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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100. [역경의 열매]
차인홍 (1-16) 두살 때부터 ‘소아마비’ 고통… 암울한 유년기
겨울방학이 짧은 미국 오하이오주 라이트주립대학은 벌써 새 학기가 시작됐다. 2000년 이 대학의 음악과 교수가 된 나는 늘 휠체어에 몸을 싣고 설레는 마음으로 교정에 들어선다. 아무리 추운 날에도 양복 재킷 하나만 걸친 채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교정에 들어서는 이 기분을 만끽한다.
유독 추운 올 겨울 캠퍼스를 거닐면 춥고 배고팠던 어린 시절이 아련히 떠오른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던 그 시설을 돌아보면 지금 휠체어를 밀고 달릴 수 있는 그 자체로 감사하다. 무엇보다 어려움을 이겨내고 한국 장애인 최초의 미국 음대 교수이자 바이올리니스트로 설 수 있도록 힘을 주신 하나님께 그 영광을 돌린다.
나는 인생의 고비마다 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간증하지 않을 수 없다. 주님은 내가 주저앉을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워주셨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연주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다. 하나님은 나를 빚으시고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보잘 것 없는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해 주신 내 인생의 마에스트로다. 아울러 한결같은 기도로 내 곁을 지켜준 아내와 두 아들 차진, 차용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1958년 나는 대전에서 작은 가게를 하는 가정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돌이 지났을 때 의자나 벽을 짚고 일어나 걸음을 떼려고 했지만 자주 중심을 잃고 쓰러지곤 했다고 한다. 또 나의 부모님은 이따금 온몸에 열이 났던 나를 지켜보며 독감이라고 여기셨다.
그때만 해도 가족 모두는 소아마비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두 살 이후로 내 한쪽 다리는 힘을 잃었고 나머지 한쪽도 약간의 힘만 남아 있을 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됐다. 목발을 짚지도 못할 만큼 양쪽 다리를 모두 못 쓰게 됐다.
어두운 시기였다. 어린시절 대부분은 집 안에서만 보냈다. 당연히 휠체어를 타야 했지만 가난한 그 시절에는 휠체어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다. 부모님은 용하다는 한의사를 찾아가 침을 맞게 하셨지만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가족 모두가 나를 치료하는 데 매달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몸은 나아지지 않았고 치료비만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가세는 급격하게 기울었다. 설상가상 아버지까지도 병에 걸려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 머무르시게 됐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가게를 처분하고 하숙집을 운영하셨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쯤 암울한 분위기는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가게를 하던 때보다 살림살이는 더욱 궁핍해졌다. 아버지는 몸져누워 계셨고 어머니는 온종일 청소를 하고 하숙생들의 빨래를 하고 밥을 하느라 늘 피곤해보였다. 그리고 목발도 짚을 힘조차 없어 몸을 질질 끌며 방안에만 있던 아들….
가장 견딜 수 없던 것은 창 너머로 동네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노는 소리가 들려올 때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형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형은 나를 업고 동네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그 정류장은 종점이었다. 버스 맨 앞자리에 앉은 나는 종점에서 종점까지 짧은 여행을 할 수 있었다. 하숙생들의 등에 업혀 산으로 들로 소풍을 갔던 것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그때 본 산야의 푸르름은 지금도 내 가슴속에 잊지 못할 감흥으로 남아 있다.
정리=송세영 기자 sysohng@kmib.co.kr
* [역경의 열매] 차인홍 (1) 두살 때부터 '소아마비' 고통… 암울한 유년기
* [역경의 열매] 차인홍 (2) 초등학교에 입학조차 못하고 이듬해 재활원으로
* [역경의 열매] 차인홍 (3) 칠흑같은 삶 속에서 만난 하나님과 바이올린
* [역경의 열매] 차인홍 (4) 인생을 바꾼 최고의 선물 ‘5000원짜리 바이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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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1958년 대전 출생 △미국 신시내티대 졸업 △미국 뉴욕시립대 석사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립대 박사 △대전시립교향악단 악장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필하모닉 바이올린 수석 △해외유공동포 대통령상 수상 △현 미국 오하이오주 라이트주립대 부교수 겸 대학 오케스트라 지휘자
***[역경의 열매] 차인홍 (2) 초등학교에 입학조차 못하고 이듬해 재활원으로
혼자서 집밖으로 나갈 수 없던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다.
또래 친구들이 다 가는 학교에 가지 못한다는 불안감과 외로움은 이제 와서도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만약 아버지나 어머니 중 한 분이 나를 전적으로 돌봐줄 여유가 있으셨다면 학교에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늘 편찮으셨고 어머니는 생계를 이어가야 했기 때문에 1965년 초등학교 입학나이였던 여덟 살이 된 나는 주로 방안에만 머물렀다.
나는 그 다음해 ‘성세재활원’이라는 장애인 시설에 맡겨졌다.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가야 하는 와중에도 부모님은 “최소한의 교육은 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에 안간힘을 쓰셨다. 그러나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학교에 다닌다’는 설렘보다는 부모님 곁을 떠나야 한다는 두려움이 컸다.
성세재활원은 남대전성결교회 장로이자 의사였던 고(故) 남시균 이사장의 헌신으로 세워졌다. 처음에는 몇몇 어린이를 돌보는 정도였으나 남 이사장께서 나중에 사재를 털어 재활원으로 규모가 커졌다. 120여명의 어린이들이 생활했지만 재정이 넉넉지 않았다. 정부 보조금만으로는 운영비도 제대로 충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재활원에는 나처럼 몸이 불편한 친구들과 고아들이 함께 생활했다. 돌이켜보면 재활원에서의 가난함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지만 교육을 받고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특히 추운 겨울에는 대부분이 동상에 걸린 발을 밤새 긁으며 잠을 설치곤 했다. 40여명이 서로 살을 부비며 추위를 이겨내야 했다. 주로 강냉이 죽이나 국수로 끼니를 때웠기 때문에 한 친구는 영양실조로 쓰러지기까지 했다.
지금도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세워진 재활원에 맡겨졌던 첫날이 생생하다. 깊은 밤 무서움을 달래주는 것은 개구리 울음소리밖에 없었다. 창문으로 스며드는 달빛이 그윽했지만 그럴수록 외로움은 더 커졌다. 눈물을 삼키고 또 삼키며 지새운 날은 손으로 꼽을 수조차 없다. 너무 일찍 겪은 두려움은 혼자 감당할 수 없는 크기였다.
‘아, 나 혼자 남았구나!’
내 유일한 낙은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을 만날 수 있는 방학을 기다리는 것. 방학이 끝나고 재활원으로 돌아가야 할 때면 눈물을 쏟으면서 엄마에게 떼를 썼다. 멀리서 재활원 건물만 보여도 나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어머니는 매번 눈물을 훔치시며 나를 떼어놓고는 무거운 발걸음을 돌리셔야 했다.
시간이 약이었다. 차츰 적응이 됐다. 친구들과 장난을 치고 놀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그리고 한참 지난 뒤에야 무서움에 몸서리쳤던 나를 달래주시는 하나님께서 그 컴컴한 밤에도 함께 계셨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무엇보다 성경에서 그때 나의 상황과 겹쳐지는 대목을 찾아 읽고선 뜨거운 눈물을 삼켰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시편 23편 1∼4절)
괴로운 시절의 기억과 주 안에서 평온했던 다윗의 노래가 어떻게 같은 감정일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가 내 삶에서 가장 어두웠던 어린 시절이었고 그런 절망에 빠진 나를 ‘쉴 만한 물가가 있는 풀밭’으로 이끌어주신 존재가 바로 주님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어린 양이었고 목자이신 하나님이 나를 곁에서 지켜보고 계셨다는 것을.
