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과 영광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인간을 일컬어 피투성의 존재라고 했다.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세상에 던져진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이다.
신앙의 눈이 아닌 상식의 눈으로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나지 않았으며, 까마득한 확률을 통과하고 우연히 사람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얘기가 다르다.
우리는 하나님이 손수 지으신 존재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이사야와 에베소서를 중심으로 짧게 살펴보자.
이사야는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으셨다고 하고 바울은 선한 일을 하라고 지으셨다고 말씀한다.
'지으셨다'는 헬라어 '포이에마'로 창조를 의미한다.
이사야서의 포이에마는 유를 의미하는 창조를, 에베소서의 포이에마는 구원을 의미하는 재창조를 뜻한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구원을 말하면서 포이에마를 언급했기 때문에 재창조를 의미한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목적이 선한 일이라고 이해하면 쉽다.
그렇다면 이사야가 말씀하는 영광은 뭘까?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봤다고 말씀한다.
여기서 영광은 한마디로 빛이다.
하나님의 빛이 뭔가?
천사들도 하나님의 빛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근본적인 사상으로 삼는 칼빈도 시원한 해답을 내놓지 못한다.
신구약 곳곳에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이사야의 빛과는 차이가 있으므로 논외로 하자.
모세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으며, 천사들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빛에 가려진 존재이시므로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마찬가지다.
신학적으로 영광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재 양식이며, 임재를 나타내는 가시적인 표현이다.
쉽게 말해 영광은 하나님의 존재와 임재를 나타내는 빛이다.
예컨대 변화산 사건을 보면 광채 속에서 그리스도가 나타나셨으며, 바울은 다메섹에서 강렬한 광채로 인해 눈이 먼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성을 말하며, 나아가 그리스도와 사람과의 관계성을 의미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삶과 복음의 일치를 이루는 삶의 복음화로 연결해도 무방하다.
바울은 복음을 나의 복음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것은 바울과 복음이 하나된 성화의 상태를 말한다.
이 삶의 복음화를 이루며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조금씩 다가서는 존재다.
골치아픈 말들을 다 치우고 우리의 창조 목적은 찬송이라고 보면 간단하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우리를 찬송하게 하려고 지으셨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찬송가를 부르기 위해 태어났는가?
인간을 단순히 하나님을 노래하는 대상으로 보면 곤란하다.
이사야가 말하는 찬송은 노래의 차원을 뛰어넘는 삶의 모든 것이며, 삶이 찬양으로 승화되는 성화의 의미이다.
찬송을 드리면서도 삶은 찬송과 거리가 멀다면 창조 목적에 위배된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과 영광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호위하는 영광, 곧 신령한 빛은 하나님과 직결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라는 말을 조금 바꾸면 하나님을 위해 사람을 지었다는 말이 된다.
사람은 하나님을 위할 수 있는가?하는 물음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신학생 때 한의사와 얘기를 나누다가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하지 못한 적이 있다.
손에 잡히지 않는 모호한 말을 의학이라고 하면 곤란하지 않느냐고 물었떠니 한의사가 되물었다.
"그럼 하나님의 영광을 설명할 수 있나?"
내가 영광은 헬라어로 독사인데 광채를 뜻한다는 모호한 대답을 하자, 한의사는 한의학이나 신학이나 설명하기 어려우나 분명 존재하는 실체가 있다고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제대로 설명할 내공이 없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한다.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의 빛을 만민에게 드러내는 것이 창조 목적이다.
지금 하나님의 빛은 가려진 길이며 거룩한 신비다.
우리가 걸어가는 믿음의 길끝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분명하게 체험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스마트폰에서 작성한 초고이므로 성경 장절은 기재하지 못했다는 점을 고려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