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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병장 석상용 상원진이 주둔했던 박회성을 찾아서
▣ 일 시 : 2022년 03월 24일(목)~25일(금)
▣ 코 스 : 초암농장-망루봉-1249.4봉-박회성(원점회귀)
▣ 인 원 : 5명
▣ 날 씨 : 맑음
1530년 편찬된 『신동국여지승람』 제31권 「경상도(慶尙道) 함양군(咸陽郡)」편에 추성(楸城)과 박회성(朴回城)에 대한 기록이 있다. 마천면 추성리 두류능선 기슭의 추성과 영랑대 아래 초암능선의 박회성이다. 주민들의 구전에 추성은 가락성(가야성)으로 박회성은 대궐터라고 전한다. 추성 주변에 국골, 어영골, 가마차골, 말달릴 평전, 두지터 등의 지명이 남아 있어 금관가야 구형왕의 유적으로 추정하고 있다. 함양문화원에서 발간한 《함양의 성곽》(2019)에 추성의 위치(지리산 하봉 아래 칠선계곡 방향)는 오류이다. 지리산 영랑대 아래 초암능선에 있는 고성은 박회성이다.
구 분 | 위 치 | 고 도 | 성곽 길이 | 면 적 | 구전 | 비고 |
추성(楸城) | 두류능선 | 645~877m | 2090.0m | 156,264.00㎡(47,269.86坪) | 가락성 | |
박회성(朴回城) | 초암능선 | 1215~1386m | 1410.9m | 94,101.02㎡(28,565坪) | 대궐터 |
박회성에 대한 또다른 기록은 정경운의 『고대일록(1596)』이다. 임진왜란 때에 산음에 사는 박회성 성주 송업(宋嶪, 1526~?)이 성을 비우고 거창에 다녀왔다가, 도체찰사 이원익에게 곤장의 징벌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1596년(병신) 12월 19일 신사(辛巳), 성주(城主)가 거창(居昌)에서 돌아왔다. 산음(山陰)에 사는 송업(宋嶪)과 단성(丹城)에 사는 이유훈(李惟訓)이 도체찰사(都體察使)에게 폐단을 진술하였는데, 논의가 박회성(朴回城)의 일에 미치자 도체찰사가 크게 노하여, 그가 산성(山城)에 들어가지 아니한 죄를 따져 곤장(棍杖) 30대를 때렸다는 말을 들었다." 송업(宋嶪, 1526~?)은 명종 16年(1561) 사마시에 합격한 인물로 정경운의 고대일록에 상사(上舍) 송업(宋嶪)이 찾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박회성을 다시 주목하게 된 것은 『비호장군석상용약전』(이종인, 1974)이다. 석상용장군약전에 나오는 상원진이 상원사터가 아닐까하는 생각에서 지난 2월 20일 상원사터를 답사하였다. 상원사터에서 상원사골로 650m를 올라가면 곧바로 박회성이다. 1908년 일본군의 진중일지에 "대궐터(大闕基)를 도적의 소굴"로 언급하고 있는데, 『신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박회성이 구전에 전하는 대궐터와 일치한다. 이번 답사는 의병들이 거처하였던 막사터와 샘터, 그리고 석루(石壘) 등을 확인하는 것이다.
1. 『비호장군석상용약전』(이종인, 1974)
1907년 남원에서 양한규와 고제량이 찾아와서 합세하고 곡성, 장성, 고창, 구례 등지에서 왜병들에게 기습작전을 하면서 싸우다가 쌍계사를 거쳐 마천으로 넘어오던 도중 고려천(고록천의 오기인 듯함)이 이끄는 일대를 만나 지리산 중턱 상원에서 합세하였다. 그후 문태수 신명선이 이끄는 일대가 추성으로 들어와 상원에서 합세하여 대진을 이루었다. 충북 제천에서 박화선이 일대를 이끌고 백무동으로 들어왔다. 그 후 김동신 홍영대 등이 안의에서 들어와서 지리산에서 의병진이 웅거하였다. 공은 지리 사정에 밝고 지략도 겸비하였으므로 백무진과 상원진의 총참모로 추대되어 수백 대원들의 군량과 군기 화약의 공급과 작전과 정찰까지 맡아서 맹활약을 계속하였다. 『비호장군석상용약전』(이종인, 1974)
『비호장군석상용약전』(이종인, 1974)은 석상용(石祥龍, 1870~1920) 장군과 같은 마을 출신인 지광(枝光) 이종인(李宗仁, 1896~1982) 선생의 기록이다. 이종인 선생은 석장군보다 26세 연하지만, 평소 석상용 장군의 지략과 인품을 존경했기 때문에 두 분의 교분은 매우 두터운 사이였다. 石장군이 1917년 출옥하여 순국할 때까지 3년간 대화를 메모해 두었다가 후세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1974년 이 책을 발간하였다고 한다. 상원사터와 박회성은 인접해 있다. 이종인 선생은 석상용 추성 의진을 상원진으로 기록하고, 일본군 토벌대는 "천왕봉 동북방 사면(斜面)에 있는 대궐터(大闕基)에 있는 도적의 소굴(巢窟)"로 기록하였다.
