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멋과 인물, 역사 유감
가장 민족적(향토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백낙청 선생의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을 지적하지 않더라도 진도를 찾는 외부 관광객이라면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우리민족의 애간장을 녹이는 듯한 계면조 가락을 연상케 하는 듯 한 "한" 같은 특유의 감정을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민족의 아이덴티티가 아니겠는가 생각해보며 이런 구슬픈 가락이 왜 유독 진도에서만 더욱 애절하고 강하게 전승되는 이유는 어디에서 연유하였을까?
진도는 삼별초 진압이후인 려말조초 왜구의 침략과 중앙정부에 대한 반역 등으로 70여년 가까이 공도(빈섬)로 관리되면서 그때 두고 온 고향산천을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
섬사람들의 또 다른 애환은 평소에도 뭍을 향한 그리움이 대단하나 고향을 등지면 서 그것도 정부권력에 의해 타의로 떠나고 나면 농경민족의 후예답계 그 그리움이란 더욱 사무쳤으리라........
옥토라고 하지만 간척이 미흡하여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바다에서 고기와 미역 등을 채취하는데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다 보니 늘 바다의 높은 파도와 싸웠을것이고 이런 과정에서 남정네들은 숱하게 파도속으로 밀물져갔을 이름모를 민초들은 얼마나 될까? 그리하여 살아남은 여성들이 먼저간 남편의 넋을 달래기 위해 씻김굿을 했으리라 미루어 짐작된다 하지만 이런 무형문화재도 전문지식인들의 노력에 의해 체계화되기 전까지는 그리고 세계민속축제에서 금상을 받기 전까지는 이들 인간문화재들은 무당, 박수, 당골래 라고 폄하 또는 백안시되기 십상이었는데 이제는 정부와 지자체의 폭포수 같은 지원으로 공연이 상설화되기 까지 했으니 이런 축복이 어디 있으랴? .
그리고 1597년9월 명랑대첩 당시 해남 쪽 어란진에 머물고있는 왜군을 울돌목 해협으로 유인하여 격파할 때 충무공의 전략도 훌륭했지만 조선수군이 승리할 수 있도록 양해협의 육지에서 이름없이 싸우다 전사한 육상의 해남·진도 향토민으로 구성된 의병은 얼마나 되며 이들이 산화해간 후 남은 가족들의 한은 어떠했을꼬? 이를 반증하는 물증으로는 진도에는 지금도 무명용사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어 400년 전 우리역사의 슬픔을 간직하고 있다.
수년 전 목포문화원(구 일본 영사관) 복원공사를 하려고 바닥 일부를 드러냈는데 이때 이름을 쪼아버린 비석이 몇 개 발견되었다.
이 일본영사관 건물의 조성에 대해서는 일본 중의원 기록에도 있는데 두 차례 걸쳐 당시 엔화로 7만엔 씩 14만원이 지원되어 1900년에 준공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명랑대첩 후 목포 앞바다 고하도에 진을 설치하여 3개월 머무는 동안 명랑대첩에서 공을 세운 조선장수의 기념 비문을 설치하였는데 1897년 일제에 의해 조선의 목포와 진남포(현재 북한 남포항으로 서해갑문임)가 강제로 개항되면서 일본인들이 영사관을 건립의 주춧돌로 고하도에 설치된 조선장수들의 비문에 새겨진 이름을 쪼아낸 후 기초공사의 초석으로 사용했을 정도로 잔인한 역사왜곡을 우린 기억하여야 한다.
또 1894년 동학혁명 후 일본인들이 동학잔당을 소탕한다고 삼남(충청 전라 경상)대토벌작전을 벌이면서 진도는 싹쓸이의 진원지나 다름없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살육이 전개되었고 이를 증명하듯 지금도 홋가이도대학 박물관에 동학군 유골이 보존될 정도로(일본에서 한국근대사를 10여년 연구한 박맹수 원광대교수 증언) ....그리고 조선시대 진도에만 유배인이 20여명을 웃돌정도로 가장 많은 저주와 원망이 서려 그래서 이런 한이 소리와 춤으로 승화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1998년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20세기를 변화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국내외학자 10명씩을 발표하였는데 국내학자로는 이영희, 백낙청 그리고 이 지역 출신 고 김현 선생이 3번째로 높이 평가될 만큼 한국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으나 고향에서의 기념비 하나없는 허전함을 어찌해야 좋을지 .............................
그런데 일제식민지하에서 친일작가이며 5공 군사독재 시절에는 군사정부와 늘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던 조병화 같은 인물은 항상 권력의 양지와 시류에만 편승하여 어려운 시대를 작가로서의 역할과 의무를 저버린 곡학아세의 대표적인 인물인데도 이 고장의 아리랑시비에 시와 이름이 새겨진 것은 우선은 진도 조씨들의 힘으로 착각되지만 참으로 역사에 대한 무지이며 또 다른 역사 왜곡이라고 훗날 두고두고 평가받을 것으로 판단된다.
인하대학교 교정 상징탑에 새겨진 조병화 시인의 글을 보면서도 연수 기간 내내 저 기념물이 남도의 어느 대학에 있었다면 오래전에 철거됐을 턴데 .......동유럽에서 철거된 스탈린과 레닌의 동상과 이승만 이후 그에 대한 상징물이 사라진 것을 보면서도 자각 못한 것을 ...........따라서 기념비가 될만한 사업이나 역할은 전문가 집단과 함께 한 최소한의 주민 토론회라도 거쳤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 진도역사관에 전시된 님웨일즈의 아리랑 원전은 김산(본명 장지락)은 북한 평양출생으로 3.1운동 실패 후 중국으로 건너가 조선 독립을 위해 애쓰다가 일인들의 혹독한 고문을 받고 팔로군들의 오해로 억울하게 처형당했으나 훗날 그의 대한 올바른 평가를 받은 독립운동가로 진도와는 아무 연관도 없는 인물이고 책 역시 그러한데도 어떤 이유로 관계가 있다고 우기는지 그 이유라도 설명이 됐으면 좋으련만 .....지난번 기행 때 처음 오신 선생님을 모셔놓고 인사가 아닐 것 같아 침묵했지만 이래서는 안되는데 하는 마음만 갖고.
오늘의 진도 무형문화재들이 그 옛날 70년대 까지도 무당, 박수 등으로 폄하되어 음지에서만 머물렀으나 인문학 전공자들의 우리것 찾기에 대한 숨은 노력과 70년 대 부터 세계각국에서 문화상대주의가 보편적 진리로 부각되면서 진도의 소리와 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았을까? 나 자신도 유년시절 어머니께서 무당을 모셔와 굿을 했던 선연한 추억이 생각나 기회가 되면 진도 임회면 남도국악원에서 씻김굿을 다시금 보고 싶다.
경기지역 선생님들 6월도 남으로 오세요. 남으로 ...........
보고픈 마음 대양만 하니 서해로 오세요 상의해서 머리가 시원한 반장 선생님도 동반해서요
첫댓글 6월12일 진도 첨찰산 산행을 하였는데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좋던데요... 청주 갑시다.
박선생님 참으로 남도에 또 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번은 중부권에서 만나기로 사전 약속되어있습니다. 반장님도 동참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제천에 김경중 선생님도 시간을 비워두고 안내하기로 하였답니다. 어서오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