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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효적 은혜 (2) 사도행전 13:44-52
우리 생활에서 수돗물이나 전깃불을 아주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수도관을 통하여 물이 공급되고 있는 한은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는 것은 아주 당연하고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전깃불도 마찬가지입니다. 전기가 공급되고 있는 한은 스위치를 켤 때에 불이 밝혀지는 것도 역시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수도관이 잘려 있거나 전깃줄도 잘려있다고 가정을 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수도꼭지를 틀어도 물은 나오지 않을 것이며, 전기불도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도관이나 전기선은 스스로 다시 결합하여 원상회복을 할 수 있다고는 아무도 믿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수리할 줄 아는 사람이 그 관과 선을 연결하면 또 다시 물이 나오고 전기 가 통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유효라는 말을 어디에 사용할 수 있을까요? 수도관을 이을 때에 물이 다시 흐르게 되는 것을 가리켜 ‘유효’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기선을 통하여 전기가 흐르게 되는 것을 유효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수리한다고 말합니다. 그 수리가 유효하게 되었기 때문에 물도 흐르고 전기도 흐르는 것입니다.
어제 뉴스에 보니까 술집에서 여자들끼리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르지만 한쪽에서는 신고 있던 하이힐을 벗어서 상대방 여자를 때렸는데, 그 하이힐에 눈을 맞아서 동공이 파열되고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실명된 눈은 그 눈앞에 아무리 센 빛을 비추어도 그 빛을 느낄 수 없습니다.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습니다.
볼 수 있게 하는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수술을 하는 것입니다. 의사가 그 눈 대신에 다른 사용할 수 있는 안구를 이식수술을 하는 것입니다. 이 수술이 잘 되면 시력을 회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전에는 절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수술이 잘 되어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수술이 효과적으로 잘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초자연적 내적 변화의 필요성
이처럼 죄에 죽은 영혼도 복음의 진리를 아무리 많이 들어봐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들어도 영적인 귀가 열린다거나 영적인 시력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끊어진 수도관이 연결되고 전깃줄이 연결되어야만 통하게 되는 것처럼, 영혼이 중생하기 전에는 결코 복음의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죄인을 중생시킬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생명을 가지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면 즉시 죄인은 새로운 영적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두아디라성의 자주장사 루디아는 하나님께서 먼저 그녀의 마음을 열어주셨기 때문에 바울의 말을 청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행 16:14). 이 진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시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다.”(요 17:2)는 말씀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 5:21)는 말씀 속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중생하게 하시면 그 효과는 즉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으신 언약을 보면, 인간의 운명은 거의 자신의 행위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담이 시험을 받은 그 결과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은 의로운 자였습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타락 후의 인간이 어떻게 자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아담에게 자유의지를 주어서 스스로 구원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게 하셨는데, 이것을 우리가 알기 쉽게 1차 구원 계획이라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1차 구원 계획을 세우실 때에는 아담의 도덕적 상태 즉 타락이전의 의로운 상태를 고려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자유의지를 이용하여 사단에게 충성하기로 하여 1차 구원 계획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사실은 이것은 실패하였다고 하는 것은 인간 편에서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한 것이지 하나님께서는 결코 실패하시는 일이 없습니다. 어쨌든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있을 때에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제2차 구원 계획을 세우실 때에도 역시 인간의 도덕적 상태 즉 타락하여 무능력한 상태가 된 것을 고려하여 적합하게 하셨습니다. 타락 전이나 타락 후나 인간에게는 자기 의지를 하나님의 주권적 지배권 밖에 둘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은 그가 최고로 열심히 충성한다고 착각하여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을 잡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름을 받고 중생하여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우편에 달린 강도는 그의 지상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누구든지 예정된 자는 다 믿었다.”(13:48)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그 은혜는 반드시 유효하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셨다면 모든 인간을 구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비록 그 이유가 부분적으로 밖에는 계시되어 있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전사역을 통하여 이성적 책임이 있는 존재인 인간의 성질과 모순되는 일을 결코 행하지 않으신다는 것만을 틀림이 없는 사실입니다.