☞ 석상용(石祥龍, 1870~1920) :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태생의 한말 의병장으로, 지리산 일대의 화전민들을 규합하여 의진을 구성하고 스스로 의병장이 되었다. 주변 일대에서 활약하고 있던 양한규(梁漢奎), 고제량(高濟亮), 문태수(文太洙) 등과 제휴하여 함양, 산청, 남원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그의 별명은 비호장군으로, 일본군마저 공포에 떨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대표적으로 실상사전투와 지리산 쑥밭재, 벽소령 및 성삼재전투 등이 있다.
실상사에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석상용은 1908년 4월 29일 50여 명의 병력으로 이들을 습격하였다가 접전 끝에 노루목으로 퇴각하였다.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5월 11일 마천면 도마리 서당에 주민들을 모아놓고 집단학살하려 하였으나, 면장 노지현의 설득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석상용 의병부대는 1907년 말부터 5년간 지리산을 은신처로 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지만, 1912년 석상용이 일본군에 체포되면서 해체되었다. 이 일로 석상용은 5년간의 수형생활을 했고, 출옥 후 병마에 시달리다 1920년 10월 26일 사망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전면장노공지현영은비』(임명근, 1983)
일본이 우리 강토를 탐내고 갖가지 침략을 자행타가 끝내는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맺고 정치에 까지 그들이 마음대로 하는지라. 이에 분노를 참지 못하여 각지에서 봉기하였으니 이것이 의병이었고, 의병을 진압시킨다는 구실로 일본은 자기네의 병력을 끌어들여 전국 각처의 요소에 수비대를 주둔시켰으니 우리 고장의 들머리에 있는 실상사에도 주둔하고 있었는지라. 의병대장 석상용(石祥龍, 1870~1920)이 이를 소탕코자 백여 명의 병력을 모아 서기 1908년(戊申) 4월 29일 이 날이 음력 3월 그믐이라 야음을 타서 실상사를 포위하고 화심포 탄환이 다하도록 공격을 하였으나 별다른 반응이 없으므로 횃불을 절마당에 던졌더니 왜병이 횃불을 주워 인근에 있는 나무더미에 던져 충전하는 화광을 이용하여 조총으로 반격하는지라. 이를 대응하였으나 실탄이 없으므로 약간의 희생을 당하고 후퇴하였다.
5월 11일(음력 4월 12일) 왜병들이 의병을 색출한다는 구실로 젊은이와 부락민을 도마마을 서당 뜰에 강제로 집합시켜 그 앞에서 문초를 하는데 잡혀온 당흥마을 김학길(金學吉)이 앞줄에서 옆줄로 옮겨 앉는다고 즉석에서 사살하고 남은 사람을 처형할 즈음에 면장 노지현이 뒤늦게 알고 달려와서 여기 잡혀온 사람들은 모두 죄 없는 사람들이니 죽이지 말라고 외친 즉, 왜병은 발길과 총부리로 심히 구타하나 이에 굴하지 않고 옷깃을 헤쳐 가슴을 내밀며 나를 죽이고 죄없는 자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호통하니 야만적인 왜병들도 공이 너무나 당당한 용기와 기백 그리고 줄기찬 항변과 늠름한 위엄에 감복하여 총부리를 거두고 모두 해산시켰다. 이때의 상처가 끝내는 다리의 불구로 일생을 마쳤다.《전면장노공지현영은비(임명근, 1983)》
1908년 4월 29일(음 3.29) 밤 석상용 상원진은 백무진과 연합하여 일본군이 주둔해 있던 실상사를 공격한다. 그러나 백무진과 약속한 공격 시간이 어긋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간다. 5월 11일(음력 4월 12일) 왜놈들은 도마리의 서당에다 주민들을 모아놓고 집단 학살하겠다고 위협을 한다. 당시 노지현(盧址鉉) 마천면장의 용기와 끈질긴 설득으로 주민들이 죽음의 위기를 모면한다. 상원사터에서 실상사까지는 칠성동→두지동→장구목→백무동→도마마을→실상사(입석리)를 잇는 루트이다. 일본군들은 실상사 길목의 도마마을 사람들을 의심하였을 것이고, 전후 상황으로 미루어 실제 실상사 기습에 가담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마천면 출신 의병 20명 중 도마마을 출신이 8명이다.