***[역경의 열매] 차인홍 (3) 칠흑같은 삶 속에서 만난 하나님과 바이올린
처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바이올린과 만난 곳이 성세재활원이다.
지금도 새벽예배 때면 재활원에서 예배드렸던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했던 시절 재활원의 신앙교육은 즐겁기만 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무더운 여름 부흥회에 참석하고 매일 새벽예배를 드리고 성경말씀을 공부하는 것은 마치 어려운 과목을 한 시간 더 수업 받는 느낌이었다. 나중에야 하나님께 기도하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인 줄 알게 됐지만 그때는 단순히 힘든 일로 느껴졌다.
내 인생이 칠흑 같은 어둠에서 환한 빛 가운데로 나오게 된 것은 모두 하나님과의 만남 덕분이었는데도 한동안 그 은혜를 깨닫지 못했었다. 그때는 막연히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 정도로 느꼈지만 재활원에서 내가 겪은 일들은 분명 하나님이 계획하시지 않았다면 이뤄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내가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게 된 것도 그런 일들 중 하나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부끄러워했음에도 이상하게 노래 부를 수 있는 기회는 자주 주어졌다. 처음에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노래를 부르면서도 내가 노래를 부르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힘들었다. 하지만 재활원 선생님과 친구들이 “너 노래 좀 하는데”라고 칭찬을 해줄수록 자신감이 생겼다.
남들 앞에 서는 것 자체가 왠지 어색했던 내가 큰소리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다니…. 특히 재활원 설립자인 고 남시균 이사장께서 칭찬해주셨던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그분은 내 노래에 기뻐하시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내가 진짜 노래에 소질이 있구나’라는 자신감이 생겼을 때쯤 나는 재활원을 대표하는 ‘가수’가 돼 있었다. 재활원에서 합창단원으로 활동했고, 이후 대전의 한 방송국에서 개최한 어린이날 노래자랑에서 1등을 하기도 했다. 또 일본 오이타현 벳푸에 있는 장애인 단체인 ‘태양의 집’에서 성세재활원 합창단을 초청해 일본에서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재활원에서 친구들과 배불리 먹을 궁리만 하던 나는 새로운 문화를 접한 뒤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노래 부르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내 몸에 들어온 음악에 대한 애착이 커졌을 때 내 인생을 바꾸는 사건이 벌어졌다. 내가 바이올린과 처음 만나게 된 것이다.
따뜻한 봄볕이 좋았던 날 나는 재활원 앞마당에서 친구들과 뒹굴며 놀고 있었다. 그때 바이올리니스트 강민자 선생님을 처음 봤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강 선생님은 유성온천에 오셨다가 돌아가던 길에 화창한 봄 날씨를 만끽하기 위해 택시에서 내리셨다고 한다. 그는 온천 인근의 만년교 다리를 산책하듯 건넜다. 둑 옆에 있는 재활원을 우연히 본 뒤 그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셨고 마당에서 서로 몸을 부비며 놀고 있는 우리들과 마주쳤다.
“제가 여기 아이들한테 바이올린을 가르쳐줄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어떤 뜻으로 그분을 재활원에 보내주셨을까. 서울의 유명 대학 출신 바이올리니스트가 시골의 재활학교에서 바이올린 레슨을 해주다니…. 바이올린이 뭔지도 모를 뿐 아니라 가정 형편도 어렵고 몸이 불편한 어린이들이 바이올린을 배운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연주와 강의로 바쁘신 강 선생님이 어떤 대가도 받지 않고 레슨을 해준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재활원의 추억을 떠올리면 강 선생님이 연주하신 그 한 음 한 음이 머릿속에서 그대로 울리곤 한다. 무엇보다 강 선생님의 첫 수업을 잊을 수 없다.
“이렇게 연주하면 소리가 나지? 이 악기를 바이올린이라고 불러요.”
***[역경의 열매] 차인홍 (4) 인생을 바꾼 최고의 선물 ‘5000원짜리 바이올린’
재활원에는 텔레비전, 라디오가 없었고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강민자 선생님의 바이올린 연주는 내가 처음 접한 ‘클래식 라이브 공연’이었다. 초보자용 바이올린으로 동요를 주로 연주하셨지만 나는 한동안 머릿속이 멍할 정도로 감동을 느꼈다. 손끝의 작은 움직임에도 미세하게 떨리는 소리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
“저 가느다란 줄에서 어떻게 저리도 아름다운 소리가 퍼져 나올 수 있을까.”
바이올린을 향한 열정은 타오르기 시작했다.
“엄마, 나 바이올린 배우고 싶어. 다른 애들도 다 배운단 말이야.”
거짓말이었다. 재활원에서 바이올린을 배우는 어린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5000원 정도 했던 초보자용 바이올린을 살 수 있는 형편이 돼야 배울 수 있었다. 재활원 아이들 중에도 비교적 집안 사정이 괜찮은 친구들이었다.
어머니는 반대했다. 어렵게 6남매의 생계를 이어가셨던 어머니로선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이 거절하셨을 것이다. 바이올린 수업을 하는 날이면 나는 교실 밖에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만 있었다. 안에서 학생들이 켜는 바이올린 소리는 소음에 가까웠지만 레슨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바이올린 수업을 귀로만 6개월을 들었다. 부러움은 화로 바뀌었고 결국 폭발했다. 주말에 집에 돌아가면서 ‘오늘은 진짜 엄마한테 확실히 말해야지’라고 결심했다. 평소에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 나로선 큰 용기를 낸 것이었다. 하지만 또 거절당했다. 나는 너무 억울해 떼굴떼굴 뒹굴며 난리를 쳤다. 부모님 가슴이 얼마나 아프셨을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나는 무조건 바이올린을 내 손에 넣어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나 바이올린 안 사주면 재활원에 다시는 안 나가. 제발 좀 사줘요, 엄마.”
집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고개를 돌린 어머니는 한동안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어머니께서 코를 훌쩍하시면서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울어”라고 말씀하셨다.
가슴 아픈 기억이다. 어머니는 두 발로 딛고 일어날 수 없는 막내아들의 부탁을 끝내 거절하지 못하셨다. 어머니가 빨래며 밥이며 온종일 고생해서 받으신 하숙비는 우리 6남매의 생활비였는데…. 그 사정을 헤아릴 턱이 없던 나는 단순히 바이올린을 배울 수 있다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시골의 장애인 시설에 있던 내가 나만의 바이올린을 갖고 연주법을 익힐 수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집안 형편도 모르고 생떼를 쓰는 철없는 막내의 요구를 받아주신 어머니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함이 무의식적으로 자라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계속 일으켜 세워주시고 바이올린이라는 큰 선물을 받도록 도와주신 누군가가 계시는구나.”
바이올린을 갖게 된 뒤 나는 1주일에 한 번 찾아오시는 강 선생님을 애타게 기다렸다. 선생님은 연습곡을 여러 차례 반복하는 것을 숙제로 내셨다. 나는 셀 수 없이 연습했다. 멜로디가 귀에 박히도록 반복해 연습했고 다음에 연습할 부분까지 미리 연습했다.
운지법이 손에 익지 않아 거슬리는 소리가 났지만 나는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악보대도 없이 차가운 마룻바닥에 앉아 두세 시간 연습하는 일이 지겹지 않았다. 연습하지 않는 시간에도 바이올린의 매끈한 몸통을 쓰다듬으면서 마냥 행복해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연습에 매달리다 보니 줄이 끊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갈아 끼울 줄이 없으면 끊어진 줄을 이어 연습을 계속했다.
