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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여러분의 손으로 작은 나눔을 베풀었습니다. 이런 작은 나눔 속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학교 일 년 선배 목사님께서 하신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를 듣다가 뒤통수를 맞은 느낌을 받은 적 있습니다. 설교를 통해 질문한 내용은 이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여러분은 그 거리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천국과 지옥의 광경은 분명 다릅니다. 천국에 간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받고, 지옥에 간 부자는 불 가운데서 고통 받으며 타인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자신의 혀를 시원하게 해 달라고 호소합니다.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천국에서 부자에게 천국과 지옥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있어서 건너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구렁텅이는 얼마나 큰 구렁텅이 일까?
천국과 지옥은 서로 말하면 들리는 정도의 거리로 보입니다. 지옥에 있는 부자와 천국에 있는 아브라함이 계속 대화를 하는 것 봐서는 그렇습니다. 그렇게 멀어 보이지 않습니다. 그 거리는 얼마큼 될까? 목사님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땅에 살아갈 때 부자가 호사롭게 살면서 앉아 있는 자리와 자기 집 대문 밖에서 아픈 상처투성이 몸으로 누워서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는 거지와의 거리가 바로 천국과 지옥의 거리가 아닐까 결론을 내리십니다.(공감)
이 이야기를 통해서 ‘거리’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천국과 지옥의 거리가 나와 내 이웃 간의 ‘거리’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리고 나와 내 이웃과의 거리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주변의 힘들고 어려운 자들과의 거리는 얼마큼 되십니까?
마태복음 25장 최후의 심판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갈라서 양의 편의 사람은 오른쪽, 염소편의 사람은 왼쪽에 세우십니다.
그리고 양의 편에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그 의인들이 대답하였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분명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지극히 작게 여기고, 지극히 보잘것없이 여겼던 자들과의 거리가 곧 예수님과의 거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웃과의 거리가 예수님과의 거리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와 예수님은 동일시했습니다. 늘 예수님은 나와 함께 하는 이웃 속에 숨어서 찾아오십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는 천국과 지옥의 거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주신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지상명령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과의 거리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스스로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요14:20) 예수님의 사랑 속에는 거리가 없습니다. “안에”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따뜻이 느껴집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들은 이제 이웃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오병리어의 기적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굶주린 사람들이 무더기로 않아있습니다. 자그마치 남자만 오천, 남자만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무리를 헤쳐 보내어, 주위의 마을과 농가로 찾아가서 잠자리도 구하고 먹을 것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입니다.”어쩌면 짜증이 난 말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말로 고치면“날이 저물었는데 이제 설교는 끝내시고 어디 가서 밥 좀 사먹으라고 하시죠. 이 사람들 여기 있느라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요.” 그러나 예수께서 물끄러미 바라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은 당혹감에 빠집니다. 순간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우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사람들을 오십 명씩 앉게 하신 다음에 하늘을 우러러 축사를 하시고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무리에게 나누어주게 하십니다. 이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오천 명이 배부르게 먹고, 12광주리 넘게 남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장명을 상상해 보십시오. 저녁 무렵, 풀 밭 위에서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모습을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기적들을 보면 늘 숫자에 현혹됩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어떻게 그렇게 다 먹일 수 있을까? 그 숫자에 현혹되고, 그리고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어려가지 해석들을 내어 놓습니다.
이 기적이야기의 핵심은 가난한 자들을 대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통해 어떤 생명적인 기적들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눔의 마음이 어떤 역사를 이루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물고기 2 + 떡 5개 =7 완전수입니다. 그리고 12는 이스라엘이 열두지파이듯이 유대인들에게는 완전수입니다. 함께 나누는 곳에는 놀라운 생명의 기적이 일어나며, 이것은 얼마나 우리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그리고 온전한 하나님을 체험을 하게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제 1성경인 구약성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굶주린 무리를 먹이신 대표적인 이야기가 바로 만나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신 광에 이르러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싸리 같은 것을 아침에 내리십니다. 만나였습니다. 만나를 거두는 원리는 간단합니다. 필요한 만큼 거두고 내일을 위해서 남기거나 거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겨진 것에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나 먹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나는 축적과 보관이 불가능한 하늘 음식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은 그 어떤 것도 축척과 보관이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사르밧 과부이야기입니다. 엄청난 가뭄으로 더 이상 생계를 이어갈 수 없었던 사르밧 과부는 마지막 남은 밀가루 한 줌과 기름 몇 방울로 빵을 만들어 먹은 후 아들과 함께 죽기를 기다릴 작정이었습니다. 그때 엘리야가 그 집을 방문하게 되고, 자초지정을 들은 엘리야는 빵을 만들어 자기에게 먼저 가져다 달라고 합니다. 분명 갈등을 하였겠지만 여인은 그 빵을 엘리야에게 가져다줍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뒤주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의 기름도 마르지 않았습니다.
