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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주는 선물, 명농당(明農堂)
“애기엄마, 보소. 밭고랑 다시 만드소. 고랑을 이짝으로 하면 낭중에 여다 심는 거 뿌리 다 썩어 뿐다. 심기 전에 얼른 저짝으로 고랑을 트소. 근데 여다 뭐 심을라 카는데?”
10년 전, 신축 빌라에 입주했을 때다. 주차장이나 놀이터를 만들기엔 좀 작은, 빌라 소유 땅이 있었다. 그렇다고 땅을 놀리기엔 아쉬웠던 입주민 중 한 분이 텃밭을 만들면 어떻겠냐고 의견을 냈다. 입주민 대부분은 30대 초·중반인 젊은 아기 엄마들이 많아서 아이들을 위해 텃밭 만드는 것에 동의했다. 각자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땅을 나누고 ‘지원이네 작은 텃밭’, ‘민지네 농장’ 등의 푯말을 세웠다. 시댁에서 얻어온 호미로 돌을 골라내고 빌라 지을 때 있었던 자잘한 공사 폐기물도 정리하고 공터에 아무렇게나 자라난 잡초도 뽑았다. 5살짜리 유치원생 꼬맹이,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도 함께 나와 돌을 골라냈다. 아이들은 돌을 골라내는 것이 일종의 놀이었다. 누가 더 큰 돌을 들어 올릴 수 있나 보이지 않게 경쟁도 하고, 조금 큰 돌을 들어 올리면 꿈틀거리고 올라오는 지렁이에 꺅꺅거리고, 집을 잃은 개미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넋을 잃고 보기도 했다.
어느 순간 이 모든 것이 지루해지면 집에 가자고 재촉하기도 했다. 돌 고르고 난 후, 퇴비를 섞어 흙을 뒤집어 주기까지도 며칠이 걸렸다. 밭 갈기 후 이랑과 고랑을 만드는 것은 아이들이 유치원과 학교에 다녀오는 사이에 했다. 시장에서 사온 챙 넓은 농사용 모자를 쓰고 장화까지 신은 모습이 전문 농사꾼 못지않았다. 고랑의 간격과 이랑의 높이를 어느 정도로 해야 적당한지 가늠이 되지 않아 옆집 언니가 하는 것을 흘끔흘끔 보면서 따라 했다. 쪼그려 앉아 고랑을 만들고 나니 오금이 저렸다. 일어나 허리 한번 펴고 나의 첫 텃밭을 흐뭇하게 보고 있는데, 빌라 근처에 사시는 어르신이 올라오셨다. 고랑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여름이 되면 아이와 함께 방울토마토를 따 먹을 생각만 했지, 텃밭의 물길은 생각지도 못했다.
사람에 지치고, 하는 일이 잘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우리는 이곳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농사를 지으러 남편의 고향으로 갈까 고민했다. 아이와 함께 흙 내음을 맡으며 맘 편히 살자고, 설마 굶기야 하겠냐고. 하지만 현실에서 도망치듯 그곳으로 가기는 또 싫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좀 더 버텨보기로 했다. 그래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봄을 맞은 3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가 44세 때 지은 ‘명농당(明農堂)’ 이야기를 할까 한다. 「어부가(漁夫歌)」의 작가로 알려진 이현보는 연산군, 중종, 인종, 명종의 네 임금을 모시고 ‘4대 사화(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를 거쳐 44년간 벼슬살이를 한 인물이다. 오랫동안 관직 생활을 했던 이현보에게 ‘농(農)’은 어떤 의미였을까? 귀향해서 귀농 생활을 잠시 생각했던 나, 전원생활이 좋아 귀촌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이현보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슬기로운 관직 생활,
가슴 속에 귀거래도(歸去來圖) 하나쯤 품고
몇 년 전 나는 예능 [삼시세끼]를 보며 금요일 밤을 보내곤 했다. [삼시세끼] ‘정선편, 어촌편, 산촌편’ 등은 도시 생활에 지쳐 시골집을 알아보지만,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들고 신경 쓸 것이 많아 포기한 사람들에게 대리만족을 할 수 있게 해 준 예능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 사는 것은 매한가지, 16세기의 이현보는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부르며 귀향의 꿈을 꾸지 않았을까?
