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is 2권 08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에 관하여
몽테뉴는 아버지의 각별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한 사랑을 직접 체험한 아들로서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 장입니다.
자식에게서 도움이 필요해서 바치는 애정밖에 못 받는다면, 그 아비는 참으로 비참한 아비입니다. •••• 우리는 향용 훌륭한 인물의 유골을 존경하고 숭배하는 마음으로 간직합니다. 자기 인생을 명예롭게 보낸 사람에게는 존경받지 못할 노년, 특히 자기 자식들에게 존경받지 못할 만큼 삭막하고 역겨운 노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궁핍이나 필요, 또는 강제와 억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도리로 자식들의 마음에 의무를 새겨주었을 테니까요.[102]
일처리를 하는 과정에 몸소 자식들을 참여시키고, 자기 경험에 따라 가르침과 조언을 주면서 그들의 행동을 조절해 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집안의 오랜 명예와 전통을 손수 후계자들의 손에 건네주고, 그럼으로써 자식들의 장래에 거는 기대에 자기 책임을 다하는 것은 늙은 아비에게 크나큼 기쁨이리라 늘 생각해 왔으니까요.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 저는 그들과 어울리는 것을 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그들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내 나이가 허락하는 대로 그들의 흥겨운 삶과 잔치를 즐기고 싶습니다.[107]
나는 아이들과 다정한 관계를 가짐으로써 그들의 마음속에 나에 대한 꾸밈없고 생생한 우정과 호의를 길러 주려 애쓸 것입니다. 좋은 성품을 타고난 아이들에게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지요.[108]
나는 나를 무서워하게 할 수 있더라도, 그보다는 나를 사랑하게 만들고 싶습니다.
노년엔 너무 많은 결함이 있고 너무도 무력합니다. 멸시당하기 꼭 알맞은 노년에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식구들의 애정과 사랑입니다.[109]
어떤 이가 당한 일을 들을 때, 내가 관심을 두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즉시 나 자신에게로 눈을 돌려, 나는 어떤가를 봅니다. 그에 관한 일은 모두 내일이 됩니다. 그가 겪은 일은 내게 경고가 되어 그 방면에 대해 각성시킵니다. 생각을 밖으로 뻗치는 대신 안으로 돌릴 줄만 안다면 우리 자신에 대해 해야 할 이야기를, 우리는 매일, 매 시간, 남에 대해 합니다.[113]
아비로서 엄하고 찡그린 모습만 보이느라 아들을 귀애하며 깊이 알아 가는 즐거움을 놓쳤고, 그를 지극히 사랑한다는 것도, 그의 덕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도 말해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 애에게 품은 그 남다른 사랑을 속으로만 간직하고 있었단 말이오. 그 사랑을 전적으로 즐기고 알았어야 할 사람은 바로 그 애가 아니오
그 에게 해야 할 말을 하나도 잊지 않고 다 했으며, 그래서 서로서로 마음을 속속들이 완벽하게 나누었음을 안다는 사실보다 더 따뜻한 위로가 없기 때문이다.
첫댓글 ‘친구처럼 친근한 아버지는 괜찮지만 친구 같은 관계는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바를 몽테뉴도 동감하고 있습니다.
“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한 아버지라는 지위만으로는 충분히 권위가 서지 않는다는 듯 자식들에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쓰지 못하게 하고, 더 공손한 호칭이랍시고 다른 이상한 호칭으로 부르게 하는 관습을 나는 좋게 보지 않습니다. ” -108-
대신, 몽테뉴는 이 취지의 본질을 밝힙니다. “나는 나를 무서워하게 할 수 있더라도, 그보다는 나를 사랑하게 만들고 싶습니다.” -109-
이에 대한 논거로 제시한 몽뤼크 원수가 아들을 잃고 나서 한 고백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간에 충분한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큰 기쁨이죠. 그런데 권위와 위엄만으로 자식을 대한다면 그런 기쁨을 자발적으로 포기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지만, 몽테뉴는 이것이 흔히 여성들이 보여주는 감정적인 반응이 아니라 철저히 이성적인 성찰을 통해서 아이들을 대해야 한다는게 포인트입니다. 물론, 이는 다소 성차별적이지만, 아마도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표현일겁니다.
이 장의 결론은, 아버지 같은 (이성적인) 사랑을 자식에게 온전히 베풀고 노년이 되면 그가 주었던 사랑이 응당 다시 본인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