***[역경의 열매] 차인홍 (5) 첫 콩쿠르 출전… 주님은 재활원 학생에게 1등을
스승인 강민자 선생님의 따뜻한 보살핌이 없었다면 난 중간에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2시간 넘게 앉아서 연습하다 보면 허리가 쑤셔올 때도 있었지만 선생님을 실망시켜 드리기 싫었다.
간혹 “연주인으로서 이름을 날리려고 바이올린에 그렇게 매달린 것 아니냐” “부모님이 연습을 강요하지는 않으셨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나는 좋아서 열심히 하다보니 실력이 늘었고 이후 진로도 물 흐르듯 풀려나갔다고 답한다. 성공이란 게 무엇인지 고민하거나 먼 미래를 계획할 겨를도 없었다. 그리고 내 대답에서 빠지지 않는 말은 하나님께서 늘 나와 함께하셨다는 것. 바이올린 실력이야 부단히 연습하다 보면 일정 수준에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을 뛰어넘는 무언가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 채워진다.
내가 바이올린을 켜면서 설명할 수 없는 즐거움을 느끼게 된 것도 나의 의지에서 비롯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작은 손놀림에도 음의 변화를 보이는 악기가 신기했고, 바이올린은 늘 나와 붙어 다니는 친구와도 같았다. 바이올린과 내가 대화하고 있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강 선생님은 종종 재활원 제자들을 댁으로 불러 처음 보는 반찬이 차려진 식사를 하도록 해주셨다. 선물은커녕 감사하다는 말씀도 못 드린 게 늘 마음에 걸렸던 나는 이후 강 선생님을 찾아뵌 적이 있다. 선생님은 나에게 과분한 칭찬을 해주셨다.
“1주일에 한 번씩이었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아이들을 만날 수 있어 나도 즐거웠어. 그중에서도 차 교수는 눈빛이 달랐지. 저 학생은 진짜 내가 오기를 기다렸구나.”
나를 잘 봐 주신 선생님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나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으셨던 강 선생님은 특히 나의 잘못된 연주 습관이나 운지법을 하나하나 고쳐주셨다. 격려와 칭찬의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기특해라. 숙제도 안 냈는데 벌써 이 부분을 연습했구나.”
바이올린을 시작하고 1년이 지났을 때쯤 실력을 뽐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이 또한 강 선생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었다. “콩쿠르가 있는데 인홍이가 한 번 준비해보지 않겠니.”
충남도가 개최하는 음악콩쿠르에 출전하라는 말씀이었다. 이로 인해 선생님은 항의를 받기도 했다. 자신의 자녀를 왜 내보내지 않느냐며 몇몇 학부모들이 불만을 드러냈다고 한다.
“인홍이보다 더 잘 하는 학생이 있으면 그 학생을 내보냈을 겁니다.”
강 선생님 덕분에 잘 넘어가는 줄 알았는데 콩쿠르를 주최하는 쪽에서 또 반대하고 나섰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주최 측 일부에서 내가 출전하는 것을 마뜩찮게 여겼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장애인이 사람들 앞에 나서는 모습을 좋지 않게 여기는 분들이 적지 않았다.
“연주 실력하고 다리가 불편한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겉모습으로만 판단하지 마시고 일단 연주를 들어보시고 평가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강 선생님이 또 방패가 돼 주셨다. 정말 죽어라 연습했다. 하지만 친구들이 아니라 심사위원과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무대가 두려웠다. 무대에서 비발디 협주곡을 어떻게 연주했는지 기억나지도 않는다. ‘내 차례’라는 진행자의 말, 철제 의자에 앉아 첫 음을 내기 위해 만든 손 모양,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 “잘 했다”며 환하게 웃어주신 선생님의 표정만 사진처럼 머릿속에 남아 있다. 다행히 실수는 하지 않았던 것 같다.
“1등은 성세재활원 차인홍.”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트로피를 건네받고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보다 더 멋진 옷을 입고 값비싼 바이올린을 갖고 무대에 오른 또래 어린이들에게 주눅이 들었었는데….
***[역경의 열매] 차인홍 (6) 중학교 3학년 끝나갈 무렵 일본에서 초청장이
충남도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여러 연주회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어렵게 빌린 연주복을 입고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아 무대에 올랐지만 실수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음악적 자양분이 된 모차르트를 접하게 해준 사람은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온 미국인 젠 영 선생님이었다. 이 여자 선생님은 재활원에서 영어를 가르쳐주었을 뿐 아니라 바깥 구경에 목말랐던 우리에게 미군부대를 구경시켜 주기도 했다. 선생님이 미국으로 돌아가던 날 친구들과 함께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런데 이 선생님이 몇 개월 후 다시 재활원을 찾아왔다. “나를 간절히 기다리는 아이들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었다”고 했다. 선물도 잊지 않으셨다. 큰 전축과 여러 장의 클래식 음반들.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설이 없던 재활원에 선생님이 가져다준 선물은 감동 그 자체였다. 당시 전축은 부잣집에서만 구경할 수 있는 고가품 중의 고가품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재활원에 남아있던 나는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우울한 마음을 달랬다. 초등학교 6학년 과정을 마친 재활원 어린이들은 중학교로 진학해야 했지만 나를 포함해 많은 학생들은 그럴 형편이 못됐다. 재활원 선생님들은 나를 비롯해 비슷한 상황에 놓인 학생들을 위해 계속 재활원에 머무르며 중학교 과정을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
오후 1시 수업이 끝나면 나는 빈 교실에서 전축을 틀었다.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3번이나 5번 음반을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눈을 감았다. 모차르트를 들으면 내 두 발로 내달릴 수 없는 바닷가와 책에서 언뜻 본 듯한 외국의 금빛 들판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셀 수 없이 들어 곡의 구성을 다 외울 정도였다.
중학교 3학년 과정이 끝날 때쯤 일본에서 초청장이 날아왔다. 초등학교 때 우리 합창단을 초대했던 일본의 장애인 단체인 ‘태양의 집’에서 보낸 것. 이번에는 5명에게 1년간 연수 기회를 준다고 했다. 태양의 집은 장애인들에게 기술을 가르쳐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었다.
선발 기준은 일본어 실력이었다. 단체생활의 엄격함에 지쳐 있던 나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또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적지 않았고 앞날이 막막하기만 했던 그 시절 뭔가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설렘이 있었다.
나와 몇몇 학생들은 일본어를 잘 하는 재활원 선생님께 일본어를 배웠고 일본 기술연수생 5명에 뽑혀 일본 벳푸 시에 있는 태양의 집에 들어갔다.
바이올린 연주자에게 1년의 공백은 크다. 하루만 연습을 걸러도 손끝의 감각이 무뎌지기 때문이다. 미래의 내 직업이 연주자나 지휘자라고 미리 알았다면 일본행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었다. 주님께서 나에게 낯선 경험을 해보라고 일본 땅으로 보내주셨다.
1974년 12월 추운 겨울 일본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계단밖에 보지 못했던 나는 그 큰 건물을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가 그렇게 신기할 수 없었다. 또 숙소에 도착해 흰 쌀밥과 고깃국, 바나나 귤 같은 음식을 맛볼 수 있어 행복했다.
입소한 뒤 ‘직장생활’이 시작됐다. 아침 8시부터 저녁 5시까지 일했다. 목공소나 인쇄소 일을 돕는 역할을 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처음으로 월급을 받고 일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 잠을 설친 적도 많았지만 어려서부터 재활원 생활을 했기 때문에 적응할 수 있었다. 내성적이던 내 성격도 조금씩 변화했다.