관직 생활 중간 중간 부모님을 뵙기 위해 휴가를 얻어 안동을 찾곤 했던 효자 이현보는 1510년(중종5) 긍구당(肯構堂) 남쪽 가에 연못을 파고 그 옆에 명농당을 지었다. 집이 완성되자 그는 도연명의 「귀거래도(歸去來圖)」를 그려 붙이고 벼슬에서 은퇴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4년 후 그는 땅 넓고 백성이 많아 다스리기 어렵다는 밀양의 부사가 되었다. 인생이 어디 내 뜻대로 되던가?
명농당(明農堂)
용수산 앞 분천 모퉁이에
띳집 신축할 계획 없지 않았네
벼슬살이 십 년에 수염만 희어졌고
벽 가득 헛되이 귀거래도를 그렸네
이 시는 1514년(중종9) 겨울, 밀양에서 잠시 휴가를 내어 부모님을 뵈러 왔을 때 명농당 벽에 붙여둔 그림을 보며 그 감회를 쓴 시다. 그는 「명농당」 시의 서문에 ‘벽에 그린 그림은 아무 탈이 없으나, 박봉을 받는 지방 관리인 것은 예전과 같아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을까. 지금은 형편상 마음대로 할 수 없기에 우선 시 한 수를 읊어 벽에 붙이고 훗날 그 뜻을 성취할 수 있을지를 시험하려 한다’고 밝혔다. 이현보는 후에 ‘명농당은 내 몸을 위한 것이고, 애일당은 어버이를 위한 것이네’라고 「긍구당」 시를 썼다. 우리가 가슴에 사직서(辭職書)를 품고 직장을 다니듯, 그도 마음 한편에 귀거래를 꿈꾸며 명농당 시를 짓고 훗날을 기약한다. 그 모습이 지금의 우리와 어딘가 닮아있다.
명농당(明農堂)
명농당(明農堂) 편액
명농당 시에서 말한 분천은 이현보의 고향이다. 그는 1467년(세조13) 경상도 예안현의 분천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살았던 분천리는 현재의 도산서원 진입로 아래의 낙동강에 자리한 풍광 좋은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안동댐의 건설로 수몰되었다. 이현보가 그곳에 살게 된 것은 고조 이헌(李軒) 때부터이다. 그는 인제 현감을 지낸 아버지 이흠(李欽)과 권겸(權謙)의 따님이었던 안동권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광여도(廣輿圖)』(출처: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예안현〉에 보이는 애일당과 도산서원,
애일당이 도산서원 아래 위치한 것을 알 수 있다.
2023년 안동시 지도(출처: 네이버 지도) 안동댐 건설로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로 농암종택이 이건되었다.
그의 청소년기는 어땠을까?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은 이현보의 행장에 “뜻이 호탕하고 시원한 성격으로 사소한 것에 구애됨이 없고 사냥하는 것을 좋아하여 학업에는 그다지 힘쓰지 않았다”라고 했다. 공부보다 사냥을 더 좋아했던 그는 고향 산천을 맘껏 누비며 아름다운 자연에서 삶의 원동력을 찾은 듯하다. 후에 그가 조선의 강호가도(江湖歌道) 문학의 선구자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이현보는 벼슬길에 올라 40년 가까운 세월 관직 생활을 했다. 1498년(연산군4)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권지교서관(權知校書館)을 시작으로 이후 예문관 검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사서(司書), 호조 좌랑, 사헌부 지평 등을 지냈다. 이현보는 강직한 성품으로 임금 앞에서도 바른말을 고하기로 유명했다. 1502년(연산군8) 그는 사관의 자리가 임금과 너무 멀리 떨어져있어 자세한 내용을 기록하기 어려우니 자리를 좀 더 가깝게 배치해달라고 청했다. 연산군은 이때부터 이현보를 미워했다고 한다. 갑자사회가 일어난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은 사간원 정언인 이현보가 세자 교육에 대한 일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안동의 안기역으로 귀양보내기도 했다.
