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사의 난으로 번진이 당 왕조의 통제에서 벗어나자 당 왕조는 중앙 정부군을 증강하는 데 많은 돈이 필요했다. 가혹한 세금 징수를 단행하여 민생이 파탄 나자 전국에서 크고 작은 반란이 이어졌다. 그중 소금 밀매업자인 황소는 왕선지와 가담하여 농민들을 모아 당 왕조에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농민 반란을 일으켰다. 황소는 60만 대군을 이끌고 낙양을 점령한 뒤 동관을 공격하고 장안에 입성해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황소의 난은 10여 년간 계속되어 당 왕조를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시켰다.
안사의 난이 완전히 진압된 것은 763년 2월이었다. 이후 당 왕조는 존속되긴 했으나 국정 운영에 어려움이 더욱 심해졌다. 당 왕조는 안사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번진을 각 지역으로 확대해 절도사로 하여금 병권을 지휘하도록 했다. 이리하여 번진은 내지까지 설치되어 40개 정도로 확대했으며, 중요도에 따라 절도사, 방어사, 단련사가 파견되었다. 안사의 난 이후 절도사는 군사 지휘권의 장악과 더불어 국가에서 위임받은 행정권까지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점차 번진이 당 왕조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경향을 보이자 그들의 세력 확장을 억제하고 순응시킬 필요를 느꼈다. 그리하여 최우선으로 황제와 유대가 돈독하고 강한 중앙 정부군을 증강하고자 했다. 이에 많은 재정이 필요해진 당 왕조는 가장 손쉽게 재정 수입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인 세금 징수를 감행했다. 가혹한 세금 징수는 곧 민생의 파탄으로 이어졌다. 이와 더불어 당 왕조는 전횡을 일삼는 환관뿐만 아니라 국가 주도권을 가지고 정치 투쟁을 벌이는 전통 문벌 귀족과 신흥 관료의 대립으로 더욱 혼란에 빠졌다.
통치 세력의 부패와 국정 혼란은 결국 크고 작은 반란을 초래했다. 855년 절동 지역에서 일어난 병사들의 반란을 시작으로, 858년에는 영남, 호남, 강서, 선주 등지에서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859년에는 구보(裘甫)라는 농민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초기에는 100여 명 정도였던 반란군에 유랑 농민과 도둑들이 합세해 그 규모가 상당했다. 이후에도 반란은 끊이지 않았으며, 그중에서도 황소의 난은 당 왕조에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평민 출신의 소금 상인이었던 황소는 소금 전매로 막대한 부를 형성한 후 북방 출신의 병사들을 회유해 난을 일으켰다.
안사의 난 이후 당나라의 조세 제도는 조용조에서 양세법으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농민은 소유하는 농지의 양과 질에 따라 하세와 추세로 나누어 세금을 냈다. 당 왕조는 거두어들인 양세를 주로 번진의 군사비로 지출했으며, 관료의 봉급으로도 사용했다. 그러나 번진의 확대에 따른 막대한 재정 지출을 양세의 수입만으로 감당하기에는 이미 벅찬 지경이었다. 이에 부족한 세입을 충당하기 위해 소금의 전매를 실시했다.
758년, 제오기(第五琦)의 건의에 따라 강회 지역에서 소금 전매를 우선적으로 실시한 후 760년에 전국적으로 실시했다. 전매 초기에는 소금 가격이 소금 1두당 10문이었으나, 여기에 소비세 100문을 물어 110문을 받았으며, 이는 점차 인상되어 나중에는 소금 1두당 300문에 이르렀다. 이는 당 왕조가 재정이 악화될 때마다 소금 가격을 올렸기 때문이다. 소금의 가격이 원가의 약 30배까지 오르자 소금을 사지 못해 음식을 싱겁게 먹는 백성이 생겨나는가 하면, 소금 밀매업자까지 출현했다. 그러자 당 왕조는 소금 밀매업자의 성행으로 세입이 줄어들까 걱정하여 이들을 염적(鹽賊)이라 칭하고 엄벌했다. 이에 소금 밀매업자들은 비밀결사대를 조직하고 무장하여 당 왕조에 대항했으며, 당 왕조의 엄한 염적 토벌은 반란으로 이어졌다.
874년, 소금 밀매업자 왕선지(王仙芝)가 하남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그는 천보평균대장군(天補平均大將軍)이라고 자칭하고, 당시 극심한 빈부의 격차를 빚어낸 당 왕조의 죄를 폭로, 규탄하는 격문을 띄운 후 봉기에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자 수천 명의 농민들이 봉기군에 가담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황소도 산동에서 호응했다. 왕선지와 황소의 지휘 아래 봉기군이 점점 강해지자 당 왕조는 군사를 소집하고 번진 절도사에게 봉기군 진압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절도사들은 당 왕조의 명령에도 적극적으로 진압에 나서지 않았다. 더구나 봉기군이 따로 거점을 마련하지 않은 채 약한 상대를 골라 공격하는 작전을 펼쳐 산동, 하남, 호북 지역까지 세력을 떨치자 당 왕조는 회유책을 썼다.
