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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광복단의 재조명,
의열단은 대한광복단의 복사판이었다!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 학술회의에서 전문교수 밝혀
10월 31일, 오후2시, 동양대 인문사회관 세미나실에서
비가 오는 날씨에도 많은 참석자들이 끝까지
논문발표와 토론을 지켜보다
<2014 보훈선양 학술회의 발표와 토론장면>
의열단은 독립투쟁 단체 중 가장 치열하게 일제와 독립전쟁을 벌인 단체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의열단이 대한광복단의 복사판이었다는 것이 2014년 학술회의에서 재확인 되었다. 대한광복단은 영주에서 국내 최초 무장투쟁방식의 독립운동은 전개한 단체로 1913년 창설되어 1918년까지 활동한 단체였다.
학술회의 개최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회장 김병수)가 주관하고 영주시, 안동보훈지청, 동양대학교가 후원한 2014년 보훈선양 학술회의가 10월 31일 오후2시, 동양대학교 인문사회관 세미나실에서 장욱현 영주시장을 비롯한 내외귀빈과 시민, 학생, 6.25 참전용사, 재향군인회원, 기념사업회원, 풍기 성내교회와 풍기 제일교회의 교우, 독립운동 유공자 단체회원 등 200여명이 참석하여 “대한광복단과 영주독립운동의 체계적 조명”이라는 대주제로 시종 진지하게 개최되었다. 여름장마 같은 늦가을 비도 이들의 참석 열기를 잠재우지 못하였다.
김병수 기념사업회장은 개회사에서 “오늘 학술회의는 대한광복단 창설 101주년 되는 해에 본 기념사업회로서는 12년만에 개최되는 학술회의”라고 소개하였다. 이어 장욱현 시장은 축사를 통해 “영주는 금성대군의 단종복위운동에 합세한 일로 많은 고난을 겪었을 만큼 항상 불의에 항거하고, 옳은 일을 실천하는 선비의 고장이라는 명성에 걸 맞는 일을 해왔다.”고 전제하고 “이것은 나중에 소수서원 창설을 통한 서원문화로 이어진 선비정신은 나라의 주권이 일제에 의해 침탈당했을 때 전국의 애국선열들이 풍기에 모여서 대한광복단을 창설하고 전국에서 최초로 무장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오늘 이 학술회의를 통하여 영주와 선비정신, 독립운동을 전개한 선열들의 애국정신이 재조명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이 성과가 영주발전에 기여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내빈으로 풍기에서 대한광복단을 창설할 때 주역으로 활동한 채기중 애국지사의 친손자 채한기 선생이 소개되어 큰 박수를 받았다.
진행방식
국민의례와 축사 등이 끝난 다음 학술회의 논문발표와 토론은 이윤갑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좌장(座長)을 맡아 진행했다. 먼저 좌장이 발표자의 학문적 성과와 약력을 소개하고 논문집필자가 발표자로 논문을 설명하면, 다시 좌장이 그 내용을 요약하여 참석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발표논문은 빔 프로젝트로 화면에 비춰졌다. 이어 좌장이 토론자의 학문적 성과와 발표논문, 저서 등을 소개하고, 토론자가 발표논문에 대하여 한 단계 더 심도 깊은 질문을 하면 발표자가 보충설명을 하였다.
일반적으로 내용이 딱딱하고 학술적이고 전문적인 용어사용으로 일반인들에게는 지루한 느낌을 준다는 통념을 깨고 이날 학술회의는 좌장과 발표자와 토론자가 청중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한 덕분에 3시간 동안 깊이 있는 내용에 빨려들어 나중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이따끔 참석자들이 발표자의 설명에 따라 발표논문집을 넘기는 책장 소리만 들릴 정도로 팽팽한 긴장 속에 진행되었다.발표논문과 토론
- 영주지역 민족운동의 성격과 의의는 무엇인가?