안기역으로 유배당한 몇 달 뒤인 같은 해 12월, 이현보는 다시 서울의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2년 전, 사관의 자리를 임금 가까이로 옮겨 달라고 청한 일을 재조사하라는 연산군의 명령 때문이었다. 이때는 갑자사화라 귀천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잡혀오고 고문으로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많은 때였다. 이현보가 살아남을 확률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압송된 지 70여 일 만에 감옥에서 석방되어 유배지인 안기역으로 다시 되돌아갔다.
어떻게 된 일일까? 이현보와 함께 감옥에 있던 사람 중에는 궁궐의 호위병이 있었다. 연산군은 근무태만으로 잡혀온 호위병을 석방하라고 죄수 명단에 점을 찍었는데 사실은 이현보의 이름 위에다 점을 찍었다. 연산군은 그의 이름은 잊어버리고 다만 ‘얼굴이 검붉고 수염이 난 자’ 인 것만 기억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목숨을 건진 이현보는 1507년(중종1) 다시 조정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다음 해에 호조 좌랑을 거쳐 관리들의 비행을 감독하고 고발하는 사헌부 지평으로 승진하였다. 이 때 이현보는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바른 말을 잘 했던 까닭에 ‘소주도병(燒酒陶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겉모습은 질그릇처럼 거무스름하지만 내면은 소주처럼 맑고 엄하다는 의미였다.
이현보 초상(출처: 문화재청)
이현보는 스스로 외직을 자처하며 관직생활을 이어갔다. 영천 군수, 밀양도호 부사, 충주 목사, 안동대도호 부사, 성주 목사, 대구 부사, 평해 군수를 거쳐 경주 부윤과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는 동안 여러 차례 가장 우수한 지방관으로 선정되어 포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향교를 재정비하고 향음주례와 향사례를 거행하고 양로연이나 노인회를 자주 열어 효도를 권장하는 등 교육과 도덕의 진흥에 초점을 두고 고을을 다스렸다. 소문난 효자였던 이현보는 부모님을 모시기 편하도록 안동 부사로 재직할 때도 있었지만 사사로이 친척과 친구들이 그를 찾아 갈 생각을 못할 정도로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여 청백리에 올랐다.
귀거래를 꿈꿨으나 오랫동안 관직 생활을 이어나간 이유는 뭘까? 표면적으로는 부모 봉양을 위한 경제적인 이유였겠지만 그 이면에는 그의 관직 생활 자체가 부모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선반가(宣飯歌)
먹기도 좋을시고 승정원 선반이야
놀기도 좋을시고 대명전 기슭이야
가기도 좋을시고 부모님 향한 길이야
이 시는 이현보의 어머니, 권씨 부인께서 쓰신 국문시가이다. 1527년(중종22) 승정원 동부승지가 된 이현보는 이듬해 2월 휴가를 얻어 어버이를 뵈러갔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온다는 소식에 노래를 짓고 여종에게 가르치며 말씀하시길 “승지가 오거든 이 노래를 불러라”고 했다. 아들이 승지가 되어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게 된 기쁨이 얼마나 컸으면 이렇게 노래까지 지어 불렀을까? 그는 「애일당희환록(愛日堂戱歡錄)」에 이때의 일을 떠올리며 ‘가장 즐겁고 기뻤던’ 때라고 말했다. 때때옷을 입고 부모 앞에서 춤을 추며 재롱을 펴고 부모 입에 맛난 음식을 넣어드리는 것도 효도이지만 이렇게 벼슬살이를 하며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드높이는 것 또한 효임을 그는 일찍이 알았던 것이다.
