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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0월 26일 오전 7시, (중국 하얼빈역, 안중근 당시 31세), 그는 저격 대상의 얼굴도 모른채 하얼빈 역으로 갔다.
나는 본시 이등박문의 얼굴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안중근 옥중 자서전 <안응칠 역사>中
이토의 얼굴을 모른 채 이토를 저격해야 하는 기막힌 상황, 일제는 이토의 사진을 철저히 통제했다. 안중근은 거사 직전까지 그의 얼굴을 알 수 없었다-나는 역 찻집에서 플랫폼의 동정을 살피며 언제 이등박문을 쏠지 생각했다.
9시 20분경,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체프와 열차 회담을 마친 이토 일행이 플랫폼에 모습을 드러낸다 (러시아 재무장관과 회담을 마치고 열차에서 내린 이토 히로부미).
의장대의 경례 소리와 군악 소리가 귀를 찢었다.
나는 곧 바로 군대(러시아)가 늘어서 있는 뒤에 까지 이르러 앞을 보았다. 이제 이토를 찾기만 하면 된다. 저자가 필시 늙은 도둑 이토일 것이다!
안중근의 몸은 빠르게 움직였다. 이토와의 거리는 7m 남짓, 7발의 총성과 함께 치명상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는 절명했다. 홀로 러시아 헌병대 사이로 나아가 한 손 저격으로 이토 저격에 성공한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110년전 그날의 의거는 지금도 많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이토 히로부미 검시 보고서).
서중석/성균관대 교수, 前국립과학수사 연구원장: 아무리 혼자서 집에서 봐도 두 사람이 쐈나? (싶을 정도로) 그 당시에 총이 그렇게 많이 개발되지 않았을 텐데 어떤 총으로 쐈을까?
우리는 그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110년전과 같은 조건으로 저격실험을 했다. 그는 왜 한 손으로 저격을 한 것일까. 현대 권총의 사격의 기본은 양손 사격이다. 그렇다면 안중근 의사가 한 손 저격을 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결과는 놀라웠다.
애런/미국 전문사격수: 저는 매일 총을 쏘는 사람이지만 안중근 의사처럼 한 손으로 쏜 것보다 정확하지 않아요. 안중근 의사는 굉장히 정확도가 높은 사격을 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는 임무를 해내려고 정확히 쐈어요. 확신합니다.
미국의 전문 사격수도 감탄하는 안중근 의사의 저격술, 총의 특성을 고려한 사격방법과 저격거리까지 계산해서 성공한 의거였다. 110년전 그 역사의 순간을 간직한 안중근 의사의 총(증거품 1호 M1900)은 사라졌다. 사라진 안중근의 총, 지금 그 총은 어디에 있을까. 시작은 단순했다. 우리가 안중근 의사의 총을 찾아나선 것은 대단한 사명감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강준환/총기연구가: 사실 계기는 거창한 건 아니었어요. 저희가 총기관련 콘텐츠 채널을 운영하다보니까 여러 자료를 찾아보다가 우연히 이 사진을 발견하게 된 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 중국 하얼빈에 안중근 기념관이 있습니다. 국내에만 있는게 아니고, 거기 전시되어 있는 총 사진입니다. 박스나 문구는 굉장히 멋 있는데 사진의 총이 안중근 의사가 사용했던 총이 전혀 아니었거든요. 사진의 총은 나온 시기가 1930년대 거든요. 당연히 안중근 의사가 사용했던 총이 아니라는 건 저희가 분명히 알고 있었죠. 그러면 그 당시 실제로 안중근 의사가 사용했던 총은 무엇일까?
우리의 생업은 콘텐츠 제작, 매주 총기나 무기 관련 콘텐츠를 만들어 운영 중인 채널에 업로드한다.
<P90>
<인트로>
편: 우리 구독자님이 댓글로 P90 요청을 많이 하시던데, P90이 왜 이렇게 인기지? 게임에 많이 나오나?
환: 글쎄, 나도 요즘 게임은 거의 안해봐서 몰라. 예전에 카운터 스트라이크 시절엔 AWP로 나름 날렸는데--- 총기관련 전문지식과 역사를 결합한 참신한 콘텐츠로 우리는 이 분야 최다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총을 운명처럼 만났다.
이성주/작가: 1910년대까지는 단총이나 권총이라고 하면 리볼버(육혈포)로 생각했어요. 다들 단순하게 권총이면 단순히 리볼버겠지. 지금까지도 리볼버(육혈포)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어요. 그런데 육혈포 라고 가정하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이후에 있었던 저격이 도저히 설명이 안돼요. 저도 의문이 드는게 자동권총이 처음 나왔던 상황이라면 리볼버도 있었고 자동권총도 있었는데 둘 중에 무엇을 선택했을까??
안중근 의사가 이토 저격에 사용한 총은 과연 무엇일까? 당대 최고 성능의 리볼버일까. 아니면 파괴력이 다소 약한 신형 자동권총일까. 우리는 국사편찬 위원회에서 관련기록을 찾았다. 이것이 그 체포되어 조사 받은 신문조서가 포함된 안중근 의사 공판기록이다. 당시 뤼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필사한 것이다. 러시아측이 현장에서 확보한 증거품 1호 안중근 의사의 총이다. 兇行에 使用한 브라우닝식 단총, 그것은 브라우닝 M1900 두 자루와 하나는 리볼버, 그 중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총은 M1900, 안중근 의사는 왜 M1900을 선택한 걸까? M1900은 벨기에의 존 브라우닝이 1900년에 개발한 최초의 자동권총이다. 탄창에 탄환 일곱이 들어가고 약실에 한발 더 장전할 수 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저격은 목숨을 건 거사였다. 그런 만큼 저격용 총도 신중하게 선택했을 것이다. 1900년대 초반, 국내외에서 활동한 의병들이 사용한 총기류다. 의외로 총의 종류가 다양하다.
