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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씨(慶州金氏) | |
경주김씨는 신라 왕실의 삼성(박,석,김) 가운데 하나다. 시조 김알지의 7세손인 미추왕(신라13대)에 이르러 비로서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서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알지의 28세손)이 935년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빼앗기기 까지 38명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명종(金鳴鍾 : 영분공파)과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 : 대안군파)을 1세조로 하는 계통이 대표적이며, 조상에 대한 계통은 확실하지 않으나 경순왕의 후손으로 전하는 김장유(金將有 : 판도판서공파), 김인관(金仁琯 : 태사공파), 김순웅(金順雄 : 대장군공파)을 1세조로 하는 계통 등 크게 5파로 갈라져 후대로 내려오면서 10여 개의 지파(支派)가 생겨났다. 지역을 중심으로 분관되어 나갔다.
영분공파 파조인 김명종은 경순왕이 나라를 빼앗긴 후 고려에서 경주군(慶州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8세손 김의진(金義珍)은 유학(儒學)의 종주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고, 12세손 김인경(金仁鏡)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고려의 명신으로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라 시와 글씨로 명성을 떨쳤다.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내중령(內中令)을 지냈고, 김예겸의 손자 김의진(金義珍)은 고려 사학(私學) 12공도(公徒)의 하나인 양신공도(良愼公徒)를 육성하였으며 문종 때에는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지공거(知貢擧)를 겸하여 인재등용에 공헌하고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다. 정중부(鄭仲夫)와 이의방(李義方)을 제거하려 했던 인물이며, 김영고의 아들 김인경(金仁鏡)은 문무를 겸한 명신으로 고종 때 조충(趙沖)과 함께 강동성(江東城)에서 거란군 평정에 공을 세우고 벼슬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시문(詩文)과 예서(隸書)로 명망이 높았다. 대안군에 봉군되고 그의 후손들이 여러 본관으로 분관되었다. 사신이 오면 관반사(館伴使 : 외국 사신을 접대하기 위하여 임시로 임명한 정3품 벼슬)로 천거되었으며 나라의 큰 일에는 항상 전례(典禮)의 일을 맡아보았다.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고, 특히 그의 아들 김약선(金若先 : 공부시랑), 김기손(金起孫 : 평장사), 김경손(金慶孫 : 추밀원 부사) 3형제가 유명했다. 충청도 보은 땅에 은둔하여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조선 중종 때의 명신 김정(金淨)이 뛰어났다. 그는 조광조(趙光祖)와 더불어 중종 때에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실현을 위하여 혁신정치를 시도하다가 기묘사화가 일어나 서른 여섯 살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에 대한 일화가 "당적보(黨籍譜)"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가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정언(正言) 등을 거쳐 순창군수(淳昌郡守)로 나가 있을때 그의 옛 글벗인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 이항(李沆)이 청탁편지를 부쳐왔다. 그 편지는 직함을 갖추어 쓰고 도장을 찍었으며 우정있는 말은 한 마디도 없고 마치 높은 자리서 하명하는 듯한 글투였다. 이에 김정은 거절의 뜻을 밝히고 아래와 같은 시를 써 넣었다. 남녘 시골로 흘러내린 병든 이 한 몸이라 천상에서 화려한 직함인 승지 이씨여 편지 쓸 즈음에 옛 벗 생각을 했는가." 김정의 죄를 추론하는데 앞장섰다. 그외에도 그가 제주도로 귀양가다가 해남 바닷가 노송 아래서 회포를 달래며 소나무 껍질을 벗기고 적은 시가 전하며, 36세로 사약을 받을 때 남긴 절명사(絶命詞)가 유명하다. 위위시경(衛尉寺卿)을 지내고 검교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에 올랐다.