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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로마서15장14~21절
제목 : 제대로 된 일꾼의 정석
바울은 선교계획을 말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주신 선교적 사명이 무엇인지 이야기합니다.
이방인을 위한 일꾼(제사장)으로 세움 받은 바울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편만하게 전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자신의 직임을 이야기하며,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어떻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는지 하나님의 일하심만을 자랑합니다.
1. 복음의 제사장 바울(14~16절)
1) 로마 교회 교인들의 신앙에 대한 신뢰(14절)
“[1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내 형제들아 -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좀 더 부드럽고 다정한 호칭을 사용하여 친밀감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 용어는 본서에서 자주 쓰는 표현으로 (1:13;7:1;8:12;10:1; 16:17) 로마 교인을 향한 애정 어린 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 당시 로마의 성도들에게 약간의 불화와 갈등은 있었지만(14장) 전체적으로 볼 때 로마 교회는 신앙의 성숙한 면모가 가득했습니다.
'가득하고'(메스토이)는 충분히 가득찼다는 말로서 1:29에서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 찼다는 말을 했을 때도 사용된 단어입니다.
'선함'의 헬라어는 '아가도쉬네스'로 여기서는 선천적 기질로서의 '선함, 착함'이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해 삶 속에서 드러나는 '새사람의 인격의 덕성 및 도덕적인 성숙함'을 의미합니다.
'모든 지식'(파세스 그노세오스)은 로마의 성도들이 더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로서(J. Murray) 저희에게 필요한 구원의 지식이 다 있어서 안전하고 확실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Lenski).
더 나아가 고전 8:1,7,10,11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그노시스'라는 단어는 구원에 관한 지식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통찰과 이해를 나타내므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오해했지만 로마의 성도들은 바울이 지금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과 계획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고후 2:14;4:6;10:5;빌 3:8, Dunn).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 로마의 성도들이 갖춘 성숙한 신앙의 또 다른 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서로'(알렐루스)는 약한 자들과 강한 자들 즉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너희가 이렇게 서로 권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선한 마음과 충분한 지식이 있어서 너희 믿음과 생활에 필요한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아직 방문하지 않은 로마 교회는 목회자들이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항상 피차 권면하여 진리에서 이탈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살전 5:11).
*살전5: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나도 확신하노라. - 헬라어 성경에는 재귀 대명사 '아우토스'가 삽입되어
'나 자신도 확신하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 다른 사람의 객관적인 증거와 평가를 떠나서 바울 자신의 깊은 확신을 강조하는 표현이다(Meyer, Dunn).
(2) 어떤 객관적인 자료에 근거해서 확증하고 확신한다는 표현이다(E.F. Harrison). 우리는 여기서 위의 두 견해가 다 작용한 가운데서 바울이 로마 교회에 대한 확신을 선언했다고 보아도 크게 잘못 됨은 없겠으나 두 번 째 견해가 좀더 자연스런 해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확신하노라'( 페페이스마이)가 수동 완료형이므로 자신의 추측에서라기 보다는 로마 교회의 사정을 잘 알 수 있는 어떤 근거에 의해서 확신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선언이 믿을 만한 증거에 바탕을 둔 확신이 아니라면 이것은 마음에 없는 칭찬을 감추기 위한 과장된 말에 불과한 것입니다.
2) 이방인을 위해 부름 받은 바울의 사도적 정체성(15~16절)
(1)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권면한다고 밝힙니다(15절)
“[15]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에파나밈네스콘)는 잘 쓰지 않은 용어로 신약성경에서 본절에만 나옵니다.
그 뜻은 '어떤 교리를 반복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그들이 알지 못한 어떤 새로운 것을 가르친다는 뜻이 아니고 이미 알고 있는 복음의 진리를 회상시킨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바울은 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라고 했을까 ?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① 복음의 원리와 명령을 안다고 하면서도 그들의 행함에 부족함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더 굳건히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성숙한 신앙적 면모를 갖춘 로마 교회였지만 온전함에 이른 것이 아니었기에 바울은 다시 한 번 진리를 일깨워 주어 로마 교회를 튼튼하게 세우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② 이미 그들이 잘 알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수신자들의 신앙의 질을 존중해 주는 예의 바른 태도이다(Dunn).