***[역경의 열매] 차인홍 (7) 선물받은 휠체어로 아태장애인대회서 금·은·동
일본 장애인 단체인 태양의 집 사람들이 나에게 선물로 휠체어를 내주었다. 목발을 짚고 다니던 때보다 훨씬 자유로워진 나는 운동을 시작했다.
재활원에 있을 때도 쓰레기통에다 공을 던져 넣는 운동(?)을 자주 했었다. 흙바닥에서 뒹굴면서 고무공을 패스하는 놀이도 기억에 남는다. 휠체어가 몸에 익은 뒤 공을 가지고 하는 운동을 자주 하면서 한국에 있는 재활원 친구들이 자주 떠올랐다. ‘이곳에서 다 같이 운동을 하면 좋을 텐데….’
일본에서 나는 일이 끝나면 곧장 체육관으로 달려갔다. 밤 11시까지 농구 탁구 등 휠체어를 타고 할 수 있는 운동은 모두 해봤다. 팀을 이뤄 호흡을 맞춰 득점을 하는 농구가 특히 매력적이었다. 흠뻑 땀을 낸 뒤 샤워를 하면서 느껴지는 즐거움도 컸다.
휴일에도 나는 혼자 체육관에 갔다. 운동에 재미를 느끼면서 몸에 근육도 생긴 것 같았다. 휠체어를 밀고 다니는 게 전보다 수월해졌다. 체육관에서 내가 농구를 하는 모습을 본 일본 체육계 관계자는 내게 대회에 나가라고 권유하기까지 했다.
“일본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 장애인 대회가 열리는데 한국 대표로 출전해보지 않을래요.”
당시 한국에는 장애인스포츠협회가 없어서 우리나라 장애인들이 공식대회에 출전하는 전례가 거의 없었다. 일본인 체육 전문가들이 나를 도왔다. 그들은 한국 대사관을 통해 우리 정부의 허락을 대신 받아줬고 출전에 필요한 운동화와 체육복을 구하는 데 도움을 줬다. 태양의 집에서는 “대회 준비를 열심히 하라”면서 오전에만 근무하고 남은 시간을 체육관에서 보내도록 배려했다. 그렇다고 월급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또 일본인 전문 트레이너를 붙여줬다. 나는 1층에서 7층까지 경사로가 설치된 건물을 오르면서 속도를 체크했다. 내려올 때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있는 힘껏 휠체어를 밀고 올라갔다.
트레이너들은 기록을 보더니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한참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며칠 뒤 이들은 나를 체력측정기기가 마련된 스포츠센터로 데려갔다. 측정을 마친 뒤 이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7층 건물을 반복해서 오르는 데 기록이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센터에서 측정해본 결과도 정말 체력이 좋은 걸로 나왔습니다. 특히 폐활량이 웬만한 운동선수만큼 뛰어납니다.”
자신감이 생겨 더욱 열심히 훈련에 참여했다. 3개월간 휠체어에 타이어를 매달고 달리는 운동 등을 쉬지 않고 했다. 훈련이 끝나면 팔에 힘이 빠지고 허리는 쑤셨지만 목표를 세운 만큼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기술연수생으로 밟게 된 일본 땅에서 체육인으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나는 1975년 일본 오이타에서 열린 제1회 아태장애인 경기대회에 한국 대표로 출전해 휠체어 장애물 경기, 800m 달리기, 소프트볼 던지기 부문에서 각각 금 은 동메달을 수상했다.
바이올린밖에 모르던 내가 일본에서 기술을 배우고 몸을 단련할 수 있는 기회까지 얻어 메달을 목에 건 것. 분명 나 혼자의 힘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해주시고 휠체어를 선물 받게 해주셨다. 하나님께선 나를 그렇게 사랑해주셨다.
일본에서 1년을 보낸 나는 전보다 밝은 모습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몇몇 친구들에게만 말을 건네던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문제는 더 어려워진 현실이었다. 바이올린 스승인 강민자 선생님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고 나는 더 이상 재활원에 머무를 수 없었다.
***[역경의 열매] 차인홍 (8) 고교 진학 좌절… 재활원 출신 장애인 4중주단 구성
대전 집으로 돌아온 나는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중학교 졸업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교육기관도 찾기 어려웠다. 일본에서 목공이나 인쇄 일을 배웠지만 일자리를 얻지 못했다. 바이올린을 배울 형편도 안 돼 집에서 의미 없이 시간을 보냈다.
내 미래를 놓고 가족들이 여러 아이디어를 내놨지만 뾰족한 수는 없었다. “도장 파는 기술이 어떨까”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나는 할 수 있는 게 많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무엇보다 바이올린을 다시 배우고 싶었다.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딴 만큼 운동을 더 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방황하던 때 강민자 선생님의 대학 후배인 고영일 선생님이 찾아오셨다. 강 선생님을 통해 알고 지내던 분이었다. 고 선생님은 당시 대전의 한 음대에서 강의를 하고 계셨다. 선생님은 다소 들뜬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다른 생각은 이제 접고 음악에만 전념하는 게 어떨까. 내가 도울 테니 현악 4중주단을 만들어보자.”
재활원 출신 학생들로 구성된 현악 4중주단을 키우시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고 선생님은 4명에게 연주법을 코치해주셨고 소년원 등지에서의 연주회 일정도 잡아주셨다. 평소에 늘 인자한 웃음을 지으시는 선생님은 연습할 때는 표정이 달라지셨다. 또 엄청난 시간이 드는 숙제를 내주셨다.
성경에서 ‘축복의 연못’으로 기록된 베데스다의 이름을 딴 ‘베데스다 4중주단’. 다시 바이올린을 연습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데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1976년 결성된 베데스다 4중주단은 대전 용두동에 작은 집을 얻어 합숙을 했다. 우리는 값싼 악기로 연습했지만 열정은 그 어느 유명한 4중주단보다 뜨거웠다.
나는 합숙소 인근의 교회에 다녔다. 여성 목회자인 김신옥 목사님은 우리에게 쌀과 김치, 밑반찬을 보내주셨다. 우리는 찬송가 연주를 하면서 믿음을 키웠다. 여전히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사회 전반에 남아 있던 시절 목사님은 큰 사랑과 관심을 보내주셨다. 우리는 헌금을 하지도 못했고 찬송가를 연주하는 일밖에 돕지 못했는데도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 늘 감사한 마음이었다.
교회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주일을 제외하고 하루 10시간 이상 연습에 매달렸다. 열악한 환경에서 실력을 갈고 닦았다. 4명은 연탄광, 부엌, 마당, 방에서 각각 개인 연습을 한 뒤 합주를 하는 방식으로 연습했다. 제1바이올린을 맡은 나는 주로 연탄광을 이용했다. 여름에는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에 짬짬이 부채질을 해가며 연습했고 겨울에는 언 손을 녹이느라 고생을 했다. 음대생들이 가끔 우리가 연습하는 모습을 보러 오기도 했다. ‘안쓰럽다’는 감정이 전해져 때로 비참한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우리 네 사람이 만들어내는 앙상블은 그 어느 4중주단보다 훌륭한 화음을 만들어낸다고 자부했다.
베데스다 4중주단은 오래 가지 못했다. 어떤 이유로 그렇게 됐는지 여기서 자세히 밝히기는 어렵다. 기약 없이 3년여간 연습에만 몰두하는 일에 모두 지쳐 있었다고만 말하고 싶다. 그런데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해체된 지 얼마 안 돼 사회복지단체인 한국소아마비협회 정립회관 쪽에서 연락이 왔다. 우리에게 연습할 공간과 숙소를 마련해주고 음악 공부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는 제안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
***[역경의 열매] 차인홍 (9) ‘행실 바른 부잣집 딸’ 나와의 결혼 위해 가출
베데스다 4중주단은 한국소아마비협회 정립회관의 도움으로 서울에 있는 회관 기숙사를 이용했다. 또 세종문화회관에서 연주회를 열었고 여러 교수님들로부터 레슨을 받았다.
