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어딘지 아십니까?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저마다의 삶의 이야기 꽃이 피는, 그 어디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현장,
여기는 화성 외국인 보호소다. 어떤 이는 일하다 체포돼 들어오고,
어떤 이는 퇴직금 요구하다 사장의 신고로 들어오고, 어떤 이는 이삿짐센터에서 일을 했는데
이삿짐 고객이 본인 가방을 깜박하고 관리실에 두었다가 잃어버린 줄 알고
이삿짐 직원인 몽골 노동자가 의심을 받고 경찰에 신고가 들어와 억울하게 오게 되고,
또 어떤 이는 공장에서 일을 하다 산재를 당해 오른쪽 팔에 박혀있는 핀을 빼지도 못한 채,
미등록자라는 이유로 산재 보험도 받지 못하고 수감 되어있는 외국인도 있었다.
그 어떤 현장에서도 들어볼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오로지 여기에서만. 언어가 안 되는데
다들 몸짓, 말짓 해가면서 말이다. 현재 10여국에서 온 17명의 사람들이 이 방에서 함께 수감되어 있다.
나란히 잠을 자는 모습들은 별로 평화스럽지가 않아 보인다.
참 가슴이 아프다.
씻고 편안하게, 내 집에서 자야하는 이들, 여기에 모이는 이유는 단지
그동안의 체류기간이 초과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범죄 행위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단지 시간 초과.
필자 역시도 시간이 초과되어 수감되었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외국인 활동가라는 것이 분명하다.
‘표적’이었다. 출근길 사무실 앞(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길)에 세워져 있는 검정 승용차,
1~2미터도 안 되는 그 시점에서 3명의 출입국 직원들이 차에서 내려 나를 체포한 것이다.
세 명 중 한명은 내가 일하는 사무실 건물 안에서 본적 있다. ‘
미리 소환하고 현장 조사 나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순간 나는 “어디서 본 적 있죠?”라고 남자에게 물어보았다.
남자는 내 눈을 똑바로 보지 않은 채 버벅거리는 말투로 “아니요.”하고 대답을 했다.
“표적이죠?”라고 묻자 같은 대답, 같은 방식으로 “아니에요.”라고 했다.
나는 짧은 질문을 계속 던졌다. “기분이 좋으십니까? 속이 시원합니까?”라고.
이후부터 출입국 도착 할 때까지 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체포 당일 이주노동자 강제추방 반대 기자회견이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의 구호와 연설을 목동 출입국 사무실 안에서 체포된 상황에서 듣고 있어야만 했다.
“나 역시 안에 잡혀 있어요.”라고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었지만…….
잠에서 가위 눌린 것 같았다. 밖에서 구호는 계속된다. “강제단속 중단하라.”
화성보호소
1009-10-9
미누(MINOD MOKTAN)
“당신의 꿈이 무엇입니까? 앞으로의 계획은요? 개인적인 거요...”
어떤 신문기자가 나를 향해 했던 말이 생각이 난다.
참 나는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나의 개인적인 삶과 관련된 계획을 세우면서 살았던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지금에서야 분명히 확신하게 되었다.
그동안 어떻게 보면 핑계일 수도 있지만, 그럴만한 시간도 여유도 없이 그때 그때 주어진 일을 하면서 살아왔다.
참 어이없다. 나는 질문을 나에게 던져본다.
길을 잃은 어린양과 같은 기분이다. ‘어차피 돌아가도 내 고향 갈 건데 뭐?’라는 생각을 할수록 마음이 더 복잡해진다.
‘고향? 이 두 글자는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왜 이제야 고향에 가야하는가?
그간 수많은 아픔과 슬픔 그리고 웃음과 추억들 함께 하지 못했던 고향은 정말로 어떤 의미일까?
아무도 없고, 갈 수 없는 곳도 아닌데 왜 나는 그간 고향에 가지 않았을까?’
평범한 사람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일거다. 갈 수 있는데도, 볼 수 있는데도,
나는 왜 그랬던 것일까? 참 아프다. 너무 늦어버렸다.
시간 흘러갈수록 모든 것이 희미해져버렸다. 다시 되돌릴 수는 없다.
여기 한국에서의 웃음, 울음, 추억들도 처음으로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머릿속이 더 복잡하다. 지우개로 지울 수만 있다면 하는 유치한 생각도 해 본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지금이라도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래! 계획을 세우자.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을 모두 몽땅 버려야하나? 아님 같이? 어떻게? 무엇을?
생각할수록 더 복잡하다.
흑… 오늘로서 수감된 지 4일째 되는 날이다. 시간은 지금 밤 11시30분.
여기서는 10시가 되면 모두 자야하는 시간이라고 한다.
나는 지금 정확히 1992년 2월 22일 입국 해 오늘 2009년 10월 12일 까지 한번도 10시에 잠을 잔 적이 없는 걸로 기억한다.
나는 여기서 휴식을 취하고, 그간 마음은 원이었으나 못썼던 글도 써본다. 감동이다.
휴일 빼고 4일 동안 나를 만나러 온 사람들 지금까지 모두 40여명.
내 소식을 듣고 그간 연락두절 되었던 선배, 후배, 동료들 모두 나를 만나로 온 것이다.
참 나로서는 기쁨, 감사 그 이상이다. 어떤 이는 눈물부터 쏟아내고,
어떤 이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어떤 이는 안타까운 얼굴로 나를 맞이한다.
다 하나 같이 똑같은 질문을 한다. “밤에 춥지 않아요?”, “밥은 잘 나와요?”,
“이불은 있어요?”, “밥은 꼭 챙겨 먹어요.” 등... 선배, 후배, 동료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심장 소리가 귀까지, 머리까지 울린다.
그 끝에서 그간 느껴보지 못했던 묘한 매운 향기가 머문다.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돌발 상황이 마음 한 가운데에서 요동친다. 뭐라 말 할 수 없다.
나도 같이 속고 만다. 선배, 후배, 동료들에게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내가 지금 선택해야 할 일 2가지다.
내 문제를 갖고 싸우는 것.
17-18년 동안 쭉 같은 한국 하늘 아래에서 살아온 숨쉬어온
미누라는 한 인간에 대한 사회의 책임감을 묻는 거다.
그간 나는 이주민과 한국인 사이에서 소통을 이야기하고 한국사회 개선에 온몸을 바쳐왔다.
그런 나에게 강제 추방이라는 독한 열매를 ‘선물’한 것에 대해 어떻게 행동 할 것인가? 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조용히 가는 것. 그간 표적 대상이었던 동료들의 결과를 보고,
지금 내가 싸우자 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좋은 결과가 없을 확률 높다는 것.
“17~18년이 지난 후에서야 가는 고향 길. 좀 더 준비해서 적어도 마음만은 더 이상 다치면 안된다.
그래서 모든 어깨의 짐을 털고 나머지 할 일은 여기 있는 사람들의 몫이니 그렇게 맘에 쓰지 말아요.”라며
동료들이 했던 말이다.
하지만 운동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밤새 고민에 빠졌다. 오늘은 변호사와 만남이 있다.
내가 앞으로 해야 할 행동에 대해 결정의 순간이 될 것이다.
그간 공연 하면서 한 번도 불러 보지 못한 우리 2집 앨범에 있는 “자유”라는 노래,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불러본다.
이 편지는 어제와 오늘 이어서 쓰고 있다.
화성 보호소
1009-10-12,12
미누(MINOD MOKT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