진인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창조의 원리도 모르고 창조의 지식도 알 바 없고
오직 꼬까옷 입혀주고
배불리 먹여줄 진인이 오셔서 모든 게 풍족한
꿀꿀이 꽃돼지가
되기로 작정한 것이다.
도무지 자신들의
존재의 정체성을 알려줄 성경의 진리에 대해선 아무
영혼의 갈구함이
없고 오직 탐욕과 정욕으로 배를 불려줄 똥 이야기에
집단 최면이 걸려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남성시대는 바로 그렇게
더러운 집단 최면들이
되기 때문에
우리 모두 사망의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주옥으로 빛나는
눈부신 성경전체의 진리를 그들이 어찌 알랴만,,,
그들이 가장 혐오하는
흙으로 돌아가라는 그 말 한마디 속에도
이렇게 엄청난
살아 있는 진리가 알박아 있음을 그들이 어찌 알랴만,,,
그들 앞에 나는
또 바보가 되어 있다.
그래서 이 글을
보고 그들은 나를 또 얼마나 비웃어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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