<왼쪽부터 발표자 김일수 교수, 좌장 이윤갑 교수, 토론자 김태환 전 회장>
첫 번 째 순서로 금오공대 김일수 연구교수가 “일제강점기 영주지역 민족운동의 성격과 의의”에 대하여 “①영주는 민족운동의 중요한 영역을 차지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규명은 그간 학계에서 주목받지 못하였다. ②영주의 항일민족운동은 시기별로 전체 민족운동의 흐름과 깊은 연관을 가지면서도 민중적 역량의 토대 위에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③영주 항일민족운동은 자연, 지리, 행정적 차이가 뚜렷한 영주, 풍기, 순흥이라는 세 지역의 차이를 넘었고, 신분과 계층간의 유대와 연합을 이뤄냈다. ④영주의 항일민족운동사의 주요한 특징은 무장항쟁적 투쟁노선 위에서 통일전선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논문발표를 하였다.
이 발표에 대하여 영주문화유산보존회 김태환 전 회장이 토론자로 “①대한광복단이 영주에서 창설되어 전국으로 확대된 이유 ②영주의 독립유공자 중 서훈을 받지 못한 분들에 대한 서훈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방법, ③대한광복단기념공원의 활성화 방안” 등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일수 교수는 “영주에서는 대한광복단이 창조적인 민족독립운동이 되었다. 이것은 자발적인 민족의식이 독립투쟁의 방식으로 나타나, 같은 노선을 지닌 단체들과 통합을 거치면서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된 것이다. 더 상세하고 세밀한 것은 나중에 깊이 있는 연구와 토론을 해보고 싶다. 또 영주에서 독립운동 유공자에 대한 서훈은 필요한 자료의 확보와 증거의 수집으로 기념사업회가 주체가 되어 안동보훈지청의 후원으로 속히 서훈이 이뤄지도록 했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영주 소작농민조합운동을 전개하고 조선 13도총간부사건을 전개한 강택진 선생의 공적을 발굴, 건국훈장을 서훈받게 한 것에 보람을 느낀다. 대한광복공원은 영주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영주독립운동, 나아가 대한광복단기념사업의 주역이 되어 연구, 전시,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도록 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협력하면 크게 활성화 될 것으로 기대한다. ”고 의견과 소감을 밝혔다.
영주지역 농민운동은 과연 독립운동인가?
농민운동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성과를 설명
<왼쪽부터 발표자 박한용 교수, 좌장 이윤갑 교수, 토론자 윤상원 교수>
두 번 째 순서는 고려대 교수이며 영주독립운동사 집필자인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실장이 “1920년대 영주지역 농민운동”에 대해서 발표를 하고 윤상원 동국대학교 교수가 토론질문을 하였다. 박한용 교수는 “일제시대 농민운동은어떠했을까?, 농민운동을 독립운동이라고 볼 수 있는가? 농민운동이 독립운동의 관점에서 어떤 성격인가?”라고 문제를 제기하여 참석자의 관심을 환시시킨 후, “일제는 식민지로 조선을 침략하고 전 산업의 90%이상인 농업을 대상으로 수탈정책을 실시했다. 그것의 준비단계로 토지조사실시로 수탈대상을 소유관계의 명확화를 시키면서 조선총독부가 전 농지의 40%를 차지하고 수탈했다. 그 결과 이러한 수탈에 대한 저항이 일어났는데, 이 수탈을 배제하는 것이 곧 일제지배의 배제를 뜻하게 된 것이다. 농민들의 요구사항은 ⓵1920년대에 소작료가 생산량의 70%~80%에 달하는 살인적인 소작료 인하 ⓶ 소작료 인하에 대한 보복으로 토지소유자가 소작권을 강제로 변경해버리니까 소작농은 이에 대한 원소작권 환원요구 ③소작료를 인상하는 수탈에 대해서는 소작료를 당초대로 유지 ④지주가 소작인에게 전가하는 지주몫의 비용을 지주부담 요구 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운동과정에서 영주에서 대표적인 것이 강택진의 지주권 포기이다. 강택진은 자신이 지주이면서도 소작인들에게 자신의 토지를 기부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면서 지주들을 향해 실지로 농지를 경작하는 소작인들에게 토지소유권을 돌려줘야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실천한 것이다.
