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대하여
천태봉 (SM리더 기관장/수필가)
유튜브 이것저것 보다가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을 보게 되었다. 몇 번 봤더니 자꾸 보라고 비슷한 것들이 이어서 올라온다. 보는 사람의 관심사에 맞춰서 카테고리를 띄워주는 알고리즘으로 그렇게 된단다.
거기서 유튜버들은 각자 나름대로 장구한 세월과 역사를 이야기하고 시간의 미시적 작용 형태를 설명한다. 천문학자들은 우주의 시간을 소개하고 물리학자들은 물질에 작용하는 시간을 설명한다. 인생론자들은 인생의 세월을 돌아보고 심리학자들은 마음의 시간을 말하고 종교인들은 영성의 시간을 얘기한다. 시간에 대한 관점들이 다르기도 하고 다른 측면들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해서 헷갈리기도 한다. 어느 물리학자는 시간을 주제로 여러 정의와 이론과 학설을 소개하고 해설을 다 해놓고는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 자기는 모르겠다고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그렇게 설파들을 하고 있지만, 수많은 학문 중에서 정작 ‘시간학’이라는 것이 없는 것을 보면 시간은 따로 공부할 대상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시간은 우주와 세상 역사의 기둥이요, 세월은 우리 인생의 줄기이며, 뭇 생명체들에게는 수명으로 주어진 삶의 기간이다. 이러한 시간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서 각자의 인생과 세상 역사와 우주 전체에 대한 관점이 결정될 것이다. 이 관점에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늙고 병들어 세월이라는 괴물에 잡아먹히고 마는 허망한 존재로 규정해버릴 수도 있고, 나의 삶과 세상 역사를 당당하게 개척해가는 주인공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어려운 주제에 대한 생각의 정리는 오히려 우리 보통 사람들이 더 쉬울지 모른다. 여러 학자들의 이론 가운데서 내 마음 가는 것을 골라서 받아들이면 되니까 말이다. 인류의 대표적인 지성이며 스승들이 정의한 시간의 개념을 한 번 들어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이란 변화의 척도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라고 했단다. 이에 대해 뉴턴은, “시간은 변화와 상관없이 흐른다. 아무 변화가 없어도 흐른다. 수학적이고 절대적인 시간이 존재한다.”라는 지론을 폈다고 한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공간과 시간은 분리돼 있지 않다고 했다는데, 일단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상통하는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뉴턴의 이론은 나의 머리로는 상상이 안 된다. 나는 내가 알 수 없는 뉴턴의 시간은 놔두고, 내가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으로 내 인생을 가다듬어 보기로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을 “변화의 척도”에서 더 부연 설명을 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이 한마디로 충분하지 않은가 싶다. 시간이라는 것이 어떤 주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채우는 물질이라는 주체가 변화해 가는 작용 과정의 이름이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주에 있는 자연의 물질이 바깥으로 움직이고 안으로 변화해서 이동하고 닳아가고 삭아가는 것이고, 살아 있는 생명 물질은 자라고 늙어가는 바로 그것이다. 물질이 없거나 변화하지 않으면 세상에 그 어떤 진행이 없고, 따라서 시간이란 것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시간학은 없는 것이 아니라 물질의 변화를 연구하는 물리학이 곧 그것이라 할 것이다. 동양사상의 체용體用이론에서도 만물은 주체와 작용의 형태로 구조돼 있다는 것이 보편적이다. 작용이라 해서 종속적이거나 부수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오히려 주체가 껍데기이고 작용이야말로 알맹이라고 한다.
우리가 물리학에서 배우는 엔트로피(ENTROPY)는 물질적 변화의 구체적인 실재로써, 열역학2법칙에 따른 물질 변화의 결과이며 시간 흐름의 현상이다. 이것은 자연의 본래 법칙에 따라 제각각의 단위와 형태와 성질로 조직돼 있는 물질이 분해되고 쇠락하여 조직 구조의 질서를 잃고 무질서하게 흩어져서 쌓이는 것이다. 이렇게 변화되어 잔해로 쌓인 엔트로피가 아직 변화되지 않은 물질과 에너지의 위상이 같아지면 변화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이 윗물은 줄어들고 아랫물이 많아져서 그 수위가 위와 아래가 같아져 버리는 것과 같다. 에너지의 평형을 이룬 이 계界는 이제 죽은 것이다.
