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름 찾 기’(요1 : 39-42)
벌써 12월 첫째 주를 맞이합니다. 참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 같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 중에 하나가 “시간 참 빨리 흐른다”라는 말입니다. 이 짧은 한 마디가 우리 삶의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프리모 레비(아우슈비츠 수감자, 강제 노역소에서 노역)는 그의 책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나치의 행악을 고발하는데 시간을 보내지 않고, 오히려 그 속에서 인간의 모습을 성찰하게 됩니다. 진흙탕 소에서 고된 노동을 하며, 희망 없이 죽음만을 기다리며 빵 반쪽을 위해 싸우는 인간의 참담함을 그리고 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화학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동료들의 축하 인사를 받으며,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실험실’에서 노동을 하게 됩니다. 때는 12월, 동료들은 추위에 굶어 죽어 가는데 그는 따뜻한 곳에서 노동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몇 달 만에 여자(독일여자)를 보게 됩니다. 독일 여자들의 화려한 옷차림, 유대인들을 짐승보다 못한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 앞에서 누더기가 된 얼룩진 포로 복을 입은 자신의 초라함을 처음으로 느끼게 됩니다.
12월 어느 날, 독일 여자들이 담배를 피우면서 무심코 던진 한마디 “참 올해는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 같다”는 말에 프리모 레비는 절규하게 됩니다. 작년 1943년 11월에 체포되어 일 년 동안 매일 노동과 추위와 질병과 굶주림으로 짐승처럼 살아온 자신의 일 년을 그렇게 표현하는 그들의 말에 그는 가슴 아픈 절규를 하게 됩니다.
왜 그는 절규할까요? 그가 보낸 수용소에서 1년은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짐승보다 못한 수용소에서의 시간들을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고, 이해하려고 하지 않은 암흑의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묻혀버리거나 잊힌 시간이란 인간에게는 큰 아픔과 고통이 되고 맙니다. 누구에게는 고통의 시간을 그들은 참 쉽게 그렇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프리모 레비처럼 “시간이 빨리 흐른다.”라는 말 앞에서 한 해의 시간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남모르게 고통의 시간들을 보낸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도, 이해시킬 수도 없는 시간들을 경험하신 분도 계십니다.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그래서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시간은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가 보낸 시간들을 누가 알아주고 이해해 준다면 어떨까요?
응답하라 1988을 보면, 시집가서 남편을 여위고 두 자녀들과 함께 힘들게 살아가는 딸 이야기가 나옵니다. 딸은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찾아온다는 전화를 받습니다. 엄마가 자신을 걱정할까봐 옷을 차려입고, 이웃집에 있는 창고에서 연탄을, 냉장고에서 먹을거리들을 빌려서 자신을 위장합니다. 하지만 엄마의 눈을 속이지 못합니다. 화장실에 몰래 두고 간 봉투를 발견한 딸은 엄마에게 전화를 합니다. 전화기를 붙들고 ‘엄마’라는 한 마디에 딸은 더 이상 목이 메여 말을 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살아온 아픈 시간들을 이해하고,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힘이 생깁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이런 사람들이 아닐까요?
돈이 필요하면 신용카드로, 밥이 필요하면 배달로, 무엇이 고장나면 서비스 센타를 찾는 세상에서 필요한 건 사람이 아닐까요? 함께 삶을 나누고, 나를 이해하고, 감싸줄 수 있는 사람 말입니다. 사람이 힘입니다.
이런 세상을 아셨는지 예수님은 우리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너희 머리카락까지도 세고 계신다. 그러니 두려워 말라”(마10:30-31)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세심한 사랑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구제적인 아픔과 문제들까지 알고 계시는 ‘어머니’같은 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간 요1-10장을 묵상하면서 ‘이름찾기’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인간학’을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인간학이란 예수님의 인간이해입니다.