신유진/전쟁기념관 유물팀장: 앞쪽에 보시면 의병군들이 사용했던 권총도 있습니다. 왼쪽에 있는 총은 소총처럼 단발로 있어 보이고요. 오른쪽에 보이는 총이 현대식 자동권총 같이 생겼잖아요. 독일에서 1896년에 개발된 마우저 권총입니다. 장탄수도 10발 정도가 됩니다. 최대 20발까지 가능하고요. 성능도 뛰어납니다. 연사속도도 빠르죠.
당시 의병들의 저격용으로 사용된 권총, 의거의 증거품으로 압수된 리볼버와 M1900에 대해 알아보았다.
김유석/전쟁기념관 유물부장 군사학 박사: 리볼버(육혈포)는 구조가 간단합니다. 어떻게 간단하냐면 실탄을 넣을 수 있는 회전식 실린더가 있고 그리고 그에 맞춰서 방아쇠를 당겼다가 그 실탄을 격발할 수 있는 장치만 있으면 되기 때문에 초기에 이 총이 많이 보편화 되었습니다. 반면에 FN사에서 만든 M1900은 길이가 17cm입니다. 마우저 권총의 절반 정도죠. 무게도 600g이 악간 넘습니다. 무게도 마우저 권총의 절반 정도이기 때문에 크고 무거운 것보다 작아서 숨기기에 좋고 신속하게 꺼내어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토의 고향, 야마구치 현립 박물관에 안중근 의거를 증언하는 중요한 유물 한 점이 있다. 저격 당시 이토 히로부미가 입고 있던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내의에는 총탄 구멍이 또렷하게 나 있다. 추위를 막기 위해 겹쳐 입었던 내의도 안중근 의사의 총탄은 막지 못했다. 총탄 구멍은 3개, 안중근 의사가 쏜 7발 중 세발이 명중한 것이다.
(안중근): 나는 곧 단총을 뽑아 들고 그의 오른쪽 가슴을 향해 신속히 네 발을 쏘았다.
이토를 직접 겨냥한 것은 네발, 첫발은 오른 팔을 뚫고 가슴에, 두번째 발은 오른팔을 뚫고 왼쪽 옆구리에, 나머지 한발은 복부에 박혔다. 이토는 치명상을 입고 20분뒤 사망했다.
서중석/성균관대 교수/前국립과학수사 연구원장: 이토라는 사람으로 기록된 총창을 보면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하나는 팔을 관통하고 하나는 폐쪽, 하나는 복강쪽으로 가서, 두개 모두 맹관 총창(탄환이 몸 안에 박힌 총상)이고, 하나는 복부로 가는 맹관총창이다. 그러니까 이토의 총창은 거의 맹관총창 (탄환이 몸 안에 박힌 총상)에 가깝다고 생각이 들어서 폭발력이 강한 M16 같이 추진력이 강한 총이라면 저 정도 거리에서는 관통을 해야 되는데 (이토의 총상은) 맹관으로 남았다는 것이 총창의 특징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총 M1900은 파괴력이 약해, 총탄이 이토의 몸을 관통하지 않고 그대로 박힌 것이었다.
이주화 학예연구사/안중근 의사기념관: 이 책은 안중근 의사께서 옥중에서 집필한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라고 합니다. 안응칠은 아시다시피 안중근 의사의 아명이었고요. 일곱개의 점이 있다고 해서 응칠이라는 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얼굴이 누렇고 백발인 키가 작은 노인이 거들먹거리면서 걸어오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필시 이토일 것이다.--늙은 도적이라고 표현하고 있어요. 늙은 도적, 이토일 것이다. 생각을 해서, 즉시, 그 즉시, 단총을 뽑아서 그를 향해 우측 방향으로, 실제로 이토가 우측 상박에 첫 탄이 맞기 때문에, 우측을 향해서 쾌사 4발을, 4발이라고 나와 있네요. 먼저, 이토를 향해서, 이토를 향해서 쏜게 4발이지만 맞은 건 3발 이구요. 한 발은 다른데로 흘러나갔으니까-속사로 4발을 쐈다는 얘기죠.
그런데, 이토가 쓸어진 이후에도 저격을 멈추지 않았다. 왜 3발을 더 쏜 걸까.
이주화: 그후에 잠깐 생각한 다음에 보니까 내가 본디 이토의 얼굴과 모습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만약에 잘못 명중 시켰다면, 일차로, 큰 일이 될 것이므로, 그래서 그 도적을 따라온 사람들을 보니 일본인들이 단체로 오기에,
이토의 얼굴을 몰랐던 안중근은 쓰러진 자가 이토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판단, 즉시 그 일행을 향해 3발을 더 쏜 것이다. 절묘하게 러시아측 인물은 한명도 다치지 않았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얼굴도 모르고 군악이 연주되는 악조건에서 7발 모두 명중, 그것도 이토와 그 일행만 정확하게 맞춘 것은 그 자체가 미스터리다.
이성주: (안 의사의 총과 같은 M1900) 한 자루 정도는 구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쏘고 싶죠. 쏘고 싶고, 그런 저격이 가능할까? 궁금하거든요. 그걸 한번 재연해 보고 싶어요. 우리 말로만 하지 말고 한번 해봅시다 라는 거거든요.
우린 그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전 세계 경매사이트를 뒤졌다. 안중근 의사의 총과 같은 M1900 을 찾기 위해서다.
