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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효적 은혜 1 (Efficacious Grace) 고린도후서 5:11-1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유효적 은혜를 “무릇 영생에 이르도록 예정된 자는 하나님이 기뻐 용납하시기로 작정하시는 때에 말씀과 성령으로 저희를 확실히 부르사 저희의 본질상 속해 있는 죄와 죽음에서부터 나오게 하시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와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또한 저희의 마음을 밝히사 하나님의 도를 깨달아 저희의 완악한 마음을 버리고 유순한 마음을 얻게 하시며 저희의 심지를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저희를 세워 모든 선한 일을 행하게 하시며 그리스도에게 유효하게 나아가게 하신다. 그러나 이것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꺼운 마음으로 자유롭게 나아가는 것이다. 이 유효한 부르심은 인간 안에 예지된 어떠한 것으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으신 특별한 은혜로 말미암아 된 것이니 반드시 성령을 힘입어 새롭게 된 후에라야 이 부르심에 응하게 되고 그 가운데서 주시마고 하신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소요리 문답서에서 유효적 부르심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유효적 부르심이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로써 그 일로 인하여 우리의 죄와 비참을 깨닫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밝히사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며 우리의 의지를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를 권하사 복음 안에서 값없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능히 받게 하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1. 변화(중생)의 필연성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수고의 공로는 모든 사람들에게 값없이 제공되는데, 왜 어떤 자는 구원을 받고 어떤 자는 멸망을 당할까? 겉으로는 똑같은 특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슨 이유로 어떤 사람은 복음을 거절하고 계속 불신앙을 고집하는데, 어떤 사람은 회개하고 믿게 될까요? 이에 대하여 칼빈주의에서는 이런 차별을 두신 이는 하나님이며, 그 분이 유효적으로 어떤 사람은 부르시지만, 알미니안주의에서는 이 차별의 원인이 인간에게 있다고 합니다.
칼빈주의자로서 우리는 타락 이래 인간을 그대로 버려두었다면 인간은 그 반역을 계속하여 구원의 모든 길을 거절하고 필경에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도 헛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이사야 53:11)는 말씀대로 그의 희생의 효과는 택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유효한 역사에 의해 피택자들에게 유효하게 되어 그들로 회개하게 하여 영생의 기업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인간은 그 본래의 상태에서는 근본적으로 부패하여 자력으로는 거룩해질 수도 행복해질 수도 없습니다. 인간은 영적으로 죽어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그토록 타락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원수된 것부터 제거하고 화목하게 되어야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죄인인 인간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되려면 먼저 새롭게 지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즉 거듭나야 합니다(요 3:3). 인간은 영적으로 죽어있기 때문에 초자연적으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영적인 선을 행하게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인간이 옛 성품 그대로 천국에 들어간다면 그에게는 그곳 역시 지옥과 같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환경과 조화를 이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천국의 분위기가 아주 싫을 것이며 하나님 존전에서 견디기 어려울 것이므로 오히려 큰 슬픔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영혼이 변화를 받아서 천국에 합당한 모습으로 변화되어져야만 할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마치 죽은 몸이 스스로 생명을 얻고자 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미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다라서 그 일의 성질상 구원을 향한 최초의 움직임이 인간에게서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중생은 피택자들에게 부어주시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입니다. 이와 같은 위대한 재창조의 사역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중생의 은혜는 선한 것을 소유한 자들로 보이는 어떤 사람들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중생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동기를 가지고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서의 인간은 자신의 절망적인 상태를 전혀 깨달을 수도 없고, 스스로 변화될 수도 없고, 누구나 다 동일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멸망의 지옥 형벌을 받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가 하려고만 한다면 자신을 바꿀 수 있으며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예지에서 나온 계획도 저지시킬 수 있으며, 하나님의 전능의 행동력도 좌절시킬 수 있다고까지 착각합니다. 그러나 ‘죄인에게 필요한 것은 자력구원을 위한 어떤 조력이 아니고 전적으로 타력에 의한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인간을 구원하기기 위함이었지, 인간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도록 추고하거나 권면 또는 간청하고 도와주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워필드)
2. 초자연적 능력에 의한 내적 변화
성경에서는 이 변화를 중생이라고 하였습니다(딛 3:5).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신 것과 같은 큰 능력에 의하여 행해진 영적인 부활(엡 1:19-20)이며,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기이한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벧전 2:9)이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요 5:24)이며, 거듭난 것(요 3:3)이요, 살리신 것(골 2:13)이며,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 것(겔 11:19)으로서, 성경은 이처럼 변화된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고후 5:117)이라고 부릅니다. 이와 같은 성경의 증거는 오직 성령에 의한 도덕적 감화 또는 단순한 진리의 감화로부터 생겨나는데, 본질적으로 인간의 자의적 행동이라고 말하는 알미니안주의의 견해와는 전혀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변화는 새롭게 창조된 생명의 원천인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의 산물이기 때문에 불가항력적이며 영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영혼의 중생이라는 것은 우리 안에서 행해지는 어떤 일이지, 우리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어떤 행위가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사망에서 영적인 생명으로 이르는 돌연적인 변화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을 의식조차 못하는 것을 볼 때에 이것은 우리의 의식작용에 미치지 않는 보다 깊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나사로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따라 피동적으로 무덤에서 나온 것처럼 중생을 받은 영혼도 단순히 피동적으로 성령의 사역에 응할 뿐입니다.