애일당(愛日堂 )
강각(江閣)
일흔이 넘은 고령의 나이에도 관직 생활은 계속되었다. 이현보는 여러 차례 사직서를 올렸지만 중종은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1542년(중종37) 그의 나이 76세 되던 해, 더 이상 그를 붙잡아두는 것은 무리라 생각한 중종이 동지중추부사라는 산직[散職, 실제로 근무는 하지 않은 벼슬]을 주어 그가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이현보가 원한 것은 벼슬에서 완전히 물러나 은퇴(隱退)하는 것이었지만 중종이 바란 것은 궁에서 다시 그를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종의 조건부 휴가를 준 것이다.
1542년 7월 3일
동지중추부사 이현보(李賢輔)가 병 때문에 전리(田里)로 돌아가고자 하니, 급유(給由)하라고 전교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 98권
임금은 그에게 급유[給由, 관리에게 휴가를 주는 것]하라 전교했지만 그와 함께 근무했던 조정대신들은 이것이 그의 마지막임을 알기에 한강의 제천정(濟川亭)에서 송별연을 열어 그를 배웅했다. 이황과 동향 사람들은 그를 위해 따로 전별연을 열었다.
벼슬에서 물러나려 함은 임금님 은혜를 잊어서가 아니고
연세가 많으니 스스로 고향의 산천을 사랑함이 합당하다네
한 고장의 벼슬아치들이 모여서 선생을 전별하니
이품 벼슬로 사직하니 연세와 덕망이 모두 높다네
……(이하 생략)……
이현보를 위한 이황의 전별시이다. 이황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한 전별시(餞別詩)를 썼다. 이황은 “우리 고향의 참판 이 선생이 휴가를 받아 귀향하니, 이를 통해서 은퇴하려는 것이다, 조정에 벼슬하는 고향 사람들이 선생의 둘째 아들 집에 모여 전별하기에 근체시 한 수를 지어 올렸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참판 선생’이라고 호칭한 것만 보더라도 이황이 그를 얼마나 존경했는지 알 수 있다. 인생 2막, 그의 은퇴 후의 삶은 어땠을까?
슬기로운 은퇴 생활,
「어부가」를 부르며 퇴계와 우정을 나누다
이듕에 시름업스니 어부(漁夫)의 생애(生涯)이로다
일엽편주(一葉片舟)를 만경파(萬頃波)에 ᄠᅴ워두고
인세(人世)를 다 니젯거니 날가ᄂᆞᆫ 줄을 아는가
이 시는 강호가도의 창시자로 일컫는 이현보의 「어부단가(漁夫短歌)」 중 제1수다. 과거의 학력고사, 현재의 내신과 수능, 공무원 시험 등에 고전시가 문학 부분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시다. 조선의 시가 문학 중 강호가도[江湖歌道, 자연을 예찬하고 자연과 더불어 살 것을 노래하는 시가문학]는 대부분 한시로 계승되고 심화되어 왔는데, 이 시는 강호문학의 전통을 국문시가에 수용하여 이를 우리 현실에 맞도록 변형시켜 후에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에도 영향을 미치는, 문학사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다.
농암종택 17대 종부가 빚어 만든 〈일엽편주〉
(출처: http://www.ellyeoppyunjoo.com/)
사실 이현보가 「어부가(漁夫歌)」의 원작자는 아니다. 원래의 「어부가」는 고려 시대까지 널리 불려진 노래였으나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점점 잊혀진 노래였다. 사라져 가던 「어부가」를 이현보의 손주 사위인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이 밀양에 사는 박준이라는 사람이 편찬한 노래책 속에서 발견하여 이현보에게 보내준 것이다.
이현보는 황준량이 구해 온 장·단가 「어부가」를 각각 수정하여 장가 9장과 단가 5장으로 만들었다. 그는 「어부가」의 서문에 ‘이것을 얻은 뒤로 그 전에 즐겼던 가사(歌詞)를 모두 버리고 오로지 여기에 마음을 두었다. 직접 책에 써서 꽃이 핀 아침이나 달이 뜬 저녁이면 술을 들고 벗을 불러 분강의 작은 배 위에서 노래하게 하니 흥취가 더욱 진솔하여 갈수록 게으름을 잊었다’라고 밝히며, 잘라내고 고쳤을 뿐 아니라 덧붙인 부분도 있다고 했다. 그가 얼마나 「어부가」를 즐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83세의 나이로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개작하고 가까이 지내는 이황에게 ‘나의 시구는 견문이 넓지 못하여 고칠 곳이 많은데 그렇게 하지 못했네. 부디 보고 취사하고 고치고 보태서 돌려보내는 것이 어떻겠는가?’라며 개작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그 모습이 존경스럽고 멋있다.
