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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
과거에 기독교인들은 하나의 거룩한 정치 공동체로 조직되어 있었다. “사람은 사회적 피조물로서 사회를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청교도들은 말했다. 그리고 청교도들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만인은 자기를 위하여 존재하며 하나님도 우리 모두를 위해 존재한다는 말은 사단적인 것이다!”
청교도들은 그의 직업에서조차 자신보다는 이웃이나 전체 공동체를 섬기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 청교도들은 자기 자신에게 빠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신앙적인 활동들조차도 이기적인 동기에서 나오는 예가 없었다. 청교도 윌리암 거날은,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은 저 세상에서의 자신의 삶을 위해서보다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선행에 더 힘쓰는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토마스 굿윈은 “‘거룩한 의무’(기도 등)에 효율적인 되면 그 사람 자신에게 좋은 일이지만 직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면 다른 사람들, 교회와 전체 사회와 가정에게 좋은 결과를 내게 되며 하나님을 더욱 영화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동료들과 지내야 할 시간에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다. 믿는 자는 결코 공동체의 유익보다 자기 개인의 영적인 유익을 더 내세워서는 안 된다. 개인주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성도의 교제”의 기쁨을 앗아가버렸다.
경건주의가 등장하면서 개인주의적으로 자기 내면만을 파고 들고 예수와 자기와의 개인적인 관계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일어나게 되었다. 하나님에게는 단지 구원받은 자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이 있는 것이다. 전체 구약성경은 하나님을 묘사하되 선택받은 백성, 성도들의 사귐과 더불어 일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다.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출6:7)고 말하였다. 그들은 그냥 “국민”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업의 백성”(신4:20)이었다. 시편 기자는 “우리는 하나님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고 노래하고 있다(시95:7).
신약성경에서도 전혀 차이가 없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신 약속들이 참 이스라엘인 교회에서 성취되었다. 구약성경에서 유대 민족에 대한 진술들은 신약의 성도들에게 적용된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신약의 백성들)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요”(벧전2:9,10)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예수께서는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고”(히2:17,5:3) 죽으셨으며,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 이는 —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시기” 위함이었다(엡5:25,27). 하나님께서 염두에 두고 계신 것은 단지 구원받은 개인들이 아니라 구원받은 공동체이다.
우리의 교회들은 공동체의 최후로 남은 요새들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도 교회들은 개인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교회로 차를 몰고 가서 설교를 듣고 그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나와 친한 사람들’에게만 인사하고 진정 공동체에 대한 경험은 하나도 없이 집으로 돌아와 버린다. 이전의 복음주의는 집단적인 영성을 몹시도 중요시하여 성찬을 할 때도 잔 하나로 돌려가며 마셨다.
키프리안은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고 지혜롭게 말하였다. 칼빈은 여기에 “교회를 자신의 어머니로 삼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고 덧붙이고 있다. 초대교회의 교제는 살아 있었다. 그 이유는 믿는 자들이 “주께서 믿는 사람들의 수를 날마다 더하심”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물질주의, 자아 도취(나르치시즘), 쾌락주의
1970년대를 “Me Decade”(자기 중심의 10년)라고 묘사한 사람은 톰 울프였다. “오늘날은 돈의 열병에 빠진 시대이다. 돈에 대한 타오르는 열망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80년대는 영웅적인 인물을 낼 수 있는 시대는 아닌 것 같다.”
“과거에는 물질주의와 허영이 문명의 몰락과 멸망의 분명한 징조로 여겼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조는 개인의 치부가 공동 사회의 번영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고 해리스는 말한다.
자아를 신성시하는 사상이 결국에는 자아의 소멸을 초래한다는 것이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사람의 정체성은 삶의 장 속에서만 발견되기 때문이다. 물고기는 물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물, 무대, 가정,이 모든 것들은 제약하고 속박하는 전제권력이 아니라 개개인의 자유와 정체성 확보를 위한 요람이다. 진정한 자아는 절대적인 독립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장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절대적인 독립, 자유, 자율은 소외와 외로움으로 이끈다. 우리는 사람들과 하나님께 의지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유한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고립해서는 안녕이 전혀 없다. 오직 두려움과 의심만 있을 뿐이다.