③ 또한 여기서 가르친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구태여 '생각나게 하려고'란 용어를 쓴 것은 바울의 신앙 인격의 겸손한 표현법입니다.
이는 형제를 권면할 때에 상대의 인격을 존중해 주는 모범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 로마의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바울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특별한 의미와 감회를 주는 주신 은혜' (텐 카린 텐 도데이산 모이 휘포 투 데우)는 세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① 그리스도 안에서 만세 전에 택정함을 입은 것을 말합니다(엡1:3-6).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일반적인 주권으로 선택함을 받은 것을 바울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라고 노래했습니다.
②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해 구원함을 받은 것을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고 강조했습니다(엡 2:5, 8).
지난 날 무지 가운데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하고 믿는 자를 멸절(滅絶)시키려 했던 악한 자신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친히 만나 주심으로 자기를 불러 회개시키고 구원해 주신 그 사건을 그는 평생 감격하며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고 찬송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대적했던 자신이 구원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라고 그의 서신 곳곳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3:24;딛 2:11-14;히 2:9).
③ 사도적인 직분과 사역에 관련된 고백으로서 바울은 자기의 사도 직분을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고 말합니다(행 9:15;고전 15:9-11;엡 3:7-9;딤전 1:12, 13).
교회와 믿는 자를 핍박하여 주님을 대적했던 죄인 중에 괴수인 자신을 불러 구원해 주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이방인의 사도'로 삼아주신 것이야말로 은혜 중의 은혜라고 간증하는 것입니다(롬1:1,5;갈1:1, 15;2:9).
이중 본문에서 말하는 은혜는 문맥상 세 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합니다.
즉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예수께서 부르시고 세우신 사도적인 직분과 사역을 뜻합니다(Murray, Dunn).
더욱 담대히(톨메로테론) - 이 말은 비교적인 의미가 내포된 부사로서 바울 사도의 다른 서신보다도 본서를 '더욱 담대한 마음으로' 썼음을 나타냅니다(12:3;14장).
바울은 자신이 로마 교회를 세우지 않았고 또한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은혜로 택정하시고 이방인의 사도라는 막중한 사명을 맡겨 주심을 생각할 때 그들을 권면할 자격을 찾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담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대략(아포 메루스) - 이는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① '부분적으로', 혹은 '어떤 곳에는'이라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Meyer).
② '다소', 또는 '어느 정도'라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Murray, Godet).
여기서 우리는 두 번째 해석을 취한다 해도 크게 틀렸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첫 번째 견해를 취함이 좀 더 적절한 해석이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더욱 담대히'란 말은 (1)번의 해석과 연결시킬 때 비교적인 의미가 선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즉, '어느 곳에서는 내가 더 대담하게 썼다'고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어느 곳에서'(부분적으로)란 6:12, 19;8:9;12:3;13:3, 13, 14;14:3, 4, 10, 13, 15, 20 등을 들 수 있습니다(Meyer).
위와 같은 구절들에서 바울은 더욱 담대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썼노니(에그랖사) - 이 말은 '과거에 ~했다'는 단순 과거형 동사로서 바울 사도가 이제까지 로마서를 쓴 사실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본서 저자가 사도 바울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증거를 보게 됩니다.
(2) 바울은 그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은혜를 본절에서 구체적으로 약술하고 있습니다(16절).
“[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 바울은 대제사장의 명을 받아 기독교도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중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이방인을 위한 복음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습니다(행 9:15;26:14-19).
즉 사도직의 은혜가 이방인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숭고한 사역의 성취를 위해 바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Godet).
그 후에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온 생애를 전략하였습니다.
'일꾼'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이투르곤'은 '레이토스'('백성')와 '에르곤'('일')이 합성된 단어로 공직자 곧, 공적인 관리를 뜻합니다(Godet).
종종 '군대의 종이나 왕의 신하'나 '성소에 부리는 자'(히 8:2)에 대해서도 사용됩니다.