먼저 당 왕조는 왕선지에게 투항을 조건으로 좌신책군압아(左神策軍押牙) 겸 감찰어사(監 察御使)의 관직을 제안했다. 왕선지는 당 왕조의 제안에 동요했다. 하지만 황소는 당 왕조가 왕선지에게 낮은 관직을 주어 봉기군에 내분을 일으키려는 것임을 알아챘다. 황소가 왕선지를 일깨우자 왕선지도 곧 정신을 차리고 당 왕조가 파견한 칙사를 쫓아 버렸다. 이후 왕선지와 황소는 군사를 나누어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왕선지는 서쪽으로, 황소는 동쪽으로 진군했다. 하지만 878년, 왕선지가 호북으로 출격했다가 황매에서 대패하고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자 왕선지의 부하들은 모두 황소에게 의탁했으며, 황소는 충천대장군(衝天大將軍)으로 추대되었다.
왕선지의 10만 군까지 흡수한 황소의 목표는 당나라 제2의 도시 낙양이었다. 그러나 낙양은 결코 만만한 도시가 아니었다. 당 왕조는 낙양 부근에 수십만 대군을 집결시켜 봉기군을 토벌하려 했다. 이에 황소는 낙양을 포기하고 상대적으로 약한 광주로 진군하여 879년에는 마침내 광주 함락에 성공했다. 광주가 함락되자 봉기군의 세력은 더욱 확장되었으며, 880년에는 60만 대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낙양을 점령한 다음 동관을 공격했다. 황소의 동관 공격 소식에 당나라 희종(僖宗)과 조정 대신들은 대경실색하여 사천으로 피란을 떠났다. 미처 떠나지 못한 대신들이 황소에게 투항함으로써 황소는 마침내 장안에 입성했다. 그리고 희종을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대제(大齊)라 하고 연호를 금통(金統)으로 정했다.
황소는 상양(尙讓)을 재상으로, 주온(朱溫)을 대장군으로 임명하는 등 통치 체제를 정비했다. 또한 당 왕조의 고위 관료와 부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백성에게 나눠 주는 등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힘썼다. 하지만 사천으로 피란 간 희종을 쫓지 않는 결정적인 과오도 저질렀다. 황소는 장안을 점령한 뒤 여세를 몰아 희종을 추적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또한 당 왕조의 금군과 번진 세력을 무장 해제시키고 자신의 군사력을 강화해야 했지만, 여기에도 무관심했다. 게다가 봉기군이 점령한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키지 않는 실수를 저질러 후에 당 왕조가 반격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황소의 장안 입성 황소의 동관 공격 소식에 당 희종과 대신들이 서둘러 피란을 떠났고, 남은 자들은 황소에게 투항하였다. 황소는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대제라고 하였다.
881년, 당 왕조는 황소의 과오를 기회로 삼아 각지의 절도사들을 규합하고 군대를 재정비했다. 당 왕조는 이민족 출신 이극용(李克用)과 연합해 장안을 공격했으며, 883년에 장안을 포위했다. 포위 기간이 길어지자 황소 진영의 식량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전세는 황소에게 불리해졌다. 그런데 이때 황소에게 결정적으로 타격을 안겨 준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동주를 지키고 있던 부장 주온이 봉기군을 배반하고 당 왕조에 투항한 것이다. 게다가 이극용이 양전파를 지키던 상양을 무찌르고 장안을 향해 진격하자, 황소는 할 수 없이 장안을 포기하고 남전으로 후퇴해야 했다. 이후 황소의 봉기군은 당 왕조와의 전투에서 모두 패했고, 황소는 태산 낭호곡(狼虎谷)으로 도망쳐 884년 그곳에서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이로써 10여 년간 이어진 황소의 난이 평정되었으며, 885년에 사천으로 피란을 떠났던 희종은 장안으로 돌아왔다.
황소는 반란을 통해 새 왕조를 열지는 못했지만 당 왕조를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시켰다. 황소의 난은 10여 년 동안 전국 각지에서 당 왕조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지주 계층에게 심각한 위협을 주었다. 또한 반란의 중심지였던 강회 지역의 경제가 완전히 파괴됨으로써 가뜩이나 재정 악화를 겪고 있던 왕조의 재정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한편 지방의 번진은 황소가 장안을 지배하는 동안 완전히 독립된 국가로 나아갈 채비를 갖추었다. 그리하여 당 왕조는 불과 23년 후에 오대십국에게 역사의 자리를 내주었다.
ㆍ 855년 : 통치 세력의 부패와 국정 혼란으로 전국에 크고 작은 반란이 일어나다.
ㆍ 874년 : 소금 밀매업자 왕선지가 하남에서 군사를 일으키다.
ㆍ 880년 : 60만 대군을 이끌고 낙양을 점령한 황소가 장안에 입성하여 황제가 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