소작료 인하요구로 촉발된 농민운동과 독립운동과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해
1923년 이후에는 농민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⓵지주부담분에 대한 소작인의 납부거부운동, ⓶소작인과 지주간의 갈등격화, ③지주의 고액소작료 항의 소작인에 대한 소작권 박탈행위 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농민운동의 과정에서 ①소작농민조합운동으로 결성된 소작조합은 지주에게 소작권을 박탈당한 소작인에게 소작인조합에서 조합비로 생계비를 지급하게 되었다. ②지주와 일제의 탄압으로 소작조합 지도부가 구속당하자 지도부 가족에 대한 구호활동전개, ③구속된 옥중동지 후원회원동, ④소작자문제로 지주가 소작권을 박탈한 토지를 다른 소작인에게 소작권을 부여하자 그 신소작인과 원래 그 농지를 경작하던 구소작인과의 관계, ⑤살인적인 소작료를 부과하는 지주에 대한 문제 등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후 농민운동은 경험축척으로 학습효과가 나타나 공동작업을 하는 ”일꾼회“가 탄생되고, 나아가 농민회로 발전된 것이다.
영주에서 영주농민회는 최초에 풍기 금계동에서 창립되었는데, 이것은 처음에는 소작인만의 소작인 모임에서 나중에는 자유농까지 가담하였는데, 조직면에서 면, 군, 도, 전국으로 확대되어 갔다. 일제는 이를 식민지 수탈정책에 대한 반대로 보고 탄압하고 막은 것이다. 따라서 일제의 탄압에 반대한 운동이 번져 나가니 나중에는 자연히 독립운동의 성격까지 띄게 된 것이다. 강택진은 이런 농민운동에서 출발하여 독립군자금 모집이라는 독립운동까지 계속한 것이다.”라고 깊이 있는 설명으로 참석자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에 대하여 윤상원 동국대 교수는 토론자로서 “농민운동이 과연 독립운동인가? 합법적인 농민운동은 일제가 허락한 운동인데 이것이 반일 독립운동이 되는가? 혁명적 조직활동과 연계되지 않은 농민운동이 독립운동이라 할 수 있는가?”라고 심도 깊은 질문을 던졌다.
박한용 교수는 이에 대한 답변으로 “소작조합운동가들은 공개적 활동에서도 이면적인 활동도 있었다. 소작운동과 독립운동의 병행이었다. 농민운동가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합법을 가장하고 소작운동을 전개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다양성을 발휘했다. 강택진 선생의 활동이 대표적인 것이다.”라고 보충설명을 했다.
영주 소작농민조합운동에 강택진 선생 새롭게 조명
토론답변이 끝나자 이윤갑 교수는 “영주농민운동의 대표적인 것은 강택진 선생이다. 이것에서 보듯 진정한 농민운동은 곧 독립운동이라 할 수 있다. 즉, 일제를 물리쳐야만 살인적인 소작료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 독립운동의 일환이 될 수 밖에 없는 농민운동을 전개한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박한용 교수의 농민운동과 독립운동의 문제는 그동안 고액 소작료 인하운동 등으로만 알려진 농민운동에 대하여 조선농민의 생존권문제, 이로 인한 농민조합의 필연적인 결성과정과 활동, 농민조합활동은 식민지 수탈정책에 대한 근원적인 저항의 문제이기 때문에 반일성격을 띨 수 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를 설명하였다. 이것은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과 이로 인한 살인적인 소작료 수탈로부터 먹고 살게 해달라는 일제하의 경제운동, 사회운동으로서 일제에 대한 저항의 내용이어서 기존의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한층 심층있는 내용이었다.
이 발표를 들은 참석자들은 “농민운동과 독립운동을 주제로 한 강의는 단순한 강의가 아니라, 정신 바짝 차리고 들어봐도 깊이가 있고 농촌문제의 구조적인 내용이다. 농민과 토지, 소작료의 문제가 그렇게 복잡한 줄 몰랐다. 그것이 자연발생적으로 반일운동으로 번질 수 밖에 없는 필연성에 새삼 크게 깨달았다. 참 유익한 학술회의였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대한광복단의 또 다른 재조명, 의열단은 대한광복단의 복사판이었다.
의열단, 광복단 관계 설명하던 좌장 교수, 의열단원이었던 선조 생각에 감격한 분위기로 눈물을 보여 숙연한 분위기로 이어져
<왼쪽부터 발표자 박선경 교수, 좌장 이윤갑 교수, 토론자 조한성 박사>
두 시간의 발표와 토론이 이어지고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세 번 째 순서로 대전신학대학 박선경 교수(영주예섬교회 담임목사)가 “대한광복단이 의열단에 끼친 영향 연구”라는 제목으로 논문발표를 했다.