그러나 특히 신약에서는 하나님에 의하여 임명된 일꾼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임명받은 일꾼을 말합니다(Meyer).
바울은 이 단어를 그리스도의 일꾼된 자신에게도 사용하지만 또한 바울 자신의 일꾼된 에바브로 디도에 대해서도(빌 2:25)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바울에게 맡기신 사도직은 범세계적인 직무로서 복음 전파의 직무는 물론 제사장적 성격을 띤 직무였습니다.
즉 바울의 사명은 이방 세계를 하나님이 받으심 직한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일과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히에루르군타)란 단어가 명백히 보여준다. 신약에서 본절에서만 사용된 '히에루르군타'란 단어는 '히에로스'('거룩한')와 '에르고'('일')의 합성동사 '히에루르고스'에서 파생한 동사로서 '거룩한 사명을 수행하다', '제사장으로 봉사하다'의 뜻을 가집니다.
이러한 사명을 받은 바울의 역할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제사장 직무를 맡은 바울의 역할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인격은 물론 모든 청중, 곧 이방인의 인격을 하나님께 바치는 구원의 메신저(messenger)로서의 봉헌(奉獻) 행위였습니다.
② 모든 교회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본서는 물론(1:8-10) 모든 바울 서신의 첫머리에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③ 구체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행위를 포함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란 표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의 사도직은 제사장적 직무를 수행하는 기능이 있었습니다(Godet).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 이것은 신약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비유적 표현으로서 아마도 사66:20로부터 발전된 개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Murray).
바울은 여기서 '이방인'(톤 에드논)과 '제물'(헤프로스포라)을 동격으로 취급하여 복음에 의하여 얻어진 이방인을 사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즉 영적인 희생 제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Godet, Meyer).
'제물'이란 제사 의식에서 마지막으로 바쳐지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심 직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 비유적인 표현에서 우리는 복음 전파자의 사역의 목표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에게 단순히 복음을 전파할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순종하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심 직한 제물이 되도록 그들의 영혼을 성결하게 해야 한다는 사명인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사도직의 기능을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함으로 묘사했고, 사역의 대상인 이방인을 구약의 제사에서 제사장이 드리는 제물로 비유하여 나타낸 것입니다(Calvin).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 당시 복음을 통해 회개한 이방인 신자들이 할례를 받지 않았다고 하여 불결하다고 주장하는 유대인 신자들이 있었기에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 바울은 이방인 신자들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고 깨끗게되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하게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Blaiklock).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의 헬라어 '헤기아스메네 엔 프뉴마티 하기오'는 완료형 수동태 분사 구문을 취하고 있어, 성화(聖化)가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로 칭의와 최종적인 구원 사이에서 이루어져 가는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한 성령께서 신자를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상태로 창조해 가시는 주체임을 보게 됩니다(Harrison).
거룩한 삶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8:2, 4).
2. 복음의 전파자 바울(17~19절)
1) 바울은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한다’고 말합니다(17절).
“[17]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러므로(운) - 앞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사도직과 이방인을 위한 임무를 말한 바울은 이제 그 사역의 구체적인 결과를 진술하기 위해 15절과 16절의 내용을 받는 접속사를 쓴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엔 크리스토 예수) - 이 어구는 바울의 애용구로서 바울 신학의 기본어(key word)입니다.
본문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란 말은 그리스도를 통하여(through Chirst Jesus)란 말로서 '자랑한다'는 용어가 시사 할 수 있는 지나친 자기
자랑적인 태도를 부드럽게 유화시켜 줍니다(Godet).
(2) 바울의 자랑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는 것으로 자랑의 근거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즉 그의 자랑은 자기 자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높이는 것임을 말합니다(Meyer).
(3) 사도가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란 말을 첨부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랑이 아니고는 모든 자랑이 제거되어야 할 것임을 나타낸 말입니다(고전 1:29, 30;고후 10:17, J. Murray).
