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없는 믿음도 믿음인가?
갈라디아 상황에서 읽는 '피스티스'의 함의 유승원 교수
I. 들어가는 말 일반적으로 '믿음'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피스티스'에 담겨진 구약-유대적 개념은 '신실'과 '순종'으로서의 실천적 의미였다. 신약에서 그리스도인들을 구원하는 믿음이 설득을 목적으로 하는 수사학적 의미의 '피스티스' 형태로 표면화되었고 이것은 특별히 바울의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이신득의' 또는 '이신칭의'의 논쟁으로 전면에 부각되었다. 바울은 '행위'를 배제한 믿음만으로의 의롭게 됨을 역설하는 것 같이 보인다(갈 2:15-3:22; 롬 3:19-4:25). 그런데 같은 신약성서 내에서 야고보서는 그와 같은 관점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온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대답은 단호하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2:17). 죽은 믿음이란 사실상 믿음이 아니란 말이다. 순종의 실천이 수반된 '신실함'이 없으면 그것은 전혀 '피스티스'가 아니란 말이다. 구약적 의미에서의 '애무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행위와 무관한 '피스티스'를 논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야유를 보낸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1)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2:18-20). 그래서 바울의 편지에 담긴 내용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결론을 발언한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2:24). 이것은 신약성서 내에서 발생하는 '믿음' 개념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논쟁이다. 그리스도인을 구원하는 믿음이 그레코-로마 세계의 수사학적 '피스티스'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일에 대한 인간 마음의 지적 동의인가? 아니면 구약적 '애무나'의 개념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실천에 의해 검증되어 그분과의 지속적 관계 안에 머무는 '신실함'으로서의 '피스티스'가 구원하는 믿음인가?
야고보는 분명하게 후자가 참 믿음이며 이렇게 행위로 뒷받침되는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밝혔다. 바울은 야고보에 대해 어떻게 답변할까? 표면적으로는 그레코-로마 세계의 수사학적 '피스티스'를 구원하는 믿음을 구원의 통로로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바울이다. 그래서 바울은 루터의 선택이 되었고 바울의 이신칭의 교의는 신약내의 정경이 되어 개신교는 이 교의를 잣대 삼아 나머지 신약성서를 그에 맞아떨어지도록 임의로 재단한 바 없지 않다. 역사적으로 개신교의 핵심 교의가 된 이신칭의이지만 신약성서 전체를 놓고 볼 때 이 문제를 의미 있게 다루고 있는 곳은 바울의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뿐이다. 신약성서에서 '믿음'은 거의 보편적으로 널려있는 핵심 개념이다. 그리고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통로로 제시된다.2) 그러나 유대인의 율법과 연관된 개념인 '의'(義)를 획득하는 수단이 '믿음'이라는 이신칭의의 논의, 즉 행위와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믿음의 원리' 자체에 대한 논의는 바울만의 것이고 그나마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제외한 그의 다른 편지들에서는 전혀 또는 거의 이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신칭의를 다루고 있는 두 편지 중에서도 로마서는 다른 여러 가지 논의들 중에 섞여있는 한 부분만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갈라디아서와는 다르다(롬 3:19-4:25). 반면에 갈라디아서는 이신칭의의 주장을 주목적으로 해서 쓰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 문제가 핵심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또한 갈라디아서가 로마서에 앞서 쓰여졌다는 점과 다른 주요 서신들에서는 이 이슈가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갈라디아서를 이 교의의 발원지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II. 계시된 바울의 복음 이렇게 이신칭의의 주장을 핵심으로 하고 있는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복음의 유일성과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기원의 신성함을 유달리 강조하면서 편지를 시작한다. 우선 복음이 한 가지 밖에 없다고 역설한다. 이점에 대해서 그는 완고하고 과격하다. 은혜와 사랑을 말하던 바울이 저주와 맹세를 마다 않으면서까지 복음의 유일성을 선언한다. 하늘의 천사라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하면 '아나쎄마 에스토!'(갈 1:8). 그리고 자신이 전한 복음이 인간의 전승을 통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에 의한 것이라는 점도 강력하게 선언된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2). 그가 다른 사도들을 만나 그들을 통해 이 복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호소하기 위해 맹세까지 덧붙인다. "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갈 1:20). 이 '복음'의 내용이 무엇일까? 만일 여기서 말하는 유일한 복음의 내용이 그가 갈라디아서에서 역설하는 '이신칭의'라면 이 교의가 갖는 절대성의 무게는 더욱 강화된다. 하나님께서 '사람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명제를 하나님께서 직접적 계시를 통해 사도 바울에게 전하셨고 바울은 선교 초기부터 이것을 이방인들에게 전한 것이고 갈라디아서는 그 내용을 다시 상술(詳述)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를 무심코 읽다 보면 바울이 전했다는 그 복음이 바로 '이신칭의'라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실제로 이와 같은 해석은 정밀한 석의에 기초하지 않은 일반 대중에게 널리 퍼져있다.3) 그러나 바울이 계시로 받았다고 하는 복음의 내용은 그렇게 간단하게 '이신칭의'라는 명제에 한정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15:1-3과의 차이 갈라디아서 1:11-12의 주장은 고린도전서 15:1-3의 주장과 표면상 모순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나 석의상 문제가 된다.4)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똑 같이 자신이 전한 '복음'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 복음을 인간을 통해 전수 받았다고 말한다. 양쪽은 비슷한 용어들을 구사하면서 서로 상반되는 주장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아래 본문의 밑줄 친 단어들을 주목하라). 