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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어디선가 지금 어린 여자아이가 한 남자에게 납치되었습니다. 이 납치범은 곧 이 소녀를 강간하고 고문한 후 살해할 것입니다. 이런 끔찍한 비극이 지금 일어나고 있지 않다면, 몇 시간 이내에 아무리 길어도 며칠 이내에 일어날 것입니다. 이러한 추측은 60억 인구를 포괄하는 통계학적 법칙에 의해 가능합니다. 똑같이 통계에 의하면, 이 여자아이의 부모는 전지전능하고 사랑으로 가득한 신이 자신의 가족을 돌본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옳은 것인가요? 이러한 믿음이 좋은 것인가요?
아닙니다.
무신론의 모든 요점이 이 대답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무신론은 철학이 아닙니다. 무신론은 세상을 보는 관점도 아닙니다. 단지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지 않겠다는 표현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 명백한 사실들이 무시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명백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검증되고 재검증되고 논의되어야 하는 세상에서 말입니다. 이러한 일은 대가가 없습니다. 또한 이러한 일은 건방지고 무신경한 일로 치부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무신론자가 바라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도 자신을 비(非)점성술사니 비연금술사로 부를 필요가 없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사이비 과학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낱말조차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무신론이란 낱말도 원래부터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무신론은 종교의 독단적인 주장에 대해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반론에 불과합니다. 무신론자는 단지 무고한 사람들의 이유 없는 죽음을 생각할 때, 신의 존재에 대해 절대 의심조차 하지 않고 신이 자애롭다고 주장하는 (미국 인구의 87%인) 2억 6천만의 미국인들이 신앙에 대한 증거를 제시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보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무신론자들만이 이런 상황을 이상하게 여깁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올림푸스산의 신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신을 믿습니다. 미국에서는 어떤 자격을 갖춘 사람이건, 얼마나 뛰어난 사람이건 간에 이러한 신이 존재한다는 걸 믿는 척 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선거에서 당선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 나라(미국)의 정책은 중세시대의 신정정치에나 어울릴 법한 종교적 터부와 미신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절망적이고 끔찍하며,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습니다. 이 문제가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면, 이러한 일은 그저 웃고 넘길 수도 있을 텐데 말입니다.
우리는 좋든 나쁘든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잃고, 자식은 부모를 잃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한 순간에 사별하고 다시는 만나지 못합니다. 친구들은 지금의 만남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모른 채 서둘러 서로를 떠나보냅니다. 크게 보면 이러한 삶은 상실의 연속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상실에 대한 치료법이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옳게, 꼭 도덕적이지는 않더라도 고대의 믿음과 틀에 박힌 모습으로 산다면, 죽고 나서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우리의 육체가 결국 망가지는 때가 오면, 우리는 이러한 육신의 짐을 벗고 생전에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고 믿습니다. 물론 어중이떠중이들이나 지나치게 이성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이곳에 들어갈 수 없고, 살아있는 동안 의심이 들긴 했어도 이를 중단한 사람들만이 영생을 누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상상할 수 없이 놀라운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핵융합 에너지는 태양을 불타오르게 하고, 이 태양빛으로 인해 생겨난 생명체는 진화하고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천국은 우리가 가 보지 않은 케리비안 크루즈 여행을 극히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인간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천국과 천국의 문지기인 신을 자신의 상상에 따라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합니다.
뉴올리언즈를 박살낸 카트리나 허리케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1000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수만의 사람들이 재산을 잃었고, 백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딴곳으로 이주해야 했습니다.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즈를 강타했을 때, 뉴올리언즈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애롭고 전지전능한 신을 믿고 있었다고 간단히 말할 수 있습니다. 허리케인이 그들의 도시를 박살내는 동안 신은 무얼 하고 있었을까요? 신은 살아 남으려고 높아지는 수위를 피해 다락방으로 올라가 천천히 익사하던 노인들과 여성들의 기도를 당연히 들었을 텐데 말입니다. 이들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평생 기도를 해온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불쌍한 사람들이 상상의 친구와 대화하다 죽었다는 이 명백한 사실을 무신론자들만이 받아들일 용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 거대한 폭풍우가 뉴올리언즈를 덮칠 것이라는 경고는 꽤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일어날 재난에 대한 사람들의 대응은 무척 어리석었습니다. 그것은 과학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었습니다. 카트리나의 이동경로에 대한 경고는 침묵하는 자연으로부터 기상학자들이 위성 이미지를 통해 어렵게 얻어낸 것이었죠. 신은 아무에게도 자신의 뜻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뉴올리언즈의 사람들이 신의 은총에 의존하는 것으로 만족했더라면, 최초의 강풍이 그들의 얼굴을 후려칠 때까지 아무도 살인적인 허리케인이 그들에게 닥치리라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카트리나 생존자 중 80%가 이 경험을 통해 신에 대한 신앙이 더욱 깊어졌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즈를 집어삼키고 있을 때, 1000명에 달하는 이슬람 시아파 성지순례자들이 이라크의 한 다리 위에서 밟혀 죽었습니다. 이 성지순례자들이 코란의 신을 열렬히 믿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들의 삶은 신이 존재한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으며, 그 여성들은 신 앞에서 베일을 쓰고 다녔습니다. 그 남자들은 라이벌 교파가 신의 말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해 왔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죽였습니다. 이 비극을 겪고 살아 남은 생존자 중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신앙을 버렸다면 그건 놀라운 일일 것입니다. 그들은 신의 은총으로 살아났다고 생각하겠죠.