찰스 핫지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영혼은 중생을 받는 주체요 그 변화를 일으키는 행동자가 아니다. 영혼은 그 변화를 선행하거나 뒤따르는데서 협동적이기도 하고 능동적이기도 하나 변화 그 자체는 경험되어지는 것이지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 앞에 나온 장님과 절름발이는 그 앞에 나오기까지 대단한 노력을 하였을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로운 능력을 기쁘게 활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침을 받는 순간에는 전적으로 수동적이었다. 치료를 받는 일에 있어서만은 어떠한 협력도 하지 못했다. 중생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신생”이라는 말에서도 피동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신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태어나는 아이는 스스로 능동적으로 태어날 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아이는 출생될 뿐입니다. 아이는 암흑 상태에서 나옵니다. 암흑 상태에 있을 때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세상에 나오자마자 그 아이의 전기능이 깨어나서 보고 느끼고 들으며 점점 이성적, 도덕적 존재로서의 그 전체 기능을 나타내게 됩니다. 성경은 중생도 이와 같다고 가르칩니다. 영혼은 중생에 의해 새로운 상태로 들어갑니다. 영혼은 새로운 세계로 안내되어 중생하기 전에는 알지도 못했고 감사도 하지 못했던 사물의 전모를 분명히 계시 받게 되고 그것들의 특유한 감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중생은 성품이 본질적으로 변하는 것을 말합니다. 좋은 열매를 얻으려면 좋은 나무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 변화의 결과로 인간은 연구나 논증에 의하지 않고 내적 경험에 의해 불신앙 상태에서 구원적 신앙상태로 옮겨갑니다. 우리가 육체적 출생에 대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것처럼 영적 출생인 중생에 대해서도 전혀 관여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육의 탄생은 우리의 힘이 전혀 관계됨이 없고 우리의 동의조차 구하는 일이 없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출생에 대해 항거할 수 없었던 것처럼 영적 출생에 대해서도 항거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출생한 후 우리의 육체적 생명을 살아가듯이 우리가 중생한 후에는 성화되어가야 할 것입니다.
중생은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즉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중생시킬 자는 중생시키시고 내버려둘 자는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조건적 선택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그것이 누구에게 주어졌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거듭난 성도는 하나님이 그의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 인줄을 알게 될 것이며(히 11:2), 이런 점에서 하나님이 자기 이웃에게는 주시지 않은 것을 자기에게는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고전 4:7)라는 물음에 바울은 인간들 사이에 특히 구속될 자들과 멸망될 자들 사이에 차별을 두신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만일 어떤 자가 믿는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중생시킨 까닭이요, 만일 어떤 믿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는 반드시 은혜를 주셔야 할 의무가 전혀 없습니다.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향해 ‘나오라’고 명하실 때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정말로 나사로는 붕대를 감은채로 무덤에서 걸어 나온 것입니다. 그 때에 나사로는 자기 능력이 아닌 어떤 다른 능력이 자기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가 모든 사정을 알았을 때는 자기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먼저 역사한 다음에 나사로는 그 능력을 힘입어 활동하였습니다. 인간의 활동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응답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구원받은 모든 영혼들도 영적 사망에서 영적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가 우선 생명을 회복한 후에 숨을 쉬고 음식을 먹은 것처럼 죄로 죽어있던 영혼도 우선 영적 생명(중생)을 회복한 수에 믿고 회개하여 선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도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라”(고전 3:6,7)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곡식을 수확함에 있어서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외부작업일 뿐입니다. 주권적인 능력으로 곡식을 자라게 하고 열매 맺게 하고 익어 거두어들이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영혼의 수확인 회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자가 아무리 열심히 설득력 있게 말을 해도 하나님께서 죄인의 마음을 열어주지 않으면 회심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영혼이 회개하고 장성하는데 있어서 인간은 단지 외적이요 기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며 내적으로 생명을 주시는 이는 성령이십니다.
성경의 타락교리는 도덕적으로 파괴된 인간은 어떠한 선행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진정으로 회심한 성도라면 자신의 무능력을 알며 자기 자신의 선행이나 공로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칼빈은 “아무도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양이 될 수는 없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선택을 받은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믿으나 복음을 들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때에 비로소 듣게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택함을 받지 못한 자는 복음을 들으나 믿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의 증거가 불충분해서가 아니라 저들의 내적 성품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반역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들을 때에 두 가지 반응이 일어나는 이유는 성경에도 나옵니다. 즉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겔 36:26)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마음(heart)이란 ‘속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 맺어진 영원한 언약에 의해 성자 그리스도는 확장되어가는 천국을 지도하시기 위에 온 땅 위에 중보적 통치자로 높임을 받으셨는데, 그것은 복종과 수난으로 받는 상급입니다. 그리스도의 지도력은 성령이라는 대행자를 통해 실시되는데 언약 안에서 미리 정해진 일정한 시간과 일정한 환경아래 구원을 얻도록 의도된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의 능력은 보통 능력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과 같은 능력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엡 1:19-20).
물질세계나 영적 세계는 다 같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물질세계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주권으로 물이 포도즙으로 변했으며, 문둥이가 깨끗하게 치료되었습니다. 알미니안주의에서는 물질세계에서의 하나님의 이적의 능력을 믿으면서도, 사람의 영혼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적은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면 악인을 선인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와 같은 능력은 창조주께서 피조물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당연히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계를 통치하는 수단들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하실 때에 빛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로 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은혜를 받기로 예정된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으로 말미암아 죄와 허물에서 벗어나 회심하게 되고,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차서 최후의 상급을 받을 수 있게 자격을 갖추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