※ 마천면 항일의병 귀순자 명단(20명, 1908~1910)
이선전(마천면), 문성주(45‧마천면 당흥촌), 박춘원(55‧마천면 당흥촌), 김문성(44‧마천면 당흥촌), 이성삼(45‧마천면 당흥촌), 김인중(59 ‧마천면 당흥촌), 김명운(49‧마천면 당흥촌), 박성언(44‧마천면 당흥촌), 박문여(73‧당흥촌), 한태서(53‧도마천동), 박관지(53‧도마천동), 장명준(57‧도마천동), 한성서(76‧도마천동), 신경언(56‧도마촌), 임선경(67‧도마촌), 한치명(26‧도마촌), 한원숙(55‧도마촌) 김성배(마천면 양전), 전이현(마천면 추성), 강수성(마천면 창촌) [국사편찬위원회,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11(義兵篇Ⅳ), 242-243]
3. 일본군 『보병 제14연대(步兵 第14聯隊) 진중일지(陣中日誌)Ⅱ』
1908년 6월 29일 함양 수비 제 5중대 西原 중위 보고 요지(6.23. 함양) : 6월 18일부터 22일에 걸쳐 함양 서남방 지구 검거를 위해 출장한 당대(當隊, 입석立石 수비대 포함)는 6월 21일 지리산의 절정 방장봉(方丈峰) 북방 유곡(幽谷, 깊숙한 골짜기) 및 동북방 사면(斜面)에 있는 대궐터(大闕基)에 적의 소굴(巢窟)이 있어서, 그 유곡에 있는 총기제작소(銃器製作所)는 지난날(過日) 구례(求禮) 수비대로 인해 깨뜨렸지만(破却), 대궐터에는 아직 토벌대가 진입할 수 없음을 알고서, 마천(立石 동남방 2리) 면장을 향도(嚮導)하게 해 병풍연(屛風然)이라는 험산(險山)에 깊이 들어가(深入) 어려움(荊棘)을 물리치고(排) 개암나무와 덤불(榛莽)을 밟고 간신히 대궐터에 도달하였다.
적의 그림자(賊影)를 탐지할 수 없었지만, 현재(目下) 적(賊)이 신축중인 가옥은 80여 명을 수용하기에 족한 규모로서, 그 공사를 끝내고 그 주위에는 석루(石壘)를 설치해 목책 울타리(樹枝鹿柴)를 편성하여 소굴로 삼았다. 따라서 가옥 및 방어설비를 파괴하고 일부로 하여금 주위를 수색하여 좌(左)의 여러 물건(諸品)을 획득하였다. 화승총(火繩銃) 12, 탄환 4貫目, 백미(白米) 7두, 기타 잡품. 파괴 가옥은 마천 면장이 방화·소각하고 말하기를 면민을 위해 적의 근거를 끊었다고 함.〔『(보병 제14연대) 진중일지』Ⅱ〕
지난주 경상대학교 김준형 교수님께 『(步兵 第14聯隊) 陣中日誌』 자료를 받았다. 토벌대의 진중일지는 1908년 6월 18일부터 6월 22일까지 토벌대의 대궐터 작전기록이 자못 상세하다. 일본군은 진작부터 대궐터(박회성)의 상원진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으나 대궐터는 험하고 요새이기때문에 접근하지 못한다. 6월 21일 함양 수비 제5중대와 산내면 입석리 실상사의 입석 수비대와 연합하여 당시 마천면 노지현(?)면장을 향도로 삼아 대궐터에 진입한다. 일본군 토벌대가 박회성에 진입했을 때 "8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이 있었다."라는 기록도 매우 흥미롭다.
1907년 2월 설날을 기해 양한규(梁漢奎, 1844~1907) 의병진은 남원성을 공격한다. 이 전투에서 의병장 양한규가 전사한다. 대장을 잃은 양한규의 일대(一隊)는 지리산으로 들어온다. 문수사와 연곡사가 호남 의병들이 주둔했던 곳이다. 1907년 10월 녹천 고광순(高光洵, 1848~1907) 부대는 연곡사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궤멸된다. 고광순 고제량 등 수뇌부를 잃은 의병들은 외당재, 내당재를 넘어 의신 마을을 거점으로 활동하다가, 1908년 2월 초 설날을 전후하여 일본군의 매복 기습에 대부분 전사한다. 지리산 남부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은 벽소령을 넘어 마천으로 숨어든다. 의병진에서 살아남은 일부 의병들은 마천면 추성리 출신 석상용 부대와 합류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부대가 상원진과 백무진이다. 1908년 4월 29일 두 부대가 연합하여 실상사를 공격하였다가, 6월 21일 박회성 대궐터의 상원의진이 일본군에 토벌당한다는 이야기이다.
