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앤서니) 후크마 교수가 말한 주 예수그리스도는
이미(already) 우리 가운데 임재하셔서 임마누엘 하셨고 우리가 말하는
재림 곧 second coming은 아직(not yet)이라는 말에 일찌감치 동의한바 있습니다.
저는 그분이 칼빈주의 신학교 교수라는 것과 이 ‘이미’와 ‘아직’ 두 마디를
공감한 것 말고는 그 분의 학설이나 사상에 대해 아직 접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분의 주장이 맞는 것은 예수는 우리의 죄를 위해 구원하신 분이며(마1:21)
그리스도는 이사야가 예언한대로(사7:14)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마1:23)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에게 집중이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날 성령을 받아 그물을 던지든 사람답게 복음의 문을 열어젖혔습니다.
그런 그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안 후에 주는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에서 더 나아가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죽은 자였던 우리 안에
부활로 임하셔서 거듭나게 하셔서 하늘의 소망이 있다는 사실까지 설파하게 됩니다(벧전1:3)
사도행전의 베드로의 설교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의 결국은 혼(souls)의 구원까지 받는다(벧전1:9)고 말하고
우리의 혼이 진리를 순종하므로 뜨겁게 사랑하기에 이른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벧전1:22)
그야말로 시몬이 게바 곧 반석이 된 후에 베드로서를 기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우리가 꼭 주목해야 할 부분은 우리에게 지금 임하신 구원의 은혜를 미리
예언한 모든 선지자들은 자신들 속에 임하신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예수로
그 받으실 고난과 그리스도로서 고난 받으신 후의 영광까지 내다보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누구를 그리고 어느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였던 겁니다.(벧전1:10-11)
베드로 전후서의 내용과 베드로가 사도행전에서 설교했던 내용과는 격차가 큽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성령 충만 받자고 하면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면 벌거벗고 칼을 차고 다니는 어린아이 취급을 받습니다.
그만큼 성령의 표적과 기사와 말씀을 듣고 임재 곧 내주 역사하시는
그 간격이 사람마다 다르지만 매우 큽니다. 이를테면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넜을
때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의 하나님의 대접이 다른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약5:7)
성경에서 '형제들아' 하고 나오면 내 말을 하는구나 생각해야 됩니다.
주의 강림 곧 임재하시기 까지 길이 참으라 하십니다. 주의 재림(흰 보좌 심판)을
길이 참고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요? 준비만 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오십니다.
지금 조급하게 언제 오실까 조마조마하신 분은 지금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이죠.
주의 영이 내게 임하여 이미 주님 안에 내가 있고 주님이 내 안에 계시는
그 사랑의 약속을 믿고 마음으로 꼭 붙잡고 있는데 뭘 걱정할 필요가 있나요?
우리가 주의 이름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말씀의 거처가 되어
그 영광을 보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므로 주의 충만한데서 받고 또 받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드디어 독생자의 영광이 우리 속에 나타나는 결말에 이릅니다.(요1:1,12,14,16,18)
그런데 예수를 믿고 예수의 부활만 할렐루야 하고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장사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 그 부활과 연합이 되어
한 몸 한 영이 되는 성령세례(고전12:13)없이 다시 오실 예수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누구의 말을 하고 있을까요?
주께서 임재하신 ‘이미’가 있어야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아직’을 기다릴 수 있지요.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며
길이 참는 것처럼 그 때까지만 참아라고 하십니다.
우리 구원의 농부(요15:1)이신 하나님이 참으시니 우리도 참아야 합니다.
우리는 참음으로 주를 바라고 하나님은 참음으로 우리에게 임재하실 타이밍을 기다리십니다.
진리의 성령이 임하신 그 때부터는 그 분이 일하십니다(요16장)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오면 땅이 일을 하듯 주의 성령이 임하시면 드디어 일을 하십니다.
그 때부터는 그를 믿는 믿음이 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의 역사(work produced by faith) 곧 믿음에 의한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살전1:3)
종말교회다운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실력입니다.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3위 하나님)이 우리에게 역사하시므로
우리 안에 그리스도(2위 하나님)의 임재를 준비하신 다음 진리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기름부음으로 우리 안에서 영원히 내주역사하십니다.
우리는 그의 내주역사하심을 따라 바깥으로는 힘을 다하여 수고를 합니다(골1:29)
이것이 바로 행함이 있는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3위 하나님이신 성령과 2위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따로 임하시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의 육신의 죄성 때문에 성령이 먼저
역사하시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임재하심과 나타내심을 오래 참음으로 기다리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도 주께서 내게 임재하셔서 생명과 영광으로 나타나시기를 바라며
그 약속의 계명(요14:21)을 지키면서 길이 참고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리는 겁니다.
그런데 농부가 밭을 갈아갈고 난 다음에 씨를 심고 열매를 기다립니다.
어떤 사람들을 보면 씨는 심지 않고 밭만 날마다 갈아엎는 것을 봅니다.
주 예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아 마음을 정하게 하고 깨끗하게 되기를 바랄 뿐
하나님의 씨이신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그 생명의 씨가 우리 속에
심겨진 다음에 자라나기를 길이 참는 과정이 없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날마다 밭을 간다고 회개를 하지만 그 속에 생명이 없으면 결국 쭉정이가 되고 맙니다.
이 땅에 역사적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만
믿고 그의 피, 십자가와 다시 오실 재림을 믿고 신부되기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우리가 신앙고백을 하듯 보좌에 앉아 원수가 발등상 될 때까지 다스리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저리로부터 반드시 다시 오시고야 맙니다.
그렇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이름으로 보내신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와 지체인 우리가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교통하는 걸 믿고 행해야죠.
부활이시며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서 거처를 함께 하시므로
영생 안에서 거룩함과 영광으로 우리 속에 나타나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의 표적이나 기사와 은사가 지나가고 진리의 말씀을 듣고 새기면 한참
밋밋한 석회석 같은 광야를 지나가지만 그 인내로 나의 목숨이 부인되고
죄성이 사라지고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붙좇아 따라가다 보면
드디어 주의 나타나심을 담대히 부르짖는 영적인 차원에 이르게 됩니다.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5:8)
길이 참고 마음을 단단하게 하라 주의 임재가 가까이 왔다고 하십니다.
노파심에서 다시 말하지만 야고보서는 히브리서가 장착이 된 사람을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로 거룩하게 되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죄와 상관이 없는 자로서 은혜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는 믿음
곧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믿음으로 실상으로 나타나게 하는 믿음의 소유자인 겁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야고보는 주의 임재하심으로 열매 맺기를 길이 참으라고 권하는 겁니다.
첫댓글 아멘!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