강준환: 총을 찾는 것은 소위 말하면 검색이죠. 구한 장소는 당연히 한국이 아니고 미국이었구요. 미국 내에는 지금도 M1900을 검색해 보면 소위 말하는 총기 경매사이트에서 찾죠. 저희도 그런 사이트를 검색하다가 골랐던 총이 이번에 구매를 해서 지금 미국에 보관되어 있어요.
마침내 지난(2019년) 8월 우리는 미국으로 날아갔다. 비행기로 17시간, 다시 목적지인 그린스버러로 달려가야 한다. 그곳에 M1900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스버러).
강준환: 보면 울컥할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무덤덤 할 것 같기도 하고 저도 기대가 되네요. 어떤 반응이 나올지~
그린스버러는 미국 남부의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있는 작은 도시다. 긴 여정 끝에 도착한 그린스버러, 우린 짐도 풀지 않고, 곧 바로 M1900 구매대행을 맡아준 총포사를 찾아갔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소총류가 거래되는 미국에도 실제 사격이 가능한 110년전의 M1900은 구하기 힘든 총이라고 한다.
강준환: 브라이닝 M1900을 보러왔어요.
직원: 네, 가져와 보여 드릴게요.
M1900을 꺼내와 보여 주는 순간, 이것이 바로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총과 같은 모델의 M1900이다 (M1900 1907년 벨기에 FN사 제작). 안중근 의사의 증거품 1호 M1900 (일련번호 262336). 흑백으로 찍은 증거품, 사진 속 안중근 의사의 바로 그 M1900과 똑 같은 권총이다. 1900년에 탄생해 이름도 1900인 이 총은 딱 11년 동안 70만정 정도 생산되고 단종됐다. 우리가 구매한 M1900은 단종되기 직전에 생산된 총이다 (710592). 관리가 잘돼 당장 사격할 수도 있는 상태, 110년전의 총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강준환: 지금 솔직히 말하자면 울컥해요. 사진으로만 보고 왔는데 이렇게 직접 보니까 이런 선 하나 하나가 사진으로 보면서 참 잘 만들었다. 그랬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보니까 부럽네~
궁금했다. 안중근 의사와 같은 상황에서 목표물을 저격해야 한다면 미국의 총기 전문가들은 리볼버와 M1900 중 어떤 총을 선택할까?
테일러/미국 총기전문가: 만약에 총을 숨겨야 한다면 저는 M1900을 고를 거예요. 공이가 달린 리볼버 같은 권총을 숨기기는 어려워요. 걸쇠가 많아서 꺼내기도 어려울 거예요.
그는 망설임없이 M1900을 선택했다.
강준환: 하지만 리볼버가 더 파괴력이 크지 않나요?
테일러: 네, 맞아요. 하지만 저는 숨기기 좋은 쪽을 택할 거예요. 더구나 재장전하기도 쉽죠.
또 다른 총기 전문가도 안중근 의사의 M1900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크리스 아이돌/미국 총기전문가: 리볼버는 주머니에 넣었다가 빼려면 공이 부분이 주머니에 걸려서 잘 안나와요. 그것만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가 쫓아와 슬라이드를 잡으면 발사가 안됩니다. 그래서 아마 안중근 의사는 그의 임무수행을 위해 M1900이 낫다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M1900은 주머니에서 바로 꺼낼 수 있습니다. 총구에 날카롭게 튀어나온 부분이 없죠. 사방이 조절 가능한 총열이기 때문에 임무수행이 용이했을 겁니다. 그리고 7연발 총이기 때문에 총탄이 부족하면 탄창을 빼고 새로운 탄창을 넣으면 바로 7연발이 다시 가능해지죠.
거사의 성공율을 높이기 위해 최대한 목표물에 가까이 다가가야 했던 안중근은, 총탄을 더 많이 장전할 수 있고 공이가 없어 숨기기 쉬운 M1900을 선택한 것이었다. 거사 직전까지 이토의 얼굴을 몰랐던 것이 그 모든 선택의 출발점이었다.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 도착한 것은 아침 7시, 자칫 잘못하면 검문검색에 걸려 사전에 노출될 위험을 무릅쓰고 2시간 전에 미리 도착했다.
(안중근): 나는 본시 이등박문의 얼굴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얼빈 역 찻집에서 동정을 살핀 것도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었고, 러시아 헌병대 사이로 나가, 최대한 가까이 다가간 것도 이토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토와의 거리는 약 7m, 안중근은 저격후 도주하기 힘든 가까운 거리까지 나아가, 이토에게 총을 쏜 것이다.-코레아 우라! (대한민국 만세!) 코레아 우라!. 스스로 퇴로를 차단해, 저격에 성공한 안중근 의사, M1900은 안중근 의사의 목숨을 건 선택이었다. 다음 날, 우리는 그린스버러 외곽으로 이동했다. M1900 성능을 확인하기 위한 저격실험을 하기 위해서다. 그린스버러의 한 야외 사격장, 저격실험에는 1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미국의 전문 사격수 2명이 참여했다. 사격수들에게 가능한한 당시 저격상황과 유사한 조건을 부여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거리에 맞추어 타격과의 거리는 7m로 잡았고, 사람크기의 종이 타격 두개를 설치해 명중율을 확인하기로 했다. 먼저 리볼버와 M1900의 사격속도를 알아보는 실험을 할 예정이다. M1900은 한번에 7발을 쏠 수 있고 리볼버는 6발 사격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둘 중 어느 것이 더 빠를까.