이렇게 물질의 변화 방향은 높은 것은 낮아지고 뜨거운 것은 식어가고, 무거운 것은 가벼워지고 짙은 것은 옅어져 가서 종국에는 멈추게 된다. 그런 면에서 변화는 정지의 방향이며 시간은 죽음의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다. 우주는 결국 이렇게 에너지의 평형을 이루어 가는 것으로도 종말을 맞는다고 한다. 이렇게 주검으로 향하는 물질계지만, 바로 그 작용 과정에서 변환되는 다른 형태의 에너지에 의해 생명이 나서 자라고 초롱초롱 아름다운 자연계를 만들어 간다. 또 한 이 생명 세계에서 물질과 생명의 유한성을 수용하고 초월하는 영혼이 자라나니 이 얼마나 장엄한 진행인가. 우리들 배 엔진에서도 연료유가 타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액체에서 기체로 상이 바뀌어, 밀도는 낮아지고 부피는 팽창함으로써 엔진이 돌아간다. 에너지가 소모돼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열역학1법칙이 이 세상의 배후에 대해서도 무언가를 시사하고 상징하는 것 같다.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라 애벌레가 나비가 되듯이 상相을 바꾸어서 승화를 하는 것이 아닐까.
아인슈타인은 어떤 공간이 움직이는 속도가 빠르면 그 안의 시간은 늦게 흐른다(특수상대성이론)는 것을 발견했고, 우주 공간 별들이 자기중심으로 끌어당기는 힘의 세기와 범위의 중력장이 커지면 역시 그렇다(일반상대성이론)는 것을 알아냈다. 그래서 어떤 우주선이 물질의 최고 속도인 빛의 속도로 달리면 그 안의 시간은 느려져서 흐르지 않고, 어떤 블랙홀 별의 중력이 커져서 무한대가 되면 그 속의 시간 또한 흐르지 않는다는 이론이 성립한다. 이는 공간은 변하는데 시간은 흐르지 않으므로, ‘시간은 곧 변화’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관에서 예외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아인슈타인 시간의 주된 관점은, 물체가 변화하는 속도는 그것이 있는 공간의 움직임이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는 그것이 아닐까.
우리 배 보일러나 부엌의 압력솥과 같이 압력이 높은 곳에서는 물이 천천히 끓고, 기관실의 조수기(EVAPORATOR) 속이나 높은 산 위에서와 같이 압력이 낮은 곳에서는 빨리 끓는다. 아인슈타인의 저 심오한 이론들도 이러한 우리 주변 일반 현상의 연장으로 보면 안 될까. 빨리 달리는 우주선 안에서나 질량이 큰 별의 중력장에서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는 것은, 거기서 물체는 천천히 움직이고 쇠는 서서히 녹슬고 생물은 더디게 자라거나 늙어가고 기계들도 느리게 작동한다는 것이다. 바깥에서는 똑딱똑딱 가는 시계가 그 안에서는 또옥따악 또옥따악 하고 느리게 움직일 것이다. 시간여행이라는 말에 호기심이 일지만, 과거나 미래로 왔다갔다하는 것은 아니고, 타임머신을 타고 남한에 왔다는 어느 탈북민의 말과 같이, 있던 곳보다 변화가 빠르거나 늦은 곳에 왔을 뿐이다.
현대에 와서 양자물리학에서 물질의 변화가 인과관계를 뛰어넘어서 확률적으로 작용하는 동시성과 비국소성이라는 현상이 발견되어 시간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하는 것 같다. 분자나 원자 단위에서는 인과율에 따라 변하는 물질이 양자 단위로 분해가 되면 인과율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동시에 여기 저기 같이 나타나거나, 오고가는 과정 없이 여기 있던 것이 저기 있거나, 변화의 중간 과정 없이 이 상태의 원인에서 저 상태의 결과로 변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입자이면서 파동이기도 한 그 양자는 바라보는 사람이 입자의 관점에서 보면 입자가 되고 파동의 관점에서 보면 파동이 되기도 하는데, 현재 상태만이 아니라 이전의 것까지도 바뀔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는 원인에 따라서 결과가 되는 아니라 결과가 원인을 바꾸는 마술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원인의 결과라는 인과법에 의지해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귀신이나 도깨비처럼 놀라운 일이지만, 인과율이 없으면 변화의 과정이 없는 것이므로 따라서 시간은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종교인들이나 영성가들도 시간은 없다거나 흐르지 않는다는 얘기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물질적 현실세계가 아니고, 물리 현상을 초월한 정신세계의 이야기다. 정신은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으면서 기능할 수 있다. 육체의 생명작용을 수용하면서도 생명체의 이기적 작용을 넘어서는 정신적인 존재가 된다면 우리는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이는 또한 공간의 제한으로부터도 놓여나지는 것이다. 이런 상태의 정신적 존재가 되기를 꿈꾸며 각고의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수행자요 구도자요, 도道닦는 이들이 아니겠는가. 도道가 터져서 자기 자신에 몰두, 입각한 완전 주체적인 정신의 존재가 되면 어떻게 될까. 시간이 가든지 말든지 세상이 변하든지 말든지, 내 육신이 늙든지 말든지 ‘나’라는 물건이 죽든지 말든지, ‘나’는 시공과 무관하게 그저 <여기 지금 이대로> 있을 것이다.
(월간 海바라기 2021. 0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