도대체 얼마나 커다란 재앙이 발생해야 사람들이 신앙을 버릴지 궁금합니다. 사람들은 유대인 학살로도 믿음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르완다에서 신부들이 벌채용 칼을 휘두르면서 학살을 일삼을 때에도 사람들은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20세기에 5억 명의 사람들이 천연두에 걸려 죽어갔습니다. 그중 대부분은 영아였습니다. 신의 뜻은 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 어떠한 사실도, 아무리 불행한 사건이라도 신앙과 양립할 수 있는 것처럼 받아들입니다. 신앙에 대하여 우리는 너무나 관대하게 받아들입니다.
물론 신자들은 종종 세상의 모든 고통은 다른 신이 한 짓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신은 전지전능하다고 주장하는 걸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이제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고전적인 변신론(theodicy ; 악의 존재가 신의 속성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설)의 문제로,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이 악명 높은 재난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거나 관심이 없습니다. 따라서 신은 무능하거나 사악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여기서 신앙이 깊은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반격을 시도할 것입니다. 신은 인간의 도덕 관점으로 판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도덕 관점은 처음부터 독실한 신자들이 신의 선함을 주장하는 기준이었습니다. 게다가 동성애나 기도에서 (자신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지 등 사소한 것에나 신경 쓰는 신은 그만큼이나 수수께끼 같은 존재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의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창조의 이름에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인류에게도 적합하지 않은 신입니다.
물론 또 다른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가장 이성적이고 불쾌하지 않은 신 말입니다. 바이블의 신은 허구에 불과합니다. 리차드 도킨스가 지적했듯이 제우스(Zeus)나 토르(Thor) 신에 대하여는 우리 모두 무신론자입니다. 단지 무신론자들만이 바이블의 신 또한 (이들 신과) 조금도 다를 게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뿐입니다. 결과적으로 무신론자만이 세상의 가혹한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동정심을 갖습니다. 우리가 죽어서 사랑하는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이러한 일은 듣기에도 끔찍한 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동안 이유 없이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의 많은 부분은 종교에 의해 자행되었습니다. 종교전쟁, 종교적 증오, 종교적 분열, 종교적 허구–이런 것들은 무신론을 윤리적이고 지적인 필수 요소로 만듭니다. 하지만 무신론은 사회에서 차지하는 영역이 협소하기 때문에 무신론자들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이유만으로 주위 사람들의 허구적인 삶에 비해 비웃음을 당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성질
최근의 몇몇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22%가 50년 이내에 예수가 재림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22%의 사람들도 아마 그럴 것같다고 믿고 있습니다. 매주 한 번 이상 교회에 나가는 이 44%의 사람들은 아마도 신이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 땅을 문자 그대로 약속했다고 믿으며, 아이들에게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을 중단시키고 싶어하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큽니다. 부시 대통령이 잘 알고 있듯이, 이런 부류의 신자들은 결속력이 가장 강하고 열성적인 유권자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시각과 편견은 국가의 모든 주요 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진보 진영 또한 이런 잘못된 것을 배워서 바이블을 인용하고, 어떻게 하면 종교적 성향만으로 투표를 하는 유권자들의 환심을 살까 궁리하고 있습니다. 50% 이상의 미국인들은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다고 합니다. 미국인의 70%는 대통령 후보가 종교에 열성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비이성은 미국의 학교와 법정, 그리고 연방정부의 입법, 사법, 행정부에서 득세하고 있습니다. 미국인의 28%만이 진화론이 사실이라 생각하는 반면, 68%는 사탄이 실제로 있다고 믿습니다. 이 같은 정도의 무지가 막강한 초강대국의 머리와 뱃속에 파고들었다면, 이는 전 세계의 문제가 됩니다.