특히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인 김남윤 교수님께서 레슨을 해주신 일이 기억에 남는다. 현재 한국종합예술학교 교수로 계신 그는 훌륭한 제자들을 길러내는 분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어렵게 그분께 레슨을 받고 싶다는 말씀을 전했고, 나에게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특별한 기회가 주어졌다.
연습량을 중시하는 호랑이 선생님으로 알려진 김 교수님 앞에서 실수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연습했다. 교수님은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려고 애쓰셨다. 레슨비를 받지도 않으셨다. 무엇보다 가난하고 학력도 변변치 않은 나에게 교수님의 지도를 받을 기회를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내가 검정고시를 준비하면서 어려움을 겪을 때 하나님께선 또 귀중한 분을 보내주셨다. 중학교 과정은 1년 만에 끝냈지만 고교 과정의 영어 과목이 너무 어려워 진도를 나갈 수 없던 때였다. 교회에서 알고 지내던 김태경 선생님이 헌신적으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중도 포기했을지 모른다.
그는 밤마다 숙소로 오셔서 영어를 가르쳐주셨을 뿐 아니라 마치 베데스다 4중주단의 매니저처럼 우리를 챙겨주셨다. 가장 고마운 일은 우리에게 유학의 길을 열어주신 것. 김 선생님과 친분이 있던 서울대 신동옥 교수님을 통해 유학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됐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신 교수님은 미국 신시내티대에서 공부하던 시절 알게 된 현악 4중주단 ‘라살(La Salle)’에 우리를 소개해준다고 하셨다. 라살은 신시내티대 음악교수로 구성돼 있는 세계적인 4중주단이었다.
김 선생님은 우리의 연주를 녹음한 테이프를 신시내티대로 보냈고 우리 4중주단을 소개하는 영문 편지를 써주셨다. 우리가 막 고교 검정고시를 패스했을 때 설마 했던 일이 현실화됐다. 신시내티대는 우리의 입학을 허락했고 학비까지 면제해준다고 알려왔다. 미국에서의 생활비도 해결됐다. 신 교수님은 친분이 깊은 아산재단 장정자 이사님을 통해 유학비를 지원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
김 선생님은 미국에서도 2년간 자신의 공부를 잠시 미루고 의사소통이 어려웠던 우리를 뒷바라지해 주셨다. 이후 그는 한국에서 결혼한 뒤 미국으로 다시 오셔서 신학 공부를 시작하셨다. 우리를 보면서 진로를 바꾸었다고 말씀하셨다. “어려운 상황인 데도 음악에 몰두해 있는 너희들을 보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어.” 김 선생님은 현재 샌프란시스코의 한 교회에서 사역하고 계신다.
미국 유학길에 오르기 전 나는 지금의 아내인 조성은과 사랑을 키워가고 있었다. 아내는 나를 지도해주신 고영일 선생님에게 비올라 레슨을 받았었다. 내가 대전에서 합숙하던 시절 아내를 처음 봤다. ‘행실이 바른 부잣집 딸’이라고만 알고 있었지 그 이상의 감정은 없었다. 아내가 경희대 음대로 진학한 뒤 한동안 볼 수 있는 기회도 없었다.
베데스다 4중주단이 서울에서 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아내와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아내의 감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친구가 나에게 귀띔을 해줬다. “성은이가 오빠를 좋게 생각하는데 잘 모르시는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 용기를 내 데이트 신청을 했다.
우리 둘은 사랑이 깊어졌지만 아내의 집안에서 반대가 심했다. 나는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매일 아내를 그리워했다. 그러다 아내가 일을 저질렀다. 몰래 주변에서 돈을 빌려 비행기를 타고 나를 찾아온 것. 소심한 성은이가 가출을 하다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행복했다.
***[역경의 열매] 차인홍 (10) 유학길 오르기 바로 전날 ‘비밀 약혼식’ 올려
나에게 이토록 아름답고 지혜로운 아내를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사실 나는 이성에 관심이 막 생기던 때조차 애써 이를 외면하려고 했다. 바이올린을 연습하면서 외로움을 달랬을 뿐 나에게 연애란 참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여겼다.
연탄광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바이올린 연습에만 몰두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내가 사랑의 감정을 품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됐다. 간혹 나와 사소한 말다툼을 할 때 아내는 예전 일을 떠올리며 농담처럼 말한다. “나한테 데이트 신청했던 대학생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요. 그때 차 한 번 안 마시고 오빠만 기다렸는데, 그러지 말 걸 그랬나.”
아내와의 데이트는 순조롭지 않았다. 성공적인 데이트는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택시를 잡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휠체어를 탄 나를 보고 지나치는 택시들이 많았다. 한번은 내가 택시 문을 연 채로 잡고 있었는데 택시기사가 다른 손님 앞으로 차를 모는 바람에 사고를 당할 뻔한 적도 있다.
둘의 감정이 예사롭지 않게 됐을 때 정립회관 관장님과 이사님 부부께서 우리를 조용히 부르셨다. 두 분은 소아마비협회 관장과 이사를 각각 맡고 계셨다. 미국 유학 준비가 거의 마무리됐을 때였다.
“인홍이가 미국으로 곧 떠나는데 둘은 어떻게 할 거야?”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고 아내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무책임한 답변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나와의 교제를 달갑게 여기지 않으실 아내의 부모님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에게 멋지게 프러포즈도 하고 남자답게 밀어붙이고 싶었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우리의 마음을 잘 아시던 이사님은 “떠나기 전에 약혼식을 하는 게 어떨까. 준비는 우리가 해줄 테니”라고 하셨다.
유학길에 오르기 바로 전날 ‘비밀 약혼식’을 올렸다. 약혼식에는 친구들과 가족 200여명이 모였지만 아내 쪽 가족은 처남 한 명뿐이었다. 여전히 아내의 집에서는 나와의 교제가 비밀이었다. 아내는 약혼식 내내 눈물을 펑펑 쏟았다.
유학생활 2년이 지났을 때쯤 나는 용기를 냈다. 일본에서 공연 일정을 마친 뒤 한국에 들러 장인 장모님께 결혼 허락을 받을 계획이었다. 처가에서는 뒤늦게 처남을 통해 우리의 약혼 소식을 알고 계신 터였다. 그러나 나는 두 분을 찾아뵙지도 못했다. 몰래 약혼식을 올렸다는 사실에 두 분은 노발대발하셨고 나는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식을 올리기 전까지 미국에서 따님과 함께 지내려고 합니다”라는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장인 장모님이 마음을 돌리신 결정적인 사건은 아내의 가출이었다. 두 분은 학교와 집밖에 모르던 소심한 아내가 나를 보기 위해 미국으로 혼자 떠났다는 사실에 적잖이 충격을 받으신 듯했다. 끊임없는 설득 끝에 결국 장인 장모님은 우리의 결혼을 축복해주시기로 했다.
우리는 기숙사 원룸에 신혼살림을 차린 뒤 1984년 12월 15일 미국 신시내티한인장로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지금까지 중요한 순간마다 간절한 기도로 부족하기만 한 나를 붙잡아준 아내 조성은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유학기간 동안 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던 것도 아내의 도움이 컸다.