사격속도 실험의 핵심은 최대한 빨리 쏘는 것, M1900과 리볼버를 차례로 쏘아 사격속도와 명중율을 확인할 것이다. 첫번째 사격수는 애런, M1900에 총탄 7발이 든 탄창을 끼우고, 사격신호가 떨어지면 쏴야 한다. 7발을 쏘는데 걸린 시간은 1.11초, 따라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에게 첫 4발을 쏜 뒤, 잠시 멈칫거린 시간까지 고려한다면, 이토 저격에 걸린 시간은 5~6초 정도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리볼버는 얼마나 빠를까 리볼버 6발을 쏘는데 걸린 시간은 1.11초, 한발 더 쏜 것을 감안하면 M1900이 리볼버 보다 0.01초 빠른 셈, 이 찰나의 순간이 저격수에겐 성패를 가르는 시간, 리볼버의 단점은 또 있었다. 반동과 소음이 컸다. 사격수에 따라 사격속도는 차이가 날 수 있다. 두번째 사격수도 결과는 마찬가지, M1900의 사격속도와 명중율이 리벌버 보다 더 높다. 실험에 참여한 사격수들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자동권총(M1900)이 확실히 빠르네, 이 당시에는 리볼버가 5발 이었고, 지금은 6발인데도 리벌버가 자동권총(M1900) 보다 더 느리잖아. 자동권총이 압도적으로 빠른 거네.
애런: M1900이 리벌버 보다 더 빠르다고 확실히 말 할 수 있습니다. 명중율이 더 높았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M1900 자동권총을 사용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M1900의 특성을 꿰뚫고 있었던 안중근, 그런데 이토를 쏠 때 기록을 보면, 오른 손을 뻗어 한 손으로 저격한다. 왜 한 손 저격을 한 것인가. 현대의 사격교육은 대부분 거의 양손사격으로 진행된다.
애런: 당연히 양손 사격이 정확하다. 다른 손이 조준을 지지해줘서 정확도가 더 좋기 때문이다.
전문 사격수들은 양 손 사격이 한 손 사격보다 명중율이 높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번 실험도 당시 저격 상황을 고려했다. 사격수들은 안중근 의사처럼 M1900을 윗 옷 주머니에 넣고 있다가 사격해야 한다. 이번 실험은 타겟 명중율이 중요하다. 양손 VS 한손 저격실험, 실험방식은 간단하다. 사격수가 M1900으로 타격 A를 향해 양손사격으로 7발을 쏘고, 이어 타격B를 한손사격으로 7발을 쏘아 두 명중율을 확인할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왜 한손 저격을 했는지 그 이유를 확인하기 위한 실험이다. 양손 사격과 한손 사격,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
애런: 양손 사격의 경우-몇발은 과녁 옆쪽에 맞았어요. 나머지는 다 과녁 안에 들어 왔습니다. 조금 왼쪽으로 치우쳐져 있네요. 제 판단에 힘이 더 들어갔나 봅니다. 한손 사격결과는 7발이 다 과녁 안에 들어 왔습니다.
예상과 달리, 한손사격 명중율이 더 높았다.
질문: 이런 결과가 나올 거라고 예상 했습니까?
애런: 전혀요. 당연히 양손 사격이 더 정확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손 사격은 양손을 모아서 고정하지 않아도 되고 바로 총을 잡고 쏘는 거죠. 또한 총을 쏠 때 팔을 뻗은 방향으로 똑바로 보는 것과 정면을 바라보며 총을 몸 한 가운데 두는 것의 차이죠.
사격수에 따라 양손 사격과 한손 사격의 차이가 날 수 있어 이번에도 동일한 방법으로 실험했다. 과녁 중심에 맞춘 명중율이 중요한데 테일러 역시 한손 사격 명중율이 양손 사격 보다 더 높았다.
테일러: 한손 사격이 양손 사격보다 명중율이 높다는 것이 저에게는 정말 놀랐습니다.
미국의 전문 사격수들도 감탄하는 안중근 의사의 한손 사격술, 현대의 사격수들이 사용하는 양손 사격 대신 한 손 사격을 한 이유는 또 있었다. 저격대상의 얼굴을 모르는 상황, 안중근은 최대한 이토 가까이 접근해야 했고, 그래서 러시아 헌병대 사이로 나아갔다. 바로 그 틈을 이용하기 위해 한손 사격을 한 것이다.
장석흥/국민대 교수: 안중근 의사는 1894년 16살 그 즈음에도 총을 쐈던 분이에요. 그래서 명사수로 이름을 날린 분입니다. 그리고 1909년에 전투 현장에서 일본군과 싸우기도 한 분이고, 그렇기 때문에 총에 대한 상식, 용병에 대해서 꿰뚫고 있다고 봐야죠.
안중근 의사는 언제, 어디서 거사준비를 한 걸까. 일본 헌정기념관에 그 단서가 되어줄 유물이 있다. 이 총탄은 안 의사가 이토를 암살하기 위해서 7발 가운데 하나다. 이토를 수행하던 다나카 세이지로의 오른쪽 발목에 박혔던 것인데 십자모양 홈이 파져 있다 (남만주 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의 발등에서 나온 총탄). 일제는 집요하게 출처를 캐물었다 (뤼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재판정).
판사: 그대의 총은 어디서 구했는가? 총알은 언제 구했나? 언제 쏘아 보았나?
안중근: 노령(러시아)에서 윤치중 이라는 사람과 총알을 교환했는데 그때 총알에 홈이 나 있었다.
