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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 타락(1) 로마서 8:1-11
우리 장로교에서 신앙의 지침서로 삼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의하면 “사람은 스스로 죄에 빠짐으로 구원을 얻을만한 선행을 행할 의지력을 아주 상실해 버렸다. 그러므로 자연인은 선에서 멀어지고 죄로 죽었으므로 회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회심하려고 하지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인간의 완전한 타락으로 전적인 무능력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류의 최초의 타락은 창세기 3:6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열매를 따먹은 것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2:1에서는 전 인류가 바로 아담 안에서 범죄하였다는 사실과 더불어 아무도 핑계할 수 없다는 것으로서 완전한 타락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러 번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으니 하나님으로부터 떠났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리에 빠졌던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2:12을 보면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란 언약의 약속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다고 하였습니다. 구원을 받지 못한 자가 우리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밖의 나라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은 동일하게 구원의 은총을 받지 못할 이방인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의 범죄를 생각할 때에 우리는 그냥 그랬었나보다 하고 지나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아담이 범죄한 범위와 그 결과는 너무나 무서운 것입니다. 인류 전체를 다 죽은 자라고, 또 인류 전체가 다 악하며, 모든 인간이 죄의 저주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죄를 지으면 법에 의하여 재판을 받고 그 재판의 선고 결과에 따라 형벌이나 벌금을 내게 됩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은 죄를 더 많이 짖고 또 다른 사람은 죄를 적게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죄는 너와 나, 우리 모두, 전 인류 전체가 동일하게 ‘죽을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면 얼마나 심각한 죄인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죄가 우리 심령에 그대로 있을 때에는 하나님을 경애할 수도 없고, 또한 구원을 얻기에 합당한 아무런 일도 행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표현을 다르게 하면,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과 반대되는 일을 하고 마귀가 좋아하는 일만 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사람이라는 존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인 동시에 스스로 죄를 짓는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종교 개혁의 시발점이 되었던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질을 잃어버린 자유의지란 하나의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결국 잃어버린 자유는 자유라고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즉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자유의지는 손상을 입고 태어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바로 아담의 범죄 때문입니다.
오늘이 무슨 날입니까?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날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주인이었지만, 일본넘들이 강제로 합병하고 군대를 주둔시켜서 전국을 장악하여 자기들 마음대로 통치를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살 수밖에 없나요? 일본이 하라는 대로 하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정도의 자유는 있지만, 자주 국민으로서 자유를 누리면서 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밥 먹고 일하고, 쉴 수도 있지만 완전한 자유입니까? 제일 중요한 ‘주권’의 자유가 없는 형식밖에 없는 자유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립을 하고자 서울 종로 3가에 있는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만세를 부르고 거리 행진을 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랬습니까? 자유 때문입니다. 무엇을 한 번 해보려고 해도 간섭을 받았습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것을 어떻게 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은 어떻습니까? 완전히 자유로운 나라입니까? 100%는 아니지만 그 때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북쪽에서는 북한공산정권이 우리를 압박하고 중국에서는 북한을 옹호하고, 경제적으로 협박을 하기도 합니다. 기술적으로는 미국과 일본에 의지하고, 자본 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미국이나 일본이 기침을 한 번 하기만 하면 우리는 감기 몸살에 걸린다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자유는 있으되 수시로 간섭을 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국력입니다.
이러한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도산 안창호 선생은 ‘무실역행’이라고 외쳤습니다. 힘을 기르자는 것입니다. 못 배웠으니 지금부터라도 배워서 지식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교육 사업을 했습니다. 아는 것이 있어야 외국과의 교류도 하고, 앞선 문물을 들여와서 나라가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아직 많은 부분에서 세계적인 첨단 지식에 부족하고 기술력도 부족합니다.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면에서는 너무나 약하기 때문에 우리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우리들이 힘을 기르려고 하면 강대국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방해를 할 것입니다. 어떤 기술을 개발해서 자기 나라를 돈을 벌어 가면 세금도 물리고 많이 벌어가지고 못하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제제를 가합니다. 그리고는 자기들의 기술은 가능하면 많이 팔려고 하는 것이 강대국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것에 대하여 어떻게 대항해야 할까요? 정말로 우리의 힘으로 가능할까요? 북한 조차도 제대로 설득하지도 못하고 통제하지도 못하는 우리나라가 어떻게 세계 강국을 대항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답을 내 놓으시겠어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일본이 그토록 교회를 핍박한 원인이 무엇일까요? 다른 모든 종교나 사람들은 얼마든지 굴복을 시켰는데, 오직 기독교인들은 핍박을 받을수록 교회를 중심으로 똘똘 뭉치는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 한국 교회 뒤에는 선교사들이 버티고 있습니다. 그들 외국인 선교사 한 사람 한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 들의 나라가 강대국인 미국, 영국 등이기 때문에 그들 나라를 무서워하기도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가 강한 나라이기 때문에 일본이 더욱 교회를 없애려고 발악을 했고, 어떻게 해서든지 누명을 씌워서라도 교회를 폐쇄시키고 목사를 잡아 가두고 성도를 괴롭혔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들이나 목사님들이 그냥 그대로 당하고만 있었을까요? 제일 먼저 무엇을 했을까요? 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살펴 주시기를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결국 우리나라는 세계의 주목 속에서 해방이 되었고, 오늘날 아직은 힘이 부족하지만 자유국가가 되어서 마음을 놓고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유는 어떤 자유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도 내 마음대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자유를 온전한 자유라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실질을 잃어버린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이 자유를 가지고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다만 할 수 있는 것은 악한 일을 하되 크게 악한 일을 하든지 아니만 작은 악한 일을 할 수 있는 선택만이 가능한 엉터리 자유였습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이나 내 마음에서 예수님을 믿기 전에 착한 일을 한 적이 있고 하고 싶은 적이 있었지 않나요?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있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도덕적으로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선한 행동을 하려고 하는 그 동기 자체가 잘못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구원을 얻기에 합당한 행동도 할 수 있다고 입증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인간은 자유행동자이지만 그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는 그 자신 이외의 어떤 세력에 의해서도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새는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닐 날개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되었든지 그 날개를 다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즉 날개를 다친 새는 하늘을 날아다닐 자유를 가지고 있지만 하늘을 날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죄로 인하여 상처를 받은 자유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고 구원을 받을만한 일을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죄를 사랑하면서 어떻게 회개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증오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의지의 무능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고(요 3:19)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40)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멸망을 당하는 이유는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자신의 잘못된 의지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오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고 하였던 것입니다.