신시내티대에서 공부를 시작하면서 나는 베데스다 4중주단의 가능성을 알아봐주신 ‘라살 4중주단’의 교수님들을 먼저 만나보고 싶었다. 명성이 높은 분들의 연주를 직접 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손꼽아 기다렸다. 실제 라살 4중주단의 제1바이올리니스트인 월터 레빈 교수님의 첫 강의는 충격이었다.
***[역경의 열매] 차인홍 (11) “30분 길이 악보 외워라” 숙제… 한달간 밤샘 연습
나는 미국 유학 이전에 이미 오랜 기간 바이올린을 연주했기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라살 4중주단의 연주는 듣고만 있어도 레슨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배울 점이 많았다. 곡의 분위기와 감정을 살려내는 연주법과 연주자들 간의 하모니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을 정도였다.
특히 라살의 제1바이올리니스트인 월터 레빈 교수님의 수업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첫 시간에 그는 한 마디의 연주법을 갖고 1시간을 강의했다. 하이든의 현악 4중주곡 ‘황제’의 한 악장을 설명하는 것도 아니고 한 마디를 어떻게 연주하느냐를 놓고 1시간을 쓰신 것이다. 감정을 담은 음정을 정확히 소리 내는 방법과 활의 위치를 세밀하게 배울 수 있었다.
레빈 교수님은 우리에게 어려운 숙제를 내주시기도 했다. 황제의 전 악장을 외워서 연주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것. 이 말씀을 들은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얼굴만 쳐다봤다. 30여분 길이의 곡을 악보를 보지 않고 완벽하게 연주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대전의 허름한 집에서 합숙하던 때를 떠올리며 “그래, 한번 해보자”고 뜻을 모았다. 주어진 시간은 한 달. 밤잠을 줄여가며 연습을 했다.
드디어 숙제를 검사받는 날 레빈 교수님은 직접 악보를 치운 뒤 시작하라는 사인을 보내셨다. 꼴깍 침 넘기는 소리만 들렸고, 목이 뻣뻣해질 정도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연주가 끝나자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레빈 교수님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곧바로 연주실로 가자”고 해 베데스다 4중주단의 연주를 녹음해주셨다.
아마 레빈 교수님은 음악을 향한 우리의 열정을 한번 확인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이후 우리가 얼마나 음악을 사랑하고 연주에 미쳐 있는지를 아셨는지 레빈 교수님은 우리에게 국제 음악캠프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등 여러 차례 선물을 주셨다.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음악 공부를 더 깊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바이올린을 연습하고 음악이론을 공부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드는 일이다. 하지만 신세계와도 같았던 새 연주법을 배우고 음악적 시야를 넓히는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나는 신시내티대를 졸업하고 뉴욕 브루클린대에서 석사 과정을 밟았다. 뉴욕의 생활비가 만만치 않았지만 장학금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대학원에서 한참 공부한 뒤에야 이곳으로 나를 보내신 것도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천사 같은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음대 학장이자 대학 오케스트라 지휘자였던 도로시 클로츠만. 독일 태생의 이 교수님은 나에게 각별한 애정을 갖고 계셨다. 재활원 시절의 강민자 선생님처럼 따뜻한 배려를 해주셨다. 워낙 호랑이 선생님으로 알려진 분이라 다가가기 쉽지 않은 분이었는데도 내게는 관대하셨다. 또 큰 연주회가 잡히면 자주 나를 솔리스트로 세워주셨다. 나는 어머니 한 분을 더 얻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학장실을 드나드는 게 부담스럽지 않을 무렵 클로츠만 학장님은 지휘 수업을 새로 만드셨다고 말씀하셨다. 정식 수업은 아니었고 교수님이 지휘자 후배를 키우기 위해 개설한 강의였다. 나는 관심이 많은 분야인 데다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학장님의 강의를 듣고 싶어 참여했다. 어린 시절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황제’를 들으면서 막연히 ‘나중에 내가 지휘를 할 수 있을까’란 상상을 하곤 했다.
그런데 이 수업은 두 학기 만에 폐강됐다.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그의 기대에 크게 못 미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역경의 열매] 차인홍 (12) 박사시험 탈락… 교수들 항의에 개교 이래 첫 재시험
지휘 수업은 끝났지만 도로시 클로츠만 학장님은 나를 1대 1로 지도해주셨다. 은퇴를 눈앞에 둔 노 교수님은 지휘자로서의 자세와 세밀한 테크닉을 열정적으로 가르쳐주셨다. 주고받는 문화에 익숙한 미국에서 아무 대가 없이 한 학생에게 레슨을 해준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학장님의 따뜻한 배려로 음악 실력은 크게 좋아졌지만 생활비가 큰 문제였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집 구하는 것이 문제였다. 큰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뉴욕의 월세방을 알아보고 다녔는데 우리 형편으로 구할 수 있는 곳이 드물었다. 어렵게 찾아낸 지하 월세방은 눅눅했고 내려가는 통로도 계단으로 돼 있어 출입이 여간 고생스러운 게 아니었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나는 아내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알고 지내던 분이 중고차를 주셔서 한동안 요긴하게 사용했지만 눈이 쏟아진 어느 겨울 다리 위에서 차가 멈춰 폐차했다.
부잣집 장녀로 자라서 험한 일을 겪어보지 않은 아내에게 미안했다. 아내는 만삭인 상태로 흑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의 가발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또 좁은 방 안에서 성능도 좋지 않은 재봉틀로 밤새도록 봉제 일을 했다. 저녁 땐 내가 봉제 일을 도왔지만 아기를 돌보면서 재봉틀질까지 하는 아내를 보면서 속으로 수도 없이 눈물을 흘렸다. 지금도 우리는 종종 당시를 떠올린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어느 때보다 서로 의지하고 깊이 사랑했기 때문이다.
석사 과정을 무사히 마친 나는 박사 학위에 도전했으나 불행히도 실기 시험에서 낙방했다. 무난히 패스할 것이라는 말씀을 주변에서 자주 들었고 열심히 준비했는데도 떨어졌다.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진로를 놓고 이런저런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교수님들이 낙방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셨다. 한 교수님은 “차인홍씨가 실기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지 못한 것은 채점과정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라고 흥분하셨다. 뒷말이 많아졌고 급기야 몇몇 교수님들이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해 교수회의가 열렸다.
회의 결과는 심사위원들이 공평하게 참여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고 결론이 났다. 내가 시험을 보던 날 각 캠퍼스의 음대 교수들이 심사에 참여했는데 내가 다니던 브루클린칼리지 교수님들만 공연 일정 등으로 한 명도 참여하지 못하셨다. 내 편에 서 주신 교수님들은 “다른 캠퍼스 교수들만 채점위원으로 참여한 시험에서 낙방한 만큼 공정한 상황에서 재시험을 치르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클로츠만 학장님은 이의제기를 받아들여 박사과정 실기시험을 다시 보도록 하셨다. 이전보다 더 열심히 시험 준비를 했고 각 캠퍼스 교수들이 빠짐없이 모인 자리에서 나는 합격했다. 재시험 사건은 개교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합격 소식을 들은 클로츠만 학장님은 크게 웃으셨고 그 자리에서 나에게 장학금 추천서를 써주셨다. 학비를 지원해주는 게 아니라 3000달러를 현금으로 받을 수 있는 추천서였다.
