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려, 그 속을 가봤다 외 3편
이 명 훈
칼은 평소에 칼집에 들어있어야 하고
짐승의 뿔은 평소에 공기의 집에 들어 있다.
뿔을 잘라 만든 잔에 화주 부어 마시고 싶도록
비가 내리고 있다.
뿔은 칼로 자르기 전 아득한 시절엔
돌을 날카롭게 벼려 잘랐을 것이다.
돌의 서러운 힘이 배인 뿔잔
나처럼 이름 없는 친구는 저만치서 뿔로 만든 나팔을 불고
누구는 뿔을 자르고
함께 사냥해 온 뿔 달린 짐승은 풀섶에 죽은 형제인 듯 뒹굴고
빗소리와 뒤섞인 불 소리 속에 서러운 탕이 끓는다.
형제의 몸에서 나온 뿔 악기에서
가슴에 별 조각 부딪는 소리가 우러나오는
불과 비, 어둠의 뜨거운 시간
친구처럼 이름 없는 나는 뿔잔에 별빛과 불, 빗소리를 섞어 마신다.
무기와 집 따로따로인 칼 따위가 닿을 수 없는
붓도 펜도 닿을 수 없는
너무 아득하여 잴 수 없는
뿔과 뿔이 서게 이는 그 어둠, 그 밤.
화엄
꽃이었던 바늘에 일부러 찔려봤다.
저 꽃, 도깨비바늘은 바늘을 통과해야
다시 늙은 화엄에 도달할 수 있다.
헐렁한 옷에 박혀 하필 내 행려에 얽혔다.
그대는 우연찮게 병든 화엄을 통과하겠지만
화엄은 내 일이 아닌 도깨비들의 일.
전제의 무게를 달다
생선을 올리면 비린내였고, 쌀을 머리에 이면 다랑논 귀퉁이 한 평 남짓 물에 뜬 달이었다.
진주 터미널 앞 중고 저울 가게에는 이곳저곳 떠돌다가 온 저울들이 서로가 서로를 이고 있다.
햇살에 눈금을 찡그리며 서로의 이력을 재고 있다. 상실은 내 삶을 관통했다.
어딘가로 가기 위해 떠돎, 잠시 서성임의 무게는 어디에서 오는가. 떠돌다 떠돌다 내상을 입은 문명의 무게는 눈금이 사라졌다.
행인들의 건조한 시선은 마른 우물, 그 염치는 그래도 무거우니 저울은 피하고 싶겠다. 문명의 전제는 뒤틀렸고, 상실만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내 상실이 어디쯤에서 왔는지를 저울은 알고 있었다.
밤은 훌륭한 저울, 죽음은 절대의 저울, 저울은 저울을 잃어버렸다.
강과 바다
물과 물이 서로 바라본다
강이 강으로 가네
바다가 바다로 가네
바다가 바다가 아닌 듯 강이 강이 아니네
강의 얼굴을 하고
바다의 얼굴을 하고
강의 뒤척임으로
바다의 비틀거림으로
물끼리 부딪혀 새하얗다, 현기증
요양소에 도착한 당신은 바다야, 강이야
남남이 된 나와 당신
당신 간병하다 가슴 뭉그러진 서른 넘은 당신 딸, 나의 딸
바다가 바다를 끌고 바다로 가네
강이 강을 몰고 바다로 가네
물결이 물결의 손을 잡고 요양소로 들어가네
물과 물이 서로 인사하네
등단시
검은 폭설
추락하는 펀드매니저는 운명을 손가락 끝에 건다
블랙 먼데이에서 프라이데이까지
시간은 검은 칠로 보디페인팅 한다
닉 리슨이 니께이 선물로 베어링 사를 망가뜨릴 때
나는 주식회사 대우의 해외 DR을 팔아먹으려고
자정 너머까지 일했다
사무실 창 밖 검은 하늘에 뜬 달
주루룩 흘러내리는 블루칩
미수에 걸려있는 심장이 조여온다
몸에서 몸으로 흐르는 검은 전류
깊고 아프게 패일수록 독한 자장도 그곳에 고인다
그 취기로
페달을 돌려대는 브로커들
비틀거리는 황금뿔 자전거는 가파른 내리막길 지나
안착할 수 있을까
닳아빠진 바퀴와 고장난 브레이크를 달고
블랙 먼데이에서 프라이데이까지
번갈아 피는 꽃들
사무실 창 밖
주말에는 검은 폭설이 내릴지 모른다
대표시
은종
비명을 지르는 밥그릇 앞에 서 있다.