가. 1908년 4월 29일(음 3.29) 상원진과 백무진과 연합 실상사를 공격함.
나. 1908년 5월 11일(음력 4월 12일) 왜병들이 의병을 색출한다는 구실로 도마마을 주민들을 학살하려고 함.
다. 1908년 6월 18일~22일에 함양 수비대 제5중대와 산내면 입석 수비대와 합동으로 대궐터 상원의진을 토벌함.
사전에 이런 밑그림을 그리고 박회성 답사에 나섰다. 일본군의 진중일지에 "대궐터(大闕基)"라는 기록도 눈길을 끈다. 최근 박회성이라는 이름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졌지만, 아직도 주민들은 박회성을 가야 구형왕의 대궐터라고 한다. 이번 답사에서 성곽과 북문지, 창고터, 건물터, 샘터, 망루, 깨진 솥단지 파편 등을 확인하였다. "백커피불여일숙(百珈琲不如一宿)이라."하였으니, 중요한 것은 하룻밤 상원진 의병이 되어 박회성 대궐터에서 일박(一泊)이 아니던가. 다음날 아침 건물터 세 곳을 복습하고, 남쪽 망루와 북문과 창고터를 확인한 후, 세 분은 상원사로 내려가고 나와 김 교수님은 어제 올라온 길로 내려섰다. 이번 답사를 요약하면, ① 박회성(대궐터)은 가야의 역사가 구전으로 남아있는 곳이다. ② 정경운의 고대일록에 따르면 박회성은 임진왜란 때 사용했던 피난성이고, ③ 무엇보다 박회성(대궐터)이 구한말 지리산 항일의병의 항전지라는 점이다. 끝.
☞ 한말 항일의병 박회성의 상원(추성)진과 백무동의 백무진 : https://blog.daum.net/lyg4533/16488769
▼ 건물터 A
▼ 건물터 B
▼ 건물터 C(북문 근처에 있음)
첫댓글 오락가락하는 비소식에 수고하셨습니다
한말 항일의병의 전적지를 찾았습니다.
읽을만한 글이다 싶어서 살펴보니 역시 도솔산인님!
석상용 장군은 해주 석씨(海州石氏)인데 명나라 신종(神宗)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이 시조(始祖)이며, 이 분이 임진왜란 때 명나라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선에 원병(援兵)을 파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 연유인즉 부인(夫人) 류씨(柳氏)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곤란을 당하던 중 조선 역관(譯官) 홍순언(洪純彦)의 구호를 받은 바 있어 그 보은의 뜻이었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에 필요한 막대한 군비 조달로 나라의 국운이 쇠하여진 책임을 지고 옥사(獄死) 합니다. 석성이 죽기 전 화가 자신에게서 끝나지 않을 것이란걸 알고 자식들에게 조선으로 도망갈 것을 유언으로 남겼는데 아들 중 차남 석천(石洊)이 먼저 성주 대명동(星州大明洞)에 정착하면서 성주 석씨(星州石氏)가 되었고, 장남 석담(石潭)은 유배지에서 풀려나와 어머니 류씨(柳氏)를 모시고 해주(海州)에 정착하였는데 이 분이 석상용 장군의 직계 조상이십니다.
그런데 청나라가 수시로 석상의 죄를 물어 조선으로 도망친 후손들을 압송하라고 조정을 압박하자 광해군이 이들을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김해로 옮겼는데 인조반정으로 조정의 관심도 멀어지고 후손들이 이곳에서 많이 궁핍한 생활을 하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호구지책으로 지금의 경남 산청군 생초면 평촌리 추내동으로 다시 일가를 옮겼는데, 일부는 무장의 후손답게 지리산 추성에 곰사냥꾼으로 정착하여 살았답니다. 그 중 출중한 사냥꾼이 석상용 장군이었고, 알려진대로 실상사와 벽소령에서 일경들과 몇 번의 전투를 치르고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돌아가셨습니다.
지금도 빈대궐터에 후손이 몇 분 사신다는데 가장 확실한 후손은 수철리 쌍재에 사시는 석재규씨입니다. 이 분은 부산에서 은행 잘 다니다가 고향으로 낙향해 산농사 지으면서 지내고 계십니다. 내내 건승하십시요!
하로동선님! 잘 지내시지요.
영랑대에서 만나던 분들 보기가 어렵습니다.
최근 상원진과 백무진의 실체를 알았습니다.
독립운동 발굴과 선양은 1, 2번이 없지요.
좋은 의견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솔산인 지리산이 아무리 깊다한들 해월령 고개만큼 술맛나는 곳이 또 있을까요.
좋은 자리에 불러만 주시면 술 한말 지고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