위의 세 견해는 유사한 것으로서 본문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란 어구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덧붙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헬라어 원문에 나타난 강조점의 문제입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란 어구는 '자랑하는 것'(카우케신)이란 말을 직접 수식하고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부사구로서 '내가 가졌다'는 '에코'라는 동사를 수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란 말은 위의 세 가지 해석을 취하면서도 자랑 그 자체를 강조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바울이 자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의 근거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한층 강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은 사도의 모든 사역의 근거요 내용과 목표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타 프로스톤 데온) -이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하나님께 관한 것'입니다(Godet).
(2) 일종의 부사적 대격으로서 '하나님께 대하여'라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Dunn).
두 가지 해석을 다 취할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은 어떤 특정한 것을 가리킨다기보다는 하나님께의 섬김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에 관련된 것에 있어서만 자랑한다는 자랑의 범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용어는 예배 직무를 수행하는 유대인의 예배 의식적 표현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전문 술어로서(히 2:17;5:1) 앞절(16절)의 '제사장 직무'(히에루르게인)와 '일군'(헤기아스메네)과 일맥 상통합니다(Godet).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 여기서 자랑의 구체적 내용은 16절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방인들이 복음을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유달리 자랑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도구로서의 축복을 받은 사실입니다(고전 15:31;고후 1:12-14;7:4, 14;8:24).
이것을 바울은 자기의 면류관이요 기쁨이라고 했습니다(살전 2:19).
2) 바울은 그 일을 자신이 해낸 것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통하여 역사하신 것’이라고 이해합니다(18절).
“[18]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한글 개역 성경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헬라어 원문이나 영역본에는 이유를 나타내고 접속사 '왜냐하면'(가르)이 본절 초두에 삽입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절은 17절에서 주장한 것, 즉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한 것에 대한 이유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 이것은 16절의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으로서 좀 더 쉽게 직역하면 '이방인 편에서 순종이 생기게 하기 위하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순종하도록 이끄는 것이야말로 바울의 소원이었으며, 또한 그의 부르심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것을 다시 상기시킴으로 로마의 성도들에게 자신의 사역에 대한 열매를 확실하게 가르치면서 이런 성과가 어떻게 무엇으로 성취되었으며 그 성격은 어떤 것인지를 규명하고 있습니다(J. Calvin).
나를 통하여 (디 에무) - 이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행한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을 통한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을 강조한 것입닙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이방인을 순종하게 하기 위해 자기가 수고한 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자기 자신은 주님이 쓰시는 복음 전도의 도구요 하나의 통로였음을 명백히 밝히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J. Murray).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바울 사도를 통해 쓰신 도구, 즉 방편과 원리가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3) 그리스도께서 바울의 말과 행동을 통해, 표적과 기사의 능력을 통해, 성령의 능력을 통해 일하셨습니다(19절).
“[19]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 바울은 세 차례에 걸쳐서 소아시아와 지중해 북부 지역을 두루 다니며 전도 여행을 하였습니다(행 13-21장),
그가 복음 전도를 시작한 것은 다메섹과 아라비아 지방에서부터였으며(행 9:19, 20), 본격적으로 이방인의 사도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것은 안디옥에서였습니다(행 11:25, 26;13:1-3).
그런데 어째서 그의 전도 사역의 출발점을 예루살렘으로 말했는가?
여기에 대해서 혹자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전도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던 것을 염두에 두고 말하였다고 합니다(F.F. Bruce).
또한 혹자는 복음 전도의 출발점과 중심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에 그곳을 언급했다고 합니다(Lenski).
후자가 좀 더 타당한 의견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행 1:8에서처럼 복음은 예루살렘으로 시작해서 땅 끝까지 전파될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루리곤'(Illyricum)은 아드리아 해의 동쪽 연안, 마게도냐에 근접해 있는 로마의 속령으로 오늘날의 유고슬라비아 영토에 해당합니다.
공식 명칭은 일루리아(Illyria)로 바울은 3차 전도 여행 중 고린도에 체류하는 동안 일루리곤 지역을 방문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행 20:1, 2).
