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 봉정대부 사헌부장령 인봉 전승업 선생 창의비
(贈 奉正大夫 司憲府掌令 仁峰 全承業先生 倡義碑)
君子는 學行이 兼備함을 말한다. 그러나 그 학문이 至高해도 行爲가 不隨하면 無用한 學問이 된다. 故로 平時에는 出仕하고 危難에는 奮起하여 救國濟民하여야 眞君子이다.
온 生涯를 통하여 儒學基本을 실천한 君子가 있으니 바로 仁峰全承業先生이다. 선생의 姓은 全, 諱는 承業, 字는 孝先, 初號는 愚齋, 晩號는 仁峰이다. 高麗朝判書이고 封管城君이며 李姓改玉에 不事二君의 節義로 遯于沃川하여 節義가 圃隱治隱에 비견되는 諱淑의 七代孫이고 祖父諱彭齡은 文科嘉善이고 選賢良淸白이며 道學實踐의 삶이 一世士林第一이라 稱한 松亭이다.
선생의 평소 행적은 墓碑와 遺稿에 詳載되었기에 本碑에선 선略한다.
壬辰四月倭軍이 侵犯하니 각 兵營의 兵使와 守令들은 거의 敗走했으며 主上도 播遷하시니 선생은 홀로 仁峰精舍에서 憤然痛哭曰君父가 播遷인데 臣子何坐視耶하고 重峯先生을 모시고와 倡義할 것을 相約하였다. 선생은 미리 軍服 백벌과 壯丁奴婢 백명과 곡식 백섬을 마련하였다가 義兵에 제공하였고 중봉을 義兵將에 추대하고 선생은 幕僚의 소임을 맡았다.
五月初四日에 義兵을 모집하여 報恩 車嶺에서 적의 예봉을 차단하였고 또한 幕下임원인 金敬白, 李瑀, 金節, 全忠男과 같이 檄文을 팔도에 보내어 倡義의 號令을 세우니 義兵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충청관찰사 尹先覺이 각 군 수령과 생각하기를 兵士가 될 만한 壯丁은 皆入義兵하니 관군에 불리하다 생각하여 백방으로 저지하였다. 이에 선생이 윤선각에게 서찰을 보냈으니 略言하면 왜병이 大禍를 宗社에 입혔으면 비록 필부라도 尙死報國하거든 況一道兵馬를 통솔하면서 坐視하고있으니 이는 國危時忘聖恩이라 하였다.
六月에 선생은 홀로 行在所에 가서 윤선각의 불충 죄를 奏達하려고 출발하여 監營을 지나다가 윤선각을 보고 君臣의 大義를 力說하니 선각이 잘못을 깨닫고 선생의 말씀에 크게 공감하여 請同事어늘 선생은 중봉과 같이 공주에 머무르면서 義旗를 세우고 의병을 招募하니 수일 사이 應兵한 자가 九百餘人이었다.
兵營의 安世獻이 선각에게 離間曰공은 一道兵權을 가지고도 不立小功인데 趙憲, 全承業 등은 奮起하여 起義兵하니 이는 필시 공의 無功을 治罪하리니 지금 의병과 絶綠함 만 못하다 하니 선각이 좋게 여겨 관내 각읍에 공문을 보내 의병의 부모처자를 옥에 가두어 의병들이 出陣하지 못 하게 하였다. 이에 선생과 중봉이 三日을 통곡하다 湖右로 가서 李光輪, 張德盖, 申蘭秀, 高擎宇, 盧應晫 등과 같이 다시 募兵하였는데 관군에 連係가 없는 자 一千五百여명이 응모하여 다시 義旗를 세웠다.
六月一日에 到淸州城外하여 적과 싸워 大捷하였고 十三日에는 군사를 錦山으로 이동하였다. 淸州大捷을 行在所에 奏達해야 하는데 義州로 가는 遠行의 어려움을 고려하여 선생이 그 소임을 맡고 의병장의 封事를 받들어 海路로 출발하여 唐津에 당도하였는데 중봉과 義兵이 錦山戰鬪에서 全沒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封事를 從官 郭賢에게 맡기고 卽歸錦山戰場하여 동지 朴廷亮과 義兵屍身七百,儈兵屍身三百을 수습하여 一基大塚을 조성하였다.
선생은 錦山戰鬪에서 함께 순절하지 못함을 恨하다가 丙申 三月에 精舍에서 終命하니 遠近士林이 모두 슬퍼하였다. 이러한 倡義의 큰 업적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한 점 褒賞이 없었으니 애석하다. 후에 孝行學文으로 司憲府掌令에 증직되었다. 이에 후손들이 선생의 遺稿를 국역 간행하고 이 倡義碑를 세우고자 西紀二千七年 臘月 후손 全圭鎬가 나를 찾아와 草稿를 보이면서 重峯과의 世誼로 倡義碑撰을 부탁하므로 愼重히 읽고 讚時調二首를 덧붙인다.
壬辰亂때 仁峰은 重峯과 함께 倡義하고
軍服軍糧뒷바라지 淸州捷報奏達하려
錦山서 함께 殉義치못한 恨어찌하랴
朴廷亮과 힘을 합쳐 殉節한 義兵屍身
그러모아 七百義塚 이룩하여 萬古救國
香魂을 온누리에 빛낸 功 거룩하다 거룩해.
社團法人 重峯趙憲先生 紀念事業會長 서울大學校 名譽敎授 文學博士 李應百 撰하고
碑面은 十四代孫 圭鎬書하고 碑陰은 同孫 安元書하다.
西紀 二ㅇㅇ八 年 三月 日
沃川全氏 松亭公派
仁峰先生倡義碑建立推進委員長
北烈 등 門中이 竪立하다.
수심대(水心臺) 회보에 인봉 전승업선생 창의비문 수록
수심대(水心臺) 2008년 2월 제17호 사단법인 중봉 조헌선생 기념사업회 회보에 증 봉정대부 사헌부장령 인봉 전승업 선생 창의비문이 수록 되었다.
사진은 경기도 김포시에 있는 우저서원(牛渚書院)내삼문(內三門)으로 우저서원은 중봉 조헌 선생을 배향하였던 곳이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서도 살아남았고 1973년 보수하였는데 조헌 추모비와 사당 등이 있다. 조헌선생의 고향이 경기도 김포여서 의미가 깊은 곳이기도 하나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의병장 중봉 조헌(義兵長 重峯 趙憲) 선생은 1592년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문인 이우(李瑀)· 김경백(金敬伯)· 전승업(全承業)등과 의병 1,600여 명을 모아, 8월 1일 영규(靈圭)의 승군(僧軍)과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 해산당하고 불과 700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 영규의 승군과 합진해서, 전라도로 진격하려던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왜군과 8월 18일 전투를 벌인 끝에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후세에 이를 숭모하여 금산전투라 일컬었다. 상훈과 추모는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록되고, 1734년(영조 10)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883년(고종 20) 문묘에 배향되고, 옥천의 표충사(表忠祠),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김포의 우저서원(牛渚書院),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에 제향 되었으며, 1971년 금산의 순절지 칠백의총이 성역화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조헌(趙憲))]
참고
출처 >
-. 수심대(水心臺)
2008년 2월 제17호 사단법인 중봉 조헌선생 기념사업회 회보
-. 송정 전팽령선생 문집관련요약집
자료제공 >
-. 송정공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