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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봉(沙峰) 이 명덕(李 明 德) (1374~1444)(72세)
지금으로부터 632년전 선생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23년(1374년) 여말 전공판서 이엽(典工判書 李 曄)의 아들 6형제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호연(浩然) 또는 신지(新之), 호는 사봉(沙峰),본관은 공주이다
선생은 여말 충신(麗末 忠臣)인 중형 이명성(李 明誠)선생과 함께 여말 거유(麗末 巨濡) 목은 이 색(李 穡)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고려가 망하매 이명성(李 明誠)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이천(伊川) 산중으로 은둔하며 이르기를
"나는 명문의 후손으로 두임금을 섬기지 못하거니와 너는 경국제세(經國濟世)의 재분이 있고 아직은 벼슬을 하지 아니하였으니 연로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네뜻대로 하라" 하시며 은둔의 뜻을 굽히지 아니 하셨으니//
선생은 "세상을 피하여 절개를 확립함은 의리(義理)이고 출세하여 천행함은
도리이니,백이,숙제(白夷淑齊)의 주(周) 나라를 도피함과 이윤(伊 尹)의 은(殷)나라를 섬김은 사적은 다르나 도리는 일반이다. 나는 마땅이
새로운 임금을 모시고 현 백성을 부리리라." 중형에게 말씀하신대로
태조(太朝) 5년(1396년) 문과(文科)에 급제 하신이후 관도에 올라
예문관(禮文館), 춘추관(春秋館),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揀院), 의정부(議政府), 승정원(承政院), 등의 각 직책을 맡아 소임을 다하였다.
1418년(태종18년) 지신사(知申事:도승지의 별칭) 가 되었다.그리고
이듬해 8월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를 하였으므로 이때 선생은 태종의
명을받아 옥새(玉璽)를 가져다가 이를 세종에게 전수하는일을 돕고
경복궁에서 신왕(세종대왕)의 즉위식을 총괄 하였다.
세종이 즉위 하면서 1418년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시발로 공조(工曹),
예조(禮曹),형조(刑曹),의 각 참판과 대사헌(大司憲)직을 맡아 그임무를 다하였다. 1422년(세종 4년) 강원도 관찰사(觀察使)로 나아가 덕의와 은혜로써 정사를 베푸니 온도민이 모두 선생의 치적을 노래 하였다. 그후 선생은 예조와 병조의 참판을거쳐 사헌부 대사헌 동지총재등의 관직을 맡으신이후 황해,경기,전라도의 감사와 한성부윤(漢城府尹)등 등 각직책을 맡으시니 내직(內職)과 외직(外職)을 두루거치면서
세종대왕을 보필하여 세종성대의 기초를 닦는데 큰역활을 하였다.
선생은 세종12년 8월 30일(1431년)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오르고
이에 병조판서(兵曹判書)를 맡아 북방야인 정책과 남방왜인 정책을 추진하고, 이조(吏曹)와 예조(禮曹)를 역임한후 학문이 높아서 예문관대재학(禮文館大提學)과 지중추원사(지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선생은 강원도 감사로 계실때 기근이 심하여 민심이 흉흉할때 조정에
식량17만석을 특별요청하여 굶주린 백성을 보호하였고 선무사(宣撫使)가 되어 지방을 자주돌며 백성을 위무하였다.
1437년(세종19년)에는 다시 전라도 관찰사로 나아가 지방행정을 공평히 하고 송사를 바르게 처리하니 고을 백성들과 이속(吏屬)들이 존경하고 사랑하기를 부모와 같이 여기었다고 한다.
이렇게 선생은 목민관 으로서의 도리를 다 하였을 뿐 아니라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외교임무를 완수 하였고 왜(倭)의 사정에도 밝아 왜적 처리문제에 관해 홀로 김종서(金宗瑞)장군과 의견을 달리한일이 있다.왜(倭)는 망생경사(忘生輕使)하는 습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선생은 1438년(세종20년) 에 다시 지중추로 소환되어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그해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거쳐 예문관 제학이 되었다 . 선생은 효자로도 조야에 널리 알려져 있다. 선생은 셋째
아드님이었지만 양친봉양을 위해서 관도에 올라 직무에 충실한 만큼
효도에도 남달리 뛰어났다.
이를 아신 태종께서는 "나는 언자나 제능(齊陵)(태조비 신의 왕후)에
봉양을 못한것이 한이된다" 하시면서 선생의 노모께 드리라고 감귤을
하사하시었고 태종 17년 선생은 상의원 제조(尙衣院 提調)로 있을때
90노모 봉양을 위해서 사직 하려하자 세종께서는 노대신의 궤장(机杖)까지 하사하시면서 국정을 자문 하시었으나 노대신의 뜻이 완강함을 아시고 대왕께서는 노모를 위하여 시약(侍藥)토록 하라는 어명을 내리셨다. 선생이 69세가 되던해 질병을 얻어 세종에게 사직의 뜻을 고하였으나 세종은 이를 윤허하지 않고 인순부윤(仁順府尹)을 재수하여 이르기를 "병석에 누워서라도 백성을 다스리라" 하였다.71세가 되어서 또다시 노령으로 사직할것을 고하니 세종께서 비로소 윤허 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다시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로 부름을 받았고 이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종1품)로 승진 되었다.