갈라디아서 1:11-12 Gnwri,zw ga.r u`mi/n( avdelfoi,( to. euvagge,lion to. euvaggelisqe.n u`pV evmou/ o[ti ouvk e;stin kata. a;nqrwpon\ ouvde. ga.r evgw. para. avnqrw,pou pare,labon auvto, ou;te evdida, cqhn avlla. diV avpokalu,yewj VIhsou/ Cristou/ 고린도전서 15:1-3a Gnwri,zw de. u`mi/n( avdelfoi,( to. euvagge,lion o] euvhggelisa,mhn u`mi/n ( o] kai. parela,bete( evn w-| kai. e`sth,kate( diV ou- kai. sw,|zesqe( ti,ni lo,gw| euvhggelisa,mhn u`mi/ n eiv kate,cete( evkto.j eiv mh. eivkh/| evpisteu,sate pare,dwka ga.r u`mi/n evn prw,toij( o] kai. pare,labon( 양자는 모두 gnwri,zw u`mi/n(제가 당신들에게 알려드립니다)이라는 어구로 시작한다. '나의 말을 잘 들어서 무엇이 진실인가를 알라'는 어조이다. 또한 양쪽 모두 "나를 통해 전해 받은 복음"(갈라디아서의 표현) 또는 "내가 당신들에게 전한 복음"(고린도전서의 표현)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리고 전승의 전달을 가리키는데 사용되는 특수용어인 paradi,dwmi(전해주다)와 paralamba,nw(전달받다)가 양 구절 모두에 등장한다.5) 고린도전서에서는 바울이 누군가에게 복음을 받았고(pare,labon, 3절) 이어서 고린도교인들이 바울에게서 그 복음을 받은 것으로서(parela,bete, 1절) 인간 전수의 사슬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것은 당연한 전승의 고리로서 문제될 것이 없는 상식적 발언이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의 바울은 인간을 통한 전승을 가리키는 paralamba,nw의 행위가 없었음을 확실하게 밝힌다. (ouvde. ga.r evgw. para. avnqrw,pou pare,labon auvto, "나는 그것을 사람으로부터 받지 않았습니다," 11절). 그렇다면 바울이 신앙의 선배들에게 받아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해주었다는 복음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받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했다는 복음은 서로 다른 것이라고 추정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에 전했다는 복음의 내용은 인용을 암시하는 접속사 o[tij로 이어지는 15:3b-4의 목적절에 담겨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메시지이다.6) 이것은 편지의 앞부분에서 바울이 자신의 첫 방문에서 고린도인들에게 전한 메시지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고전 2:2)이었다고 회상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에서 바울이 전한 복음은 처음부터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된다'는 것이었고 그것이 신앙의 선배의 전승을 통하지 않은 직접적 계시에 의한 것이라는 뜻이 되는가? 우선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계시의 내용이 무엇인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인한 바울의 소명 바울은 1장 12절에서 자신의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pare,labon… diV avpokalu,yewj VIhsou/ Cristou/)이라 말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문법 상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한 것'의 의미일 수도 있고(주격 소유격)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울에게 계시하신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목적격 소유격). 그러나 바울에게 계시의 주체는 언제나 하나님이라는 점과,7) 16절에서 이를 다시 언급할 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자신의 아들을 계시하신 것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후자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바울이 12절에서 언급한 계시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울에게 보여주신 일을 말한다. 물론 이 사건은 바울이 다른 곳에서 언급하는 부활하신 주님과의 대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일에 자신의 사도로서의 권위를 바탕한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고전 9:1). 부활 목격자의 열거에서도 자신을 사도들 중의 지극히 작은 자로 (고전 15:9)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내게도 보이셨느니라"(15:10)는 그리스도의 목격이다. 대략 2세기경의 반(反)바울적 문헌인 슈도-클레멘틴 설교문도 바울이 환상의 경험에 입각하여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하는 야바위라고 비난을 하고 있다.8) 이곳 갈라디아서에서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복음의 권위를 확언하기 위해 예루살렘과의 인간적 전승의 연계를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다(1:17-20). 따라서 본문에서 언급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입은 소명의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다.9) 갈라디아서 1:16절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여 보여주신 이유는 '그를 이방에 전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래서 직접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그는 다른 큰 사도들과 의논하지 않고 곧 바로 (아마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아라비아로 갔었다.10)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신 사건과 더불어 즉시 바울이 전하게 된 복음의 내용은 따로 상술되지 않았다. 만일 그때 그가 계시를 받은 것이 명제로서의 이신칭의라면 바울은 모호하게 혼란을 일으키지 않고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고 그것이 복음의 핵심이었노라고 거침없이 밝혔을 것이다. 그보다 더 갈라디아서를 쓰고 있는 목적에 잘 부합하는 전략이 있을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이신칭의를 계시하셨다고 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바울은 '계시'를 말하면서 그렇게 확정을 짓지 않았다. 그가 전한 것은 어찌 보면 막연하게 "아들"이었다(16절). 즉 바울은 이 계시의 사건 이후 단순하게 '그리스도'를 전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바울은 그 이전까지 복음 전하는 자들을 핍박하고 있었다(1:23). 