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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 속죄 요한복음 10:22-29
칼빈주의의 5대 교리 중에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을 했고, 이제 3번째로 제한 속죄의 교리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는데, 그 뜻이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구원하지 않는 것인데, 이 선택은 사람에게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있으며, 자신의 선하신 뜻대로 주권적으로 택하시는 것을 가리켜 ‘무조건적 선택’이라고 하였습니다.
선택을 한다는 말을 생각해 보면, 선택의 반대는 불선택이 됩니다. 즉 선택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선택과 유기’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든지 아니면 그대로 버려두시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됩니다. 택함을 받은 사람은 천국에 가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흑과 백이 명확합니다. 중간의 회색은 없습니다. 오직 두 갈래 길만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 두 길 중에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까요? 이 것 조차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오른 쪽 길로 가면 구원을 받는다고 할 때에, 내가 오른 쪽으로 가겠다고 결정했을 때에, 그 마음까지도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움직였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칼빈주의이며, 알미니안주의에서는 자신의 뜻대로 선택하여 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1. 목적과 적용에 있어서 제한을 받는 속죄
예수님께서는 전 인류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셨을까요? 아니면 피택자(선택받은 사람)만을 위해서 바치셨을까요?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희생의 목적은 전 인류를 다 구원하시기 위함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사람들만 구원하시기 위함인가 하는 것입니다.
알미니안 주의에서는 ‘그리스도는 전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칼빈주의에서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밀하신 목적과 계획 아래 피택자만을 위해 죽으셨는데 피택자 이외에 사람에 대해서는 그들이 일반은총에 참여하는 자라는 범위 안에서 부수적인 관계를 가질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많은 종류의 식물들 중에서 오직 한 송이의 꽃을 피우려고 하면, 이 단 한 송이 꽃을 위하여 이 땅에 햇볕이 비춰야 하고 비가 와야 합니다. 그 주위의 모든 것들이 함께 햇볕과 비를 맞게 됩니다. 이것은 일반은총이라고 하며, 다만 꽃을 피우는 그 한 송이만이 선택되었으므로 ‘무조건적 선택’에 의한 ‘제한 속죄’ ‘제한 구속’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직 한 사람의 영혼만 구원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많은 영혼 아니 모든 영혼을 구원하는 것과 똑같은 수고를 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는 어느 누구의 구원에나 차별 없이 균등하게 적용이 되지만, 사람들 스스로의 죄악으로 인한 전적무능력으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중생, 성화된 사람들만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2. 속죄의 무한한 가치
‘제한 속죄’라는 말과 ‘제한 구속’이라는 말은 동일합니다. 제한 속죄라는 말은 용서를 받는 사람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고, 제한 구속이라는 말은 구속 받는 사람이 제한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 두 가지의 뜻은 동일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속죄는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효력의 적용으로 실제 구원을 받는 자는 유한한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에서 “그러므로 피택자는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에 빠졌더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되었느니라. 또한 합당한 때에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저희가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하심을 얻으며 양자가 되고 성결함을 입으며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셨느니라. 택함 받은 백성 외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으며 효력 있는 부르심을 입고 의롭다 하심을 얻으며 양자가 되어 성결함을 받아 구원될 자가 한 사람도 없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은 영생을 주시기로 선택하시고 다른 사람들은 선택하지 않으셨다면(무조건적 선택) 그리스도의 사역의 주요 목적은 분명히 선택된 자들을 구속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제한 속죄의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속죄의 가치와 능력에 어떠한 제한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속죄의 가치는 무한합니다.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전 2:8), 악인들이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행 3:15) 하나님께서 ‘그의 피로 교회를 사셨다’(행 20:28)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속죄의 가치는 만일 전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전 인류를 구원할 수도 있을 만큼 무한한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특수한 사람들을 위해 의도되었고 적용된다는 의미 즉 실제로 구원을 얻을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는 의미에서 제한되는 것입니다.