선생은 태조/정종/태종/세종/등 4조에 역임하면서 49년간 나라와 민족의 발전에 크게 기여 하였으나 1444년(세종26년)윤7월13일 72세
나이로 장서하니 우리역사의 성군이요 명신이신 세종대왕께서는 나라의 조회를 철폐하시고 조문케하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右議政)을 증직하고 공숙공(恭肅公)의시호를 내리셨다.
선생의 장례는 공주군 산내면 정생리(지금의 대전시중구 정생동)에서
치루어졌다고 하는데 본래부터 이부근의 산에는 호환(虎患)이 많았기
때문에 세종이 남재등에게 명하여 서울의 포수를 거느리고 가서 호위케하고 광주부윤(廣州府尹)과 통진부사(通津府使)로 영군장(領軍將)을
삼아 선생의 영구를 호위케하고 장지(葬地)를 개척했다고한다.
9월12일에는 다시 대왕께서 치제(致祭)케 하시고 재문을 내리셨으니 우리는 그제문을 통하여 선생께서 천품이 강직하고 풍채가 탁월할뿐
아니라 재주는 경륜에 뛰어나고 각종 전적에 뛰어나게 해박하여서 여러 직책을 빈틈없이 완수한것을 알수있고 ,특히 병부(兵部)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계율에 어긋남이 없게 하시고 중앙직과 지방직을 두루 맡아 선정을 베풀어 건국초의 국기(國基)를 반석위에 올려 놓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백성들이 동기간에 사랑하는 노래가 있었음을 알수있다. 선생은 그때나 지금이나 행정의 귀감이요 사표라 아니 할수 없다.
그제문은 이러 하다,(세종대왕이 내리신 제문)
"생각 해보니 타고난 성품이 강직하고 풍채와 계획이 뛰어 나도다. 재질은 경륜에 우수하고 지식은
서적에 해박하도다. 일찍이 고시에 응시하여 좋은소문이 날로 드러나도다. 관부 요직에서 논의 사상이
투철 하였도다. 사리를 밝게 고찰하여 요로에 있었도다. 출납이 분명하고 지도력이 풍부 하였도다.
내가 왕위를 이어 받았을때에 보조 역활이 더욱 많았도다. 오랫동안 병부에 있으면서 군율에 오차가
없었도다. 자주 선정을 베풀으니 백성들이 덕화를 노래하도다. 언제나 조정에 있어서 이르는곳 마다
직무를 다했도다. 원로인 경을 생각하니 슬픈 마음이 그침이 없도다. 이에 불쌍히 여기는 전법을 들어서
작은 의식을 내리오니 영령이 어둡지 않거든 기꺼이 흠향 하리라."
대제학을 지내신 선생은 지은글이 많았겠지만 지금은 왕조실록에 그뜻이
일부기록 되어 있고 경백 안절사(慶伯 按節使)로 계실때 조령(鳥嶺) 세제에
올라 임금을 그리며 지은 오언시(五言詩) 한수가 전한다.
"차가운 새벽에 세제에 오르니 봄기운이 몽몽 하도다.
북쪽을 바라보니 임금님 멀리계시고
남으로 와서 어머니를 모셨도다.
아득히 짙은 안개에 희미하고 멀리푸른 하늘을 바라보도다.
시름가에 서울가는 기러기는 없네 "
선생은 말년에 낙향하여 노모를 봉양하는 한편 후학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으니 지금 대전 직할시 중구 정생동 은 정승이 살았다하여 유래된이름으로 정승골,정생골등으로 불려지고 있으며 이곳은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서당골 또 선생의호인 사봉골 등의 지명이 전해오고 있으며 1992년
대전 중구청(청장 유병하) 은 이를 기념하여 옛공주 땅인 이곳 정생동에
유허비(遺虛碑)를 세워 선생의 유덕을 추모하고 있다.
선생은 성상뿐 아니라 만백성의 추앙을받아 성종때 공주 명탄서원 충절사에 사액하시고 중형인 여말 충신 이명성(李 明誠) 선생과 동 배향 하였고
1828년 (순조:무자년) 사림의 공의에 의하여 전남 능주 칠송정(七松亭)에
충현사를 세우고 원호를 칠송서원 이라 하였다. 또 1925년 전북 진안군
좌포리에 충절사를 건립하고 지방 사람들이 춘추로 향사한다.
첫댓글 우리조상의 얼을 되세기며...
공주이씨21대손입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