종교적 근본주의는 현명한 사람들이 비판하기 쉬운 표적이지만, '중도적인 신앙'이라 불리는 것들은 우리 사회나 학문의 전당인 대학에서조차 엄청난 특혜를 누립니다. 중도주의자들보다 근본주의자들이 신념에 따라 판단을 내리기 때문에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본주의자들은 부족한 증거와 이론으로 그들의 신앙을 정당화하지만, 최소한 합리적으로 정당화하려 노력는데 반해, 중도주의자들은 믿음이 주는 좋은 결과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말고는 대체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중도주의자들은 바이블의 특정 예언들이 정말 이루어져서 신을 믿는다고 하지 않고, 종교가 그들의 삶에 의미를 주기 때문에 신을 믿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다음날 수십만의 사람들이 쓰나미로 인해 죽음을 당했을 때, 근본주의자들은 이 참혹한 재난을 신이 분노한 증거라고 해석했습니다. 이들에 따르면 신이 낙태, 우상숭배, 동성애와 같은 악에 대해 간접적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는 겁니다. 윤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재난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찌 보면 합리적입니다. 이에 반해 중도주의자들은 이런 재앙이 신과 관련 있다고 연관 짓기를 일체 거부합니다. 그러면서 신은 완벽한 미스테리이며, 단지 가장 극심한 악에 대한 위로의 역할을 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동남아 쓰나미와 같은 엄청난 재앙이 일어났을 때, 중도주의 신앙은 사탕발림과 의미 없는 헛소리만을 만들어 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선량한 사람들은 진실하게 믿는 신자들에게 윤리적으로 설명하고 비판하기보다는 그냥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을 믿는 것을 선호합니다.
재앙이 일어났을 때 신의 심판보다는 신의 자비를 강조하는 게 분명 중도주의 신학의 미덕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물에 불은 주검을 바다에서 건져올릴 때 언급되는 것은 신의 자비가 아닌 사람들의 자비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천의 아이들이 어머니의 품을 벗어나 익사할 때에도 중도주의 신학은 가장 적나라한 도덕적 겉치레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심판의 신학이 이보다 논리적으로 더 가치가 있습니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의 뜻을 중도주의자들의 말처럼 절대 헤아릴 수 없는 게 아닙니다. 이 참혹한 재앙에서 한 가지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정신적으로 아무 이상이 없는 수 많은 남녀가 이러한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으면서, 이런 신앙이야말로 최상의 도덕적 가치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주며, 삶에 의미를 주기 때문에 중도주의자들이 이성적인 사람도 신을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말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이런 불합리는 '신'이라는 낱말을, 위안을 주는 다른 낱말로 바꾸는 순간 명백해집니다. 예컨데 어떤 남자가 자신의 집 마당 어딘가에 냉장고만한 다이아몬드가 묻혀 있다고 믿고 싶어 하는 경우를 상상해 보세요. 당연히 이러한 생각을 가짐으로써 기분이 굉장히 좋아질 것입니다. 만약 그가 중도주의자들과 비슷한 예에 따라 이러한 믿음을 유지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해 봅시다. 그에게 왜 당신 마당에 일찌기 전세계에서 발견된 가장 큰 다이아몬드보다 수천 배나 큰 다이아몬드가 파묻혀 있느냐 하고 물을 때, 그는 "이 믿음은 제 삶에 의미를 주니까요"라거나 "우리 가족은 주말마다 이 마당을 파는 것을 즐기고 있어요"라거나 "나는 우리 마당에 냉장고만한 다이아몬드가 묻혀 있지 않은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요"라고 답변한다면, 분명 이러한 대답은 어처구니없는 답변일 겁니다. 이런 답변은 어처구니없는 정도가 아니라 바보나 미친 사람의 답변일 것입니다.