당시 사냥꾼들이 흔히 쓰던 총탄인데, 목표물에 박히면 탄두가 벌어져 살상력이 커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는 안중근 의사를 잔인한 살인범으로 몰아가기 위해 재판 내내 총탄의 출처를 물고 늘어졌다. 우리는 총탄의 홈을 파서 사격해 보기로 했다. 110년전 사냥꾼 처럼 간단한 도구로 십자 모양 홈을 팠다. 미국의 전문가들도 처음 해보는 일이라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실험용으로 준비한 십자 모양탄도, 안중근 의사의 M1900의 탄두와 같은 형태다. 실험용 타겟은 사람의 비슷한 몸과 밀도를 가진 발리스틱 젤(Ballistic jel)로 준비했다. 일제의 주장대로 안중근 의사의 십자형 총탄은 이토를 고통스럽게 죽이기 위한 잔인한 의도였을까. 발사된 총탄이 젤 안을 헤엄치듯 한 방향으로 뚫고 들어갔다. 이제 발리스틱 젤의 탄열을 갈라 탄도의 상태를 확인하면 일제의 주장이 사실인지 그 진위여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강준환: 이쪽으로 쭉 관통을 했네요. 쭉 들어온 자국이고~
그렇다면 젤 속에 박힌 총탄은 어떤 상태일까. 일제의 주장대로 탄두가 벌어졌을까.
강준환: 탄두가 전혀 변함이 없어요.
탄두의 변형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총탄은 또 다른 이유로 우리에게 중요하다. 안중근의 거사 준비현장으로 안내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일제의 집요한 심문에도 이토를 저격한 총의 출처에 대해서는 철저히 숨겼지만 총탄을 교환하고 저격연습을 한 곳은 밝혔는데 바로 연추다. 두만강 접경지대인 러시아 연해주의 대표적인 한인마을 연추, 당시 연추엔 항일 의병조직인 동의회 본부가 있었다. 청년 안중근은 1907년 러시아로 건너와 동의회 의병으로 활동했다. 그곳엔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崔在亨, 1860~1920)이 있었다. 연추의 최재형 집에서 동의회가 결성됐고, 의병들의 숙식과 거처는 물론 무장투쟁에 필요한 무기와 군자금도 그의 집에서 나왔다. 안중근을 후원한 것도 최재형이었다. 최재형의 딸 올가는 그 현장을 목격했다. 안중근 의사가 최재형의 집 마당에서 저격훈련을 한 모습을 지켜 본 것이다.
“내가 듣기로 안응칠 이라는 사람이 누군가를 사살할 준비를 한다고 했다. 우리 집 마당 벽에 사람을 그려 놓고서 권총사격을 하고 있었다”-최재형의 딸 올가의 회고록 <나의 인생>中,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계획한 것은 1909년 2월, 1908년 국내 진공작전 이후 동의회 의병부대가 타격을 입자 안중근은 고심 끝에 비밀 결사조직을 만든다. (同義斷指會-국내 친일인사와 일제의 주요인물을 암살 하기 위해 연추에서 조직한 비밀결사조직). 안중근이 주도한 동의단지회는 국내의 친일인사와 일제의 주요 인물을 암살하기 위해 연추에서 조직한 비밀결사조직이었다.-동지 12사람과 상의한 뒤 마침내 왼손 약지 한마디를 끊어 그 피로써 태극기에 글자 넉자를 쓰니 ..대한독립이었다. 12명의 동지들과 피로써 맹세한 대한독립, 안중근 혈서 ‘大韓獨立(대한독립)’ 안중근 의사는 그날 이후 모든 문서에 한마디가 없는 왼손 인장을 찍었다. 독립기념관에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이곳에 안중근 의사의 이토 저격작전 준비과정을 살펴 볼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이토 저격작전에 참여한 우덕순의 증언을 채록한 것이다.
김형목/독립기념관 연구위원: 이등박문이 온다는 소식을 전해 주니까 6~700 리 떨어진 곳(연추)에 있던 안중근 의사가 전보를 받고 8일 저녁에 돌아왔습니다. 그 신문을 내어주니 이등의 기사를 읽고서는 참말로 일어서서 춤을 덩실덩실 추웠습니다. 어떻게 하겠는가 하고 내가 물은즉 가야지 어디로? 하얼빈으로 가야지 이렇게 아주 간단하게 즉결되고 말았습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의 만주시찰계획이 발표된 건 1909년 10월, 동서양의 철도가 교차하는 만주는 열강들이 탐내는 요충지였다. 이토의 하얼빈 행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동청철도, 남만주철도).
김형묵: 서로 흥정을 할려고 했던 거죠. 그러면서 이토는 제국주의의 실행을 위해서 러시아와 협상을 위해 간 거죠.
우덕순, 동의회 의병활동을 할 때부터 안중근과 함께 한 동지였다. 안중근과 우덕순이 하얼빈으로 출발한 것은 10월 21일, M1900을 가슴에 품고 하얼빈행 열차를 탔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 까지 거리는 778km, 송화강 남쪽에 자리한 중국 헤이룽장성의 하얼빈은 당시 러시아 관활의 국제도시였다. 거사를 앞두고 안중근은 동지들과 마지막 기념 사진을 찍었다. 러시아어 통역을 위한 18살 소년 유동하도 함께 했다. 안중근, 우덕순, 유동하, 하얼빈역 북쪽에 선린가, 안중근과 동지들은 이곳에 숙소를 잡았다.
김월배/중국 하얼빈이공대 교수: 우덕순 의사하고 조도선, 안중근 의사께서 김성백의 집에 와서 밤에 하얼빈 의거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십니다.
