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교 “기독교인만 천국 가? 아니야” "양심으로 천국 간다" 주장
::: 교회와신앙 ::: (amennews.com)
윗글을 읽고 제 생각을 나눕니다.
전체적 요점은 스베덴보리 사상을 비성경적인 것으로 이단시하는 글입니다. 그 중에는 스베덴보리 관련 내용들을 사실 그대로 소개한 부분도 있으나 상당부분에 있어서는 시종일관 마치 자신이 심판자인 듯 정죄하고 판결하는 모양새를 띠고 있습니다.
아울러 이 글은 글쓴이의 의도적 경우에 의해서든 아니면 무지의 경우에 의해서든 간에 글을 읽는 이들로 하여금 은연중 사실 아닌 것을 사실로 왜곡하며 일방적으로 폄하하고 있다는 인상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로는 이 글을 올린이가 비록 겉으로는 스베덴보리 사상의 주된 요지를 간추려 소개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어찌 그러한 것을 진리로 주장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정작 당사자인 스베덴보리가 상세히 설명해놓은 부분에 대해서는 정확한 이해와 언급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스베덴보리의 저서들은 너무 방대하고 이질적이어서 글을 읽는 이가 대단한 주의와 겸손과 인내를 준비하지 않고서는 그 내용의 본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나아가 그의 글은 현재 기독교인들의 주요 사상과 정면 배치되거나 생소한 내용들이 많은 까닭에 미리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읽게 된다는 점 또한 그의 글이 충분히 이해됨이 없이 성급히 거부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사정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그의 저서의 상당 부분을 그것이 어찌 그러해야 하는지 그 과정을 설명하고 또 설명하는데 할애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의 저서에 ‘왜냐하면’ 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고 때로 같은 사실을 지루할 정도로 중복하여 설명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거기 올려진 글 역시 이런 비난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앞뒤 문맥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구체적인 논증을 거침은 없이 그저 정통으로 굳혀놓은 자신의 사상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거부해버리는, 한 마디로 과정에 대한 이해없이 결론의 상이함만으로 정죄를 일삼는 자칭 이단판별사들의 성향이 그대로 반영된 글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물론 글 여기 저기에는 스베덴보리와 관련된 내용들로 꽉 채워져 있어 얼핏 보기에는 글쓴이가 이 글을 올리기까지 많은 자료를 준비한 흔적이 엿보입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 글에는 인터넷상에서 스베덴보리 관련 사이트 이곳저곳을 넘나들며 그 사상의 이단성을 증거하기 위해 자료를 수집한 흔적은 있으나 정말 중요한 작업인 그의 저서들을 직접 파헤치고 연구해본 흔적은 거의 없는 것이 가장 큰 결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주장하였는지 그 결론적 사실들만을 찾아내 비평하려 한다면 아마 컴퓨터를 통한 자료 수집으로도 단시간 내에 많은 양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너무 피상적이어서 사실 규명에는 충분치 못한데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사상의 이단성을 규명하려면 적어도 그의 방대한 저서들 중 적어도 서너권 정도는 먼저 읽어야 그의 사상의 핵심을 그런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이런 정도의 인물을 비평하는데 그의 저서들을 차분히 읽어보지도 않은 채 다만 인터넷상의 자료들에만 의존한다면 그것을 어찌 겸손하고 정직한 태도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사상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판별하기 위해서는 아마 그의 저서를 직접 읽는 것보다 더 지혜로운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참고로 출판사 서평에서 옮겨봅니다.
*** 스베덴보리에게 보내는 역사적 인물의 찬사 ***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꿈도 희망도 없는 절망적인 상태의 장애인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때론 하나님을 저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스베덴보리의 영계 탐험기를 읽고, 나는 더 이상 외롭지도 슬프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스베덴보리를 알고 나서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천국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천국에 가면 나는 더 이상 장애인이 아닌 것도 알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다시 젊음으로 돌아가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나는 그의 저서를 읽은 후, 죽는 것이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헬렌 켈러 (Helen Adams Keller 1880~1968)
미국 맹농아 저술가 / 사회복지 사업가
인류 역사상 스베덴보리와 같은 인물이 있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또한 미래에도 그런 인물이 나타나리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 수수께끼 같은 능력에 대해서는 놀라울 뿐이다.
에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 1724~1804)
독일철학자 / 저서 ‘순수이성비판’
스베덴보리는 천문학적인 정확성을 가지고 일하기 위해 훈련을 쌓은 지성인이었다. 그가 만일 위대한 학자가 아니었다면 사정없이 분석하고 평가하는 여러 방면의 학자, 시인, 작가들 앞에서 꿋꿋하게 서지 못했을 것이다. 제아무리 고상한 주장을 펼쳤을지라도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랄프 왈도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1803~1882)
미국의 대표적 사상가 / 시인 / 작가
스웨덴의 위대한 선견자 스베덴보리는 천상의 문제에 대해 새로운 지식을 우리에게 전달해 준 아버지라고 일컬어질 만하다. 떠오르는 영적인 지식의 햇살이 처음 이 땅을 비치기 시작했을 때, 그 햇살은 보통 사람들을 비치기 전에 가장 드높게 우뚝 선 사람의 마음을 먼저 밝혀 주었다.
그 마음의 산봉우리가 바로 스베덴보리다.