우리는 파스칼의 논증이나 키에르케고르의 변증법 또는 다른 철학적인 사기 논증이 왜 말이 안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다는 것은 신의 존재가 자신과 어떤 관계가 있으며, 그 존재 자체가 믿음의 이유가 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쟁점이 되는 사실과 개인이 이를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거나 최소한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세상 원리에 대한 종교적인 믿음도 다른 어떤 믿음과 마찬가지로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성에 반하는 그들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근본주의자들은 이를 확실히 이해하고 있는 반면, 중도주의자들은 거의 당연한 듯이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성과 신앙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은 수세기에 걸친 인간의 사고에 따른 당연한 사실로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강하게 믿고 있는 것에 대한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어떤 신조를 믿는 사람이든 사람들은 이성의 타당함을 믿으며 가능한 한 최대로 추론과 증거에 의존합니다. 이성적인 의문이 신앙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나면 그들은 언제나 이를 환영합니다. 하지만 이성적인 의문이 그들의 신앙을 위협할 때에는 조롱거리로 만들고 맙니다. 때로는 이 두 현상이 동시에 일어나기도 하죠. 종교적 교리에 대한 증거가 거의 존재하지 않거나 교리에 어긋나는 증거가 존재할 경우에 신자들은 '믿음'으로 빠져 나가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렇게 믿는 이유들(예컨데 "신약 구절이 구약 구절의 진실성을 확인해 주기 때문이다", "창문에서 예수의 형상을 보았다", "기도를 올렸더니 내 딸의 암 증상이 사라졌다"라고 하는 이유들)을 댑니다. 이러한 이유들은 대체로 타당성이 없지만, 이유가 없는 것보다는 그래도 낫습니다. 신앙이란 이성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때에도, 종교인들이 계속해서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부여한 면허증에 불과합니다. 이성과 양립할 수 없는 종교적 믿음들로 인해 박살난 이 세상에서, 역사의 종말과 영혼의 불멸을 논하는 철기시대적인 신의 개념에 점점 더 의존하고 있는 이 나라(미국)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들을 게으르게 이성적인 부분과 신학적인 부분으로 나누는 일은 이제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습니다.
신앙과 친절한 사회
신자들은 무신론이 20세기에서 가장 큰 범죄들을 저질렀다고 종종 이야기합니다.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 폴포트의 정권이 어느 정도 각각 비종교적이었던 게 사실이지만, 그들이 이성적인 정권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연설들은 인종, 경제, 국가주의, 역사 또는 지성주의의 도덕적 위험성에 대한 망상에 빠진 설교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 면에서 종교는 여기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유대인 대학살을 생각해 보십시오. 벽돌 하나하나를 쌓아 나치 유대인 소각장을 만든 반유대주의는 중세시대 기독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수세기 동안 독일 신자들, 그중 믿음이 강한 신자들은 유대인들을 최악의 이교도로 보았고, 계속해서 존재해 온 사회악 대부분을 그들 탓으로 돌렸습니다. 독일에서 발생한 유대인들에 대한 증오가 대체적으로 세속적인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종교로 인해 유럽의 유대인들에 대한 이미지는 계속 악화되어 왔습니다 (바티칸은 1914년까지도 자체 신문에서 유대인에 대한 비방과 중상을 계속했습니다).
아우슈비츠, 굴락(소련 수용소), 킬링필드는 사람들이 믿음에 대해 비판적이어서 생긴 일이 아닙니다. 이와 반대로 이러한 비극들은 특정 세속적 이데올로기의 위험에 대해 충분히 비판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종교적 신앙을 비판하는 이성적 주장은 무신론이 신조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주장이 아닙니다. 무신론자가 드러내려는 문제는 다름이 아니라 신조 그 자체의 문제입니다. 모든 종교들이 필요 이상으로 갖고 있는 그 신조 말입니다. 역사상 어떠한 사회도 사람들이 너무 이성적이어서 문제가 생긴 경우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미국인이 종교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한 목표라고 생각하는 반면에, 많은 선진국들은 벌써 이런 목표에 도달하였습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어쩔 수 없이 고대의 종교적인 소설에 의지해 삶을 유지하게 하는 "신(神) 유전자"를, 왜 다른 선진국들의 많은 국민들은 가지고 있지 않은지를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다른 대다수 선진국들의 무신론자 비율은 종교가 윤리에 필수적이라는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합니다.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호주, 캐나다, 스웨덴, 스위스, 벨기에, 일본, 네덜란드, 덴마크, 영국과 같은 나라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비종교적인 나라입니다. UN의 인간개발보고서(2005)에 따르면 이 나라들은 기대수명, 문맹율, 개별국민소득, 교육수준, 남녀평등, 살인범죄율, 영아사망율 등에서 나타나듯 가장 건강한 나라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하위 50개 나라들은 확실히 종교적인 나라입니다. 다른 분석들 또한 똑같은 내용을 전해 줍니다. 미국은 부유한 민주국가들 중 특이하게도 종교 직역주의(literalism)와 반(反)진화론이 강한 나라입니다. 또한 살인범죄, 낙태, 10대 임신, 성병 전염과 영아사망율이 높은 점도 특이합니다. 미국 내부에서도 똑같은 비교를 할 수 있습니다. 미신적인 종교 성향과 반진화론의 수준으로 대표되는 중서부와 남부 주에서는 위와 같은 사회의 건강도를 측정하는 수치들에 대한 문제들이 똑같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동북부의 세속적인 주들은 유럽의 그것과 비교할 때에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이러한 상관관계가 인과관계로 얽혀 있는 건 아닙니다. 신에 대한 믿음이 사회 문제를 일으킬 수도, 사회 문제가 신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질 수도, 아니면 두 가지 문제가 어떤 다른 문제로부터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인과관계에 대한 이슈는 배제하더라도, 이러한 사실들은 무신론이 건강한 사회와 완전히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줄 뿐만 아니라, 종교적 믿음이 사회의 건강성을 지키는 데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입증해 줍니다.