유독 내 주변에는 클로츠만 학장님을 비롯해 도움을 주신 분들이 많은 것 같다. 물론 하나님께서 내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주셨기 때문이다. 한때 조건 없이 나를 돕는 분들을 보면서 장애인이라서 동정을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곧 그런 생각을 고쳐먹었다.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밤을 새우며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런 선의의 도움들이 앞으로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역경의 열매] 차인홍 (13) 꿈에 그리던 고향 대전시향 악장으로 ‘금의歸國
나는 박사과정의 전공을 지휘 분야로 택했다. 지휘자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고 도로시 클로츠만 학장님께 지휘를 배우면서 큰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연주 일정도 많아졌다. 미국 뉴욕의 카네기홀, 시카고, 인디애나폴리스, 마이애미, 일본 등지에서 100여 차례 실내악 및 협주에 참여했다. 아스펜 국제음악제, 안톤 베베른 탄생 100주년 기념음악제,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인 이츠하크 펄먼의 마스터 클래스에서 연주했다.
박사과정 공부와 연주 활동을 병행하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럴수록 마음 한구석에선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다. 마침 한국에서 친구가 연락을 해왔다. 한 대학에서 음악과 교수 채용 공고가 떴으니 지원해 보라는 것. “자주 나는 기회가 아니니까 한번 원서라도 넣어봐. 너 정도면 되지 않겠어.”
지원서류를 제출하고 내심 기대됐다. 유학생활이 길어지면서 나와 아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고 살림은 쪼들렸기 때문이다. 얼마 뒤 지원했던 대학의 학과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번 식사자리를 하자는 제안을 받고 기대는 더욱 커졌다.
한국에 들러 학과장을 만났다. 한동안 나를 응시한 뒤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강의실은 2층인데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좀 힘드실 거 같은데요. 휠체어에 앉으셔서 칠판을 이용하기도 버거우실 것 같습니다. 쉽지 않을 거 같은데….”
나는 얼굴이 빨개졌고 모멸감마저 느꼈다. 너무 화가 나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장애인은 채용 안 하신다는 말씀이군요.” 차라리 이런 얘기를 듣지 않고 탈락했다면 실력이 모자란 탓으로 돌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장애인을 차별하는 분위기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전시립교향악단의 지휘자로 계시던 고(故) 정두영 선생님께서 특별한 제안을 해주셨다. “차 선생님, 한국으로 오셔서 우리 교향악단의 악장을 맡아주실 수 없으신가요. 차 선생님만큼 실력을 갖춘 분을 찾기 어렵습니다. 꼭 모시고 싶습니다.”
정 선생님은 친분이 있는 다른 사람들을 제치고 나를 추천해 주셨다. 무엇보다 여전히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만만치 않은 곳에서 실력으로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감사했다. 나는 주저 없이 박사과정을 미루고 한국에 들어왔다.
한국에서 일과는 정신없이 지나갔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교향악단의 연습을 했고 목요일마다 대전 극동방송에서 클래식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인 ‘명곡산책’을 진행했다. 저녁에는 내 연습실에서 학생들에게 레슨을 해줬다. 또 1주일에 한 번 침례신학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여러 일을 하면서 내 평생 처음으로 경제적 여유가 생겼다. 한국에 올 때 갖고 들어온 돈은 30만원뿐이었다. 집을 마련하고 중고차를 사기 위해 대출을 했는데 어느 새 저금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대전에 온 지 6년 만에 빚도 다 갚고 집을 마련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정 선생님께서 대전시향에서 사임하신 뒤 몇몇 단원 간에 불화가 생겼다. 이를 원만하게 해결하려던 나는 되레 오해를 사게 됐고 악장 자리를 내놓으라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나를 밀어내려던 단원들은 내 단짝 친구를 고발하기도 했다. 사업을 하는 데 필요하다고 해서 내 명의를 빌려주었던 친구가 관세법을 어긴 실수를 찾아낸 것이다. 친구와 나는 법정에까지 서게 됐다.
당시 나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며 서명운동에 나선 고마운 분들이 기억에 남는다. 3∼4명의 단원을 제외한 대전시향 단원 전체와 교인 수백명이 서명해 주셨다. 모두 내 부족함 탓에 벌어진 일인 만큼 미련 없이 악장 자리를 내놨다.
***[역경의 열매] 차인홍 (14) 다시 미국길… 익명의 천사 “매월 1000달러 돕겠다”
악장에서 물러난 뒤 억울함에 밤잠을 설친 적도 있지만 나는 마음을 추스르고 유학을 떠날 결심을 했다. 1996년 12월 31일 장학금과 생활비를 일부 지원해 준다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지금까지 이룬 것이 모두 물거품이 된 것 같은 허망함을 느끼기도 했다. 또 유학 준비를 하고 나니 수중에 돈이 남지 않았다. 두 아이를 키우는 30대 후반의 가장이 살림도 빠듯한데 유학길에 오른다는 것은 모험에 가깝다. 보장된 미래도, 마땅한 생계 수단도 없이 상아탑에 갇혀 엄청난 양의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무모한 유학길에 나선 이유는 대전에서 ‘아마빌레 실내악단’을 5년간 이끌며 지휘했던 경험이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한번 맛보면 헤어날 수 없다는 지휘의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 데다 부족한 실력을 채우고 싶은 욕심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를 들더라도 완전한 설명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해 주셨다는 말이 정확하다.
가난으로 고생할 가족들이 걱정됐다. 빨리 박사과정을 마쳐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97년 여름 생활고는 깊어졌고 나는 여기저기 일자리를 알아봤다. 한 지방의 교향악단에서 제2바이올린 수석주자를 모집한다는 신문 광고를 보고 지원했다. 오디션을 보러 갔는데 지원자가 5명밖에 없었다. 당시 그 자리는 이미 상임지휘자와 친분 있는 사람으로 잠정 결정된 상황에서 구색맞추기식 오디션을 열었다는 말을 나중에야 들었다.
그런데 내가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합격했다. 당시 영국에 있던 상임지휘자도 녹음된 내 연주를 듣고는 오디션 결과를 인정했다. 생활비를 보태며 연주 실력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 아울러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컬럼비아에 있는 한인교회에서 성가대 지휘를 맡으며 기도를 쉬지 않았다.
보통 4년 만에 마치는 박사과정을 나는 2년반 만에 끝낼 수 있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내 능력 이상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앞길은 막막했다. 더 이상 학생 신분이 아니었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처음 미국 유학에 나설 수 있도록 도와주신 김태경 목사님을 찾아가 고민을 털어놨다. 로스앤젤레스에 계시던 목사님의 배려로 나와 아내는 작은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자와 반주자로 사역하면서 매일 새벽기도를 했다.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학생비자를 연장할 수 있는 기간은 1년. 이 기간에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울 때쯤 익명의 천사를 만났다. 한 교인이 매달 1000달러씩 우리 가족을 위해 헌금하겠다고 나섰다. 이분의 도움으로 나는 숨통이 트이게 됐다. 고마운 마음에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채용공고만을 뒤지던 어느 날 교수 채용 정보를 알려주는 인터넷 신문의 메일 한 통이 눈에 확 들어왔다. 오하이오주 라이트주립대학교에서 바이올린 지도교수를 뽑는다는 공고였다. ‘바이올린 전공자, 현악 4중주 경험자, 지휘를 할 수 있는 자’라는 지원 자격은 꽤 이례적이었다. 한 분야의 전문가를 뽑는 게 아니라 세 분야, 그것도 내가 공부한 세 분야를 경험한 사람을 뽑는 것이었다.
완벽한 영어 문장으로 자기소개서를 쓰지 않으면 제대로 읽지도 않고 떨어뜨린다는 말이 기억났다.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까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스스로 적어냈다. 이미 다른 대학에서 강의하는 교수들을 포함해 쟁쟁한 경쟁자들 사이에서 내가 채용될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차인홍 (15) 83대1 경쟁 뚫고 라이트주립대 교수에 최종합격
미국 오하이오주 라이트주립대학교의 교수 채용 경쟁률은 83대 1이었다. 보통 수백대 1까지 기록하는 다른 대학의 경쟁률보다는 낮은 편이었다. 세 분야를 모두 공부한 교수들이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보다 유리한 조건의 경쟁자들은 많았다.
