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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적 선택 2 요한복음 6:35-40
무조건적 선택의 원리는 전적 타락과 원죄의 교리를 그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원죄가 우리 모든 인간에 있고, 그 원죄로 말미암아 전 인류가 아담 안에서 완전히 타락했기 때문에 도저히 구원을 받을 수가 없는 상태에 있다면, 누군가가 구원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구원을 줄 수 있는 존재는 어떤 존재입니까? 인간은 모두가 죄 가운데 있어서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 이외의 다른 어떤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사람보다 못한 존재는 결코 사람을 구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보다 우월한 존재는 무엇입니까? 현재하는 피조물로서 좀 더 우월한 존재는 천사들입니다. 천사들은 사람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분명 사람보다는 우월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들 역시 피조물이기 때문에 구원의 능력은 없습니다. 오직 사람을 비롯하여 온 우주만물을 만드신 그분,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죄와 타락의 상태에 있는 우리들로서는 자력 구원이 전혀 불가능하며,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할만한 권리조차 없습니다. 그래도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의 은혜를 입은 자들일 것입니다. 자 이렇게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다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방법이나 절차는 오직 하나님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가리켜 무조건적 선택의 이성적 증거라고 말합니다.
타락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셀 수 없이 많은 자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하신 것과 또한 은혜 언약에 있어서 인류의 머리요 대표자로서 활동하여 그들이 범한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 그들의 죄벌을 담당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구세주를 주신 것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 공로 없이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는 오직 칼빈주의에서만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통치자요 심판주로서 하나님은 그의 선하신 뜻대로 죄인들의 세상을 다루실 자유를 갖고 계십니다. 그분이 어떤 사람은 용서하시고, 어떤 사람은 정죄하신다고 해도 그분의 공의에 위배되지 않고, 어떤 사람은 구원하고, 어떤 사람은 유기(버림)한다고 해도 그분의 공의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 것입니다. 원래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그가 긍휼히 여기실 자에게 긍휼을 베풀 자유가 있습니다. 구원을 얻고 싶은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고,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습니다.
왜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구원을 얻는가 하는 이유는 오직 만사를 자신의 의지대로 명하시고 정하시는 이의 기쁘신 뜻에서만 발견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창세전부터 하나님께서 구원을 받을 자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은혜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우리 성도들을 창세전부터 이미 사랑하고 계셨던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가 믿고 있는 칼빈주의의 구원관과 다른 구원관을 가진 알미니안 주의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알미니안 주의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받기로 작정하는 인간의 자의적인 복종과 信行(믿음의 행위)을 강조합니다. 칼빈주의에서는 천국의 기업을 얻을 자와 하나님의 넘치는 영광에 참여할 자를 선택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라고 분명하게 성경을 근거로 주장하고 있는데 비하여, 알미니안 주의에서는 그것을 결정하는 자는 궁극적으로 인간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어찌하여 어떤 사람은 구원하시고 어떤 사람은 구원하지 않으시는가 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목적에 속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다만 우리는 이렇게 선택을 받은 것에 대하여 영원히 찬양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요.”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기 때문입니다(엡 2:1-3). 그래서 사도 바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그는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자기 뜻대로 행하신다.”(단 4:35)라고 하였습니다.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자기의 아들들로 예정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은 사람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반면에 알미니안 주의에서는 구원을 받는 것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은 사람에게 달려있다고 주장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말도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겠다고 생각을 하고 결정을 합니다. 내가 교회를 다닐 것인가 아니면 우상을 숭배할 것인가 다른 종교를 믿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생각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정말로 교회를 다니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결정을 내렸을 것입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조언도 했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결정은 본인 스스로 내렸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까지만 보면 구원의 선택권이 하나님께 있지 않고 사람에게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면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구원은 확정적이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가 구원의 종교가 아닌 세상의 종교와 동일시되어 버리는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 마음대로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었다면, 내 마음대로 하나님을 떠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은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천지만물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큰 손상을 입게 됩니다. 이런 하나님을 어떻게 구원주로 믿을 수가 있을까요?
