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의 강은 유달리 깊고 맑았습니다. 멀리 상류에는 고대의 도시,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었을지 모르는 도시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워낙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도시의 더러움도 이미 다 정화된 듯 그 중류 쪽의 물은 퍽이나 맑았습니다. 한쪽 강가에는 건물이 많았습니다. 썩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는 건물들이었죠. 다른 쪽 강가는 겨울밀밭이었습니다. 우기에는 물이 7,80센티미터 높아지는 땅이라 흙이 아주 기름졌거든요. 밭 너머는 마을이었고 나무들이 선 뒤로 다시 밭이 이어졌습니다.
지평선까지 평야가 이어져 사방이 확 트인 아름다운 땅이었습니다. 타마린드, 망고 등 그곳의 나무들은 나이가 아주 많았지요. 노을 내린 저녁 시간이면 퍽이나 평화로운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어떤 교회나 사원에서도 찾을 수 없는 축복어린 모습이었습니다.
강변에는 힌두교 탁발승 네 사람이 각자 자시느이 신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목청껏 외치는 이들 주변으로 군중이 모여들었습니다. 가장 소리가 큰 사람이 가장 많은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승려 신분을 표시한 구슬과 각종 장식을 달고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외우는 사람이었지요. 다른 승려들은 슬그머니 자리를 떠났습니다.
인간은 여러 종류의 신, 이념, 희망 등을 통해 시간을 초월하는 무언가를 추구해 왔습니다. 아이의 탄생은 불멸성을 상징하지 못합니다. 삶은 왔다가는 가고 맙니다. 죽음, 고통, 인간이 만드는 손실은 여전히 존재하고 변화와 소멸, 생성이라는 운동은 시간의 순환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시간은 사고입니다. 그리고 사고는 과거의 결과물입니다. 연속성을 가진 것. 즉 결과를 낳는 원인과 다시 원인을 만드는 결과는 시간 흐름의 일부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시간의 덫에 붙잡힌 채 낭만이나 상상이라는 도구를 동원해 영원한 무언가를 만들고자 헛된 노력을 계속합니다. 그리고 불멸성에 대한 욕망이 생겨납니다. 마음의 이미지를 통해 죽음이 없는 상태를 경험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종교는 거짓 현실을 그려 왔습니다. 정직한 사람은 이 점을 알고 있습니다. 거짓이 가져오는 손실에 대해서도 알고 있지요. 공상이나 낭만적 환상이 없는 상태, 시간도 없고 사고나 경험의 결과물도 없는 상태가 존재하기는 합니다. 거기 도달하려면 거짓과 왜곡을 내버려야만 합니다. 아니, 내버린 것들을 누구도 발견하지 못하도록 깊이 파묻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은 당신이 꼭 필요한 도구들을 의도적으로 감추는 것이라 생각하거든요. 이 때문에 모방을 하기도 하고 또 다른 왜곡도 생겨납니다. 이런 것을 거부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이나 강한 의지, 무언가 더 크고 매력적인 대상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거기 숨겨진 덧없음, 위험, 불쾌함과 비속함을 볼 수 있다면 그만입니다. 아주 간단하지요.
마음을 통해 영원이라 불리는 것을 키워낼 수는 없습니다. 마음이 사랑을 키우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또한 마음을 기울여 추구한다 해서 영원을 찾을 수도 없습니다. 이런 것을 추구하는 마음은 낭비되는 마음입니다. 마음은 중심부는 깊지만 가장자리는 얕은 흐름입니다. 마치 중심부에는 물살이 거세지만 강둑 부분은 고요한 강과도 같습니다.
깊은 흐름은 그 뒤에 거대한 기억을 감추고 있습니다. 기억은 마을을 지나가면서 더러워지지만 얼마 지나면 다시 깨끗해집니다. 흐름의 힘과 동기, 공격성과 자기정화력은 바로 기억의 크기에 따라 결정됩니다. 스스로가 과거의 잿가루임을 깨닫는 것도 이 깊은 기억이고 결국 털어버려야 할 것도 이 깊은 기억입니다.
이 기억을 털어버릴 방법, 새로운 상태로 들어가게 하는 별다른 묘안은 없습니다. 그저 모두를 바라봄으로써 끝낼 수 있을 뿐입니다. 이 거대한 기억이 사라질 때에야 새로운 시작이 가능합니다. 말은 현실이 아닙니다. 말로 측정하는 행동은 현실에 대한 부정입니다.
희망탐색 p163~165 (용오름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