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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적 선택 에베소서 1:3-14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관점은 무엇일까요? 이것을 바로 알아야 우리의 신앙의 중심을 잡고 바로 세울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오실 예수님에 대하여, 신약 성경은 오신 예수님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러면 왜 성경이 필요할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무엇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려고 하였을까요? 이것을 아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 때문에 이 땅에 오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택한 자’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구원을 받습니다. 믿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존재를 구원하실까요? 천지만물 중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인간’입니다. 인간만이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나 개나 동물들에게는 영생하는 영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도서 3:21을 보면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고 하였습니다. 위는 하늘나라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계신 천국입니다. 아래는 땅 속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즉 땅 속에 묻히는 혼은 소멸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을 믿고 죽은 사람의 영혼은 천국에 가지만, 믿지 않아서 천국에 가지 못하는 영혼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영혼은 지옥에 갑니다. 천국에 간 믿는 자의 영혼은 영원토록 하나님 앞에서 기쁨 속에서 찬양하고 지내게 되지만, 지옥에 간 영혼은 그 불타는 불 구덩이 속에서 신음하면서 역시 영원토록 살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한 순간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내가 언제 커서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고등학교도 졸업하고, 대학교 들어가고,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애기 낳을까? 지나고 보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립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삶을 바람과 같고, 그 길은 나그네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 택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사람이 태어나기 전부터입니다. 영생할 사람과 멸망할 사람을 택하여 정하여 놓으셨습니다. 이 작정은 아담 안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졌으나 그 기회를 상실한 이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가리킵니다. 타락한 결과 인간들은 죄가 있고 부패되었고, 이런 죄인의 동기는 사곡해졌기 때문에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자비를 요청할 권리까지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불순종의 죄로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이 이 죄 벌에서 구원 되어 행복과 성결의 자리로 이끌림을 받고,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 본래의 멸망 상태 그대로 방치되어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게 됩니다. 불신자들이 지옥에 가는 것은 결코 부당하지 않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의 작정에 의하여 또한 그의 영광을 위하여 어떤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생을 얻도록 예정되고 어떤 자들은 영벌을 받도록 예정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정된 천사들과 사람들은 정화하고 불변적으로 계획되고 그 수효는 완전하게 확정되었고 이미 결정되었기 때문에 조금도 더하거나 덜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예정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의 영원 불변하신 목적과 오묘하신 계획과 기쁘신 뜻대로 영생하기로 예정된 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고, 이 선택은 피조물 속에 예견되는 신앙이나, 또는 착한 행실이나 그 어떤 것으로 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택함을 받은 사람들은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다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구속을 받는데, 때가 되면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으로 부름을 받아서 의롭게 됨을 얻고, 하나님의 거룩한 양자가 되고, 거룩하게 변하여가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택함을 받은 자 외에는 아무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되거나 부르심을 받거나 의롭다 하심을 얻거나 양자가 되거나, 성화가 되거나 구원을 얻는 자가 없습니다.
이러한 선택 교리, 무조건적 선택에 대하여 명백하게 깨닫는 것은 아주 신앙에 있어서 아주 중요합니다. 이 교리를 통해서 하나님, 인생관, 세계관, 구속관 등이 결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하나님은 구별 없이 아무에게나 구원의 소망을 주시지 않으며 이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는 구원을 저 사람에게는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영원선택의 교리를 완전히 이해하기 전에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의 샘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선택교리는 과연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엡 1:4-5에서는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29-30에서는 영원으로부터 영원까지 이르는 구속의 고리(chain)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 “미리 아신 자, 미리 정하신 자, 부르신 자, 의롭다 하신 자, 영화롭게 하신 자”는 모두 동일한 사람입니다. 이 단어들을 보면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과거형”이라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3단계로 시간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 단어들이 과거로 쓰여 있다는 것에는 무슨 뜻이 담겨 있지 않을까요?
여기에는 하나님의 속성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작정하시거나 혹은 예정하시거나 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들은 어떤 일을 계획하지만, 그 계획이 언제 변할지 모릅니다. 계획대로 실천해나가지만 어떤 상황이 발생하여 망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목적을 두고 계획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시고 마시는 분이심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구원의 확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이미 구원을 받은 존재임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아멘! 이 말씀도 과거형입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얻었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고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지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칭찬과 상을 받는 것입니다.
더욱 더 감사할 일은 무엇일까요? 내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9:11-13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의 아버지 대에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택하시고 이스마엘은 물리치셨습니다. 야곱이나 에서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정해졌습니다. 그들이 태어나서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이미 정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명백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구원을 얻는 일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는 것도 아닌 것을 알 수 있고, 또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는 것도 아니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토기장이가 자기의 소원대로 진흙을 빚어서 소용대로 그릇을 만드는 관계와 유사합니다. 여기서 잠깐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볼까요? “너희의 패리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봅시다. 만든 사람이 능력이 있나요 아니면 만들어진 물건이 능력이 있나요? 당연하지요. 만든 사람이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이십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께 그 어떤 불평이나 원망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방 종교는 어떤가요? 사람이 어떤 형체를 만들었습니다. 이 형제는 돌에다 새긴 것도 있고, 나무를 깎아 만든 것도 있고, 쇠붙이를 부어서 만든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만든 사람이 그 만들어진 것에 대고 ‘신이여 복을 주세요.’이렇게 기도합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주객이 전도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들어진 물건이 만든 사람에게 ‘신’이라고 불러야지 어떻게 만든 사람이 자신이 만들어 놓은 물건에게 ‘신’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바로 이런 것이 이방 종교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방 종교가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요한복음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내가 예수님을 믿겠다고 택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겠다고 택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 택하였습니까? 주님께서 택해주셨습니다. 내가 착해서 택하셨을까요? 내가 공부를 잘해서 택하셨을까요? 나는 나쁜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 택해주셨습니다. 나는 못난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 택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5:8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악한 죄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택해주셨습니다. 사람을 택하시고 그로 하여금 자기에게 가까이 나아오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시 65:4). 할렐루야!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보면, 정말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는 성도가 얼마나 될까? 하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 최고의 암흑시대에도 다른 모든 시대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열왕기상 19:18을 보면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7천명의 사람은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견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남은 백성’으로 보존하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 곧 선민들을 의하여 역사의 모든 과정을 통치하고 계십니다(막 13:20). 그들은 세상의 소금과 빛입니다. 그러므로 세계 역사상 그들은 비록 소수지만 그들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 때문에 보디발의 집에 복을 주셨으며, 소돔성에도 의인 10명만 있었다면 그 성을 구원하였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착한 사람이나 신앙이 있는 사람이나, 순종하는 사람을 뽑으셨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스스로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들만을 선택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만 뽑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 사람의 방식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또 이런 문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좋아하고 순종하는 사람을 뽑았는데, 이들이 하나님을 싫어하고 불순종하면 이들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이 될 수 있겠느냐 이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신 즉 누구는 긍휼히 여기시고, 누구는 그냥 내버려두시는 이유에 대해 구태어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하나님의 구원의 긍휼을 받지 못한 사람들) 누가 그 뜻을 대적하겠느냐? 라는 반대론자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 9:19-21)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진흙이 아니라 같은 진흙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도공으로서 같은 진흙을 가지고 하나는 귀한 그릇으로 다른 하나는 천한 그릇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의 뜻을 캐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천사들도 떨면서 알아보고자 하는 하나님의 감추인 뜻은, 그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라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욱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요? 내가 여기에 있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 먼저 찾아오셔서 우리의 마음에 성령으로 감동시키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게 하셨고,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