이러한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신 그 놀라운 사랑을 무효로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기독교 내의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이 “종교다원주의”입니다. 어떤 종교든지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에 소위 개똥철학을 논할 때가 있었습니다. 친한 친구 3명이 함께 다니면서 잠도 같이 자기도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종교 이야기도 나오게 되면, 그 때에 우둔한 머리와 잘못된 생각은, 결국 모든 종교는 오직 한 곳에서 만나지 않을까 하는 결론을 내리곤 했습니다. 이때에 저는 불교에 대해서도 몰랐고, 유교에 대해서도 몰랐고, 더군다나 기독교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무지한 상태였습니다. 물론 성경은 읽은 적도 없으면서도 종교를 논하고 기독교를 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허무맹랑한 모습인지 모릅니다. 오늘날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한 번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기독교가 무엇입니까? 성경을 읽어 보셨습니까? 성경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전혀 모르는 상태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영혼이 미혹당해 있기 때문에 그저 남이 하는 소리를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고 그냥 받아들이고, 자기가 말한 것 때문에 주장하고, 전혀 기독교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도 않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이 선택받지 못한 것을 가리켜 “유기”라고 합니다. 이들에 대한 정죄는 본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를 인간과 천사들 앞에서 영원히 나타내기 위해 기도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의인에게 상을 주고, 동시에 죄인에게는 벌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잠언서 16:4을 보면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9:22-23을 보면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함이며,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에 대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의도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의도는 택한 자들에게도 부수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택함을 입은 자들은 구원의 은혜가 자기들에게 임하지 않았다면 자신들도 역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배워 알게 되고, 또한 자기들보다 더 죄가 많거나 무가치한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영원한 멸망 가운데 버려두시면서, 자기들은 죄에서 구출하여 영생으로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풍성함에 대해 한층 더 깊이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택함을 받은 자들이 그처럼 극진한 사랑과 복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그들에게 가장 강력한 감사의 동기를 제공해 줍니다.
셋째, 현세와 내세에서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ㅇ 아버지께 대해 더욱 신뢰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넷째, 그들이 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순결한 삶을 살려고 하는 강한 동기를 부여받게 됩니다.
다섯째, 그들로 하여금 죄악을 더욱 증오하게 합니다.
여섯째, 천국의 기업을 받은 자들로서 그들은 하나님과 더욱 가깝게 사귀고 성도간의 교제를 더욱 친밀하게 하게 됩니다.
일곱째,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거절에 대해서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전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으니라. 저희가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롬 11:111) 고 말함으로써 유대인이 아무 이유 없이 거절되었다고 하는 비난을 없애 버립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거절하신 것은 특별한 목적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즉 구원을 이방인에게까지 미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는 거의 독점적으로 이방인의 교회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시대마다 약간의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해 왔는데,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훨씬 더 많은 유대인들이 ‘시기나게 되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리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회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되는 때가 오면, 그 때는 종말이라고 합니다. 몇 해 전만해도 이스라엘에 기독교회가 생기기만 하면 파괴하고 못된 짓을 했지만, 이제는 예루살렘에만 해도 몇 교회가 된다고 하니 점점 더 종말이 가까워 오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기,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지 않고 지옥에 가도록 작정한 사람들의 교리를 반대하는 알미니안주의의 생각은 마귀의 미혹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단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만인구원”을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또 다시 ‘종교다원주의’로 돌아가게 됩니다. 만일 만민구원이 옳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기독교가 필요 없어지고 맙니다. 만민이 다 구원을 받는데, 무엇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필요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다른 종교를 믿어도 구원을 받는데 무엇 때문에 힘들게 기독교를 믿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느냐 이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살고, 내 마음에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살아도, 구원을 받을텐데, 무엇 때문에 마귀와의 싸움을 싸우고, 내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성령의 열매를 맺기를 노력하는 그런 어려운 신앙생활을 무엇 때문에 하려고 하겠습니까? 이와 같은 교리가 장로교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아직까지 합동측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통합측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미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 우리의 친구들이나 친척들이 혹은 가족 중에서도 이 영원한 형벌을 받도록 예정되었다고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실제로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그들에 대해 동정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혹시나 그들 중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택하여 놓으셨지만 아직까지 깨닫지 못해서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지나 않았을까 하고 전도를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불신자들에 대한 동정은 아무 가치도 없는 잘못된 동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에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요, 의로움의 원수로써 죄악을 사랑하고 구원 또는 하나님의 임재를 싫어하는 자들이라는 것이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은 절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지옥에 갈만한 자들만 지옥으로 보내실 것이요, 또한 우리가 저들의 참 성격을 보면 저들에 대한 하나님의 처분은 아무 만족스러운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죄를 선택하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혹시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지옥 갈 자로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자포자기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결정적인 불순종은 죽을 때까지 찾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 회심하지 않은 어떤 사람이 설사 자신에게 회심의 변화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할찌라도 그는 결코 하나님께서 이미 자기를 회심시키지 않고 구원하지 않기로 작정하셨다고는 단정하지 못합니다. 즉 사람에게는 자기를 결정적으로 비택자 중의 하나로 간주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 전도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짚고 넘어가야만 합니다. 영아의 경우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칼빈주의에서는 회심하고 주님을 영접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영아가 구원을 받았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가 없습니다. 알미니안 주의에서도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본인 자신의 결정에 의한 주님의 영접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역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장로교의 가장 잘되어 있다고 하는 웨스트민스터 신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 영아에 대한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성경에서 성도의 자녀가 구원(너와 네 집이)을 얻는다는 것은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으나, 불신자의 자녀의 구원 여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영아의 문제도 역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어떻게 하셨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성도의 가정의 영아라고해서 다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없고, 불신자 가정의 영아라고 해서 다 지옥에 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 된 이 모습 이대로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