1차 시험에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은 뒤 교수채용위원회 위원장과의 전화 인터뷰로 진행된 2차 시험에도 합격했다. 머리가 뻣뻣해질 정도의 긴장감으로 나는 다음 시험을 준비하며 간절하게 기도했다. 3차 시험은 ‘심층 전화 면접’이었다. 심사위원들이 한자리에 모인 자리에서 나에게 전화를 해 인터뷰하는 방식이다. 심사위원들은 내 말을 스피커로 동시에 듣고 여러 질문을 했다. 나는 30분간 진행된 영어 인터뷰에서 내 실력 이상을 발휘했다. 이해하지 못하는 질문도 없었고 의외의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또박또박 답했다. 분명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을 것이다.
나는 최종 후보 3명 안에 들었고 3박4일간 대학에서 진행된 최종시험을 치르게 됐다. 주어진 과제는 독주회, 오케스트라 리허설, 학생들을 상대로 한 개인 레슨 등이었다. 또 총장, 학장을 비롯한 교수들, 학생과 함께 모임을 갖고 내 됨됨이를 평가받는 시간도 있었다. 시험이 끝난 뒤 녹초가 됐다. 이제 기도하는 시간만 남았다.
“축하합니다. 우리 대학의 교수로 최종 결정됐음을 알려드립니다.”
목이 메었다. 원서 접수부터 최종 발표까지 7개월이 걸렸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바이올린을 배운 뒤 일본에서 기술을 배우느라 음악과 멀어졌던 시절, 대전의 연탄광에서 연습에만 몰두했던 날들, 낯선 미국 땅에서 눈물을 흘리며 고생했던 시간들…. ‘하나님께선 나에게 이처럼 큰 열매를 맺어주시기 위해 그토록 힘든 시간을 주셨구나.’
교수가 된 뒤 대학에서 처음으로 연 독주회에는 관객들이 몰려들어 예정 시간보다 30분이나 지나서야 연주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 유럽 아시아 등 세계 연주회 일정도 많아졌고, 미국 전역의 교회에서 간증뿐 아니라 연주회를 해 달라는 요청이 이어졌다. 또 베데스다 4중주단과 다시 만나 장애인을 위한 연주회도 열었다. 나를 불러주는 곳이라면 크든 작든 연주회 규모에 연연하지 않고 응했다.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있는 재능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인 만큼 이를 나누는 일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이 덕분에 나는 음악과 교수들 중에서 음악활동 실적이 가장 높았다. 대학 재학생과 일반인들로 구성된 대학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았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교향악단의 객원 지휘자로도 활동했다. 미국의 한 대형교회에서 간증과 연주회 초청이 있었는데 이 실황이 전파를 타면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대학 측에서도 학교의 이미지를 개선했다면서 나의 외부 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조교수로 부임한 지 7년째 되던 해에 나는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라이트주립대의 종신교수에 임명됐다.
지휘자로서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은 쉽지 않았다. 부담스런 자리다. 단원들뿐 아니라 수많은 관객들의 시선이 지휘자에게 꽂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다른 지휘자와 달리 휠체어에 앉아서 단원들의 소리 하나 하나를 조화롭게 이끌어야 한다. 특히 대학 오케스트라에 애착이 간다. 여기에는 교수이자 첼로 연주자도 있었고 일반인들 대다수도 음악 전공자들이었다. 되도록 쉬운 곡보다는 어려운 곡을 택해 연습했다. 단원들의 실력을 믿었을 뿐 아니라 도전 속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부족한 지휘자인 나를 10여년간 전적으로 믿고 따라준 단원들에게 감사했다.
***[역경의 열매] 차인홍 (16·끝) ‘휠체어 지휘자’로 우뚝… 이 모두 하나님의 영광
방바닥에서 뒹굴며 암울한 시간을 보내던 내가 휠체어를 날개처럼 달고 미국으로 건너가 교수가 됐고 많은 사람 앞에서 지휘하고 강의를 한다. 이 모든 영광을 나는 하나님께 돌린다. 앞으로 나누는 삶을 살아가겠다고 다짐하고 기도하는 이유는 이런 주님의 은총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선 뜻하지 않은 순간 나누고 봉사하는 삶으로 나를 이끌어주셨다. 결정적인 계기는 한 통의 이메일이었다. 이 편지는 나의 삶을 담은 ‘아름다운 남자 아름다운 성공’이라는 책을 본 독자가 보낸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의사라고 소개했다. “베이징에서 의료선교를 하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교수님이 계셨던 재활원과 아주 비슷한 어려움에 놓인 재활원을 현지에서 봤습니다. 교수님께서 그곳에 한 번 가셔서 불편한 몸과 가난 때문에 꿈을 잃을지도 모를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나눠주신다면 좋겠습니다.”
나는 주저 없이 꼭 가보겠다고 답장했다. “모든 경비는 교수님이 부담하셔야 합니다”란 답을 받고 잠시 멈칫했다. 교수가 된 뒤 이전보다 훨씬 안정적인 삶을 살았지만 나는 여전히 집세에다 아이들 교육비까지 걱정해야 하는 평범한 가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컴컴했던 어린시절 한줄기 빛이 돼 주신 고마운 분들이 떠올라 방문 계획을 미루지 않았다.
현지에서 40여명의 장애아동들을 만난 뒤 울컥했다. 쏟아지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그곳은 내가 머물던 성세재활원과 정말 비슷한 환경이었다. 특히 재활원 한 구석에서 바이올린을 연습하는 한 어린이를 보고 감회가 새로웠다. 그곳에서 나는 연주회를 열었고 어린이들에게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나눠줬다. 어린이들이 나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재활원 시절 나는 그토록 달콤한 군것질거리들을 마음껏 먹고 싶었다.
이후 더욱 열정적으로 나누는 삶을 살기 위해 간절하게 기도했다. 방학을 앞두고 선교지에서의 봉사활동, 장애인을 위한 음악회 일정 등을 잡았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유럽 등지의 교회에서 내게 과분한 축복을 주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언하는 스케줄도 틈틈이 소화했다. 가장 보람된 일은 “우연히 교회를 들렀다가 교수님의 간증과 연주를 듣고 예수님을 믿기로 했다”는 말을 듣는 것이다.
장애인들을 위한 장학재단을 만드는 일도 우연한 기회에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장애가 있는 가난한 학생인데 공부를 하고 싶다”는 이메일을 종종 받고 가슴 한구석이 찡했지만 어떻게 도울지 막막하던 때 우편물 하나를 받았다. 보내는 사람은 ‘찰리 할머니’라고만 씌어 있었고 주소는 적혀 있지 않았다. 그 안에는 체크카드 두 장이 들어 있었다. 편지의 내용은 “큰돈은 아니지만 어려운 학생을 위해 써주시기 바랍니다”였다. 편지를 받고 난 뒤 장학금을 마련하는 일을 조만간 구체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전에는 부자들만 장학재단을 만들 수 있다고 여겼는데 작은 도움의 손길을 모으면 가능한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외국의 선교지에 세워진 한 음악학교에 갔을 때도 작은 도움으로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절감했다. 이 학교의 장애인 학생 한 명을 돕는 데 한 달에 50달러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재활원의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내가 꿈을 키웠고 여러 천사 같은 분들의 따뜻한 도움으로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던 놀라운 일들…. 내 비전은 더 많은 장애아동들이 나처럼 하나님을 바라보며 꿈을 펼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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