무신론자 비율이 높은 나라일수록 개발도상국에 대한 지원도 많이 하는 나라입니다. 기독교 문자주의와 실제 기독교적 가치들의 관련성은 다른 자선사업 지표에 의해 엉터리임이 드러납니다. 최고경영자와 일반 직원간의 연봉 차이를 한번 따져 보자구요. 영국은 24대 1, 프랑스는 15대 1, 스웨덴은 13대 1입니다. 그런데 83%의 사람들이 예수가 진짜로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믿는 미국에서는 무려 475대 1로, 많은 낙타들이 바늘구멍을 쉽게 통과할 것으로 믿는 것 같습니다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는 바이블 구절에 빗댄 말).
폭력의 근원으로서의 종교
21세기 문명에 있어서 가장 주요한 과제 중의 하나는 인간이 중요하게 여기는 개인적인 관심사들, 즉 윤리, 영적인 경험, 그리고 피할 수 없는 고통들에 대해 비이성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표현하는 법을 학습하는 것입니다. 이 과제에 있어서 종교적 믿음만큼 방해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이성과 양립하지 않는 종교적 신앙은 이 세상을 분리된 도덕제도를 가진 그룹으로 갈라 놓았습니다. 기독교인, 무슬림, 유대인, 힌두 등으로 말입니다. 이러한 분열은 계속해서 분쟁의 원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종교는 오늘날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큰 폭력의 원천입니다. 최근의 팔레스타인(유대인과 무슬림), 발칸반도(정교회 세르비아인과 카톨릭 크로아티아인, 정교회 세르비아인과 보스니아 알바니아의 무슬림), 북아일랜드(청교도와 가톨릭), 카슈미르(무슬림과 힌두), 수단(무슬림과 기독교인), 나이지리아(무슬림과 기독교인),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무슬림과 기독교인), 스리랑카(불교인과 힌두교인), 인도네시아(무슬림과 티모르의 기독교인), 이라크와 이란(무슬림의 시아파와 수니파), 그리고 카프카스 지역(정교회 러시아인과 체첸 무슬림, 아제르바이잔 무슬림과 기독교 아르메니안)과 같은 케이스들은 몇 가지 예에 불과합니다. 앞서 말한 지역들에서 종교는 지난 10년간 문자 그대로 수백만의 죽음을 야기한 명백한 원인이었습니다.
이 무지로 분열된 세상에서, 무신론자만이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종교적 신앙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폭력을 조장합니다. 종교는 최소한 다음 두 가지 의미에서 폭력을 부추깁니다. (1) 사람들은 종종 창조주의 뜻에 따라 행동한다고 믿고 그에 따라 다른 사람을 죽입니다 (사후에 영원한 행복을 약속 받는다는 이 정신병적인 믿음에 따라서 말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행동에는 수 없이 많은 예가 있고, 그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지하드 요원의 자살 폭탄 테러입니다. (2) 더 많은 사람들은 단지 자신들의 종교가 도덕적 가치관의 중심이라고 믿기 때문에 종교적 분쟁을 일으킵니다. 인간 문화 중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문제 중 하나는 아이들에게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 대한 공포와 잘못된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입니다. 많은 세속적인 문제로 인해 발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종교분쟁은 결과적으로 종교로 인해 일어난 것입니다 (아일랜드만 봐도 그렇습니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중도주의 신자들은 인간 분쟁은 언제나 교육의 부족, 가난 또는 정치적인 불만으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진보 진영이 갖는 망상 중 하나입니다. 이런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9.11 테러범들이 정치적인 억압 따위를 겪은 적이 없는 중산층 대졸자들이었다는 점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그들은 동네 이슬람 사원에서 불신자들의 타락과 순교자들이 가게 될 천국의 기쁨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과도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얼마나 많은 건축가와 기계공학자들이 시속 700km로 벽을 들이받아야 우리는 성전(聖戰)자들의 폭력이 교육, 가난 또는 정치와 관련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까요? 놀랍게도 진실은 이렇습니다. 혼자서 핵폭탄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교육이 잘 된 사람도 죽고 나서 천국에서 72명의 처녀를 맞이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다는 겁니다. 신앙에 의해 분열된 사람의 정신은 이러한 일을 가능하게 하며, 이러한 분열은 지성이 종교적인 망상을 뒷받침하게 될 정도로까지 자라납니다. 만약 우리가 종교의 폭력을 근절하고자 한다면 종교의 거짓된 확신을 근절해야 합니다.