이야기는 나눌 때 일어나는 생명의 기적을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하나도 저장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나누면 생명의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굶주린 자들 앞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명령하십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깊은 속뜻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아름다운 축복의 메시지입니다. 저는 오늘 이 것 하나 우리가 깨닫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이 명령은 죄를 짓고 유배를 당한 사람에게 내려진 명령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런 명령을 듣고 믿음의 길을 떠납니다. 무엇일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그 뒤 구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이런 어마 어마한 하나님의 축복을 약속 받았기에 아브라함은 믿음의 길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이라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복 받는 사람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그를 만나게 될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은 다른 이들에게 복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고, 하나님은 그의 그런 믿음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너는 복이 될 것이다”자신의 삶의 타인들이 복을 받는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 현대인들의 합리적인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고백하지 않으면 따르지 못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 끝에는 놀라운 일들이 숨어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한 민족이 일으키는 축복의 통로, 땅을 차지하는 축복의 통로,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정말 축복된 삶은 무엇일까요? 내가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복이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가서 먹을 것을 주어라”이 말씀은 너희가 ‘축복의 통로’가 되어라 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축복의 통로가 되는 기쁨을 제자들에게 경험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는 방법임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빵도 물고기도 직접 제자들이 가져다주게 하고, 그 기적을 맛보게 하십니다. 축복의 통로가 되는 순간 하나님과 우리의 거리는 없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제자들은 인생의 참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나눔에는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손에 쥐면 냄새난다)
오늘 본문이 있는 누가복음 9장에는 또 다른 한 잔치자리가 있습니다. 풀밭에서 물고기와 빵으로 끼니를 때우는 잔치와 달리 너무나 화려한 잔치를 소개합니다. 똑 같은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 마가복음 6장에는 구체적으로 그 잔치를 소개합니다.
당시 유대 땅을 다스리던 왕 헤롯의 생일잔치입니다. 헤롯은 궁내 대신들과 화려한 잔치를 펼쳤습니다. 그때 헤롯의 딸이 화려한 춤을 추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줍니다. 기분이 좋은 헤롯은 나라의 절반이라도 줄 터니 소원을 말해 보라고 합니다. 그때 딸은 어머니에게 소원을 묻고 답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내게 주십시오.”결국 세례요한은 어처구니가 없이 한 소녀의 소원으로 죽게 됩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가 그렇게 죽습니다.
마가와 누가는 세례요한의 죽음과 오병이어를 묘하게 대조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잔치 그 속에는 어이없는 질시와 복수, 끔찍한 궤계와 살인이 숨어 있었습니다. 풍족하지만 그 잔치 속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하지만 소박하고, 보잘것없는 풀 밭 위에 잔치는 풍족하고 생명이 넘칩니다.
이 두이야기를 통해 누가는 당신은 어느 잔치에 관심이 있고, 어떤 잔치에 가기를 원하고 있는지를 누가는 우리에게 질문하는 것 같습니다.“가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는 잔치”좀 부담스럽지만 이 잔치가 생명을 여는 잔치입니다.
“나는 당신들의 그리스도는 좋아한다. 하지만 당신들의 그리스도인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당신들이 그리스도인들은 당신들의 그리스도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마하티르 간디의 말입니다. 오늘 이 말을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나는 예수가 싫은게 아니다 그에게 미친 팬클럽이 싫을 뿐이다” 왜 우리는 이 땅의 잔치자리에서 인심을 잃었을까요? 종교는 그 종교를 믿지 않는 자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 종교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합니다. “너희가 먼저 먹을 것을 주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는 무시하고, 내가 복 받는 길로만 달려왔고, 그 복 받은 것을 자랑하듯 대형건물을 짖고, 그 힘을 자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의 아픈 목소리를 듣지 않는 거리가 바로 하나님과 우리의 거리, 천국과 지옥의 거리일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세상의 힘들고 지친 자들을 위한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신발 끈을 매고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나눔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