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2//
디지털 시대의 ‘하이퍼텍스트+시’
하이퍼시
들어가며// 시문학(2008년 3월호)의 「하이퍼텍스트 시와 디카시」 대담에서 필자가 말한 하이퍼시의 개념을 요약한다.
현대는 하이퍼미디어인 디지털 영상시대이다. 미디어는 소통의 모든 매체를 망라하는 개념이며, 기호 즉 언어는 소통의 도구로서 아주 기본적인 미디어의 하나이다. 하이퍼미디어를 하이퍼텍스트와 함께 혼용하고 있는데, 이 용어는 1950년대 컴퓨터 개척자인 넬슨(Theodore H. Nelson)이 ‘hyper’(초월, 과도한)와 ‘text’를 합성하여 만든 컴퓨터 및 인터넷 관련개념이다. 기존 텍스트의 선형성(線形性), 고정성, 중심성, 관념성 등에 대해 하이퍼텍스트는 비 선형성, 비 고정성, 탈-중심, 탈-관념, 쌍방향성 등 상대적 특성을 가진다.(이들 특성에 관한 설명은 다음 기회에 설명한다.) 이러한 특성은 포스트모던의 해체시학을 포용하고 있으며, 시를 종이책의 2차원 기호에서 4차원의 사이버 공간(하이퍼 공간)의 미디어까지 확대하고 공연의 새로운 영역도 열어 놓는다. 그래서 하이퍼텍스트의 방법에 의한 ‘하이퍼텍스트+시’(*시작품은 텍스트이므로 이후‘하이퍼시’로 명명해도 무방할 것 같다)가 탄생된 것이다.
여기서 하이퍼텍스트를 시쓰기 방법 면에서 볼 수 있는데, 이를 ‘언어의 징검다리’식 연결망으로 비유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우주적 공간(하이퍼 공간)에서 별과별을 잇는‘링크’가 있고, 그 링크를 계속 따라가는 궤적으로 이어지는 그런 경로이다.‘북두칠성’의 별 연결 경우도 같다. 시를 이처럼 우주 공간의 ‘경로’로 이해해도 되고, 봄날에 꽃과 먼 꽃으로 옮겨다나며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나비의 ‘비상 경로’에 비유해도 된다. 이러한 시 쓰기는 인간의 뇌 속에 잠재해 있는 기억의 소자(원소)들 사이를 흐르는 의식의 흐름과 흡사하다. 시를‘의식이 전광처럼 발광하여 움직이는 하나의 경로’(텍스트 맥락의 경로)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참 흥미롭다.
이상과 같이 새로운 하이퍼텍스트의 시쓰기 방법의 일부를 비유적으로 요약해 보았다. 이제 하이퍼미디어는 불가피한 생활이다. 그래서 시 또한 이 미디어 시대에 변할 수밖에 없다. 아날로그적 사고방식과 기호만으로 머물다가는 어느 순간에 낡은 시로 시대에 뒤떨어져 버릴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아날로그의 인프라를 도외시하란 말은 결코 아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은 상호보완적이어야 될 것이다. 문제는 아직도 전통적 서정시를 시의 유일한 왕도(王道)로 믿고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하이퍼시’의 실예
경향신문의 신춘문예 당선작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먼저 작품 전문을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빨강 초록 보라 분홍 파랑 검정 한 줄 띄우고 다홍 청록 주황 보라. 모두가 양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양은 없을 때만 있다. 양은 어떻게 웁니까. 메에 메에. 울음소리는 언제나 어리둥절하다. 머리를 두 줄로 가지런히 땋을 때마다 고산지대의 좁고 긴 들판이 떠오른다. 고산증. 희박한 공기. 깨어진 거울처럼 빛나는 라마의 두 눈. 나는 가만히 앉아서도 여행을 한다. 내 인식의 페이지는 언제나 나의 경험을 앞지른다. 페루 페루. 라마의 울음소리. 페루라고 입술을 달싹이면 내게 있었을지도 모를 고향이 생각난다. 고향이 생각날 때마다 페루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아침마다 언니는 내 머리를 땋아주었지. 머리카락은 땋아도 땋아도 끝이 없었지. 저주는 반복되는 실패에서 피어난다. 적어도 꽃은 아름답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간신히 생각하고 간신히 말한다. 하지만 나는 영영 스스로 머리를 땋지는 못할 거야. 당신은 페루 사람입니까. 아니오. 당신은 미국 사람입니까. 아니오. 당신은 한국 사람입니까. 아니오. 한국 사람은 아니지만 한국 사람입니다. 이상할 것도 없지만 역시 이상한 말이다. 히잉 히잉. 말이란 원래 그런 거지. 태초 이전부터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무의미하게 엉겨 붙어 버린 거지.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미쳐버린 채로 죽는 거지. 그렇게 이미 죽은 채로 하염없이 미끄러지는 거지. 단 한 도 제대로 말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안심된다.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고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한다. 길게 게 심호흡을 하고 노을이 지면 불을 피우자. 고기를 굽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술을 마시자. 그렇게 얼마간만 좀 널브러져 있자. 고향에 대해 생각하는 자의 비애는 잠시 접어두자. 페루는 고향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스스로 머리를 땋을 수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양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말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비행기 없이도 갈 수 있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다.