선린가 34호, 집주인 김성백은 유동하의 사돈으로 하얼빈 한인사회를 이끄는 인물이었다. 마지막으로 하얼빈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던 조도선이 합류했다. 안중근의 이토 저격작전에 직접 참여한 인물은 모두 4사람, 조도선은 현지 사정을 훤히 파악하고 있어 거사에 큰 힘을 보탰다. 조도선이 하얼빈에서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안중근과 동지들은 구체적인 실행작전을 짰다. 검토한 거사 후보지는 세 곳, 이토의 출발역은 장춘으로, 일본군 통제구역이었고, 종착역 하얼빈은 러시아 관활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 사이에 있는 채가구(차이지거우)역, 러시아 관활인 채가구역은 이토의 열차가 잠시 쉬어갈 것으로 추정되는 후보지였다. (장춘->채가구->하얼빈), 24일 아침, 안중근 일행은 채가구역 답사에 나섰다. 이토가 탄 철도는 러시아 철도의 궤도와 달라 정차해야 하는 곳이 채가구역이었다.
김월배: 왜냐하면 남만주철도하고 동청철도하고는 철도의 궤도, 즉 사이즈, 레일규모가 작기 때문에 반드시 채가구역에서 레일 교체로, 기차가 반드시 서야 하기 때문에 안중근 의사께서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채사구역에 가게 됩니다.
하얼빈에서 80km, 채가구역은 하얼빈역에 비해 작은 간이역으로 감시가 느슨한 것이었다. 지금도 옛 간이역사가 그대로 남아 있는데 안중근과 그의 동지들이 머물렀던 곳이다.
김월배: 바로 여기가 채가구역입니다. 채가구역 밑에 숙소입니다. 그들은 이 지역 채가구역 반지하 여관에서 하루 반을 보내며 고민했다. 거사지역을 하얼빈역과 채가구역, 둘 중 어디로 할 것인가. 만약을 대비해 플랜B를 준비했다. 이토가 채가구역에 내릴 경우, 우덕순과 조도선이 맡고, 실패할 경우,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저격하기로 작전을 짰다. 다음날 안중근은 홀로 하얼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26일 아침, 서둘러 숙소를 나섰다. 안중근이 하얼빈역에 도착한 건 아침 7시, 이때까지 동지들이 채가구역 거사에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반드시 러시아 헌병대 검문을 무사히 통과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 그런데 제지 당하지 않고 무사통과, 천운이었다. (보안이 강할 것이라 예상했던 하얼빈역을 검문검색도 없이 통과),
반병률/한국외대 교수: 하얼빈 지역은 러시아가 관리를 했으니까 러시아측에서 일종의 비표라고 하는 출입증을 발부하라고 그랬는데 그런데 일본 총영사가 그걸 거부했고 이토 히로부미는 위대한 인물, 거물이 오는데 들어가면서 체크를 하느냐? 그래서 안중근 의사가 들어갈 수 있었던 거죠.
오전 9시, 이토의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자, 안중근은 채가구역에서 거사가 실패한 것을 알았다. 이제, 이토를 제거할 마지막 기회였다. 안중근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2중작전으로 이토 저격에 성공한 것이다. 이토를 저격한 총, 안중근 의사의 M1900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하얼빈역 광장 남쪽 역사에 다시 문을 연 중국의 안중근 의사기념관, 기념관 한쪽에 옛 하얼빈역 1번 승강장을 볼 수 있는 특별한 창이 있다.
김월배: 바로 여기는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현장입니다. 삼각형으로 표시되어 있는 부분이 안중근 의사가 쏘신 저격의 장소이고, 사각형이 있는 곳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가 쓸어진 장소입니다. 러시아 헌병대는 안중근 의사를 체포해서 일본 총영사관으로 밤 10시경에 인계를 하게 됩니다.
의거 당일, 채가구역의 우덕순과 조도순도 체포됐고, 뒤이어 유동하도 붙잡혔다. 러시아 헌병대가 증거품으로 사진과 함께 일본측에 넘긴 총은 세 자루, 안중근과 우덕순의 M1900 두 자루와 조도순의 리볼버다. 그중 총번 262336이 새겨진 M1900이 안중근의 총이었다 (우덕순의 M1900 총번 263975).
이주화/안중근 의사기념관 학예연구사: 안중근 의사 사형이 집행되어서 순국하신 이후에는 다시 검찰측이 그 증거를 모아서 보관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그 안중근 의사의 유류품 일부는 가족에세 인계하고 나머지 압수된 증거품은 돌려주지 않는다.
일제가 안중근 의사의 총을 몰수한 것은 1910년 2월, 마지막 공판이 끝난 후다. 우리는 일본 헌정기념관을 주목했다. 헌정기념관 2층 전시실에 안중근 의사의 총탄이 전시되어 있기 때문에 (남만주 철도이사 ‘다나카 세이지로’의 발등에서 나온 총탄), 그의 총도 헌정기념관 수장고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질문: 2층에 다나카 세이지로가 맞았던 총탄이 있는데, 총은 없습니까? 권총
직원: 총은 없네요. 보셔서 아시겠지만 응칠(안중근 의사의 아명)씨가 쐈던 권총인데, 권총은 경찰측에서 처분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외 정보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총의 행방은 모른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공개된 일본 사료관의 문서상으로는 총의 행방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김월배: 안중근 의사의 그 사료를 찾는 일은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해요. 모래에서 바늘 찾기라고 하는데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의거를 하셨던 명치 42년, 1909년 (의거) 그 시점에 지금 전체적인 기록이 없습니다.
김형묵: 안중근 의사는 일본측이 봤을 때에 식민지를 하는데 최대의 걸림돌이었고 그런 유물이나 유품이 남아서 뒤에 한국인들에게 전수가 된다면 그것은 적개심을 크게 흥분시킬 수도 있으니까 의도적으로 없앴다고 봐요.