신영복 선생님은 그의 책 담론에서, 진정한 삶의 아름다움은 ‘앎’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앎’이란 ‘안아줌’이라고 말합니다. 한 사람의 삶의 풀 스토리를 들어주고, 그 생각에 공감하고, 그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안아줌’이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씩 그 사람의 삶을 주인공으로 두고 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는 소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이야기를 예를 듭니다. 빵 조각 훔친 죄로 19년을 복역하는 죄수의 이야기도 주인공으로 두면 새롭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사회에서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지만 감옥에서 한 사람, 한 사람 삶의 'full story'를 들으면 공감이가고, 이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삶도 중심에 두고 보면 너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래서 ‘아름다움’의 반대말은 ‘추함’이 ‘모름다움’이라고 하십니다. 저는 이 말에 너무나 큰 공감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의 ‘인간학’(인간이해)는 무엇일까요? (요1-10장의 주인공들을 통해)
요한복음1장에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만나십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라고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그에게 예수님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평가하시고,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오시기 전에 먼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다고 하십니다. 니고데모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주목’해서 보아준 예수님께 항복하고 맙니다.
요한복음 4장, 예수님은 유대사람들이 인간 취급받지 못하는 사마리아 여인을 주인공으로 삼으셨습니다. 여인과 대화를 시작하십니다.(제자들은 놀람) 동정심이 아니라 진심으로 여인의 삶을 안아주십니다. 그때 여인은 예수님께 자신의 삶의 아픔을 이야기 합니다. 남편5명이 있었고, 지금의 남자도 자신의 남편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들어주시고, 안아주시는 예수님께 자신을 내려놓았습니다.
요한복음 5장, 베데스다 연못에서 중풍병자를 예수님은 고칩니다. 38년된 병자에게 ‘네 자리를 가지고 돌아가라’라는 용기를 주셨고, 병자는 일어났습니다. 문제는 이날이 안식일이었기에 유대사람들 일어나서 예수를 박해합니다. 그날에 유대사람에게 주인공은 ‘안식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그날의 주인공은 “중풍병자”입니다.
요한복음8장에 보면 간음한 여인이 나옵니다. 사람들에게는 주인공은 ‘율법’입니다. 율법에 의해서 그 여인을 돌로 쳐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주인공은 ‘그 여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죄 없는 자는 돌로 치라’ 고 소리치십니다. 주인공이 달라지면 언어도 달라집니다.
예수님의 인간학의 핵심은 인간이 만든 그 어떤 것, 즉 ‘안식일’, ‘율법’도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인간학의 핵심은 ‘사람’입니다.
무리(군중)속에서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안아주는 것이 예수님의 인간학의 핵심입니다. 군중 속에 묻혀서 자신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가슴깊이 안아주시고, 주인공으로 만드셨습니다.
저는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이름 찾기’라고 부르고 싶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한 장면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베드로가 처음 만나는 장면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라고 말하자 요한의 제자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바로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입니다. 그리고 안드레는 자기 형 ‘시몬’에게 “우리가 메시야를 보았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시몬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옵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로구나.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게겠다.”라고 하십니다. 아람어로는 ‘게바’, 그리스어로는 ‘베드로’이고, 그 뜻은 ‘반석’입니다.
군중 속에 묻혀서 그저 어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시몬이라는 자를 예수님은 이름을 불러 주시고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도 무리 속에서 사람을 발견하는 일, 이름을 불러주는 일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이름을 부르신다는 것은 ‘수많은 군중’ 속에서 묻힌 사람들의 삶을 ‘주인공’으로 불러 주시는 사역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각 사람의 삶을 안아주시는 행위입니다.