종처럼 웅웅거릴 때, 그 소리는 고독했지만 나는 감정을 누르고 있었다.
캘커타 마더하우스에서 죽음 앞에 놓인 행려병자의 밥그릇, 은으로 빚은 종 같았다. 욕지거리, 부서진 말, 신음이 흰 밥알과 뒤섞이고 공명되어 은은한 소리로 사라지고 참새 두 마리가 따라 날아갔다.
종소리를 좇아 보이지 않는 것들이 얼마나 지나갔을까.
끝도 시작도 없는 길, 별빛과 허기, 돌팔매질과 마작, 율려의 빛도 더러 묻었다가 빗물에 씻겨 떠내려갔다. 은종이 내던져져 부딪힌 벽에선 노잣돈인 듯, 나는 은종으로부터 탈출, 다시 행려가 시작되었다.
기이한 종소리가 느린 걸음으로 앞섰다.
산문
마음이 머무는 곳과 문학이라는 밀도
풍경 속엔 무엇들이 들어 있을까. 바닷가의 포장마차에서였다. 혼술을 하다가 나가려는데 다른 한 곳의 테이블 분위기가 왠지 이국적이면서 낯설었다. 바람의 냄새나 나고 광활한 초원의 느낌이 있다고 할까. Where are you from? 호기심이 일어 간만에 영어로 묻자 몽고에서 돈 벌러 왔다고 한다. 몽고는 버킷 리스트의 한 곳이다. 반가운 김에 얼떨결에 합석까지 하게 되었다.
나이를 물어보니 이십 대 후반이다. 내 둘째 딸보다도 어렸다. 그의 곁엔 또래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내 눈치를 살피더니 청년이 자기의 연인이라고 했다. 나는 그 테이블의 술값을 내주고 싶다고 말했다. 치기라면 치기겠지만 아직 남아 있는 낭만과 풍류, 자식 또래에 이국에서 고생하는 청춘들에게 기성세대로서 조금은 기쁨을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둘은 사양했지만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청년은 자기의 연인이 서커스 단원이라고 했다. 서커스라니. 어릴 적에나 천막에 들어가 볼 때의 놀라움이 아련하게 밀려왔다. 둘 사이의 사랑이 이국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피어날까? 청춘에 대해 부러움이 생기는 한편 둘 다 이국에서의 삶이 녹록지는 않아 보여 안쓰러움이 일었다. 청년이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보지 않았지만, 외국인 노동자이기에 벌어봐야 얼마일 것이며 더욱이 여자는 서커스를 하기에 위험이 언제 닥칠지 모른다.
치명이 배인 사랑은 아프면서도 아름답다. 나는 그들과의 대화가 즐거우면서도 둘 사이의 긴밀한 시간을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십 분 정도 앉아 있었나, 자리를 떠나기 전에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었다. 이 나이에 벌어놓은 돈도 없지만, 저 테이블의 술값 계산 말고도 둘을 기쁘게 해주고 싶어 지갑에서 몰래 오만 원짜리 지폐 하나를 꺼내 주머니에 넣어두고 있었다. 계산을 마치고 떠나면서 오만 원 지폐를 청년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는 사양하면서도 얼굴에 미소가 돌았다. 단지 받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그냥 인정해주는 어른을 만나서일 것 같은 미소라고 나는 여겼다. 그의 애인도 맑게 웃고 있었다. 가볍게 앉았다가 가볍게 떠나면서 그 둘이 서툰 한국말로 인사를 하는 것이 등을 따스하게 했다.
내 삶도 문학의 여정도 쉽지 않은 것들로 얼룩져 있다. 주고받은 상처들도 깊다. 삶의 과정에서 마음이 끌리거나 머무는 곳들이 이따금 일어난다. 그 와중에도 혹시나 피해 주는 것을 최소화하려고 거의 본능적으로 마음의 움직임이 이는 걸 안다. 그로 인해서도 여운이 길어진다. 시를 향한 마음은 이루 말로 할 수 없다. 마음이 시키는 일에 작게나마 손길이 가면 그 순간 시간은 문학이라는 밀도에서마저 희석되는 것을 채우며 그 이상의 부드러운 밀물 같은 느낌을 길게 준다.
김명훈/ 청주 출생. 2000년 《현대시》 등단. 장편소설 『꼭두의 사랑』 외. 문학사상사》 장편소설문학상 수상.