실용주의
오늘날의 교회 성장 전략과 하나님의 교회 성장 전략은 아주 대조적이다. 하나님의 전략은 사도행전에 약술되어 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였다”(행2:42,43). 이러한 배경, 이러한 직접적인 전략에 따라 하루에 “삼천명을 더하셨다”(행2:41). 이에 대하여 가능한 유일한 설명은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7)이다.
그 교회는 화려한 의상을 찾는 소비자들을 위한 것이 아닌 진리를 찾는 제자들의 고향이었다. 그러므로 그 교회의 교제는 생생한 것이었으며 지속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수퍼마켓이 아닌 오두막집, 즉 서로의 밀착된 관계를 발전시키는 오두막집이었다. 그것은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 나사렛 예수에 대한 그들의 공통적인 친밀감 때문이었다.
교외 지역(부유층 주거 지역)에 위치한 초대형 교회들은 군중들을 끌어 들이기 위하여 때때로 굉장한 쇼를 벌이고 프로그램을 만들고 연사들을 초청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교회들 안에 공동체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초대형 교회들을 우리의 모델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런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와 같은 영적인 제국들은 집단적인 나르치시즘(자아 도취)으로 몰아넣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에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하려고” 오지 않으셨는가? “의원이 필요한 사람은 의인이 아니라 병든 자”라고 그분이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여호와께서는 상하고 애통하는 심령을 가진 사람들에게 가까이하신다”는 것이 성경 자체의 교훈이 아닌가? 교회는 자기 만족에 빠진 대중들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인생의 폭풍우 속을 헤쳐 나가는 죄인들을 형제 자매의 사랑으로 돌보는 장소인 것이다.
과거 없는 현재
오늘날 우리에게는 성도의 공동체, 성도들과의 한 몸에 속했다는 의식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거룩한 보편교회의 일부, 즉 아브라함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성도의 교제에 속했음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기독교는 역사적인 종교이다. 교회는 현실 도피주의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이 세상을 당신의 무대로 삼아 오셨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에 의해서) 우리를 이 세상의 환경 속에 두셨으며, (섭리에 의해서) 이 환경 가운데에서 우리를 역사 내내 보존해 주셨으며, (구속에 의하여) 우리를 이 환경에서 구원해 주셨다. 우리는 이 세상으로부터 (세상 바깥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안에서 구원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시대 뿐만 아니라 성경 이후의 시대에서도 역사 내내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공동체를 이루어 오셨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과거의 기록을 “구속 역사-구속사”라고 부르고 있다.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교회의 아버지들, 즉 교부들보다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을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처럼) “거룩한 공회(보편교회)”에 속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우리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사도들, 어거스틴, 아타니시우스, 그리고 루터, 칼빈, 청교도들, 에드워즈, 휫필드, 그리고 웨슬레, 스펄전, 휫필드. 그리고 우리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증인들의 영적인 자손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독립 교회들의 구성원이 아니라 성도들의 “역사적” 교회의 구성원이다.
부흥회 중심의 복음주의의 “신조는 무시,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라는 정신은 반역사주의의 온상이 되었다. 가수 말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일만을 얘기하는 사람들이여, 여러분이 얼마나 나아갈 수 있을까? 과거가 없는데 어찌 미래를 열 수가 있겠는가?”
공동체에로의 회귀는 기독교 전통에로의 복귀를 수반한다. 역사적으로 무엇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무지한 그리스도인들의 세대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유다서3절)를 부활시킬 수 없다. 미래를 준비하려면 우리의 과거를 배우고 그 과거를 우리의 것으로 통합시켜야 한다.
전문가들의 횡포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전문가들에게 넘겨 주었다. 많은 사람들은 정치 문제에 대해 자기들이 실제적으로 아무런 힘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 분야를 “전문가들”에게 맡겨 버리고 있다. 심지어 우리는 우리의 정서적 안정의 문제까지도 전문가들에게 넘겨 버렸다. 우리는 우리의 말을 들어주고, 흔히 우리의 목사님들이나 부모님들이나 친구들이나 이웃들이 충고해줄 수 있는 말을 듣기 위하여 “전문가”에게 한 시간당 200달러나 갖다 바친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공동체가 사라진 후 우리가 얼마나 절망적이 되었는가를 보여 주는 실례이다.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치유를 받기 위해 상담 전화에 매달리고 있다.