안중근 의사가 항일독립운동의 상징이 되는 것을 두려워한 일본은 총도 함께 봉인해 버렸다. 그의 총이 겨냥한 곳은 단지 이토 한 사람이 아니었다. 대한제국을 삼키고 만주까지 진출한 일본제국주의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날 안중근은 하얼빈역 1번 승강장으로 나아가는 순간, 스스로 퇴로를 차단했다. 일본 제국주의와 전쟁을 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렇게 총을 들었고 이토는 현장에서 사망했다.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안중근은 도주하지 않았다. 당시 이토를 취재하기 위해 모였던 세계 언론의 관심은 이토를 저격하고 끌려가는 안중근 의사에게 집중됐다. 세계가 주목한 재판정! 안중근 의사는 여섯 차례 열린 공판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토의 죄를 만천하에 폭로했다.
(안중근): 이토의 첫번째 죄는 그의 지휘 아래 조선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요, 둘째는 고종 황제를 폐위시킨 죄, 셋째는 을사오조약과 정미칠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요, 넷째는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다섯째는 나라를 강제로 빼앗은 죄요, 여섯째는 한국의 철도,
안중근 의사가 밝힌 이토의 죄목은 열다섯 가지, 안중근 의사의 법정투쟁은 그동안 일제의 침략과 만행에 눈 감았던 세계 언론을 움직였다.
(안중근): 열다섯번째는 동양의 평화를 깨트린 죄다.
그의 법정투쟁은 전세계로 타전됐다. 거사 당일부터 전세계에 타전된 전보만 무려 9만 여건, 안중근 의거의 영향력은 그만큼 컸다. 한 명이라도 안중근의 얘기를 들어 준다면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의 자유를 송두리째 빼앗아간 파렴치한 군주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이 재판은 결국 안중근의 승리로 끝난 것.-영국 더 그래픽 (The Graphic)지 찰스 모리머 기자.
김형목: 요즘 같으면 실황중계 하듯이 공판투쟁을 실시간으로 내보내는 어떻게 보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즉각적인 보도가 전세계적으로 일어났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토의 죽음은 일본을 충격에 빠트렸다. 11월 4일 일본은 국장으로 이토의 장례를 치렀다. 몸에 박힌 총탄도 함께 묻혔다.
반병률: 안중근 의사가 정말 큰 일을 해냈다. 이것을 축하를 한 거죠. 그 다음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장면이 나오는 필름을 상영하고 사람들이 상당히 만족했다. 그랬거든요. 그게 기사에 나온 거죠. 일본 첩보자료에도 나온다 말예요.
안중근 의사의 이토 저격 영상을 연해주 한인들이 관람한 것은 그해 11월말, 그러나 일본이 러시아 촬영기사가 찍은 동영상을 구입해 공개한 것을 보면 의거 순간을 찍은 장면은 사라지고 없다.
장석흥: 일본에서는 이토라고 하면 천엔권 지폐에도 올라올 정도로 국민적인 영웅인데, 저격 장면은 보고 싶지도 않고 또 감추고 싶기 때문에 그런 건 대외에 공개하기에는 일본인들의 치부를 들어내는 것이기도 하고 그래서 아마 편집한 걸로~
반병률: 1909년 이후 1910년 3.1운동 이전시기까지는 d나 의사가 항일 독립운동의 상징처럼 되었어요. 안중근 의사의 그 사건과 비슷한 그런 것들을 청년들이 다시 꾸미고 안중근을 본받고 안중근 처럼 우리가 한번 국국의 전선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청년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죠.
아무리 지우고 감추려고 해도 사라지지 않는 것, 그것이 역사다. 일제가 봉인한 한중근의 총이 담긴 정신은 그렇게 오늘도 이어졌다.
이성주: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가 됐을 때 만 서른하나였어요. 그런데 죽음으로 가기 위한 선택을 했는데 자기의 목숨을 그러니까 모든 걸 버린다고 생각을 하게 되면 일이 너무 간단 명료하게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제 나이 서른에 어떤 선택을 했는지 한번 봤어요. 돈 벌기 바빴죠. 돈 벌기에 바쁘고 글쓰고 뭐 하고 있었는데 그 진정한 선택이라는 건 선택 이후에 있었던 그 대가를 치루겠다. 목숨으로 대가를 치루겠다. 오케이~ 그러니까 거기서 같이 썼던 M1900도 그런 의미였던 거거든요.
시대적 책무 앞에 생을 걸었던 청년 안중근, 강한 신념으로 제국주의의 심장을 쏘았던 안중근의 정신에 이제 우리가 답해야 한다.
(안중근): 난 일개 자객이 아니다.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 일본 제국주의와 전쟁을 하기 위해 늙은 도둑 이토에게 총을 쏜 것이다. 코레아 우리!(대한민국 만세), 코레아 우리! 코레아 우라!끝. (KBS “안중근 의사 의거 110주년 기념 미스터리 추적 안중근의 총”에서 정리).
① 110년전,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20분, 당시 31세, 조선의 젊은 엘리트 독립운동가 안중근은 중국 하얼빈역에서, 일본 이토 히로부미(1841~1909)의 얼굴도 정확히 모른채, 늙은 도적, 얼굴이 누렇고 백발인 키가 작은 노인이 거들먹거리면서 걸어오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필시 이토일 것이다 라고 추정 판단해서, 러시아 헌병대를 뚫고 들어가, 이토와의 거리 7m 바로 앞에서 권총 4발을 발사, 그 중 3발을 명중시켜 저격에 성공한다. 이토는 치명상을 입고 20분뒤 사망,
② 안중근 의사가 저격에 성공한 건, 권총이 탁월해서냐, 명사수여서냐. 사용한 권총은 브라우닝 M1900, 벨기에 존 브라우닝이 1900년에 최초로 개발한 자동권총이다. 안중근의 이토 저격은 목숨을 건 거사였다. 그런 만큼 총도 신중하게 선택했다. M1900은 길이가 17cm 무게 600g 정도 작아서 품속에 숨기기에 좋고 신속하게 꺼내어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③ 안중근은 총의 출처에 대해서는 철저히 숨겼지만 총탄을 교환하고 저격연습 한 곳은 밝혔다.바로 연추다. 러시아 연해주의 대표적인 한인 마을, 당시 연추엔 항일 의병조직인 동의회 본부가 있었다. 청년 안중근은 1907년 러시아로 건너와 동의회 의병으로 활동한다. 그곳엔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崔在亨, 1860~1920)이 있었다. 최재형은 안중근을 후원했다. 안중근은 최재형의 집 마당에서 저격훈련을 하였다.