물론 복음 전하는 사람들과 인간적 원수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연히 그들이 전하는 내용이 바울에게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어 계시하셨을 때 바울이 깨닫게 된 점은, 그가 핍박하던 자들이 주장하던 내용이 옳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제 바울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적극적으로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그가 소명을 입자마자 전하기 시작했던 '그리스도'는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였다. 바울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사설(邪說)을 전하는 사람들로 보아 핍박했던 이유는 율법으로 볼 때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의 개념에 있었다. 메시아는 정치적 승리자이거나 순결과 정통성을 지닌 대제사장이어야 하는 것이 당대에 퍼진 통념이었다.11) 바울이 보기에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존재이지 메시아가 아니었다(갈 3:13, 신 21:23의 인용). 그러나 이러한 고정관념은 그 저주와 수치의 죽음을 겪은 자가 하나님의 계시로 그 앞에 '주'로 나타났을 때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이것은 '십자가에 달린 그 사람'이 바로 '부활하신 주로서의 그리스도(메시아)'라는 것을 확인하는 신학적 회심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12)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바울이 예루살렘 지도자들과 더불어 확인할 필요 없이 바로 이방인들에게 전했던 복음의 내용이었다. 바울이 갈라디아에 들어갔을 때 처음 전했던 내용을 상기하는 곳에서도 그 핵심적인 메시지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였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믿음'의 원리를 거증하기 위해 바울은 그들이 처음에 경험했던 생생한 성령의 역사를 상기시킨다(갈 3:2). 갈라디아 교인들은 성령을 체험하던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들의 체험을 환기시키며 그것을 자신의 주장의 증거로 삼을 수 있었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성령을 받던 그때 갈라디아 교인들이 들어서 믿었던 메시지로서 눈앞에 그대로 생생하게 그릴 수 있는 내용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VIhsou/j Cristo.j… evstaurwme,noj)이었다.13) 상황적 논쟁의 산물로서의 이신칭의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쓸 때 주제로 삼은 '이신칭의'를 초기 선교시에 전하지 않았다. 그것은 갈라디아서 이전에 기록되었고 바울의 최초의 서신이라고 할 수 있는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이 교의에 대한 언급이 일체 없는 데서도 확인된다.14)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들어가서 처음 전한 선교의 메시지에는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경배'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과 부활'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의 심판'이 주 내용으로 들어 있었다(살전 1:9-10). 역시 갈라디아서 이전의 편지인 고린도전서에서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것이 갖는 구속적 의미였다(고전 2:2; 15:1ff). 물론 고린도전서도 이신칭의에 대해 일언반구의 취급을 하지 않는다. 믿음과 의의 문제에 대한 언급이 부분적이나마 등장하는 경우는 모두 갈라디아서와 비슷한 시기 또는 그 이후에 쓰여진 편지들에서이다. 고린도후서를 쓸 때 바울은 모종의 유대주의자들에게 시달림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유대적 기원에 대해 수사학적 열변을 토해낸다.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고후 11:22). 이러한 유대주의자들과의 언쟁이 포함되어 있는 고린도후서에는 우발적이고 막연하기는 하나 '의'에 대한 언급이 단 일회에 걸쳐 이루어진다.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후 3:9). 마찬가지로 갈라디아서 이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빌립보서에서도 할례를 강요하는 가르침을 베풀던 사람들을 "손 할례당"이라 불러 비판하고 있다(빌 3:2).15) 여기서도 바울은 자신의 유대적 근원을 힘주어 강조한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 하니…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 3:4-6). 그리고 이러한 빌립보서에서 역시 우발적이나마 이신칭의에 대한 언급이 발견된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9). 바울의 편지들이 갈라디아서를 전후로 해서 '의'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편지와 부분적이나마 언급이 있는 편지로 갈린다는 사실은 이신칭의 교의가 갈라디아의 상황에서 불거져 나온 특정성을 지닌 논쟁이었음을 암시한다. 이신칭의는 바울이 계시를 통해 받은 복음이 아니었다. 바울이 받았고 깨달았던 복음은 바울 이전의 복음전파자들의 것과 다를 바 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마련해 놓으신 구원의 길이라는 것이었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갈라디아에서도 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했다. 그러나 학자들에 의해 이른바 유대주의자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하면서 문제가 야기되고 이에 대응하여 벌인 바울의 논쟁이 갈라디아서의 '이신칭의'라고 보면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III. 과도기 교회의 신학적 혼란 갈라디아서에서 발생한 상황은 어찌 보면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면서 언젠가는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던 일이었다. 역사적 바울을 논하는데 있어서 사도행전의 기록을 그대로 원용하는 것은 현대의 바울 연구에서 금기로 치부된다. 하지만 초기교회의 정황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는 사도행전이 분명하게 제공해 주고 있다. 사도행전의 기록자는 어떻게 복음이 이스라엘에서 시작하여 이방에게로 넘어갔는가를 역사적으로 규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예수의 제자들은 복음이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예수의 승천을 앞에 두고 있으면서 제자들이 예수에게 한 질문은 '언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실 것인가'였다(행 1:6). 이들은 온전한 12 지파의 복원에 기초한 통일왕국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6) 그래서 그들이 한 첫 번째 일은 다름 아닌 배신자 유다의 자리를 채워 12 지파의 대표성을 확보하는 일이었다(행 1:15-26). 이러한 이스라엘 회복의 기대로 복음을 유대인들에게만 전하던 제자들은 예기치 못한 결과로서 이방인들 가운데서 복음의 메시지가 먹혀 들어갈 뿐 아니라 오히려 더 흥왕하게 되는 것을 목격한다.