여수麗水 외 3편
김 완
제6호 태풍 카눈의 진로를 살피다가 남쪽 바다로 갔다
태풍이 북쪽으로 방향을 튼 뒤 비바람 잦아들고
전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 관광객 천만이 다녀간다는
각자도생의 시절 만난 그녀의 얼굴은 맑고 그윽했다
폭염이 내리쬐는 한낮에는 보이지 않던 사람들
밤이 되자 어디선가 하나 둘 나타난다
게으름과 후회가 읽지 않은 책처럼 쌓여가도
휴가의 정점을 지난 사람들 걸음걸음 여백이 있다
조명으로 물든 거북선대교 그녀가 사는 밤바다 위로
개똥벌레, 잠자리들 깜박거리며 줄지어 날아오른다
먼바다에서 신호를 교감한 등대들도 깜박인다
하늘에는 별들 반짝이고 땅에는 풀벌레들 찌르르 찌르르
드문드문 만나는 사람들 가만가만 속삭이는 그녀의 파도 소리
여순 10·19 항쟁이라는 슬픔의 바다에 새 살을 돋울 수 있을까
죄도 없이 죽어간 수만 명의 잠 못 든 넋을 위로할 수 있을까?
그녀에 취해 끝없이 그녀를 탐하는 청춘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조곤조곤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는 어머니의 한 생生이었다
올바른 길을 잃고 어두운 숲 속에 있었던, 거칠고 사납던 숲
아! 그 숲이 어떠했는지 생각만해도 몸서리쳐지는 시간들
여순 10·19 항쟁 75주기 세월의 구비마다 아직 피가 맺혀 있다
삽을 든 아이들
부일의 안일한 삶을 버리고 스스로의 희생을
요구하고 나선 백조파를 대표하는 시인
을사 정미 경술로 이어지는 국권 상실의 아픔
우리 민족에게 분노와 슬픔이 극에 달할 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완성되기까지
상화는 보리로 뒤덮인 들판을 걷고 또 걸었다
할아버지가 세운 우현서루를 거쳐간 수많은
애국지사와 독립운동가들, 평생 배일 운동에 앞장선
강직한 지사였던 백부에게 엄격하게 배운 민족의식
달성산에 세운 신사를 철거하라는 스승 장일천
그들을 짓밟고 칼로 내리친 헌병들, 피를 흘리며
쓰러진 스승의 몸을 부둥켜안고 소리쳐 울던 아이들
통감 이등박문이 서울로 돌아가고 며칠 뒤 깊은 밤
상화와 친구들은 삽을 들고 캄캄한 달성산으로 간다
신사 앞뜰에 이등박문이 기념으로 심은 벚나무를
뽑아다가 달서천에다가 팽개쳐 버린다 어린아이들의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이 그대로 나무로 옮겨간 것이다
대구 달성 공원에 세워진 시비 상화의 어릴 적 친구들
이상화, 현진건, 고월 이장희, 목우 백기완의 시비
죽어서도 한곳에 모여 무슨 정담을 저리 즐겁게 나누나
예술가는 절대적으로 ‘자유를 향유해야 한다’라는
아! 가장 아름답고 오래된 것들은 꿈속에만 있어라*
* 동경 유학 중 연인 유보화를 만나 시 「나의 침실로」를 쓸 당시의 마음 상태
우리 서로 기댈 수 있다면
소가 누워있다가 살짝 고개를 든 형상이다
높지 않아도 화려하지 않아도
우도의 오름처럼 서로 기댈 수 있다면
함께 춤출 수 있다면, 빛과 어둠
그 다채로운 색채를 알아볼 수 있다면
걷당 쉬당 놀당 가주마씀 할 수 있다면
마을의 액운을 막으려고 쌓은 방사탑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올레길처럼
증오와 분노에서 사랑과 연대로 갈 수 있다면
각자도생 보다 우리 서로 기대고 살 수 있다면
라면을 끓이며
광복절 아침 라면을 끓이며 한 작가의 말을 떠올린다
한때 그의 짧고 간결한 문장에 반하여 심취했던
그는 왜 그 자리에 부르지 말았어야 할 이름을 불러냈을까
내다보는 아파트 옆 동에 태극기가 드리없이 걸려 있다
라면의 쫄깃한 맛과 약간 부드러운 맛을 좋아하는
아들과 내 입맛이 다르듯 그와 내 생각이 다르구나
다른 맛의 경계를 찾으려고 불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과거의 글로 잘못된 현재의 글을 눈감고 넘어갈 수 없다
그가 즐겨 쓰는 ‘각자도생’, ‘영생 불망’의 시대에도
넘지 말아야 할 금도는 있는 법, 개떼처럼 물어뜯어
만신창이가 된 가정에 소금을 뿌리는 행위는 무엇인가
좋아하는 라면 오뚜기처럼 다른 그는 일어설 것이다
라면의 어느 골짜기에 매운 슬픔을 품고 있는지는
국물을 마셔보지 않고는 직접 알 수 없는 일이다
마음을 키우면 거슬리는 것도 티끌처럼 작아질 수 있을까
