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한국 최초의 부흥사를 길선주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길선주 목사 이전에 널리 부흥운동에 매진한 선교사가 있었다. 그가 하디박사(Dr. Robert A. Hardie)이다. 하디박사는 1903년 원산의 사경회에서 깊은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여 한국 전역에 큰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사실 1907년 평양의 대 부흥운동은 이 하디박사의 부흥운동의 결과라고 설명할 수 있다.
하디는 원래 카나다 토론토의 의학도로 구성된 YMCA에 의해서 8년계약으로 한국에 파송된 의료선교사이다. 처음에는 서울과 부산에서 일했으나 1892년부터 함경남도의 원산으로 선교지를 옮기고 진료소를 세워 의료선교를 했다. 그러던 중 8년 계약이 완료되어 1898년 부터는 남감리회 선교사로 소속을 바꾸었다.
하디는 원산에서 최선을 다해서 의술을 베풀며 복음을 전했다. 하지만 기대하던 것 만큼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하디는 그 원인이 성령의 능력의 결핍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악한 세력들이 자신을 넘어 뜨리려고 궤계를 부리는데 자신을 그것을 이길 힘이 없었다. 그리해서 그는 여러해 동안 성령의 능력을 간구했다. 그러던 중 1903년 여름에 중국에서 일하던 남감리교선교사 미스 화이트(Miss. Mary C. White)가 원산에서 일하던 그의 친구를 찾아 휴가를 보내려고 왔다. 그런데 화이트는 원산에 토착해서 자신의 친구들에게 성경을 연구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갖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화이트와 그의 친구들은 기도회를 갖기도 하고, 하디박사에게 성경공부를 세차례 인도해 줄것을 요청했다.
하디박사가 이 집회를 위해서 택한 성경구절은 요한복음 14: 12-14; 15: 7; 16: 23-24이었다. 이 세귀절은 각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그리스도의 내주, 오순절의 경험에 관한 것이었다. 하디박사가 이 구절을 연구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요한복음이 말하는 신앙도 경험도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이런 신앙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모든 죄를 회개하여 심령의 정결함을 얻는 신앙의 실천을 해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으로 그가 해야할 일은 이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일이었다.
다음 주일예배에 하디박사는 자신의 교인들에게 자신의 교만과 강팍함, 그리고 참된 믿음의 부족을 고백했다. 사실 이것은 하디에게 매우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그렇게 하도록 요구하셨다. 여기에 하디박사는 순종한 것이다. 이제 하디박사의 마음에는 놀라운 평화가 임했고, 그의 사역은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했다. 이런 사건 이후의 하디의 삶은 놀랍게 달라졌다. 더 이상 이전의 하디가 아니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디박사의 모습이 한국교인들에게 중요한 신앙의 모델을 제시한 것이다. 사실 하디박사는 한국신자들이 진정으로 죄를 회개하고 신앙의 열매를 맺게 되기를 위해서 기도했다. 하지만 그런 것의 실례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데 하디 자신의 회개와 고백은 많은 신자들에게 진정한 회개란 무엇인가를 보여주게 되었다. 이후의 부흥운동은 하디의 모델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복음주의 신앙의 특징은 성경의 말씀을 단지 과거의 말씀으로만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의 말씀은 우리의 삶 가운데서 다시금 반복될수 있고, 반복되어야만 한다. 하디박사는 성경의 말씀 앞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고, 성경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로 만드려고 노력했다. 이런 가운데서 그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고, 이것을 통해서 1907년의 대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하디박사는 그 후 전국에 다니면서 자신이 체험한 성령의 능력을 전했다. 1906년 여름에 그는 평양에 가서 원산에서 나타났던 성령의 역사를 전했다. 그후 평양신자들은 열심히 기도하면서 성령의 역사를 기다렸다. 1907년 대부흥운동은 하디가 시작한 성령운동의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