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한순간이라도 조용히 앉아 마음을 닦는다면 간지스강 모래알보다 많은 칠보탑을 세우는 것보다 더 낫다. 칠보의 탑은 결국 무너져 먼지가 되지만 한 생각 청정한 마음은 정각(正覺)을 이룬다.
동자의 안내를 받아 다시 금강굴 입구로 나오자 동자는 조금 전에 본 절이 반야사라고 무착에게 일러 주었다.
헤어질 때가 되자 동자는 위의 게송을 읊었다. 무착은 동자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절을 하였다. 그러자 동자의 모습도 반야사의 모습도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오직 황량한 바위산만이 남아 있을 뿐, 노인을 만났던 곳에서는 흰구름이 솟아올라 계곡전체를 순식간에 덮어버렸다.
그 때였다. 문수보살이 큰 사자를 타고 많은 권속들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을 보이더니 갑자기 동쪽에서 검은 구름이 솟아올라 그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무착이 만났던 노인이 바로 문수보살의 화신이었다. (廣淸凉傳 卷中)
* 지혜의 절 반야사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되어 있었다. 황금은 변하지 않음을 상징한다. 금은 화학적으로 가장 안정된 원소이다. 마찬가지로 지혜는 언제 어디서나 물들지 않고 본래의 빛을 발한다.
무착은 유리로 된 찻잔의 차대접을 받았다. 유리는 투명하고 맑음을 상징한다. 지혜의 본 바탕은 숨김이 없다. 문수는 지혜의 빛으로 숨김없는 마음으로 무착을 대하였건만 무착은 아직 형상에 끌림을 받았다. 하여 무착은 하룻밤의 숙박을 허락받지 못했다.
법문을 들은 후 무착은 문수를 보았다. 그러나 아직 남아있는 한 가닥 덜익은 검은 마음은 다시 문수를 사라지게 하였다.
* 이후 무착선사의 수행은 더욱 깊어졌다. 어느 해 동짓날 무착은 팥죽을 끓이다 팥죽 솥 위로 무수히 솟아 오르는 문수를 만나게 되었다. 문수를 만난 무착의 행동이 가관이다. 솟아 오르는 문수들의 뺨을 국자로 찰싹 찰싹 때리며 말했다. '네 문수지 내 문수냐'
* 자신이 아는 만큼 세상을 볼 수 있다. '내 문수'가 익은 만큼 '네 문수'를 볼 수 있다. 덜 익은 '내 문수'로 익은 '네 문수'를 볼 수 있다고 한다면 그가 본 '네 문수'는 익은 문수가 아니다. 내 수준으로 진리를 재단하는 착각일 뿐이다.
* 세상이 어지러우면 무수한 '네 문수'가 등장한다. 속성 깨달음공장이 나타나는가 하면 '요점정리 깨달음 학원' '단기완성 깨달음 마을'도 등장한다. 그런데 수강료가 싸지 않다. 아내와 딸을 바쳐야 하고 즐거이 재산을 바치며 울부짖어야 하고 자신을 허깨비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남는 것은 회한 뿐이다.
* 다음으로는 무수한 깨달음 해설가들이 등장한다. 그네들은 권위에 자신을 의탁하기를 좋아한다. 전거를 대며 자신의 책임을 미룬다.
나타나는 깨달음 선수마다 적당한 해설을 붙여준다. 그러다 잘못되면 책임을 미룬다. 이들의 특징은 언제나 뒷북을 친다는 점이다.
만일 지식이 깨달음을 보장한다면 매일 우리는 컴퓨터에 예배드리면 깨닫게 될 것이다.
* 선불교의 위대성은 복잡한 교리에 주눅들지않고 누구에게나 쉽고도 단순하게 깨달음의 문을 열어준 데 있다. 그러기에 선불교는 교학이 화려하게 완성된 이후에 유행하게 되었다.
수행의 단계를 미리 확정하여 놓고 뒤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안으로 자신의 생각의 뿌리를 살피고 그 얻은 바를 밖으로 점검받는 것이다.
책을 보지 말라는 말은 고정관념 선입견을 갖지 말라는 말이다. 자신의 수준을 넘어서 입을 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네 문수'를 자랑하지말고 '내 문수'를 언제나 살펴야 한다. 어떻게 살필 것인가. 떠오른 생각의 전제를 살펴 스스로에 속지 않아야 한다.
첫댓글 한생각 청정한 마음은 정각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