마티, “당신은 일상적으로 당신이 선택한 교회에 들린다. 그것은 신자들의 자연스런 공동체가 아니라 신분이나 경제적인 지위에 따라 한 개인의 자아를 표현하는 장소이다. 지역을 넘어 한 공동체의 지렛대와 같은 신앙이란 것은 잊혀진 지 오래이다.”
제도적 교회에 대한 신뢰의 회복
우리는 교인의 자세가 아니라 소비자 심리로 바뀌어 버렸다. 교회를 평가하되 그 교회가 성경에 대하여 어떠한 헌신을 하고 있으며 어떤 복음적 경건을 가지고 있느냐를 살펴서 평가하기보다는 마치 우리가 인기 있는 음식점을 쇼핑하듯이 교회를 쇼핑하는 것이다.
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교회에 대한 격앙된 냉소주의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1) 교회의 피상성과 천박성
남캘리포니아의 공무원 한 사람은 설문 조사에 응하면서 “교회 지도자들이 신학을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내 생각으로는 교회들은 거개가 사회의 일부가 되어 버렸지요. 교회들이 복된 소식은 잊어버리고 교회 부동산 임대료 낼 걱정만 하고 있습니다. 교회들이 복음적 메시지를 잊어버렸어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결론을 내린다. “성직자들 중에 몇몇 사람들은 대단히 훌륭한 분들이예요. 그러나 대부분은 전능한 돈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교회의 위대한 유산들을 강도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해군 장교, “교회는 일종의 권력 브로커와 같았습니다. 그것은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교회는 그 구실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등지거나 교회에 저항하고 있다. 그 까닭은 교회가 그 예언자적 사명과 선교적 사명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갤럽은 “인생의 일차적인 물음들에 관해 좀더 분명한 통찰력을 사모하는 엄청난 갈망이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이나 다니지 않고 있는 사람 모두에게 있다”고 말한다.
2) 교회의 세속화
일반 대중에 따르면 “천상에 대한 자신들의 소망은 땅에 속한 교회들에서는 성취되기가 힘들다”고 한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고 그런 방식이 아닌 우리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방식으로 이 사회에 대항하는 교회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다. 오로지 목회적인 문제에만 쏟는 교회를 원치 않는다.
대중들 특히 젊은 세대는 하나님과 접촉할 수 있는 교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성품과 그 행하시는 방식과 과거에 행하여 오신 활동과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목표들에 친숙해질 수 있는 교회를 찾고 있다. 그들은 이 시대의 현안들을 효과적으로 다루는 하나님 중심의 교회를 원한다. 그들은 현세의 문제들에 대한 영원의 관점을 원한다. 갤럽,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 책임을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으면 대신에 부차적인 것들만을 추구하고 피상적인 행락에나 관심을 쏟으며, 그들이 설교하는 고귀한 소명과 그 실천을 활발히 가르치려는 경건한 공동체에 참여하고 지원하는 일은 꺼리는 사실에 놀라고 경계하고 분노하고 있다.”
3) 교회의 율법주의
마틴 마티에 따르면 많은 교회들은 세상을 두려워하여 “여러 법과 규율을 가지고 젊은이들을 묶어 놓고 있으며 밖의 좀더 큰 사회로부터 심지어 신체적인 격리까지도 시키고 있다”. 율법주의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2천년 전에 이와 같은 종교적 태도에 대하여 반대하셨다. 엄격한 복장 규제, 사교적인 춤의 반대, 주류와 흡연의 금지, 공적인 유흥, 영화나 연극 구경도 금하는 행태에서 편협성을 읽을 수 있다.
그와 같은 율법주의적인 종교 행태는 진리를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며 사람의 의견을 성경의 수준으로까지 높여서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과거 중세의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저지른 일을 보수적(근본주의적)인 교회들이 자행하고 있다.
만약 한 지역의 교회 공동체가 진리를 향한 진지한 자세를 보여 준다면, 인생의 문제들에 대하여 영원의 관점을 제공해줄 수 있다면, 그리고 율법주의적이 아닐 수 있다면, 교회와 담을 쌓고 지내는 많은 사람들에게 기독교 공동체는 더욱 매력적이 될 것이다. 그리고 순전한 그리스도인들은 아주 초기의 제자들의 모범을 따라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쓴다”(행2:42)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적어도 그들은 우리의 솔직함과 우리의 확신에 찬 용기에 대하여 고마워하리라고 장담한다. (381 전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