― 이제니의 시 「페루」 전문
이 시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새로운 쓰기의 일면을 살펴본다. 첫째, 종래의 신춘문예식의 글투를 완전히 벗어나 있다. 둘째, 이 시를 단순히 해체나 언어 게임으로만 보면 안 된다. 해체시의 한 방법인 언어의 미끄러지기가 있다. 초현실주의에서의 ‘아시체(雅死体)놀이’도 연상된다.‘양’에서 우는 동물 양으로, 양의 울움 소리 ‘메메’에서 ‘라마의 울음 소리’로, 언어 ‘말’에서 히잉 히잉 우는 동물의 ‘말’로 미끄러진다. 그런데 미끄러짐이 계속되면서 서로 연결되고, 전체는 하나의 네트워크를 구성한다. 마치 링크된 ‘말의 덩어리’ 또는 ‘마디’를 점핑해가는 모습과도 같고, 앞에서 말한 ‘언어의 징검다리 건너기’나 꽃과 꽃을 날아다니는 나비의 비상 경로와 같다. 그런데 이런 쓰기 방법이 시인의 무의식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무의식의 도약이라고 할까, 쓰기가 무의식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하이퍼텍스트는 사이버 공간에서 링크된 마디를 점프해가서 경로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인간의 뇌 속의 무의식은 체험에 의해 기억되기 때문에 자극과 반응에 의해 연결된 링크로 그 경로(상상)는 자연적인 생명 기호의 총체적 질서 위에 있다고 하겠다. 지금 우리에게는 하이퍼텍스트의 쓰기 방법을 삶의 공간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실용의 문제에 당면해 있다. 앞서 말한 별의 연결망이나 사람의 뇌의 신경조직을‘리좀’(rhizome)이라고도 하여, 수목상(樹木狀)의 조직 형태와 대비해서 말하는 경우도 있다. 하이퍼텍스트 시쓰기는‘리좀’ 형태를 지향한다고도 볼 수 있다. 예문의 시 「페루」는 시인의‘의식이 점핑하여 도약하면서 구성된 하나의 리좀적 경로’라고 볼 수도 있다.
의의 및 배경
오늘의 디지털 시대는 TV와 컴퓨터를 통해 영상, 문자(텍스트), 음성의 정보를 개인이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는 멀티미디어를 발달시켰다. 그래서 첨단 정보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지식이 팽창되고 인식의 확장도 가져왔다. 또한 컴퓨터 그래픽과 연관되어 비디오, 레이저, 빛, 소리 등을 이용한 미디어 예술이 발전하여 영상시대를 열었다. 화상전화는 그 좋은 예이다. 시각성과 동시성이 두드러져서 기존의 시공간을 무너뜨려 버렸다.
지난밤에 딸과의 대화를 통해서 실감했다. 디지털 시대는 시간과 공간을 살해하고 전 세계를, ‘이때, 이곳, 나’와 마주보기로 만들고 있다. 또한 원근을 극복하고 동시적 마주보기를 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이곳 이때의 인간존재를,‘현존재’(Da-Sein)라고 말했다. ‘다’(Da)란 ‘거기, 이곳’의 뜻이고, ‘자인’(Sein)은 존재한다는 뜻. 이러한 영상시대에 맞추어 시도 관념의 아날로그적인 ‘읽는 시’에서 디지털적인 영상을 ‘보는 시’로 이행되어야 할 것이다. 시집이나 문학지들이 수없이 쏟아지고 있지만 오늘 급변하는 영상시대에 이미 그 호소력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새로운 시쓰기 방법으로서, 마디(node), 링크(link), 경로(path)를 중심으로 하이퍼텍스트(디지털)의 특성을 들어 기존 텍스트(아날로그) 와 비교하였다. 그리고 시대적 의의와 새로운 시쓰기의 필연성도 말했다. 이를 바탕으로 현재 문단을 살펴보자.
