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89년 醴泉人 초간 權文海가 쓴 大東韻府群玉에
{아주신씨는 평산(신씨)에서 스스로 분파한
고려 판도판서 신윤유 지후]로 기록되어 있다
[鵝洲申-世傳 分自 平山 高麗 判圖判書 申윤유 之 後]
2,1606년 유운이 쓴 동사찬요에 아주군유사란 글이
올라 있다-신익휴는 아주신씨의 上祖로 기록 됨
3,1666년 간행된 호계 신적도 선생의 문집에 기록
(신적도-진사,찰방,정묘,병자호란 의성 의병장)
4,회병 신체인 선생(영조조 生 순조조 死)의 문집
에도 평산신씨로 부터 분파했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명증 할 길이 없음이 기록되어 있다
鵝洲氏 是本 自平山(평산신씨)分出
(신체인-영,정조시대 유명성리학자,금산서원 배향)
5,1817년 만성보 저자인 공주인 김노정을 만난 후
도와 신정주 선생이 쓴 서호기행 글머리에 평산신씨로 부터 분파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공주인 김노정을 방문 그가 쓴 만성보에 아주신씨 시조로
평산신씨 12세 신익휴가 등재되어 있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 자료를 보여 줄 것을
요청 하였으나 뜻을이루지 못하자 아마 그가 그런 기록이 쓰여진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단정하고 일행과 함께 의성으로 되돌아 간다는 내용의 기행문(1817년)
*1965년에 발표한 변증론에서
신석호 박사는 서호기행을 근거로 김노정이 만성보
에 아주신씨 시조로 신익휴를 위조 했다고 주장했다.
가짜 시조 논란이 처음 시작됨
6,1872년에 발견된 고려말 성리학자 신현의 전기인
[화해사전 세헌]편에 신현 가계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평산신씨 11세 신숙의 차자 신익휴가 군공을
세워 아주군이 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평산신씨 대종회는 이를 근거로 1930년 평산신씨
대동보인 경오보에 아주신신씨 시조로 신익휴를
입보 하였다
1957년 신언직이 화해사전을 위서로 주장하는
화해사전변무록을 발표하였고 평산신씨 대종회는
이를 근거로 특별조사 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사를
통해 화해사전을 위서로 자체 확정하여
경오보 청보작업을 통해 1976년 간행한 병진보에서
아주신씨 시조 신익휴를 본보에서는 빼고
참고목록에 등재 하였다고 한다
*중국 절강대학 주생춘교수는 우연히 미국
하버드 대학 도서관에서 [화해사전]을 읽고 2005년
화해사전이 위서가 아님을 밝힌 논문을
발표 하였다
[현재 평산신씨 대종회는 평산신과 아주신의
관계가 무관함을 주장하고 있고,
아주신씨 대종회는
김노정이 쓴 만성보에 신익휴님이 평산신씨 11세
신숙의 차자로 기록된 것을 그대로 1819년
아주신씨 최초 족보 을묘보 간행시 등재한 이후
그 전례를 전승해 오고 있다]
[출처] 기록에 나타난 아주신씨와 평산신씨 관련|작성자 응암28세 동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