④ 안중근은 1908년 국내 진공작전에서 동의회 의병부대가 타격을 입자 고심 끝에 12명 동지들과 비밀 결사조직, 동의단지회를 조직한다. 이는 국내 친일인사와 일제 주요 인물을 암살하기 위한 비밀결사조직이다. 1909년 2월, 이토 히로부미 암살계획을 세운다. 동지 우덕순이 안중근에게 이등박문 하얼빈 방문소식을 전해 주자 전보를 받고 8일 저녁에 우덕순에게 간다.
⑤ 안중근은 이토 기사를 읽고서 춤을 추웠다. 우덕순이 어떻게 하겠는가 물은즉, 가야지, 어디로? 하얼빈으로, 간단하게 즉결되고 말았다. 이토의 만주시찰계획이 발표된 건 1909년 10월, 만주는 열강들이 탐내는 철도 요충지, 이토의 하얼빈행은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만주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한 것, 이토는 제국주의의 실행을 위해서 러시아와 협상을 하는 거다.
⑥ 안중근은 하얼빈 김성백의 집에서 우덕순과 하얼빈 의거에 대한 계획을 수립, 김성백은 유동하의 사돈으로 하얼빈 한인사회를 이끄는 인물, 마지막으로 하얼빈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던 조도선이 합류, 안중근의 이토 저격작전에 직접 참여한 인물은 모두 4사람, 조도선은 현지 사정을 훤히 파악하고 있어, 안중근과 동지들은 구체적인 실행작전을 짤 수 있었다.
⑦ 거사 후보지는 세 곳, 이토의 출발역은 장춘으로, 일본군 통제구역이었고, 종착역 하얼빈은 러시아 관활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 사이에 있는 러시아 관활인 채가구(차이지거우)역, 채가구역은 이토의 열차가 잠시 쉬어갈 것으로 추정되는 후보지, 24일 아침, 안중근 일행은 채가구역 답사에 나섰다. 이토가 탄 철도는 러시아 철도와 궤도가 달라 정차해야 하는 곳이 채가구역이었다.
⑧ 그들은 채가구역 반지하 여관에서 하루 반을 보내며 고민했다. 거사지역을 채가구역과 하얼빈역, 둘 중 어디로 할 것인가. 만약을 대비해 플랜B를 준비했다. 이토가 채가구역에 내릴 경우, 우덕순과 조도선이 맡고, 실패할 경우,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저격하기로 작전을 짰다. 다음날 25일, 안중근은 홀로 하얼빈으로 돌아왔다.
⑨ 26일 아침, 서둘러 숙소를 나섰다. 안중근이 하얼빈역에 도착한 건 아침 7시, 이때까지 동지들이 채가구역 거사에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반드시 러시아 헌병대 검문을 무사히 통과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 그런데 제지 당하지 않고 무사통과, 천운이었다. 참으로 하늘이 도왔다. 하얼빈역은 보안이 강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검문검색도 없이 통과,
⑩ 오전 9시, 이토의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자, 안중근은 채가구역에서 거사가 실패한 것을 직감, 이제, 안중근에 의해서 이토를 제거할 마지막 기회였다. 안중근 바로 7미터 앞 이토를 향해 권총 4발 발사, 3발 명중, 저격에 성공. 이토 치명상 입고 20분뒤 사망, 만일의 경우를 대비한 안중근의 2중작전 성공, 러시아 헌병대는 안중근 의사를 체포, 일본 총영사관으로 밤 10시경 인계, 채가구역의 우덕순과 조도순도 체포, 뒤이어 유동하도 붙잡혔다. 1910년 2월 마지막 공판이 끝난 후, 일제는 안 의사의 저격권총 M1900을 몰수, 유족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⑪ 안 의사의 총이 겨냥한 곳은 이토 개인 한 사람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를 겨냥한 것, 그날 안중근은 하얼빈역 1번 승강장으로 나아가는 순간, 스스로 퇴로를 차단했다. 일본 제국주의와 전쟁을 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안중근은 그렇게 총을 들었고 이토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대한민국 만세! 안중근은 도주하지 않았다. 세계 언론은 안중근에게 집중, 세계가 주목한 재판정! 우리의 안중근 의사는 여섯 차례 열린 공판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토의 죄를 만천하에 폭로했다..
⑫ 1919년 3.1운동 후 4월 10일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945년 8월 15일 해방, 1948년 8월15일 어떻게 건국한 정식 대한민국이냐, 6.25 한국전쟁도 극복했고 월남파병, 중동진출, 70여년 동안 국가 경제는 눈부시게 발전했고 일본 경제 바로 턱밑까지 따라 왔다. 한국도 부자나라니까 미국 대통령도 방위비를 더 내라고 야단이다. 한미일 안보로 국방을 튼튼히 하고 경제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여기까지 온 게 안중근 의사를 포함한 독립운동가들의 덕분이다. 안보와 경제를 아는 대통령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국가와 대통령을 위해 기도 하자. 우리는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