알미니안 주의도 칼빈주의와 같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분명하게 제한하고 있습니다. 다만 제한의 내용은 완전히 다릅니다. 칼빈주의에서는 속죄의 범위를 제한하여 그리스도의 속죄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지만, 알미니안에서는 속죄의 능력을 제한하여 그리스도의 속죄 자체로는 실제로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 개인이 믿겠다고 할 때에만 적용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칼빈주의는 속죄를 양적으로는 제한하나 질적으로는 제한하지 않는 반면에, 알미니안에서는 질적으로 제한하고 양적으로 제한하지 않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내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셨습니다. 죽음의 목적을 제한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또 어떤 때에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내 양이 아니라.’(요 10:26)고 하시기도 하셨고,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느니라.’(요 8:44)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제외시킬 사람을 제외시키고 있으므로, 제외된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독생자를 보내사 고난당하게 하시고 죽게 하신 그 사랑은 모든 인간을 동등하게 그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이며 무차별적인 사랑이 아니라 그의 택한 자들만을 위한 특별하고 신비한 절대적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백성, 그의 신부, 그의 교회를 위해 죽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속죄
만일 속죄의 혜택이 보편적이며 무제한적이라고 하면 알미니안주의자들의 말과 같이 인간이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받게 된 저주를 말소하는 희생은 될 수 있겠지만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만족시키지는 못하게 됩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히 10:1)고 하였습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 죄를 지어서 곧바로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용서를 받았다고 하면, 저녁에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요? 오늘 죄를 용서 받았으므로 내일은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올해는 죄를 지었지만 내년에는 죄를 짓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죄라고 하는 것은 밖으로 드러나는 것도 있지만 드러나지 않고 마음속으로 짓는 것도 있고, 은밀한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는 모든 죄를 위하여 다 속죄제를 드림으로써 용서를 받았는데, 죽기 직전에 그만 죄를 지어 제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율법을 다 지킨 것입니까 못 지킨 것입니까? 못 지킨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순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폐하거나 경감할 수가 없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네게 준 짝인 하와가 주어서 먹었기 때문에 너의 죄를 감해 주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처럼 모든 율법은 온전하게 지키지 않으면 반드시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즉 온전한 순종을 적용시키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우리들의 죄를 완전히 대속하는 것입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은 모든 저주와 함께 우리들의 현재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없애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 즉 택한 백성을 위하여 아담이 파괴한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심으로서 구원에 필요한 조건인 ‘완전 순종’을 하심으로써 율법의 완성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근거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완전한 의로운 옷을 덧입음으로써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지, 우리의 것이라고 말할만한 공로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침례교의 유명한 설교가인 찰스 H.스펄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 죽으셨다면 당신은 결코 지옥에 떨어질 수 없다. 하나님은 하나의 일에 대하여 두 번 벌하지 않는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대신하여 그리스도를 벌하신 것이라면 다시 당신을 벌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대가를 두 번 -처음으론 구세주의 십자가의 피흘림에 대하여, 다음엔 또 나에게- 요구하시지 않는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대속물로서 벌하시고 다시 인간을 벌하신다면 어찌 공의로울 수 있는가?” 대속이라는 말 자체가 대신하여 죄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죄를 주님께서 대신 받으셨다는 뜻이므로, 하나님께서 또 다시 우리의 죄를 물으신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대속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속전’의 개념입니다. 마 20:28을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매우 주의해서 보아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모든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속전의 성질은 그것이 지불이 되고 승인이 되면 필연적으로 자유롭게 해 주어야 합니다. 많을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진정한 속전이 아닙니다. 공의상 이 속전이 누구를 위해 지불이 되었든지 그에 대한 일체의 부담을 말소키며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이 피택자들만이 아닌 전인류를 위한 것이라면 그 공로는 전 인류에게 적용되어 아무도 지옥의 형벌을 받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대속을 입었지만 그들에게 아직도 벌할 것이 남아있다고 여기신다면, 즉 대속자와 피대속자에게 이중 형벌을 요구하신다면 그것을 불공평한 처사가 되고 맙니다. 지금도 주님을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들이 천국에 간다는 뜻입니까? 