우리 농암 이 선생이 나이 일흔이 넘어 관직을 그만두고 분강 물가로 물러나 한가로이 지내며 여러 번 임금이 불러도 나아가지 않고…. 늘 작은 배를 타고 짧은 노를 저으며 안개 낀 물결 속에서 한껏 읊조리고, 낚시 놓던 바위 위를 배회하며 갈매기를 벗하여…. 잘라내고 고치고 덧붙여서 모시는 아이들에게 주고 익혀 부르게 했다.
이것은 이황이 쓴 「어부가」의 발문이다. 이현보와 이황의 숙부인 이우는 절에서 함께 과거 공부를 하여 문과에 동방급제(同榜及第)한 죽마고우였다. 생후 7개월에 아버지를 여읜 이황에게 부친이나 다름없었던 이우는 49세에 병으로 돌아가시고 이때 이황은 이현보를 의지하며 가깝게 지냈다. 게다가 이현보의 둘째 아들 이문량(李文樑, 1498~1581)과 셋째 아들 이중량(李仲樑, 1504~1582) 역시 이황과는 친구 사이이며 특히 이중량과 이황은 동방급제하여 두 집안의 깊은 인연이 계속되었다. 이현보와 이황은 서른 살 이상의 나이 차이임에도 편지와 시를 주고 받으며 서로를 존중하고 아꼈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 영지사(靈芝寺), 월란사(月瀾寺)를 유람하고 만년에는 주로 임강사(臨江寺)에서 지냈다. 때로는 가벼운 배와 짧은 삿대로 강을 오가며 「어부가」를 불렀다. 경치 좋은 곳에 가면 이현보는 이황을 생각하며 시를 지어 보내고 그를 초대하여 함께 지냈다.
병에서 일어나 퇴계에게 읊어 드리다
봄바람 몰아쳐서 꽃이 다 떨어졌는데도
반도(蟠桃)는 신선이 돌보아 아직 많이 남았네
어지러이 땅에 떨어져 붉은 비단 펼친 듯하고
찬란하게 가지에 남아 푸른 비단을 비추네
재촉하는 갈고(羯鼓) 소리에 나무 잡고 춤추고
가득한 유리 술잔에 얼굴이 불그스레하네
해마다 이 모임을 서로 어기지 말아서
삼천 년에 한 번 맺는 반도 기다림이 어떠랴
1555년(명종10) 4월 10일, 이현보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쓴 시다. 그는 이황에게 이 시를 보내며 ‘월란사(月瀾寺) 철쭉 모임을 나를 위해 미룬다고 하는데, 나는 늙었으니 이제는 제외하라’로 전했다. 다만 ‘이번만은 전날 약속한 것이 있기에 병든 몸을 이끌고 가볼까 한다’고 했다. 이에 이황은 ‘선단에 꽃이 피고 햇빛도 아름다우니, 천 년 세월 봄 광경은 이때가 좋네요’라고 차운(次韻)하며 그의 시에 답했다.
여든이 넘어도 강건하던 이현보는 학질에 걸려 병이 위독했다. 이때 이황은 나라 걱정하는 그를 안심시키고 마음을 풀어 주었다. 같은 해 6월 13일, 그는 ‘내 나이 90이 되어 나라의 두터운 은총을 입고 너희들도 모두 있으니 유감이 전혀 없다’는 말을 남기고 긍구당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89세였다.
긍구당(肯構堂)
긍구당(肯構堂) 편액
5도 2촌은 어떨까?