이 과정에서 생겨난 이념적 갈등과 그 해지를 변명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이 유대 땅 안에 살던 로마 백부장 고넬료의 사건이다 (행 10:1-11:18). 사도행전 내에서는 고넬료의 사건을 통해서 비로소 복음이 이방인들까지 포함한다는 것을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깨닫는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행 11:18). 이념적 혼돈을 야기한 비유대인 신자들의 회심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들어가면서 복음에 내재하고 있던 긴장이 불거져 나온다. 다름 아닌 율법과 할례의 문제였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이 유대인들의 신분 자체를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예수 자신이 충실한 율법의 준수자였고 한번도 유대인들의 할례를 문제 삼은 적이 없었다. 그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했고 마태의 경우 예수의 입을 통해 그 점을 확언시키기까지 한다(마 15:24).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도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모였고 유대인의 종교의 중심인 성전을 활동의 본거지로 삼았다. 그들이 율법을 포기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비록 바리새인들의 전승과 갈등이 있다거나 안식일의 해석에 대해 이견을 보이는 측면은 없지 않았으나 율법 자체를 부인한 증거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할례와 율법은 유대인의 삶의 문화적 아이덴터티였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후에 율법의 의미와 전면전을 벌이는 바울조차 스스로 유대인들을 얻기 위해 유대인처럼 행동하고 율법을 지키는 자로 사는 것을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고전 9:20). 그러나 이방인의 경우에는 복음을 받은 이후 해결해야만 하는 심각한 문제가 율법과 관계해서 생겨난다. 1세기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 율법의 준수를 요구하지 않았다.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이방인들과는 직접적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물론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요구하지도 않았고 안식일을 지킬 것을 강요하지도 않았다.17)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특권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을 비난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복음을 수용하고 난 뒤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사고의 혼란이 발생한다. 복음은 핵심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그러나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그 복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시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비유대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고 복음을 수용하여 회심자들이 되는 것을 보고 그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을 때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이방의 복음 수용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념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방인 신자들도 이스라엘인가? 분명히 적지 않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통해 이방인이 이스라엘에 편입되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즉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상속자들인 유대인이 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이점은 바울의 로마서에서도 암시되어있다. 이방인들이 복음을 수용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 된 것은 다름 아닌 이스라엘의 일부가 된 것이라는 메타포가 사용된다. 바울은 로마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롬 11:17-18). 이방인 신자들이 이스라엘이라는 원 줄기에 접붙임을 입어서 이스라엘의 일부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런 인식이라면 유대의 율법에 충실하던 그리스도인들이 이제 복음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된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들어온 새 유대인으로 보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귀결의 추론이었다. 이제 하나님의 유대인이 된 이방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정의하는 율법을 준수하고 유대인이 되었음을 상징하는 할례를 받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을 것이다.18) 사도행전의 보고에 따르면 안디옥에서 첫 이방인 교회가 생겨났을 때 바리새파에 속해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던 유대인들이, 믿음을 갖게 된 이방인들은 필수적으로 할례를 받아야 하며 모세의 율법도 지켜야만 한다고 주장을 했다(행 15:5).19) 이러한 해석과 주장은 결국 초기 그리스도인들 전체가 신학적 논쟁에 참여하는 종교회의로까지 발전했고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교회는 묘한 중도적 입장의 해석을 내린다. 성인 남자들에게 있어 고통스럽고 복잡하기 그지없는 할례는 필요하지 않고 복잡한 예전과 정결율을 포함하는 율법도 그대로 다 준수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안식일 준수도 요구하지 않았다. 돈육섭취를 금지시키지도 않았다. 단지 몇 가지 요긴한 유대적 관습과 윤리에 혐오감을 주는 우상의 제물 먹는 일, 피와 목매어 죽인 것을 음식으로 삼는 일, 음행 등을 삼갈 것을 사도들의 권위로 결정했다(행 15:22-29). 사도행전에서는 이에 대한 논의가 일단락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이 이슈는 상당한 기간 동안 초기 교회 내에서 민감한 신학적 논쟁으로 계속되었을 터이고 보수적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사도행전 15장에서 주어진 해석을 수용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 분명하다. 사도행전은 이 과도기의 이슈가 할례와 율법의 필수성에 관한 것이었지 믿음과 행위의 대립 논쟁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갈라디아의 상황은 이러한 초기의 신학적 갈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개척하고 떠난 뒤 그들에게 보수적 유대주의 그리스도인 전도자들이 찾아왔던 것 같다. 바울은 이들을 "다른 복음"을 전하는 "어떤 사람들"(갈 1:7), 또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2:4)라고 불렀다.20) 이들은 이방인인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아야 할 것을 가르쳤다(2:3; 6:12). 바울은 이에 격렬하게 반대한다. 할례를 받는 것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일이다(3:3).
