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적인 하나님(그분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인간 존재의 목표이다)을 제거해 버린 후 계몽주의적 세속주의는 문화를 이교주의로 되돌려 놓았다. “수명이 다한 한 신의 장례식에 하늘로부터 신들의 비가 내렸다”(콜라코프스키). “서구는 하늘의 빈 공간을 채우려 수 있을 만큼의 만신전(萬神殿)을 일으켜 세웠다”(해링톤). 전통적인 신의 죽음이 애도되고 있을 때에 새로운 신들이 날개를 접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신들은 민족, 인종, 물질주의, 전체주의, 국가라는 신이었다.
뉴에이지 운동의 뿌리들
신지학(神智學)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에 따르면 “모든 신지학적 사색은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경험되어져야만 한다는 신비주의적인 전제 위에 서 있다”(이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이며 비매개적이며 직관적인 만남을 추구했던 중세 신비주의자들의 논리와 동일하다. 루터가 말한 대로 ‘벌거벗은 하나님’을 목격하고 접촉하고자 했다).
블라바츠키는 1875년에 신지학 협회를 세웠다.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을 보면 신지학이란 고대 그리이스의 피타고라스와 플라톤, 영지주의자였던 시몬 마구스와 발렌티누스, 신플라톤 철학자인 플로티누스와 프로클루스, 중세 북유럽의 신비주의자들이었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쿠사의 니콜라스, 르네상스 시대의 사변적 신비주의자였던 파라셀수스와 지오르다노 브루노, 독일의 철학적 신비주의자였던 야콥 뵈메, 그리고 독일의 낭만주의자였던 쉘링 등의 사상가들에게서 발견되는 신비적 사상 흐름을 가리킨다. 그리고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은 이렇게 끝맺고 있다. “그러나 신지학적 견해들의 가장 풍부하며 가장 심원한 사상적 원천은 인도 사상으로서 일찍이 베다 경전으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인도 사상이다.”
기억해야 할 사실은 신약성경과 초대교회가 단호하게 반대하였던 사상은 영지주의와 그리이스의 형이상학이었다는 것이다.
이원론
이러한 모든 운동이 가지고 있는 한 가지 공통점은 그 운동들이 다 “이원론적”이라는 사실이다. “선”과 “악”으로 이분하는데 이는 보통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의미한다. 조로아스터교는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주도권 다툼을 하고 있다고 본다. 동양의 종교들 역시 귀신들과 영들의 세계에 대한 이원론적인 편견을 심하게 가지고 있다. 물론 기독교에도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으며 귀신도 인격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귀신은 “악한 신”이 아니다. 귀신조차도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으며 좀더 큰 목적을 위하여 언제 어느 곳에 악이 존재하도록 허용할 것인가를 결정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기독교는 “하늘에서의 정사와 권세들의 싸움”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영적인 싸움을 신학의 중심 주제로 삼지는 않는다.
능동적 허무주의와 새로운 불교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능동적 허무주의가 유행했던 것을 보았으며 이제는 새로운 불교가 등장하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뉴에이지 운동, 물병좌 자리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신비적 경험에 대한 내적인 여행은 헐리우드의 은막의 스타들과, 화려한 천을 두르고 공항에서 뉴에이지 호객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나 캘리포니아의 마린 카운티의 주민들만의 기괴스런 취미가 아니다. 다른 분야들의 책들은(특히 심리학의 경우) 대중적인 시장을 목표로 하여 자기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들을 뉴에이지 운동에까지 밀고 나가고 있다.
뉴에이지 운동은 얼마나 광범위한가?
과학 기술이 아닌 우리의 지식과 철학과 도덕적 전망은 암흑시대로 되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과학을 전공하는 사람들 안에서도 그들의 학문적인 합리주의를 우상과 맞바꾸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의학, 사업, 심리학, 연예, 오락, 정부, 교육 등이 뉴에이지 생각들을 도입하고 있거나 검토하고 있다. 지적인 써클 내에서 신비주의를 정죄하는 것은 사실 위험한 일이 되었다. 지식인들이 반물질주의적인, 반합리주의적인, 아니 초합리주의적인 전망에 상당할 정도로 경도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신비주의를 반대하는 일보다 합리주의를 반대하는 일이 더 쉽게 되어 있다. 계시를 없애버린 다음 서구 문화는 이성도 포기해 버렸다.
신비주의가 더 이상 소수의 기인들의 취미가 아님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미신이 과학자이든지 역사가이든지 경제학자이든지 정치가이든지 교육가이든지 종교가이든지 많은 새로운 사상가들의 상상력을 장악하였다. 1960년대의 히피들은 1990년대의 여피들이 되었는데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히피시대 때의 초월주의를 그대로 가지고 왔다.