지옥에 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속죄는 전인류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위하여 보증을 선 사람들 곧 참 그리스도의 교회를 구성하는 진실한 성도들에게만 해당된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희생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죽음이 전인류를 구원할 의도였다면 사람들 중에 멸망하는 자들이 없어야 하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을 성취하실 능력이 모자라든지 혹은 그 계획대로 실행하실 것을 원하지 않으심이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항상 끝까지 이루어지고 말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누구를 위하여 죽으셨든지 그들은 결국 구원을 얻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다시 하나님의 계획을 설명해볼까요? 계획을 수행할 지혜와 능력을 가진 이성적 존재인 인간은 어떤 일을 계획하고 수행할 때에 결코 달성하지 못할 일을 의도하거나, 도달할 수 없는 목적에 대한 계획을 채택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지혜와 능력이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일을 하실 리가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멸망 받을 자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저들의 구원을 목적하시지도 않으시며 성취하시려고 수단을 강구하시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 자신이 그의 죽음의 목적을 제한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보편적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내 양이 아니라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느니라.”고 하신 말씀을 보면 분명하게 그들을 천국에서 제외시킨 것입니다. 요셉에게 나타난 천사는 장차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실 아이는 세상에서 “자기 백성을” 죄악 중에서 구원할 의무를 수행하실 분이라고 하면서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선언함으로써 그의 속죄사역이 그의 백성만을 위한 것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단순히 구원을 가능하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고 실제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여러분과 내가 구원을 받는 백성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은 한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모든 인간을 동등하게 그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이며 무차별적인 사랑이 아니라, 그의 택한 자들만을 위한 특별하고 신비한 절대적인 상입니다. 주님께서는 무질서하게 모든 대중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그의 백성, 그의 신부, 그의 교회를 죽으셨습니다. 농부는 자기 밭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 밭에서 자라는 가라지까지 귀중하게 여겨 가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은 하나님의 밭입니다(마 13:38).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것은 좋은 씨앗인 천국의 자녀들을 위하심이지 결코 악마의 자식을 위하심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똑같이 사랑을 받고 그리스도께 차별 없이 구속되어지는 자는 모든 사람이 아니고 오직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은혜를 주시되 태양이 그 빛과 열을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비추듯이 나무가 누구에게나 그늘을 만들어 주듯이 그렇게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필연에 의해 빛을 비추는 태양처럼 그의 사랑을 전달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적인 행동을 하시는 분이시며, 그가 사랑할 대상을 택할 수 있는 전권을 가지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에서부터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를 서로 원수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후손들이 누구를 의미합니까? 바울은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고 함으로써 이 후손을 곧 그리스도 한 분만을 가리킨다고 보았습니다. 마귀의 자손이라는 것도 해석해 보면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을 가리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원수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 8:44)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마술사 엘루마에게 마귀의 자식이요 공의의 원수라고 말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마귀의 자식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요 6:7). 그러므로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은 인류의 두 부류를 지칭합니다. 즉 택함을 받은 자와, 택함을 받지 못한 두 부류가 있습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을 '하나‘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과의 관계는 마치 포도나무와 그 가지가 연합되어 있는 거처럼 서로 연합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의 시작에서부터 두 부류로 나누시고 서로 원수가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은 인류 전체를 똑같이 사랑하시거나 똑같이 구원하실 의도가 전혀 없으셨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무한하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악마와 타락한 천사가 하나님의 목적 밖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랑하심은 무수한 택자들을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영원한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영생복락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의미에서 무한한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미 택함을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이미 영생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첫댓글 감사합니다. 좋은 내용 마음에 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