만일 할례를 받으면 구원의 길이었던 그리스도조차 너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게된다(5:2). 바울 자신도 할례 받는 것을 그냥 묵인하면 동료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의를 상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갈 1:10) 핍박을 면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6:12). 그러나 바울은 분명하게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할례 반대' 입장에 서서 그것을 강경하게 고집했고 그 입장에 대한 신학적 논쟁은 오늘의 갈라디아서를 남겼다.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충분하며 그 위에 유대인의 할례와 율법을 더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바울의 입장이며 추가적인 할례와 율법의 불필요성이 바로 '믿음'에 대한 해설이었다. IV. 이신칭의 논쟁의 이면(裏面) 이신칭의는 이렇게 이방인과 율법(할례)의 관계를 정의하는 가운데서 등장한 논쟁의 교의였다. 바울이 '믿음'의 원리를 강조함으로써 반대하는 것은 '행위와 실천' 일반이 아니었다. 복음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넘어가면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할례 의식과 율법 준수의 필요성에 대한 신학적 갈등의 정황에서 주장된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할례와 율법'이 그가 반대한 내용의 핵심이었음을 감안하고 갈라디아서를 읽어야 한다. 바울의 논적(論敵)들 바울의 복음을 통해 이미 신자가 된 갈라디아 교인들을 찾아와 할례와 율법의 필요성을 역설한 사람들의 능변과 성서적 박식은 강한 호소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자신의 사람들을 미혹하여 생각을 바꾸어놓는 저들에 대해 불쾌감과 분노를 숨기지 않는다(1:6-7; 3:1; 4:17-20; 6:11-14). 바울은 저들의 주장이 그릇된 것임을 보이기 위해 이방인의 구원에 있어 율법의 무용성을 밝혀야 했다. 율법 수용이 필요 없는 것이라면 구원에의 충분조건은 무엇일까? 갈라디아 교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었을 때 그것을 들어서 수용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그리스도를 전했을 때 그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마음에 갖는 수용적 자세인 믿음이 필요했다. 전달하는 내용에 대한 마음의 동의와 수용이 없이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믿음이 신령한 지식이며 이것이 성령을 통한 계시로 이루어진다고 믿었다(고전 2:1-16).21) 그러나 갈라디아 상황이 발생하기 전에는 이 '믿음'의 개념이 특별하게 신학적 논쟁의 핵심이 될 이유가 따로 없었다. 그것은 복음 전도의 현장에서 청자들에게 기대되는 당연한 현상이었을 뿐이다. 갈라디아에서 율법의 문제가 이슈가 되면서 율법의 불필요성을 거증해야 했을 때 바울은 논쟁상 율법의 반대 명제로서 '믿음'의 개념을 설정한다. 사실상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율법의 무용성을 논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구원을 위해 충분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본래 바울의 마음속에 세운 대립 명제는 '그리스도 대 율법'이었다(2:16, 21; 3:24; 5:2). 그러나 갈라디아를 찾아서 할례와 율법을 요구하던 보수주의자들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하고(3:7, 29)22) ' 유대인 됨'의 특성인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전도자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바울로서는 율법과 그리스도를 대립 개념으로 설정하는 것이 논쟁의 전술상으로 볼 때 별 의미를 갖지 못했다. 바울의 주장이 '그리스도만'이라면 저들의 주장은 '그리스도+율법(할례)'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수용할 때 요구되는 '믿음'을 율법의 대립 개념으로 설정하게 된다. '믿음'을 뜻하는 헬라 단어 '피스티스'(pi,stij)는 논쟁을 위해 여러 가지로 편리하고 효과적인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냐 율법의 일이냐 전통적으로 많은 오해를 불러온 '믿음' 대 '행위'의 대립은 본래 '그리스도'와 '율법'의 대립이었고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믿음'과 '율법의 행위'의 대립으로 설정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갈라디아서의 '프로포지티오'(propositio)라 할 수 있는 2:16에 대한 올바른 석의가 필요하다.23) 바울은 바로 이 구절에서 의도한 전략상의 대립명제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우선 갈라디아서 2:16의 헬라어 구문과 번역을 비교하여 정확한 뜻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 헬라원문 eivdo,tej [de.] o[ti ouv dikaiou/tai a;nqrwpoj evx e;rgwn no,mou eva.n mh. dia. pi,stewj VIhsou/ Cristou/( kai. h`mei/j eivj Cristo.n VIhsou/n evpisteu,samen( i[na dikaiwqw/men evk pi,stewj Cristou/ kai. ouvk evx e;rgwn no,mou( o[ti evx e;rgwn no,mou ouv dikaiwqh,setai pa/sa sa,rx 개역성경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필자사역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를 통하지 않으면 율법의 일들로 의롭게 되지 못하는 것을 알고있어, 우리는 율법의 일들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로 의롭게 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율법의 일들로는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반복하여 나오는 pi,stij VIhsou/ Cristou는 한글개역성경을 비롯하여 다수의 번역성경들에서와 같이 목적격 소유격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이 될 수도 있고 주격 소유격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faithfulness of Jesus Christ)이 될 수도 있다. 전통적으로 취했던 목적격 소유격으로의 해석은 본 문장이 별 의미 없는 동의어 반복을 계속하게 만드는 어색함이 크다.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바울이 16절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내용은 '율법에 의존하지 않고 예수를 믿어 의롭게 되는 이유' (h`mei/j eivj Cristo.n VIhsou/n evpisteu,samen)이다. 그런데 pi,stij VIhsou/ Cristou를 목적격 소유격으로 취급하면 율법에 의존하지 않고 예수를 믿어서 의롭게 되는 이유가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기 위한 것'이라는 맥없이 이상한 설명이 되고 만다. 독자는 "왜 율법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것으로 의롭게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기대를 하고 있을 때 바울의 답변이 "율법으로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 것으로 의롭게 되기 위해서입니다"가 되어, 그의 답은 답이 아니라 질문 자체를 평서문으로 바꾸어 놓는 이상한 반응이 되고 만다. 그러나 단어의 배열대로 번역하는 것이 되는 주격 소유격의 해석을 취하면 pi,stij VIhsou/ Cristou는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스티스'가 된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 명사 '피스티스'는 지적인 동의를 보여 명제를 수용하는 belief를 가리킬 때 뿐 아니라 주체의 신실함이나 충성을 뜻하는 faithfulness를 뜻할 때도 사용되었다(롬 3:3; 갈 5:22). 이 경우 pi,stij VIhsou/ Cristou는 '예수가 가졌던 신실함' 또는 '예수의 충성됨'을 뜻하는 '예수의 믿음'이 된다.24) 이렇게 읽을 경우 전통적 독해가 갖고 있는 표현상의 논리적 어색함이 사라지고 본문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h`mei/j eivj Cristo.n VIhsou/n evpisteu,samen). 그리고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가 '예수의 믿음'으로 의롭게 되기 때문이다. '율법의 일들'(e;rga no,mou)이25)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신실하심'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다. 십자가 사건과 그리스도의 피스티스 여기서 '예수의 믿음(충성, 신실함)'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소명을 다하여 죽기까지 신실했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 된다.26) 이어지는 2:20과 3:1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복음의 핵심으로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이런 정황의 해석은 더 설득력을 갖는다.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은 '율법의 일들'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신 역사'의 공로 때문이라는 자연스러운 독해이다. 이렇게 해석할 경우 2:19-20의 의미도 더 논리적으로 나타난다.27) 여기서도 한글개역성경의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의 헬라 원문은 evn pi,stei zw/ th/| tou/ ui`ou/ tou/ qeou로서 주격 소유격으로 볼 경우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피스티스' 안에서 사는 것"이 된다.