몇 라운드를 뛰는 동안에(알미니안주의에서 이신론으로, 이신론에서 유니테리언으로, 유니테리언에서 낭만주의로, 낭만주의에서 초월주의로, 초월주의에서 실존주의로, 실존주의에서 뉴에이지 폭발로) 우리는 우리의 기독교 신앙에 계속적인 연타를 당했다. 우리는 문화에 도전하기보다는 문화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메시지에 물을 타서 순하게 만듦으로써 그 길을 도와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복음을 잘 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 대신에 이미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을 값싸게 흉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복음주의적인 케직 사경회 운동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고결한 삶”- 좀더 높은 삶, 경건한 삶, 단수가 높은 삶을 살도록 요청하고 있듯이, 뉴에이지 운동은 “좀더 높은 의식”- 고상한 의식으로 고양시키도록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다. 지난 세기 말에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고군분투하였던 프린스톤 신학교의 신학자 위필드는 케직 사경회 안에 있는 신비주의적이고 신지학적인 영향들을 발견하고 경각심을 발동시켰다. 그리고 달라스 신학교의 설립자인 루이스 스페리 체이퍼(초대 교장이었으며 조직신학자였다)에게서도 중세 신비주의와 초월주의적 신비주의에서 볼 수 있는 이원론적 인간론을 발견할 수 있다.(그의 책, <신령한 사람>)
영적인 테크놀로지
실용주의와 소비자 중심주의에 덧붙여서 자기 성취 프로그램과 주관주의가 사회 일반 도처에 침투하게 되자 그 결과 “영적인 기술학”(spiritual technology)이 생겨나게 되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기독교)과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주술)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되었다.”
뉴에이지 운동은 과학과 주술의 혼합을 약속하고 있다. 그와 같은 운동에 복음주의자들이 성급하게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패트 로버트슨은 “정신이 물질을 지배하는 법입니다. --- 그리고 마음은 그 정신이 들어올 수 있는 궁극적인 통로입니다. 다른 말로 말해서 당신이 축복을 고백하고 은총과 승리와 성공을 고백하면 그러한 것들이 당신에게 임하게 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전히 아프고 가난에 찌들린 사람들의 경우는 그들이 말하는 요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거나 이 주요 원리들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주요 원리들이란 “번영의 법칙들”이라고 그가 부르는 것이다.
이런 유의 말들은 신오순절의 진영에서 아주 많이 나오는 말인데 어디까지가 오순절 운동이고 어디부터가 뉴에이지 미신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은 때가 대단히 많다. 이 두 집단은 정신의 영역, 소위 말하는 영적 세계, 영계에 너무나도 사로잡혀 있어서 기독교적이 아니며 이원론적이며 이단적인 신비주의이다. 이것이 바로 주술, 즉 “영적 테크놀로지”, 사이비 과학과 사이비 종교의 혼합이다. 그 주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다.
19세기의 형이상학적 신지학적 사교 집단과 현대 신오순절 운동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결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 내용 면에서 영적인 테크놀로지, 실재를 창조하는 것에 대한 신오술절파의 강조는 에머슨이나 써로우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하다. 예를 들어서 오순절 계통의 초대형 교회의 어떤 목사는 어떻게 한 그리스도인이 자기 자신의 실재를 창조할 수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 4차원은 3차원을 포함하여 3차원을 통제하느니라’ --- 우리가 그 잠재의식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상상력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 비전을 가지고 꿈을 가짐으로써 여러분은 여러분의 미래를 키울 수 있으며 그 결과를 얻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제 4차원의 세계>) “여러분이 여러분의 입으로 예수님의 임재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 예수님은 여러분의 입술과 말에 매여 있습니다.”(앞의 책)
결론
뉴에이지 운동은 뉴잉글랜드의 프로테스탄트 정통이 무너져 내린 후에 미국의 종교가 취한 방향의 결과이다. 마침내 몇 차례의 성공적인 출발을 해본 후에 많은 미국인들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될 것이라”(창3:5)는 루시펴의 거짓된 약속에 매달려 다시금 에덴 동산의 (타락한) 첫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공생애 사역시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였다”(마7:29)는 경탄을 받았다. 예수님은 항상 말씀하실 근본적인 무엇인가를 가지고 계셨다. 이것은 정치적 의미에서 래디컬(급진적)하다는 것이 아니고 궁극적 의미에서 래디컬(근원적)하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결코 정치적인 일정을 설파하신 적이 없지만 예수님의 초월적이며 신학적인 초점이 있는 메시지는 믿기 어려운 정치적인 결과들을 내었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셔야 했던 말씀들을 좋아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들은 예수께로부터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들어 왔던 것들이 아닌 무엇인가 심원한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있었다.
뉴에이지 사람들과 접촉했던 한 친구의 말에 따르면 뉴에이지 지도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전엔 근본주의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질문도 없이 또 생각도 없이 그저 믿어야 할 것들을 듣고만 앉아 있는 일에 진저리가 났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떼어 놓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규율들과 기대에 싫증이 났다. 정죄와 비난과 교조주의에 넌더리가 난 많은 사람들은 뉴에이지에서 치유를 발견하게 되었다.
최근의 한 조사에 의하면 뉴에이지에 빠진 사람들의 높은 비율이 개신교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갤럽 여론 조사는 “피상적인 기독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경각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응답자들은 “신앙의 기본들을 다루어” 줄 능력이 없는 “천박하고 피상적인” 교회 생활에 환멸을 느꼈다. 우리가 의미 있는 대답을 해줄 능력도 없고 세상을 의미 있게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지도 못하는데, 다음 세대가 기독교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또 인생의 깊은 문제들에 대한 합리적인 답변들을 기독교에서 얻게 될 것이라고 어떻게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