나는 계간 시향을 만 7년 동안 발행하면서 문단을 살펴보았다. 매호 100 명의 시인의 작품을 골라 게재해 왔다. 그래서 문단의 동향과 시의 흐름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는데, 한마디 말하면 우리 문단은 하이퍼미디어의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신세대의 신인들에 의해서 해체 등의 언어철학을 바탕으로 한 포스트모던 한 작품들이 생산되고 있지만, 그것도 소수이고 대다수의 시인들이 고루한 서정시에 머물러 있다. 특히 시가 다른 장르에 비해 늦다. 아마 그 이유는 언어의 관념에 붙잡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언어는 기본적인 미디어로서 그 기능이 관념을 바탕으로 하여 소통되기 때문에 탈 관념하고 언어의 벽을 뛰어 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시인들이 앞으로 언어철학을 이해하고 하이퍼미디어의 새로운 공간을 알게 되면 시의 확장된 인식과 공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이퍼시’ 운동
이러한 때에 벌인 새로운 시운동은 문학사적 의미를 갖는다. 현대시협을 중심으로 해서 벌인 금요시론포름은 주목할 만하다. 여기서 벌인 사물시, 탈관념, 디카시, 디지털시의 토론은 잠자는 문단에 작고 매운 파문을 일으켰다. 이를 간략히 언급하면 이솔의 ‘사물시’, 이상옥의 ‘디카시’, 오남구와 송시월과 박유라, 양준호 등의 ‘탈관념시’, 심상운의 ‘디지털 시’를 들 수 있다. 이 모두가 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여러 갈래 하이퍼미디어의 시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오늘 하이퍼미디어 시대에 와서 보니 이러한 기저에는 1960년대 중반에 이미 ‘하이퍼시’를 예견한 선행된 작업이 있었다. 문덕수의 「꽃과 언어」(현대문학, 1961. 3), 「선에 관한 소묘」(시단, 1963. 7) 등의 작품들이 그것이다. 이는 하이퍼텍스트의 선구적 작품임이 분명하다.
(하이퍼텍스트의 이론으로 이상(李箱)의 시를 분석한 문덕수의 「한국시의 동서남북」(시집 꽃먼지 속의 비둘기의 권말에 수록, 2007)은 하이퍼텍스트시론의 남상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는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언어는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
꽃의 둘레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간
꺼져도,
어떤 언어는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된다.
― 「꽃과 언어」
「꽃과 언어」는 종래의 시각과는 달리 하이퍼텍스트의 시 쓰기로 이해할 수 있다. 사물의 실체를 추구하는 실체론이 아니라 사물과 사물과의 존재와 관련에서 생성하는 이미지를 포착한 ‘관계론’으로서, 언어가 사물과 만나는 관계에서 이미지의 기의(signifié)가 변화하는 다양성을 보여준다. 특히 의미가 고정되지 않고 미끄러지고 있다. 이것은 현대 언어철학의 해체(解体)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고 탈관념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언어가 무의식의 '징검다리인 경로’에서 탄생하는 것으로, 즉 하이퍼텍스트의 관점으로 보면 꽃잎과 나비의 링크, 꽃잎과 꿀벌의 링크가 이루어지는 경로들이 선명하다. 특히 시집 선공간(성문각, 1966) 시들의 선(線)들은 링크이고 거미줄의 그물처럼 짜인 네트워크가 아닐까 한다. 한 대목 인용해 본다.
어둠 속에서 빛살처럼 쏟아져 나오는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선(線)이
꽃잎을
문다.
(생략)
거미줄처럼 짜인
무변(無邊)의 망사(網紗),
찬란한 꽃 망사(網紗) 위에
동그만 우주가
달걀처럼
고요히 내려앉다.
‘디카시’ 담론
디카시’는 디지털 시대를 배경으로 나온 하이퍼미디어 시의 하나이다. 기존의 아날로그적인 텍스트와 ‘차별성’을 두어야 한다고 본다. 도구적인 면에서 디카를 사용한 영상 텍스트(사진)와 기호인 문자로 된 문장 텍스트를 종이책 위에 인쇄해 내고, 여기에서 ‘날시’라는 새로운 개념도 정리해 놓고 있다. 이 운동은 많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으며 담론의 대상이 되어 있으므로 자세한 것은 접어놓는다. 간략하게 언급하면 그 첫 번째는, 언어는 소통의 기본 미디어이다. 이 미디어가 기존의 아날로그 식 서술이나 묘사로 그쳐서는 차별성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시 쓰기도 앞에서 얘기한 하이퍼미디어 적인 방법이어야 한다고 본다. 단순히 사진과 서정적인 텍스트의 나열이나 인쇄된 결과물만으로는 종래의 포토포엠과 식별이 어렵게 된다. 그 두 번째는, 인쇄 매체를 벗어나 소리, 동영상 등까지 망라한 사이버 공간으로서 과감하게 확장하여 말 그대로 하이퍼미디어 세계로 발전해 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도 생각한다. 아무튼 디카시는 디지털 시대를 배경으로 출발한 미래의 시로서 화제를 모으고 있어 고무적이다. 미래에 어떻게 논리가 구축되고 발전할지는 알 수 없으며 무한한 가능성을 보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