* 초자연적 변화에 대한 알미니안주의의 잘못된 견해
알미니안 주의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들의 큰 결점 중에 하나는 인간의 마음에 대한 성령의 초자연적역사의 필연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중생이란 각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점진적인 변화로서 도덕적 신념이나 진리의 일반적 힘에 이끌려서 죄인의 마음의 의도가 변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주의는 ‘자유의지’ ‘반대적 선택의 능력’을 주장함으로써 결국 죄인인 인간이 자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을 좀 더 강하게 주장하게 되면 인간과 그리스도는 구원의 협력자가 됩니다. 이는 마치 구원을 인하여 얻은 영광을 그리스도의 은혜와 인간의 의지에 돌림으로써 인간이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의 공로를 나누어 갖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알미니안 주의자들의 주장과 같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의향이시라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역에서 큰 실패를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도 인간이 그의 자유의지로 받을 수도 있고 받지 않을 수도 있다면 그들의 구원관은 “전능자를 하나의 무모한 의욕과 시험과 노고를 하는 자로 만드는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교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모든 죄인을 다 구원하시려다가 죄인들에게 방해를 받고 거듭 실패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을 붙잡기 위해 끈질기게 포위 공격을 하지만 인간의 영혼은 난공불락의 자유의지라는 아성에다 하나님을 향한 전투에서 완강한 저항과 공격을 감행하여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포위망을 해제시킬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령은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자유의지를 뒤쫓다가 패전한 장수나 실패한 정치가처럼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도망하던가 아니면 굴욕적인 파면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알미니안 주의자들의 주장입니다.
그러면 성경도 그렇게 알미니안 주의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을까요?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권세는 어떤 제한도 받지 않는 권세입니다. 창세기 18:14을 보면 “여호와께서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고 하였습니다.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로 비추어 볼 때에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권면하시고 간청하시다가 피조물이 응하지 않으면 결국 그의 목적을 성취하지 못하시다는 것을 도무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부르심이 유효적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는 모든 사람이 구원 얻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뜻대로 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고 상상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커다란 흠을 가지고 있는 것이 될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은 결코 전능하신 하나님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하나님께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고 인간에게 간청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알미니안주의의 모순입니다.
* 구속 사역의 충족성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져야할 부채(죄의 대한 책벌)를 완전히 갚아주셨기 때문에 죄의 결과로부터 해방시켜주셨다는 것과 일생동안 흠 없이 사시고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심으로서 우리에게 영생이라는 상급을 주셨다는 것을 칼빈주의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온전히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여 하늘의 생명을 얻게 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이 사역을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라고 부르는데 이 사역의 충족성에 대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완전한 순종과 자기 희생으로 아버지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렸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가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을 위해 화해뿐만 아니라 천국의 영원한 기업까지 획득하셨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영생이라는 상급을 받지 않으시고 단지 우리의 죄만 도말하시기 위해 그 모든 일을 하셨다면 그의 백성들은 원점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즉 타락 이전의 아담과 같은 수준으로 되돌아가는 것 외에 다른 변화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되면 또 다시 모든 인간들을 아담과 같이 시험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3:11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 안에 계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구원사역에 대해 인간은 전혀 구원을 받을만한 아무 공로도 갖고 있지 않으며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는 무의 상태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좋은 권면”이 아닙니다. “좋은 소식”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행하셨는가에 대해 우리에게 선포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죄인의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구원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라는 의미입니다. 만일 인간의 선택에 의존하는 신앙과 순종이 반드시 첨부되어야 한다고 하면 그것은 복음주의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알미니안 주의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간을 위해 죽으셨고 성령은 그 구속을 모든 인간에게 적용하시려고 애쓴다. 그러나 구원을 얻는 자는 약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이미 복음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적이다, 혹은 복음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다 이루었다.” 말씀하셨습니다. 즉 아버지께서 그에게 하라고 주신 구속 사역을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유효적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성령에 의해 모든 사람에게 적용이 된다면 그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에게만 적용이 되었다면 그 사람만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제한 속죄라고 합니다. 이 제한 속죄는 성령이 임한 그 사람에게 유효적으로 임한 것입니다.
알미니안에서 말하는 것처럼 “무제한 속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더욱 완전하고 더 확장시키는 것 같지만, 사실은 구속사역이 불완전한 것이라고 부인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무제한 속죄는 다른 말로 하면 ‘보편적 구원’입니다. 누구나 다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구원을 얻는다고 했는데, 정말로 이 지구상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 예수님을 믿고 있나요? 믿지 않는 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도 ‘보편적 구원’을 주장할 수 있을까요?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이 말씀을 꼭 기억하고 반드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택한 사람은 반드시 구원을 받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구원 받기로 예정된 자는 모두 믿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한 속죄요, 유효적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면 못하시는 일이 없으신 ‘무소불능’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을 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감사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까? 내가 무엇이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을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해주셨습니다. 내 모습 이대로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선택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나를 사랑하시니 오직 감사할 것 외에 더 무엇이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