아무튼 사도는 여러 해에 걸친 자신의 사역의 결과를 언급하는데서 자기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나 회심자의 수효, 또는 이러한 사역에 뒤따른 고난 등에 관한 설명을 생략하고 단지 자기가 수고한 경로를 표시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을 인용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Harrison).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 이것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 이르는 넓은 범위의 지역을 나다니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목적지를 향해 곧바로 서둘러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는 복음을 편만하게 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편만하게 전하다'의 헬라어 '페플레로케나이'는 '플레로오'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부족한 것으르 보충하고 완결짓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직역하면 '복음을 채웠노라', '복음 전하는 일을 완성했노라'(NEB)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또한 복음을 모든 곳에 전파하여 '완전히 밝히 드러내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Godet).
칼빈(Calvin)은 이것을 '바울이 부족된 것을 보충하면서 복음 전파를 넓게 퍼뜨렸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통하여 바울의 전도 활동을 짐작해볼 수 있는데 그는 전도 여행을 하면서 큰 도시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그곳에 교회를 세운 다음 그 지역의 새로운 회심자들에게 그 교회를 맡겨 그들로 하여금 그 주변 지방들을 보다 강력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복음화 시키도록 한 듯합니다.
3. 복음의 개척자 바울(20~21절)
1) 바울의 확고한 선교 정책을 보여 줍니다(20절)
“[20]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자신의 사도직의 진실성을 확증하기 위해 지금까지 동양에서의 자신의 활동이 거둔 성공에 대해서 언급하였습니다(19절).
그리고 이제 본절에서는 서양에서의 미래 사역과 로마 방문에 대한 생각을 피력하기 위해 그가 항상 자기 사역의 지침으로 삼아온 원칙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Godet).
이러한 고백은 이미 다른 전도자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 곳에서는 전도하지 않겠다는 바울의 확고한 선교 정책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자기 자신에게 닥치는 희생과 고난이 아무리 많더라도 복음을 위한 길잡이가 될 책임을 맡겠다는 그의 소망을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Harrison).
'힘썼노니'라고 번역된 헬라어 '필로티무메논'은 '필로스'('사랑함')와 '티메'('명예')가 합성된 단어로 '힘쓰다'는 의미 외에 '명예를 사랑한다' 또는 '영예로운 일로 간주한다', '열성으로써 노력하다'의 의미를 가진집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개인적인 영예를 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의 사도적 책임이었습니다.
사도란 단순한 목사나 전도자가 아닙니다.
바울 자신이 고전 3:10에서 말한 대로 그의 사명은 '터'를 놓아 다른 사람이 그 위에 건축할 수 있게 하는 것, 즉 남들이 아직 가지 않은 곳,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영예로운 일로 여겼고, 이 일을 사랑했으며 또한 최선을 다해 열정적 노력을 기울인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바울의 성스러운 자랑과 열망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여기서 어떤 새로운 사상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현재 목표를 향해서 다가가고 있는 선교 사역의 진행 방법과 정책 및 그 성격을 규졍하고 있는 것입니다(Godet).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해야 할 막중한 사명을 갖고 있는 바울이(1:8, 14, 15;행 1:8) 여기서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한다는 자신의 선교 정책을 말한 것은 단순히 사도직의 구별 의식이나 우월 의식에서 한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울의 사역의 독특한 특징으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할 신성한 일을 자기 혼자 독불장군 식으로 주장하지 않고 다른 사역자들의 전도 활동과 열매를 존중한다는 의사 표현입니다.
즉 이미 복음이 전파된 곳에 또 가서 전하는 이중적 일을 하지 아니하여 하루라도 빨리 땅 끝까지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파하고자 한 열망에서, 바울은 그러한 선교 원칙을 취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선교 원칙은 그 결과 얻어지는 공적을 독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체 기독교 선교의 경제성을 위해서였습니다.
아직도 미개척지가 많은데 한 곳에 사역자들이 모이는 것은 기독교 전체의 공동 사역(team ministry)이란 관점에서 볼 때 비효율적이므로 자신이 먼저 앞장서서 고통을 무릅쓰겠다는 순교적 자세를 바울은 항상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2) 바울은 자기의 선교 정책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일치하고 있음을 증명합니다(21절).