사람은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끼리 사랑할 수 있다고 해서 하나님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즉 물이 높은 곳에서부터 아래로 흘러 흘러 바다로 향합니다. 그런데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을 보고 반대로 위쪽으로도 올라갈 능력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또 사람은 높은 곳에서 아래쪽으로 뛰어내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벼랑 아래에서 꼭대기로 뛰어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타락하였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완전히 장님이 되어 있어서 타락한 천사나 악한 귀신이 하는 것처럼 선 대신에 악을 좋아하며 선택합니다. 성도는 완전히 성화될 때에 비로소 거룩한 천사가 하는 것과 같이 오직 선을 좋아하며 선택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악한 것을 할 것인가 선한 일을 할 것인가는 스스로 자신의 자유로 행한 것이기 때문에 아울러 책임도 져야 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즉 타락한 인간은 한결 같이 그 행동에 있어서 강제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 죄를 짓고 또 죄 짓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 사람의 성향과 원하고 바라는 것이 그렇게 하고 싶어서 마침내 그 심정이 자진하여 의식적으로 또 의지적으로 그와 같이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악한 것을 천성적으로 좋아하고 원하는 것이 인간의 타락하고 부패한 본성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욥은 “악을 짓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욥 15:16)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14을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알면 어떻게 인간을 유능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그 본연의 상태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교양이 없는 사람은 책을 읽어도 그 책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 의미는 깨닫지 못합니다. 예술품을 보아도 겉모습은 아름답다고 느낄 수는 있겠지만 예술적인 가치를 깨닫지는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3년 전인가요 우리나라에서 ‘피카소’ 전시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피카소가 누군지는 알 고 있습니까? 그 때에 미술을 잘 감상한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오늘 피카소를 만나고 가는구나!” 그랬더니 옆에 있는 사람이 ‘피카소가 왔었어?’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정말 무식한 노릇입니다. 피카소가 언제적 사람인데 아직까지 살아 있나요? 피카소의 그림을 통하여 피카소의 미술관을 느끼고 그의 감성을 느낀다는 의미로 ‘피카소를 만났다.’고 말한 것입니다. 피카소는 1881. 10. 25일 스페인 말라가에서 태어나서 1973. 4. 8. 사망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마지막 순간, 생, 아비뇽의 아가씨들, 거울 앞의 소녀, 미노타우로스 연작, 전쟁과 평화 등이 있습니다. 또한 수학을 모르는 사람은 수학의 공식을 보아도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중생하지 못한 사람,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이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을 읽어도 아무런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설사 신학공부를 해도 교리에 대해서는 알 수 있지만 복음이 무엇인지는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전혀 무지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어떤 기쁨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전혀 무관심하게 되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의 왕이시며 나의 구주가 되며 성육신하신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에 사랑하고 경배하고 순종하고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런 전적인 무능력은 단순히 부패한 도덕적 성질에서뿐 아니라 ‘무지’에서도 생깁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은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하고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엡 4:17-18)고 하였습니다. 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하였습니다. 고전 2:9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고전 2:10을 보면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할렐루야! 불신자들은 못 보지만 우리는 본다 이 말입니다. 믿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고 하였습니다. 중생하지 못한 불신자의 상태로는 도저히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는 것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알 자를 주권적으로 선택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 성도들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8:43-44을 보면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였을 뿐 아니라, 명료하게 듣지도 못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그들에게는 미련하고 미친 말처럼 들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악귀가 들린 자라고까지 비난하였습니다(요 8:48-52). 오직 주님의 제자들만이 그 진리를 알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을 자유한 자라고 생각하였지만 사실은 악귀의 자식이요 죄의 종이었던 것입니다(요 8:33). 우리를 비난하고 자신들은 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옛날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임을 알면 됩니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각 개인의 영혼은 성령이 중생시키기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어떤 영적 행위이든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적성이나 능력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명하는 말입니다. 육체적으로도 사람이 죽으면 아무 행동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육체적 죽음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영적으로 죽는다면 그는 이미 어떠한 영적 행위도 할 수 없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전적인 무능력이 이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부패는 자력으로 도저히 자기를 깨끗케 할 수 없습니다. 새로 태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마음의 변화인데, 그것은 오직 언제 어디서나 그가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주권적 능력으로만 가능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 옮김을 가리켜 중생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중생, 살리심, 흑암에서 광명에로 불러냄, 소생시킴, 새로운 삶이라고 합니다. 이 일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집니다. 이 변화의 결과로 사람은 진리를 알게 되고 도 그 진리를 기쁘게 수용하게 됩니다. 저나 여러분은 성령으로 새 생명은 얻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고 경배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경외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