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이 본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놀라웠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성전만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유일한 성전이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만 모여도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 곳이 바로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카타콤이라는 무덤 속에서도 그들은 신앙생활이 가능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제사장이 없으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조그마한 어린이조차 제사장으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갔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열심히 지켰는데,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날에서 그리스도 안의 안식을 누렸습니다.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율법을 강조하고 율법을 지켰지만, 그 율법으로 서로 정죄하고 미워하며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조차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잘 몰랐어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 사랑하고 기꺼이 희생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이 그들을 변화시켰습니다. 성령께서 그들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엉성한 그림자를 붙잡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참 실체를 붙잡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 실체는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자기들이 그토록 무시했던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영적임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시기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경을 수 백번 읽었다는 사람들이 드디어 반격에 나섰습니다.
‘성경을 수 백번 읽어보니 사도 바울이 계시로 안 율법의 목적이 사실 그게 아니더라.
바울은 율법은 인간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고, 결국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한 몽학선생역할을 한 것이라고 했지만, 내가 구약을 수 백번 읽어본 결과 율법은 그리스도인들이 지키라고 주신 것이다.‘
무언가 새로운 깨달음을 말하는 것 같지만, 그것이 사도행전 15장에서 사도바울과 다투었던 유대인들의 주장이었고, 사도 바울 이전에 알고 있었던 바리새인들의 깨달음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주장들이 힘을 얻어서 율법을 가만히 교회에 끌어오게 되었고, 그래서 율법을 참실체로 알게 된 사람들이 율법에서 각종 짝퉁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본받아서 예배당을 꾸미고, 그것을 성전이라고 부르고, 제사장 그룹을 본받아서 성직자 그룹을 만들고, 율법이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이 율법을 잘 지키도록 하기 위해 오신 몽학선생으로 전락시켰습니다.
할례는 유아세례로, 유월절은 부활절로, 맥추절은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소위 “대체신학”을 보면서 유대인들은 더 이상 기독교를 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유대교의 조악한 모조품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구약 성경을 수 백 번이 아니라 수 천 번 읽어도 사도 바울이 말한 율법의 진면목을 절대로 못 깨닫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기 때문입니다.(갈 1:12)
바울은 말했습니다. “나는 율법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산다”(갈 2:19,20)
그런데 그들은 정면으로 반대되는 주장을 합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살아야 합니다!"
성경을 남보다 많이 읽었다는 교만이 오히려 그를 미혹시킨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가르침을 버리고, 자기 나름대로의 복음을 만든 것입니다. 슬픈 사실은 성경 백번 읽었다는 데 기가 죽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맹목적으로 그런 사람들을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이란 하나님과 동떨어진 어떤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곧 선이시며, 우리가 선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도달하는 어떤 개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과 연합하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이 구호는 그리스도의 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의미심장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