역사의 천둥 번개는 느리지만 고요함 속에 숨어 있다
등단시
물 끓는 시간
나를 덥히려면 당신이 먼저 뜨거워져야 한다
당신이 뜨거워지려면 무엇보다 시간이 필요하다
오늘따라 몹시도 서두르는 당신,
맹렬히 타오르며 이곳저곳 나를 자극한다
당신은 후끈 달아오르면서도 얼굴만 조금 붉힌다
임계점에 이르면 내 피부에서는 소름이 돋는다
땀샘이 열리고 가느다랗게 앓은 소리를 낸다
날름거리는 당신의 혀가 파랗게 날을 세운다
이윽고 내가 뜨거워지면서 당신은 말을 잃는다
빠르고 화끈한, 더디지만 오래가는
여러 얼굴을 가진 당신, 당신의 에너지가
늠름하게 쳐들어와 나를 덥힌다
당신의 몸 곳곳을 뚫고 솟구쳐 오르는 나의 파동들
방울이 점점 커지면서 내 눈이 등잔만큼 열린다
그래 바로 이거야 내 온 몸에서
굵은 땀방울이 솟구쳐 오르고, 환희의 신음 소리가 달아오른다
아득히 천둥번개가 치고 우레 소리가 들린다
백팔번뇌가 끓어올라 우리들 사랑이 기화하는 동안
방 안에서는 고소한 냄새로 가득하다
파도가 절정에 이르면 소리 없이 스러지듯이
어느 한 순간에는 우리 모두 흔적 없이 사라져야 한다
자신의 가슴에는 역사를 새기지 않는 물
그래, 나는 텅 비어 있는 또 다른 물이다
대표시
단골집이 없어진다는 것은
세상에 하나뿐인 단골집 식당이 사라졌다
그 식당에 드나들던 사람들은
사소한 즐거움 하나를 잃어버렸다
약속을 잡지 않아도 그곳에 가면
낯익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꾹꾹 눌러 담은 고봉밥과 맛깔 나는
된장찌개 내주던 할머니 백반집도 사라지고
알싸한 고향 바다 냄새를 토하며
한여름 허기를 달래주던 깡다리 집도 사라졌다
기막힌 국물로 국수를 말아주던
간판 없는 작은 식당도 사라진 지 오래다
더불어 사는 사람살이를 향기롭게 하던
작은 공간들이 그렇게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
구원과 위안은 미래의 원대한 것보다는
오늘의 작고 사소한 것들에게서 온다
단골집이 없어진다는 것은 대체할 수 없는
사소한 위안 하나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 동네 식당에 드나들던 사람들에게는
아름다운 한 시대가 저물어 간다는 것이다
식당 하나 없어진다고 세상이 바뀔까
산문
선연 선과善緣 善果
사는 동안 맺은 다양한 인연들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제자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스승으로 살아갑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삶의 연쇄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깨우치게 됩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인연은 선하고 아름다운 결과를 낳습니다善緣 善果. 사회가 아프면 의사도, 시인도 더불어 아파야 합니다. 최근 두 가지가 정말 가슴 아픕니다. 하나는 재난 참사가 너무 많고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느낌입니다. 또 하나는 요즈음 도드라지는 ‘묻지마‘ 폭력과 살인입니다. 사회가 갈수록 개별화 파편화하고 격차가 벌어지면서 사람들이 고립되고 무력감을 느낍니다. ‘각자도생’보다 서로 기대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증오와 분노에서 사랑과 연대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사는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땀 흘려 일하지만 갈수록 힘겨운 우리 사회의 모든 이웃에게 위로와 치유, 희망이 필요한 때입니다. 「환자가 경전이다」라는 제 시詩의 제목처럼 늘 환자, 사람을 중심에 두고 고민하고 발전하는 사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짧은 가을이 가고 불현듯 찾아온 겨울처럼 구름을 보며 시대의 기상을 점치고 싶었던 J 시인이 그립습니다.
김완 / 광주 출생. 2009년 《시와시학》 등단. 시집 『너덜겅 편지』 외. 송수권 시문학상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