‘이것이 인간인가?’의 주인공 프리모레비는 나치의 비인간적인 행동을 고발하기 보다는 무리 속에서 잊혀지는 인간들의 삶의 스토리를 끄집어내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삶이란 ‘아픔’자체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고통도 우리 자신의 삶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주목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그저 평범한, 별 볼일 없는 것으로 취급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각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셨고, 이름을 찾아주셨습니다. 마중물이 되어서 그 사람 내면의 깊은 잠재력을 끄집어 내셨습니다. 군중속서 자신의 옷을 잡는 여인을 돌아보셨고, 사람 머릿속에서 지워진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 그에게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각 사람의 삶을 소중히 여기시는, 이것이 예수님의 인간이해였습니다.
일본인들에게 한 때 일본인이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 1위를 차지했던 일본 배우겸 감독 기타노 다케시는 2만명이 죽은 동경 대 지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이렇게 말합니다.
“2만 명이 사망한 하나의 사건이라고 생각하면 8만 명이 죽은 쓰찬 대 지진 보다 나았다는 식의 수치로 밖에는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사람의 목숨은 2만분/1이 아니다. 따라서 2만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사람 한 명이 죽은 사건이 / 2만건 발생한 것이다.” 이 말은 개인적으로 가슴에 깊이 새겨진 말이 되었습니다. 그의 주장은 수만 명의 죽은 사건 속에는 각자의 이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름과 연결된 수많은 다른 이름(부모, 친구, 친척)들이 있고, 그 사람과 관련된 사연도 수 없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름과 사건을 하나의 사건이나, 수치로 표현한다면 그 사람의 이름과 사연은 무쳐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일을 경험했습니다. 세월호에 죽은 304명의 아이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하나의 사건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입에서는 6,25때 흥남부두에서 죽은 사람들보다 숫자가 적은데 뭐 그렇게 나라가 시끄럽게 떠드느냐고 합니다. 과연 옳은 말일까요? 304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한명이 죽은 304개의 사건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인간이해입니다.
‘금요일엔 돌아오렴 ’ 세월호 240일간의 유가족의 아픔을 기록했습니다. 죽은 아이들의 이름과 관련된 사연들을 읽다보면 가슴이 매여 옵니다. 공항장애를 앓고 있던 김건우 엄마 노선자씨는 친구 같은 아들 때문에 매일을 삶을 버텨냈습니다. 작은 일에도 엄마에게 전화해서 이야기 하던 건우가 있기에, tv에서는 전원구조라고 방송해도 엄마는 아니라고 거짓말이라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그런 일 앞에서 전화를 하지 않는 건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픈 사연들은 304라는 숫자와 하나의 사건 속에 묻혀버리고 맙니다.
올 한 해, 누구보다도 아픔가슴과 뜨거운 마음으로 여러분은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들의 삶의 이야기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성공한 사람이나 잘 난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무치거나, 늘 그런 사람이라는 인식 속에 무쳐버리고 맙니다.
누구도 우리 삶을 이해하려고 하거나, 안아주려고 하지 않는 아픔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를 대우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로 대우해 주셨고, 하나님의 자녀로 대우하셨고,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저는 바벨론 포로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께서는 나를 버리셨고, 주님께서는 나를 잊으셨다”고 하는 백성들에게 들려주는 이사야의 말씀을 읽는 것으로 오늘 말씀을 마칠까합니다.
“어머니가 어찌 제 젖먹이를 잊겠으며, 제 태어서 낳은 아들을 어찌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비록 어머니가 자식을 잊는다 하여도, 나는 절대로 너를 잊지 않겠다. 보아라, 예루살렘아, 내가 네 이름을 내 손 바닥에 새겼고, 네 성벽을 늘 지켜보고 있다”(사49:15-16절)
“하나님 내 이름 아시죠?” 이렇게 질문하면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손바닥에 이름을 새겨 놓았단다”
오늘 일 년의 마지막달입니다. 한 해 고생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평범한 삶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 삶을 이해하시고, 안아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머리카락’까지도 세고 계시는 분이라고 예수님은 소개하고 계십니다. 오늘 그 사랑 앞에 손을 내 미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토미워커 - 내 이름 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