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 관음사에 安住하다.
2008년 9월 초 나는 청운스님을 봉주사로 입주한 후 몇 일간 여행을 하고는 추석이 지난 이틀 후 표충사에서 짐을 꾸려 거제 관음사로 향했다. 관음사에는 속가 고모인 비구니 헤주스님이 계신 곳이다.
혜주스님은 은사이신 박영우 스님이 요양 차 25년 전에 주석하시던 곳이다. 혜주스님은 은사스님을 평생 모시며 지내오셨다. 은사이신 영우 비구니스님은 당료가 있어서 늘 음식을 조절하며 살으셨다. 그런 스님을 시봉하느라 따라 오신 것이다.
그 때 나는 해인사 강원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 거제도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세상이었다. 우리나라 어디건 그랬으니까. 거제도 역시 별 발전이 없던 곳이다. 그러나 여름이면 피서객으로 붐비는 곳이었다.
지금의 거제시는 대우조선소, 삼성조선소를 비롯한 여러 관광자원으로 살기 좋은 곳으로 첫째가는 곳이 되었지만 그 시절에는 아주 오지생활을 하던 곳이다. 소위 은둔이나 피난처로 적당한 곳이었다.
관음사에는 일 년에 한두 번 천도재(薦度齋)가 있거나 무슨 일이 있을 때만 다녀가던 곳이었다. 그리고 영우 노스님이 돌아가시고 혜주스님께서는 제주로 가려고 관음사를 정리하려고 하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대중생활을 마치면 살 것이니 그 동안만 계시라고하며 설득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다.
사실 이곳이 없었다면 어떤 방법으로든 공 사찰을 가지고 있을 수 도 있었지만 별로 그럴 필요를 못 느꼈다. 말사 주지며, 본사 삼직이며, 큰 절 소임을 두루 보았기 때문에 따로이 公사찰이 의미가 나에게는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조계종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나 또한 종단이란 틀에서 구속적인 생활이 싫어졌다.
지난 30년 대중생활을 하며 공동체의 생활이 무엇이며, 공무적인 일이 무엇인지, 수행과 포교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꼭 소속적인 틀이 필요 한 것은 아니다. 다만 조직을 위해 불가분 필요 할 따름이다.
이제 남은 2, 30년을 세상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싶은 마음이다. 내가 스님이라 하고, 어떻게 살아왔다하는 것들은 모두 허울일 뿐이다.
아래 마을의 할머니가 와서 무엇을 물어보면 도움 될 수 있을 만큼 말해주고, 누가 염불 축원을 부탁하면 힘닿는 대로 해주고, 가까운 이가 맛있는 음식으로 초대하면 기분 좋고 맛있게 먹고, 몸이 고단하면 가까운 면 의원에 가서 치료받고, 목욕을 하고 싶으면 시골 목욕탕에서 따뜻하게 몸을 담그기도 하고, 그 저 마음 편하도록 때를 따라서 살면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 어딜 가도 여기만큼 좋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산 좋고 물 좋고 인심 좋으면 그만이다. 거기에다 공기마저 좋으니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지난 11월 15일 오후 법당을 중창키 위해 불상을 임시법당으로 옮기는 중에 대세지보살 얼굴에 우담바라(한국적)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날은 햇빛이 좋은 날이라서 빛을 받은 우담바라가 빤짝임을 보고 발견하게 된 것이다.
법당을 중창하는 일이 없었다면 우담바라가 피었음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날 햇빛이 없었다면 발견치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불가사의 한 인연의 소치라 할 수 밖에 없으리라. 불사를 진행함에 걱정은 다소 되었었다.
그런데 부처님의 인연법으로 마음이 아주 가벼워 졌으며, 사실적으로 그 후 불자님들이 하루 도 빠짐없이 발길이 이어지고 있음이다. 이것만 해도 나는 부처님의 가피를 입고 있음이 분명한 것이다.
불사는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법당을 지을 나무도 노자산 적송을 시주받았으며 업자 또한 불자를 만나 다행이고 목수역시 나의 의중에 딱 맛는 분이며 인건비 및 공사비 내용도 아주 적당한 선에서 합의 하게 되었다. 그리고 주위의 불자들이 많은 도움을 주고 있으며 시주하는 분들도 많아지고 있다.
앞으로 이곳은 해맞이 절로서 기도하는 사찰로 거제의 명찰이 될 것으로 보인다. 법당을 중축하고 불 사리탑을 세우고 도량을 정비하면 아주 좋은 예쁜 도량이 될 것이다. ***
2010년 12월 27일 저녁시간에
지나왔던 일들을 정리하고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