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망국의 한을 안고 안동에 은둔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김세필(世弼)이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옥중에서 입던 피묻은 옷을 가지고 나와서 통곡하며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는 화를 당하여도 오히려 위에 성군(聖君)이 계셨기 때문에 다행히 살게 되었지만, 지금 임금께서는 나이가 겨우 십여 살이고 간신들이 꼭 너를 죽이려 하니, 네가 어찌 죽음을 면할 것이냐"하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의병을 일으켜 전쟁에서 순절하였고, 아우 김홍욱(金弘郁)은 효종 때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있으면서 앞서 인조 때 사사(賜死)된 민희빈 강씨(姜氏)와 그녀의 어린아들의 억울함을 상소하다가 효종의 노여움을 사 친국(親鞠)중에 장사(杖死) 되었다.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金漢藎)은 영조 때의 부마(駙馬 :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혼인)이면서도 겨우 두 칸 집에 살면서 비단은 걸쳐 본 일도 없고 가마를 타는 법도 없이 청빈하게 살다가 아들이 없어 형의 아들인 이주를 양자로 삼았다.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書藝)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켜 특히 예서와 행서에 새로운 경지를 이룩하였다. 김부일(金富佾 : 수태위를 역임), 김부식(金富軾), 김부의(金富儀 : 지추밀원사를 역임)가 유명했다. 유명한 김부식(金富軾)은 인종이 즉위하자 왕실외척임을 빙자하여 권세를 쥐고 군신의 예의에 벗어나는 행동을 일삼던 이자겸(李資謙)의 방자함을 충고하여 이를 시정하게 하였고, 42년간 벼슬에 있으면서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1145년(고려 인종 23년) 왕명을 받들어 우리나라 최초의 정사(正史)인 "삼국사기(三國史記)" 50권을 완성하여 바치는 등 이름난 문장가(文章家)로 송나라에까지 명성을 떨쳤다.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하였다. 조선 창업에 공을 세워 보좌공신(補佐功臣)에 책록되고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한 후 함경도 정평에서 은둔하였다. 고려말에 장사랑(將仕郞)에 올랐다. 그 가통을 이어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고종 때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지낸 김영작(金永爵)의 아들 김홍집(金弘集)은 한말 외세와 개화의 틈에서 처참하게 희생당한 인물이다.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을 거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올랐으며, 김철희(金喆熙)는 황주 목사(黃州牧使)로 재직중 1885년(고종 22년) 황해도 토산에서 일어난 민란을 진압하여 승녕부 종장(承寧府從長)을 지낸 김춘희(金春熙)와 자산으로 도서관을 설립한 김인정(金仁貞), 중국 원세개(袁世凱 : 중화민국의 초대 대통령)의 옥새를 새겼던 서예고문 김태석(金台錫), 아악부원양성소(雅樂部員養成所)를 개설한 김영제(金寧濟), 청성곡(淸聲曲)의 명수 김계선(金桂善) 등과 함께 명문의 전통을 이었으며, 김용원(金庸源)과 김도태(金道泰)는 조국의 자유수호와 광복을 위하여 몸바쳤다.
태사공파(太師公派) : 전서공파(典書公派), 판관공파(判官公派), 좌랑공파(佐郞公派), 사승공파(司丞公派), 공평공파(恭平公派), 우재공파(愚齋公派), 송재공파(松齋公派) 병판공파(兵判公派), 부산파(釜山派), 성천파(成川派), 시랑공파(侍郞公派), 시중공파(侍中公派), 예조판서공파(禮曺判書公派), 익화군파(益和君派), 차호공파(車胡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청원파(淸原派), 평창파(平昌派), 호정공파(昊亭公派)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 감사공파(監司公派), 계림군파(鷄林君派), 공호공파(恭胡公派), 동지이판공파(同知吏判公派), 봉산파(鳳山派), 부제학공파(副堤學公派), 연동파(蓮洞派), 정수공파(貞肅公派), 춘고공파(春皐公派), 판윤공파(判尹公派), 현령공파(縣令公派), 만호공파(萬戶公派), 경재공파(敬齋公派), 망주헌고파(望主軒公派)영분공파(永芬公派) : 강릉공파(江陵公派), 검교공파(檢校公派), 두계공파(杜溪公派), 밀직공파(密直公派), 병조판서공파(兵曺判書公派), 부사공파(府使公派), 수은공파(樹隱公派), 시어사공파(侍御使公派), 옥구참공파(沃溝參公派), 월성부원군파(月城府院君派), 참찬공파(參贊公派), 판삼사사공파(判三司事公派),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현감공파(縣監公派)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 감사공파(監司公派), 공조판서공파(工曺判書公派), 금제공파(金堤公派), 사인공파(舍人公派), 식암공파(息菴公派), 장암공파(壯菴公派), 직장공파(直長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참교공파(參校公派), 참의공파(參議公派), 충암공파(沖菴公派) [본관지] : 경상북도 경주시 [기 타] [ 연락처 ] 경주김씨대종친회 : 02)393-34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