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은 2005년 12월 해남신문사에서 발간한『 이데올로기에 갇힌 해남의 근·현대사 』책자에 실린 내용중 해남신문 편집국 부장인 박영자기자가 쓴 남헌 오홍탁선생에 대한 글입니다.
오 홍 탁 / 산이 상공출신 / (1913 ~ 1950)
현직 경찰관이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적발됐다. 1930년대 일제의 탄압이 극심했던 시기에 현직 경찰로서 적색농민운동을 주도해 당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사건의 주인공이 산이 상공 출신인 오홍탁이다.
오홍탁은 전라남도 해남군 산이면 상공리 401번지 양지마을 출신으로 경찰직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일제의 탄압이 극심했던 시기에 현직 경찰로서 적색농민운동을 주도해 전국을 놀라게 한 인물이다. 이 사건을 소개한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는 한 면을 할애 할 만큼 오홍탁과 관련된 적색농민조합 건설위원회의 사건과 그를 소개했었다.
조선일보 1934년 9월 7일자 호외에는 '순사로 재직하면서 적색농민조합 멤버로 활약 / 학생시절 독서회의 조직자, 서내에서는 모범경관'이라는 표제를 달고 그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당시 조선일보에는 사건에 관계된 인물로서 가장 주목을 끄는 사람은 현직 경관으로 결사의 이면에서 활약하다가 탄로, 당국자는 물론 일반사회도 놀라게 했다는 내용으로 강진경찰서에 근무했던 오홍탁을 적고 있다. 이어 조선일보에는 '오홍탁은 산이면 상공출신으로 해남농업실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재학중에는 독서회라는 사회과학연구소를 조직하여 공산주의를 연구하였고 졸업후에는 각 촌에 독서회를 만들고 소작쟁의 등을 지도했다. 또한 경찰계에 들어가서 비밀을 탐지하는 동시에 동지들과 연락활동을 하려고 소화 8년 9월에 전남순사교습소에 들어가 12월에 졸업을 하고 강진서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는 이때에도 적색농민조합의 멤버로 관변에서 활동을 계속하면서 산이면 책임자로 활동을 하였다. 그는 경찰 재직중에도 성격이 양호하여 상관의 신임을 받은 모범경관인 동시에 그가 순사로 임관되기 전에도 자기 고향의 촌민들에게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그는 이 신임을 이용하여 자주 자기 고향을 드나들면서 암암리에 멤버 활동과 적색사상의 선전에 노력하여 오던 중 검거됐다. 현직 경관으로서 공산운동에 참가한 것은 경북 예천 사건에 이어 두 번째로 조선이나 일본내지 공산운동사상에 보기 드문 일로 매우 주목된다'는 글을 싣고 있다.
당시 주요언론이었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호외를 발행하고 몇 달에 걸쳐 많은 지면을 할애했던 전남운동협의회 및 적색농민조합건설준비위원회 발각 사건은 당시 사회를 들끓게 했던 커다란 사건이었다.
적색농민조합운동은 1930년대 농촌지역 전 지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항일독립운동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어 일체의 합법적인 운동이 봉쇄되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때의 독립운동은 비합법적으로 전개되었고 일제의 가혹한 탄압 앞에 20년대 독립운동의 길을 걸어왔던 많은 명망가들이 친일의 길을 선택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30년대 독립운동은 비합법, 비타협 투쟁을 선택한 사회주의 세력들에 의해 전개된 면이 강했다.
1930년대는 사회주의사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적색농민조합과 적색노동조합이 전국에 걸쳐 조직되었다. 이러한 여파로 해남에서도 북평 이진 김홍배를 중심으로 한 적색농민조합 운동이 일어났고 이 조직은 타 지역에 비해 그 규모가 광범위했고 활동내용이 대중적이었다.
김홍배와 오홍탁을 비롯한 적색농민조합 관련자들은 명망가가 아닌 1930년대 민중의 진출을 직시하며 성장한 새로운 세대의 청년활동가들이었다. 그리고 회원의 대부분은 농민이었다. 이 조직이 존재했던 마을의 경우 대부분의 농민들이 회원으로 가입했을 정도로 농민들의 호응이 높았다. 그래서 사건이 적발되었을 때 검거된 숫자만 해도 558명에 이르렀다.
산이면 지부 책임자로 활약했던 오홍탁은 이 사건의 실질적인 주도자인 북평면 이진 출신의 김홍배 등과 함께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다. 그리고 전국민이 바라던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오홍탁은 첨예한 좌우익 대립속에 또다시 구속이 되고 목포지원에서 재판을 받은 후 공주형무소를 거쳐 김천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한다. 그리고 6·25 발발직후 석방돼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그는 안타깝게도 보도연맹원으로 가입돼 갈매기섬에서 총살당하는 비운을 맞는다. 당시 시신을 수습했던 오인록씨(산이면 상공)의 증언 내용이다.
1964년 화산면과 진도 사이 무인도로 시신을 수습하러 갔다. 사건이 발생한지 10년이 훨씬 넘었지
만 경찰들의 감시 때문에 시신을 찾아올 수 없었다. 그 해도 경찰과 언쟁을 하면서까지 산이면 상공 사람들이 시신을 찾으러 갔다. 섬에는 뼈만 남아있는 시신들이 즐비했다.
그곳에 끌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산이 금호출신 박상배씨와 같이 갔기 때문에 쉽게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 박상배씨는 산이 상공 사람들이 일렬로 서서 총살 당했던 장소를 기억하고 있었고, 그 기억대로 뼈들이 나란히 있었다. 우리는 8명의 산이 상공 사람들의 뼈를 수습해 왔다. 다만 그 뼈들이 누구누구 것인지 알 수가 없어 한데 담아 왔다. 그리고 뼈를 빻아 각기 나눠 선산에 안치했다. 한 집안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20대의 젊은 나이로 밝은 사회를 꿈꾸었을 그는 해방 후 50여년이 흐른 지금에도 환한 세상을 맛보지 못하고 오롯이 자신의 무덤도 갖지 못한 채 흙속에 묻혀있다.
* 위 "전남운동협의회사건"과 관련하여 당시 3,200여명이 참가하여, 558명이 검거
되고, 그중 57명이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으로
송치되었으며, 그중 49명이 옥고를 치루었으나, 2009년 8월현재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분은 모두 27명뿐이다.
남헌선생의 독립유공자 서훈에 대하여 국가보훈처는 공적은 '건국훈장 애족장'에 해당되
나, 사망원인이 불명하다는 사유로, 서훈을 보류하고 있다.
첫댓글 근대의 동복오씨문중 인사이십니다. 자세한 자료를 종친회사무실로 보내주신다면 좋은 교육자료로 발전할 수 있으리라
사료됩니다. 종원여러분들의 청안을 기원합니다.
다음 카페 ' 독립운동가 오홍탁과 전남운동협의회'에 들어가시면 남헌 오홍탁선생의 자료가 있습니다.
오병두님의 건투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