아들의 '피스티스'(신실하심)는 다름 아닌 '아들'을 수식하는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그 일이다. 나는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살아있는 것은 바로 내 안에서 사시는 '그리스도의 피스티스'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논리이다. 본문을 이렇게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 '내가 가진 믿음' 안에서의 삶으로 설명되는 어색함의 부담을 피할 수 있다. 바울이 인간의 삶의 심리적 작용인 자신의 믿음 안에서 산다는 인본주의적 원리를 표명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여기서도 주격 소유격의 해석을 취할 때,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 다름 아니라 나를 사랑하여 죽기까지 하신 '그리스도의 신실함 안에서 사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동일시된다. 이렇게 볼 때 21절의 결론적인 언급이 앞의 내용들과 더 분명한 연속성을 갖게 된다.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근본적으로 율법이 개입할 때 손상되는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의 원리였다. 그래서,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2:21b).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 즉 그분의 피스티스의 사건이 플래카드처럼 눈앞에 펼쳐져 있지 않은가(3:1)?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다는 것은 유대인들이나 유대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바울과 공유하는 근본 전제이다.28) 이방인들에게 율법이 개입되면 바로 그 근본 원리인 하나님의 은혜의 원칙이 무의미하게 되며 그것을 결국 '그리스도의 피스티스'에서 나온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된 것으로 만드는 논리적 모순을 야기한다는 주장이다.29)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강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5:4).30) 이렇게 바울은 그리스도와 율법의 대립관계를 '그리스도의 피스티스'와 '율법의 일(행위)'의 대립관계를 설정하고 이를 다시 '피스티스'와 '일(행위)'의 대립관계로 요약한다. 주격 소유격의 이슈는 3장 2절과 5절에서 더욱 분명하게 이러한 사고 진행의 열쇠가 된다. 한글개역성경의 "듣고 믿음"(3:2, 5)은 헬라 원문의 구문상 자연스러운 번역이 되지 못한다.
바울은 이제까지 율법과 그리스도를 대조했다. 물론 그것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행위(일)'와 '피스티스'의 대조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1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즉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를 언급한 뒤 바로 이어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었던 성령의 체험을 상기시킨다.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분명히 율법과 상관이 없었다. 그것은 율법이 논란이 되기도 전에 그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일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묻는다. evx e;rgwn no,mou to. pneu/ma evla,bete h' evx avkoh/j pi,stewj. 서로 대조되고 있는 소유격을 그대로 번역하면, "율법의 일들로부터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피스티스'의 들음(또는 메시지)으로부터 성령을 받았습니까?"가 된다. 사실 evx avkoh/j pi,stewj를 갑자기 앞의 e;rgwn no,mou와는 다른 방식으로 "듣고 믿음"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구문상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은 여기서 신자의 믿음을 논하고 있다고 미리 전제했을 때만 억지로 끄집어낼 수 있는 해석이다. 우리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피스티스'와 '하나님의 아들의 피스티스'를 번역하는 논리를 따라서 evx avkoh/j pi,stewj를 구문상 가장 자연스러운 '피스티스의 들음'으로 번역을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즉 여기서 바울이 던지고 있는 질문은 이제까지의 논리와 일관성을 갖는다. "당신들이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일에서 나온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때 나는 당신들에게 율법을 언급하지도 않았으나 당신들은 성령을 받았다. 그렇다면 당신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당신들을 사랑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신실하셨던 사건)의 메시지'를 통해서였다는 것이 자명한 진리 아니겠는가?" 아브라함과 우리의 피스티스 이렇게 '피스티스'의 원리를 주장하면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피스티스'와 '신자들이 갖게 되는 피스티스'를 동일시하기 위해 이제 '아브라함의 피스티스' 논쟁으로 이행한다(3:6-14). 좀더 구체적으로 '피스티스'의 원리를 증거하기 위해 성서의 해석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바울은 같은 단어가 사용된 '예수의 피스티스'와 3장 6절의 '아브라함의 피스티스'를 구분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다. 그리고 여기서 바울의 성서해석은 상당한 정도 바울의 적대자들의 성서 해석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누가 참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는가를 설명하면서(3:7, 29) 아브라함에게 명령되었던 할례와 그 할례를 규정하고 있는 율법의 준수를 요구했을 것이다(창 17:9-14). 그래서 바울은 바로 그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피스티스'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한 것은 그가 믿었을 때이지 할례를 받았을 때가 아니다(3:6). 이 시점에 도달하면서 '그리스도의 피스티스'와 '아브라함의 피스티스'가 함께 통칭의 '피스티스'로 불리기 시작한다. 즉 율법으로 말미암은 자들과 대립되는 위치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oiv e,k pi,stewj, 3:7)이라는 범주가 형성된 것이다. oiv e,k pi,stewj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로 인해서 자신의 피스티스를 갖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양자를 다 포함하고 있다.
즉 이것을 풀어서 쓴다면 '그리스도의 믿음과 자신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사람들'이 된다. 바로 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고 그 약속을 이어받은 "아브라함의 아들"(uivoi, VAbraa,m)들이다(3:7-9). 이를 더 확실하게 뒷받침하기 위해 삶과 관련해서 서로 대립의 위치에 있는 두 성경구절이 인용된다.