아더 코난 도일 (Arthur Conan Doyle 1859~1930)
의사 / 영국의 작가, 추리소설 ‘셜록홈즈’의 저자
스베덴보리의 생애는 물질을 극복하는 영의 승리를 강력하게 나타냈고, 그의 교훈의 생기와 영감은 오늘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가슴에 웅변적 증거가 되어 주었다. 세상에서는 양심의 소리가 적고 죽은 듯이 무력하게 보일 때가 있는데, 이때야말로 스베덴보리 같은 특수한 영적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다.
데어도어 루즈벨트 (Theodore Roosevelt 1858~1919)
미국 제26대 대통령 / 정치가
스베덴보리는 북구의 아리스토텔레스요, 서양의 붓다입니다.
우리는 그의 깨달음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스즈키 다이세츠 (鈴木大拙)(1870~1966)
20세기 일본의 대표적 불교학자 / 종교사상가
첫댓글 그러나 이런 정도의 제 설명으로는 스베덴보리의 사상을 정죄하는 그 글을 읽는 분들의 의구심을 떨쳐드리기에 턱없이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기 그 글을 읽으시다가 혹 스베덴보리와 그의 사상에 대한 의구심이 가라앉지 않는 분들께서는 꼬리말을 통해 의견을 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부분에 대해 시간이 나는대로 또 역량이 닿는대로 제 생각을 나누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저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엄기욱 형제님의 글이 이해됩니다.
네, 처음 뵙습니다. 카페에 들려 글 남겨주심에 감사도 드리고요. 서로에게 유익한 교제 되기를 고대합니다. 평안히...
이단색출에 혈안이 될 정도로 기존논리에 안주하고 있는 비판자들은 저서를 직접 파헤쳐 완독한다 해도 수긍하지 못하긴 마찬가지일 겁니다. 처음부터 기존 교리가 각인된 심정상태에서 닫힌 마음으로 읽을 것인데, 스베덴보리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기존 교리의 핵심이 결국 구원의 본질인 선을 도외시하게 만든다고 비판하는 사상이거든요. 맹목적 폐쇄적 개신교보다 차라리 합리성과 보편적 윤리의식을 유지하는 일반분들이 타종교 구원론을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요즘 기독교 내에서도 스스로의 배타성에 대해 자성하는 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열린 기독교' '함께 가는 기독교'를 지향하자는 소리들이 들리더군요. 인간 보편적 삶과 심성에 해악을 끼치는 사교집단이라면 모를까 서로 '다르게' 믿는다고 해서 정죄하는 마인드는 사라져야 하고 또 우리가 일일이 대응하지 않아도 시대적 추세에 의해 사라질 게 분명한 구습이죠. 우리나라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아직도 이런 구습이 남아있다는 게 사실 놀랍기도 합니다.
최근 출판된 두 책으로 인해 스베덴보리라는 이름이 급속히 퍼지자 이에 반동으로 그의 사상을 비판하려는 움직임도 점차 빈번해짐을 느낍니다. 이런 과정들을 보면서 한편으로 주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져갈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감사와 평화~
비판받는 당사자들의 감정만 동요하지 않는다면, 저런 비판의 여파래야 기독교내 일부 사람들 스베덴보리 멀리하게 하는 것 뿐일 테지요. 저런 비판만 듣고 무조건 스베덴보리를 멀리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무엇을 직접 알아보고 스스로 생각 판단하지 않고 교계의 말만 따르는 분들뿐이겠지요. 그런데 그런 분들은 이미 주님을 알고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입니다. 각자 옳다고 믿는 가르침대로 선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우리로서는 그분들에게 반감을 갖거나 스베덴보리를 강요할 이유가 없습니다. 수용한 교리야 어떠하든 그분들이 오히려 우리보다 더 선을 실천하며 사는 분들일 수도 있는 것이기에요...
예,,,,우리가 좀 지혜롭게 새계시를 전하면 스보덴보리에 대한 오해가 풀릴것입니다. 마치 1학년학생에게 처음한글을 가르치듯이요.. 선한 삶을 산 사람은 사후 영계에서 예수님을 쉽게 구세주로 영접한후 천국으로 갑니다. 야곱로버, 베르댜듀데에서 더 자세히 계시가 되었습니다. 신자들은 단지 진리를 알고 이해하고 영접하므로 더 유리한 위치에 있는것 뿐입니다. 그리고 유유상종인 천계는 그래야지만 더욱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사기치는것이 선한사람가운데 나쁜생각 가진사람이 사기도 칠수 있는것입니다. 사기꾼은 죽으면 사기꾼만 모여 있는곳으로 가므로, 자기를 되돌아 보게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글을 읽어 보니 글 쓰신 분은 균형잡힌 시각으로 사실을 말씀하시려는 것이 느껴집니다. 스웨덴보그의 글을 읽고 그에 동조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다 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또다시 새로운 교리가 펼쳐진 것을 믿는 것 외엔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역시 진리를 아는만큼 진리를 지키고 사는 삶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아는만큼 지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 그치고 실제의 삶에 나타나는 열매들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여 살면 모두가 우리들이 주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맞습니다....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지요... 예수님의 열매가 천국이지요. 그래서 많이 읽지말고 행하라고 하는 구절도 있어요. 그런데 사명에 따라 많이 읽어야 하는 사람도 있고, 번역도 해야하는 사람도 있고, 다양성이 나타납니다. ^ ^
스베덴보리연구회의 '위대한 선물'에 대한 제 견해가 잘못되어
본문에서 관련부분을 삭제하였습니다. 그 책은 우리가 읽어야할 좋은 책이더군요..
늦게나마 발견하여 고쳤습니다. 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