왜 종교는 인류 폭력의 강력한 원인일까요?
우리의 종교는 근원적으로 서로 양립할 수 없습니다. 예수는 죽었다 살아났고, 슈퍼히어로처럼 다시 이 땅에 내려오거나 그렇지 않을 두 가지 경우밖에 없습니다. 코란은 불변하는 신의 뜻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두 가지 경우밖에 없습니다. 모든 종교는 세상의 이치에 대해 구체적인 주장을 합니다. 이렇게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다수의 주장은 지속적인 갈등의 원인이 됩니다.
어떠한 다른 분야의 주장도 자신과 다른 사람의 불화를 크게 강조하거나 영구적인 보상과 처벌의 차이를 강조하지는 않습니다. 종교는 '너희와 우리'라는 생각이 중요한 차원을 넘는 그러한 분야의 하나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신의 이름을 바르게 부르는 것으로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고통의 차이를 불러올 수 있다고 믿는다면, 비신자와 배교자들을 험하게 대하는 것은 당연한 이유가 됩니다. 어떠한 경우에는 살인 또한 정당화됩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자신의 아이들에게 어떠한 말을 함으로써 자신의 아이들의 영혼이 영원한 불행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면, 옆집에 사는 이교도는 소아성추행범보다 훨씬 더 위험한 사람이 됩니다. 종교적인 다툼은 단순한 부족주의, 인종차별 또는 정치색에 따른 충돌에 비해 헤아릴 수 없이 위험합니다.
종교적 신앙은 대화를 멈추게 합니다. 종교는 믿음에 대한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 계획적으로 금지된 유일한 분야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믿음은 종종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가 되고 죽음의 의미가 되고, 또 너무나도 종종 살인의 이유가 됩니다.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큰 이해관계가 걸려 있을 때에 사람에게는 대화로 해결할 것인가 폭력을 행사할 것인가의 단순한 선택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이성적이 되려는 의지, 세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새로운 증거와 이론에 의해 발전시키려는 의지만이 대화의 단절을 막을 수 있습니다. 증거가 없는 확신은 인간성을 빼앗고 불화를 조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성적인 사람들의 의견이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을 테지만, 반면에 비이성적인 사람들은 그들의 신조에 의해 분열될 수밖에 없습니다.
단지 다른 종교간의 대화를 증가시킴으로 인해 세상의 분열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심히 가능성 없는 일로 보입니다. 문명세계의 해결책이 명백한 비이성에 대해 서로 포용하는 것일 리 없습니다. 진보적인 종교 토론을 주장하는 단체들은 서로의 세계관이 충돌하는 부분을 덮어두고 넘어가려고 하지만, 이 부분은 같은 종교 신자들간의 충돌 원인으로 남게 됩니다. 결국 정치적 조정(political correctness ;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는 부분을 피하고 주변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따라가는 사고 방식)은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노예제도나 식인풍습이 없어진 것처럼 종교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어지려면 우리가 신앙의 신조를 버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들에 대한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우리는 신앙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에 대한 이유가 없거나 또는 부적절한 근거만이 있다면 우리는 세상과도 사람들과도 단절됩니다. 무신론은 가장 단순한 지적 솔직함(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헌신입니다. 사람의 확신의 강도는 그가 가지고 있는 정당한 근거와 증거에 비례해야 합니다. 확실하지 않은데도 확실하다고 우기는 것, 어떠한 증거도 없으면서 확신하는 것은 지적 그리고 도덕적인 결함입니다. 무신론자만이 이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무신론자는 종교의 거짓말을 알아채고, 그 거짓말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