“[21]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본절은 사 52:15의 70인역(LXX)의 문자적 인용으로서 앞절(20절)에서 말한 바울의 선교 정책이 자기 고집이나 자랑이 아님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의 이방인을 위한 전도 사역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일치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그 유명한 이사야의 '종의 노래' 즉 메시야의 자기 비하(빌 2:7, 8)와 고난과 승귀(빌 2:9-11)가 완벽하게 응결되어 있는 사 52:13-12의 내용으로서 그 종이 많은 민족과 왕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호이스 우크 아넹겔레 페리 아우투 와손타이).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 사 52:13-15에서는 '왕들'(멜라킴)로 표현되었으나 본문에서는 유대인과 대조되는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자신의 선교적 비전을 이사야 52:17 말씀, 그리고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땅 끝까지 이르게 하겠다”는 이사야 49:6 말씀과 더불어 이방의 사도로 부름 받은 바울의 사도적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말씀들입니다.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카이 호이 우크 아케코아신) - '듣지 못했다'는 것은 유대인들처럼 고난의 종 되시며 메시야이신 주님에 관한 소식을 듣지 못했다는 뜻으로서 역시 이방인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리고 '깨달으리라'(쉬네수신)는 말은 사도들이 전파한 주님의 소식, 곧 복음을 듣고, 예수를 메시야인 구세주로 알게 되어 믿음에 이르른 것을 뜻합니다.
앞 구절의 '볼 것이요'란 말과 대등 소이한 표현입니다.
이렇듯 열방에 복음의 빛이 비춰지므로 주께 돌아온 자가 역사상에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새로운 시대가 도래 한 것을 보여주는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바울은 자기의 선교 사명을 인식하고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자신의 선교사역의 결과를 증거한 것입니다.
한편 혹자는 이러한 예언이 바울의 사역에서 성취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그의 사도직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말합니다(John Calvin).
왜냐하면 이 말씀은 특별히 사도들에게 위임되었고(마 28:19, 20; 막16:15), 그들에 의해서 이 말씀이 성취되어졌기 때문입니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의 성숙한 신앙과 진보에 대해 만족하면서도 그들이 잊고 있던 본질을 놓치지 않도록 긴 편지를 썼습니다(14,15절).
바울이 한 세 가지 칭찬은 공동체가 건강하게 성장하는 데 필요한 자질이었습니다. 하지만 본질이 흐트러진 외연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이름만 고친다고, 조직을 개편한다고 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 교인들은 잊고 있었던, 그러나 바울은 정확히 진단했던 본질에 대한 처방이 내게도 필요하진 않습니까?
2) 바울은 자신의 직무를 분명히 알고 있었고, 이를 충실히 수행했습니다(16절).
과거 복음의 훼방자였던 바울이 그리스도의 일꾼이 된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감격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제사장의 직무를 상기하며, 또한 로마 교인들이 복음의 동역자가 될 때를 소망하며 긴 편지를 써 보냅니다.
자신이 부름 받은 목적을 알고 부르심의 소망 가운데 초지일관 이에 순종하여 사는 것만큼 복된 삶도 없을 것입니다.
3) 바울은 자신의 업적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지 않습니다(17~19절).
오히려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일에 자신을 사용하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바울을 선택한 하나님의 눈은 절대 틀리지 않았습니다.
이 일꾼은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역사를 일으키셨는지 그것만이 자랑이었습니다.
바울의 자랑에 이어 덧붙이고 싶은 내 자랑은 무엇입니까?
4) 바울은 복음을 위해 척박한 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20,21절).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보고,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을 것이라는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그는 복음의 불모지에 말씀의 씨를 뿌렸습니다.
넓고 쉬운 길을 마다하고 좁고 험한 ‘기록된 길’을 가셨던 예수님의 행보와 닮아 있습니다.
내가 걸어온 길은 어떤 길이었습니까?
또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은 어떤 길일까요?
길을 갈수록 예수님의 길과 닮아야 하지 않을까요?
기도
공동체-예수님이 걸으신 길을 따라 부르신 소명을 온전히 이루며 살게 하소서.
열방-미얀마 정부가 언론인을 체포하며 언론과 국민의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 정부가 언론인을 석방하고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고 보호하도록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