하박국 2:4는 의인이 '피스티스'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 했다(갈 3:11). 반면에 레위기 18:5를 통해 볼 때 율법을 행하는 자는 율법 안에서 살도록 되어있다(갈 3:12). 현재 갈라디아의 상황에서 볼 때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자들이 있고 율법 안에서 사는 자들이 있는데 성경은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고 규정했다. 문제는 신명기 27:26에 기록된 바와 같이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로 정의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갈 3:10). 그러니 율법 안에서 사는 자들은 현실적으로 저주 아래 사는 자들이 되며그래서 '율법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율법의 저주"를 받은 자들임에 틀림없다(갈 3:13). 더구나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약속을 430년이나 뒤에 등장한 율법이 무효로 만들 수는 없다(3:16-17). 피스티스는 선행의 대립 개념이 아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범죄로 인해서 주어진 것으로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자손, 곧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잠정적 효력을 갖고 있던 것이었다. 그래서 율법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실현하기 위한 보조적 기능을 수행할 뿐이다 (3:21-22). 율법은 그리스도까지 인도하면 그 역할을 다하는 유치원 선생이다(3:24).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그로 말미암아 약속은 성취되었다. 그것은 율법과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피스티스'의 시대이다.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를 통해 약속이 믿는 자들에게 주어졌다(3:24). 바울은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로 인해 피스티스를 갖는 사람들이 생겨난 사건을 다시 통칭 '피스티스'라 부른다. 지금 온 것은 그리스도인데 그것이 바로 '믿음이 온 것'이나 다를 바 없다(25절). 그리스도가 온 후로 율법 아래 있지 않게 된 것인데 '믿음'이 온 이후로 율법이 필요 없다고 한다(25절).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27절). 이렇듯이 뚜렷하게 부각되는 대비는 율법과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피스티스' 또는 그냥 '피스티스'로 불린다. 그리고 바울은 메시지를 듣고 믿어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사람들이 갖는 마음의 상태인 '피스티스'를 전혀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지 않고 그의 논의 가운데 섞어버려 그리스도의 피스티스와 같은 성격의 것으로 동일시하고 만다. 그런 논의의 과정 가운데 분명한 점 한가지는, 적어도 갈라디아서에서 '피스티스'의 대립 개념이 '실천'이나 '선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은 '피스티스'의 개념을 할례와 율법에 대항하기 위한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의 신실함'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신분에 진입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삶의 양태를 정의하면서 전면에 부각시켰다. 이제까지 살펴본 이신칭의 논쟁의 대립 명제 구도는 이렇게 진행되어 왔다. 그리스도 ↔ 율법 ↓ 그리스도의 피스티스 ↔ 율법의 일(행위) ↓ 신자의 피스티스 ↔ 신자의 율법 의존 실천이 있어야 하나님 나라를 상속한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의 이신칭의 논쟁에서 정의했던 '믿음'이 인간의 선행과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었다는 것은 같은 서신 뒷부분에서 바로 드러난다. 바울은 덕행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개신교의 전통적인 이신칭의 개념에 꼭 어울리지 않는 주장을 바로 갈라디아서 내에서 펼치고 있다. 바울은,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기 위해서 성령을 좇아서 "행(行)"하라고 명한다(5:16). 여기서 '행하라'는 의미의 단어는 peripate,w로서 '걷는다'는 뜻이고 이는 히브리어의 $lh에 상응하는 개념이다. 이것은 삶의 총체적 실천을 가리키는 말이고 여기서 유대교의 율법적 실천을 위한 성서해석을 지칭하는 '할라카'라는 용어가 나왔다.
피스티스의 원리를 강력하게 주장한 바울이 독자들에게 행할 것을 요구한다. 즉 '행위'할 것을 권한다. 물론 '율법으로' 행하라는 것으로 오인하지 않도록 분명하게 '성령으로'(pneu,mati)라는 단서를 달았다. 바울이 생각하는 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사람들은 다름 아니라 '성령으로 행동'(pneu,mati peripatei/te)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성령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게 된다. 성령을 좇아 행동하지 않고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사람들의 말로는 어떻게 되는가?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이렇게 쓰고 있는 바울의 논리를 따르면, 그가 그리스도인의 구원에 행위의 검증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바울은 이때까지 '율법의 일'이 아니라 믿음의 원리를 갖고 살게 되어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권면을 하고 있다. "성령으로 행동하는 실천의 삶을 살아야 한다(5:16a). 성령을 따라 행위하지 않으면 육체의 욕심을 따르게 된다(5:16b-17). 육체의 욕심을 따르는 일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5:21b).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으려면 '성령으로 행동'(pneu,mati peripatei/te)해야 된다." '행위'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바울의 갈라디아서 전반부 논리를 계속 잇자면 피스티스로 의롭게 되는 사람은 성령으로 '행위'하는 사람이며 그렇게 '행위'하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나라가 보장된다. 그리고 피스티스의 원리는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리인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리는 다름 아닌 윤리적 실천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5:24). 더욱 흥미있는 것은 바울이 이처럼 '믿음'에 있는 사람들을 '선행'과 연결시킬 뿐 아니라 율법에 있는 자들을 오히려 '악행'에 연관시킨다는 점이다. 육체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없다는 것을 역설하기 위해 육체의 일들을 열거하기 직전에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언급함으로써 바울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육체의 일들을 행하는 사람들이 되게 만든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5:18).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실천하는 자가 아니라 이어지는 욕심의 행위에 끌려 다니는 사람이다. 그들은 율법 아래 있기 때문에 행위에 실패하고 행위에 실패하기 때문에 멸망에 이르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반면에 피스티스에 있는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의 인도아래 성령을 따라 행위하는 사람들은 그 검증된 행위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다는 논리가 바울의 갈라디아서를 관통하고 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7-9의 결론이 나오게 된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7-9). 갈라디아서의 피스티스는 행위를 배제하지 않는다 갈라디아서의 바울은 행위와 상관없는 믿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바울이 생각하는 '믿음'은 결코 행위를 배제하지도 않으며 행위와 무관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건실한 행위를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할례와 이어지는 유대 율법의 추가를 반대했다. 그와 같이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의 필수성을 반대하는 의미에서 역설된 '구원하는 믿음'은 행위로서 검증되어 행위를 당연시하는, '사랑을 통하여 작용하는 믿음'(pi,stij div avga,phs evnergoumenh)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물론 이렇게 믿음이 '행위' 특히 '선행'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해서 바울이 인간 중심의 공로주의를 주창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이 자신의 행위로서 구원을 따낼 수는 없다. 바울은 그에 대해 감히 상상도 하지 않는다. 구원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다. 즉, 구원이 작용하는 원리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리스도 뿐 아니라 율법도 필요하다는 주장이 바울에게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구원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기 때문이었다(갈 2:21).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를 배신하기 때문이었다(갈 5:4).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로 인해 의롭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은혜의 원리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고(3:13),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를 통한 혜택을 누리게 된다(갈 2:16). 믿음으로, 즉 '피스티스'를 통하여 의롭게 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가 구원받는 인간에게 적용되는 통로가 바로 '피스티스'이다. 피스티스를 갖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구원에 이르고, 영생을 얻으며(6:8),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다(5:21). 그런데 그 피스티스는 사랑을 통하여 제 구실을 하는(갈 5:6), 또는 행위를 통하여 검증되거나 확인된다고 할 수 있는 총체적 신실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똑같은 단어인 '피스티스'가 성령의 열매 중의 하나로 제시되고 이에 대한 한글 개역성경의 번역은 ' 충성', 표준새번역 성경의 번역은 '신실'이 되었다(갈 5:22).