그해 봄, 동네 어르신께서 일러주신 방향으로 밭고랑을 다시 만들고 검은 비닐이 씌워진 이랑에 아이와 함께 고추, 오이, 가지, 방울토마토, 상추, 양배추 등을 심었다. 그 후, 해질녘이 되면 작은 물병과 조리개를 든 장화 신은 아이들이 엄마를 따라 졸졸 텃밭을 향해 가는 모습들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한때 잠시 귀향을 생각했던 나와 남편은 빌라의 텃밭을 가꾸며 전원생활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동안 주말마다 이곳 근처의 시골집을 구경하고, 땅을 보러 다녔다. 하지만 여러 현실 앞에서 우리는 그저 마음속으로만 여러 채의 집을 지었다.
최근, ‘5도 2촌’ 생활을 하는 직장인 김미리의 『금요일엔 시골집으로 퇴근합니다』를 읽었다. 아, 일주일에 ‘5일은 도시, 2일은 시골’ 이렇게 살아도 되는구나 싶었다. 그러고보니 퇴직을 앞두고 계신 우리 팀 선생님도 지금 ‘5일은 직장, 2일은 밭’, 다른 공간에서 생활하고 계신다. 지금쯤 선생님 밭에는 양파와 마늘이 추운 겨울을 견디고 연둣빛의 여린 싹이 땅을 뚫고 올라올 것이다. 그리고 선생님은 씨감자를 심고, 고추, 상추, 토마토를 작은 육묘 상자에서 길러 낼 것이다. 하지만 꽉 찬 일주일을 보내면 힘들지 않을까?
씨를 심고 작은 텃밭을 일구는 그 시간은 어쩌면 지친 나를 위로하는 ‘쉼’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우리에게 위로와 쉼의 공간이 필요하듯, 이현보 역시 그런 곳을 원했던 것은 아닐까? 사실 ‘명농(明農)’의 의미는 중국 주나라 주공(周公)이 낙읍에 귀로할 뜻을 밝히며 성왕(成王)에게 고한 말이다. 『서경(書經)』 「낙고(洛誥)」에 “이내 몸은 이제 농사일이나 밝히리니, 그곳의 우리 백성이 부유해지면 먼 곳에 있는 백성들도 모두 모여들리라.”고 한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명농당은 임금을 떠나, 낙향해서도 백성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목민관의 마음이 담겨있다. 나는 여기에 덧붙여, 명농당은 그에게 있어 내직(內職)과 외직(外職)의 벼슬살이와 부모 봉양 사이에서 온전히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같은 공간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이현보가 경치 좋은 명농당을 짓고,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며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은 소망을 편액의 이름으로 담은 것은 아닐지….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 바로 이런 것이리라. 농암의 국문시가 중 문학적 가치가 뛰어난 「농암가(聾巖歌)」를 봄 선물로 전한다.
농암(聾巖)애 올라보니 노안(老眼)이 유명(猶明)이로다
인세(人世)이 變ᄒᆞᆫᄃᆞᆯ 산천(山川)이 ᄯᆞᆫ가설가
암전(巖前)에 모수모구(某水某丘)이 어제 본ᄃᆞᆺ ᄒᆞ예라
농암가(聾巖歌) 비(碑)
정 리
이복순 (한국국학진흥원)
자 문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참 고
1. 한국의 편액 (https://pyeonaek.ugyo.net)
2. 조선왕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
3.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https://kyudb.snu.ac.kr/)
4. 제4회 기탁문중 특별전-영천이씨 농암종택, 『때때옷의 선비』,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 2008.
5. 이현보 저, 장재호·김우동 역, 『농암집』,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국학진흥원, 2019.
6. 권진호, 『안동의 유교현판』, 민속원, 2020.
7. 한국국학진흥원소장 국학자료목록집, 『영천이씨 농암종택 애일』, 한국국학진흥원, 2022.
8. 주승택, 『선비정신과 안동문학』, 이회문화사, 2002.
9. 서철원, 『고전시가수업』, 지식의 날개, 2022.
10. 김미리, 『금요일엔 시골집으로 퇴근합니다』, 휴머니스트,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