박선경 교수는 “의열단은 1919년 중국에서 창설되었는데, 의열단의 사상적 배경은 영주의 대한광복단이었다. 대한광복단은 1913년부터 1918년까지 크고 작은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의열단은 1930년대 국외독립투쟁 단체 중 그 활동이 으뜸이다. 이 의열단에 황상규, 김상옥, 김대지, 이각 등 대한광복단원 9명이 참가하고 있다. 의열단의 투쟁방략은 대한광복단의 4대강령 등을 그대로 채택하여 같았다. 의열단은 대한광복단의 복사판이었다. 대한광복단은 독립투쟁 전개를 위한 활동을 군자금 모집에 집중했다. 반면에 의열단은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의열단을 창설한 단장 김원봉은 영주의 강택진을 만났다. 그리고 광복단원들도 만났다. 광복단의 실태를 보고 이를 본받으면 의열단은 성공하겠다고 확신을 한 것이다. 광복단에서 의열단, 의열단이 나중에 조선의용단, 조선의용대, 광복군 창설로 이어졌다.
광복단과 의열단은 군자금 모집, 일제와 무장투쟁, 민중봉기를 통한 전면적인 일제와 전쟁에서 승리로 독립쟁취, 민족해방을 이루자는 것에서 모두 같았다.“라고 의열단과 광복단의 관계를 설명했다. 이어 박선경 교수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①광복단의 황상규, 김대지는 광복단 창설에서 와해과정을 겪으면서도 계속 그 독립정신은 의열단으로 계승되었다.
②광복단 독립운동에서 영주에서 출발했으나 대구가 더 조명되고 있다. 같은 광복단 활동했던 박상진은 박상진기념사업회에서 많은 연구성과가 있다. 그러나 채기중 애국지사는 연구가 별로 없다.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가 이 일을 해야한다.
③독립운동에 대한 더 깊이 있는 연구로 영주발전에 기여하자.
이윤갑 교수는 박선경 교수의 발표에 대하여 “대한광복단의 활동이 의열단으로 이어져서 의열단의 기초가 되었다. 이것은 전민족의 운동이 대한광복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수택 애국지사가 나에게 할아버지뻘 되는 집안 조상인데, 의열단원으로 밀양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고문후유증으로 석방되어 32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오늘 의열단과 관계된 학술회의에서 좌장을 맡으니 우연이 아닌 것 같다”고 밝히며 감격스런 표정으로 눈물을 보여 장내를 숙연하게 하였다.
발표에 이어 친일반민족행위자 조사위원을 역임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인 조한성 박사가 토론을 통하여 “대한광복단은 1900년대와 1920년대를 연결하는 단체이며, 의열단과 인맥, 투쟁방략에 있어서 상관관계가 있는 단체였다. 아울러 과거를 추구하는 복벽세력과 공화정을 추구하는 시대에 앞선 세력이 함께 했으니 이념이 다른 세력들도 고루 갖추고 있는 단체였다.
①의열단은 광복단을 본받아 투쟁방략을 갖추고 해외독립기지건설, 군자금모집, 의열투쟁을 통하여 중국의 신해혁명처럼 독립하고자 시도했다.
②해외기지 건설에 목적을 둔 큰 목표를 가지고 활동했다.
③군자금 모금을 위한 의열투쟁은 그 수단이었다.“라고 보충설명을 했다.
이어 이윤갑 교수는 참석자들의 질문을 받고 답변하는 시간도 가졌다.
학술회의는 열띤 설명과 토론에 종합토론시간을 모두 설명과 토론에 할애하여 참석자들의 진지한 태도에 긴 3시간이 짧은 한 순간처럼 지나고 김병수 기념사업회장이 “12년만의 학술회의가 정말 보람있었다.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가 해야 할 과제의 방향을 오늘 학술회의를 통하여 다시 설정했다. 참석하신 분들과 발표자, 토론자 교수님들께 감사드린다”라고 마무리 인사를 하였다.
<경청하는 참석자 여러분>
<경청하는 장욱현 영주시장과 내빈 여러분>
2014.11.2.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