예수의 피스티스가 죽기까지 순종하는 십자가의 신실함이었고 그 신실함이 우리를 구원하듯이, 그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인간의 피스티스도 그와 같은 '신실함'을 함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구원하는 '피스티스'는 지적인 동의와 메시지의 수용,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를 뜻하지만 그 안에 결코 선행을 배제하지 않는 '신실함 속의 실천'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V. 맺는 말 살펴본 바와 같이 루터 이후 개신교가 그리스도교 교의 핵심으로 여기고 있는 이신칭의는 바울이 계시로 받은 복음 그 자체가 아니었고 갈라디아에서 발생한 이방인의 할례와 율법 문제에 대응하면서 형성된 논쟁의 교의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신칭의를 단순한 상황 논쟁으로 치부하고 마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 왜냐하면 초기의 복음이 유대인에게서 할례와 율법이 없는 비유대인에게로 넘어가면서 반드시 겪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의 필연성은 갈라디아의 상황을 이후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핵심 교의가 창조되는 신학적 요람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신칭의 교의가 구성된 상황에서 '믿음'과 대립의 위치에 있었던 것은 할례와 율법이었지 선행을 포함한 행위 일반이 아니었다는 점은 간과해서 안될 중요한 사안이다. 특히 이 교의가 형성되는 논쟁의 현장인 갈라디아서 어디에서도 '피스티스를 통하여 의롭게 된다'는 주장이 신자의 덕행이나 윤리적 실천이라는 차원에서의 '행위'를 배제하는 것이라는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하게 추적되었다. 오히려 '피스티스'를 주장하는 바울이 구원을 위해 올바른 행실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는 발언을 하고 있다는 점도 확인되었다. 갈라디아서에서 '피스티스'는 그레코-로마의 수사학적 의미에서 지적, 정서적 '동의'(同意)와 수용의 뜻을 지니고 있다. 바울은 분명히 이 단어를 수사학적 의미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사용된 이 용어에는 유대-구약적 의미에서의 '신실함'과 '충성'의 뜻이 깊이 잠입해 들어와 있다. 피스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충성과 신실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복음의 메시지를 듣는 선교대상자들의 수용의 마음 상태, 그리고 신자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갈 5:22)이기도 하다. 그래서 바울이 '믿음'을 논하면서 동시에 덕행과 경건의 외양으로서의 바른 행실을 하나님 나라의 조건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바울이 자신의 글 중에 수사학적 의미로서 '피스티스' 또는 '피스튜오'를 사용할 때 그의 이해 속에는 '신실'과 '충성'에 입각한 행실의 외양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신칭의의 논쟁은 행실 없는 믿음을 구원의 수단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야고보서와 바울서신 사이에는 표면적 긴장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신학적으로 크게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 듯 싶다. 바울도 행위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제언에 동의하고 있다.31) 그렇다면 바울이,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교가 구원의 통로로서 인간 쪽에서 가져야 하는 믿음이란 무엇일까? 이런 메타포를 원용해 본다. 그러나 신약의 선교 상황에서 첨가된 수사학적 개념의 '피스티스'가 구약-유대적 의미의 '신뢰'의 관계와 '순종' 및 '신실'을 포함하는 '애무나'를 대체해 버린 것은 아니다. 바울을 비롯하여 초기 복음 선포자들이 의도했던 믿음은 수사학적 상황에서 시작되지만 종국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 속에서 순종하는 실천의 신실함으로 불연속성 없이 일체를 구성하며 이어진다. 굳이 분석을 위해 양자의 구분을 강제한다면 수사학적 믿음은 총체적 의미의 '피스티스'라는 긴 터널의 입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긴 터널의 초입이라고나 할까? 터널 저쪽으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그 터널에 진입해야 하지만 그 터널을 다 빠져나가지 않으면 들어온 의미가 없어진다. 시작하는 수사학적 믿음은 터널의 진입이라 보고 저쪽 출구까지의 나머지 터널은 ' 신실'(faithfulness)로 특징지어지는 믿음의 과정이다. 그렇다고 해서 별도의 두 개 터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진입구와 출입구는 하나로 이어진 연속체이다. 진입하여 그 길을 계속 가다보면 결국 터널을 빠져나가게 된다. 그 터널에 들어가서 통과하는 과정 전체를 신약의 '믿음'으로 설명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