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와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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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세계적인 사회심리학자로서,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져 있는 저술가. 그는 ‘자유로부터의 도피’, ‘건전한 사회’, ‘사랑의 기술’ 등의 저작에서 주로 인간 상실과 그 회복에 대한 글을 많이 썼다.
여기에 소개하는 ‘소유냐 존재냐’도 그의 사상의 단면을 두드러지게 보여 주는 대표적인 저서로서, 삶의 두 가지 양식 즉 ‘소유’와 ‘존재’의 차이에 대한 분석을 통해 새로운 향유와 참된 인간성 회복을 위한 근원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고자 하는 프롬의 노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가. 소유와 존재
우리는 많은 종교에서, 노래에서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찬미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들 대부분이 사랑과 정에 목말라 하며 외로움에 빠져 있다. 왜 그럴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사랑의 의미를 잘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의미를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사랑의 이름으로 이기적인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여기에 대한 프롬의 대답을 듣는다면 한마디로 소유욕이 될 것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들의 소유욕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우리는 무엇이든 소유하려고 한다. 그리고 우리의 소유욕은 끝이 없이 무한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것이 사람들의 보편적인 속성이 되어버렸다 는 것이다. 소유하려는 욕망을 안 가진 사람은 오히려 예외에 속한다는 말이다.
이제 사람들 은 더 이상 나누어 갖는 법을 모르게 되었다. 따라서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서먹서먹한 관계가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이런 고립감에 빠지게 되면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비생활에 몰두하게 된다. 이젠 우리들에겐 여가와 소비는 동의어가 되었다. 우리는 시간까지도 소비한다. 즉, 시간을 죽인다(Kiling Time). 시간은 더 이상 창조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프롬은 이런 삶의 방식을 ‘소유양식’이라고 부른다. 이런 소유양식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이런 사랑 불능의 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소유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경험을 함께 하고 나누어 갖는데서 기쁨을 얻는 사람들은 드물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의 삶을 그는 ‘존재양식’이라고 부른다. 물론 누구든 생존에 필요한 만큼은 소유해야겠지만 존재양식으로 사는 사람들은 소유하려는 집착이 없기 때문에 순수한 삶의 기쁨을 알고, 주는 행위를 통해 타인과 하나가 된다. 그들에게는 진정한 우애와 사랑이 있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프롬은 이런 존재양식이 주로 불교와 기독교 같은 위대한 종교 사랑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 보며, 마르크스의 사상도 소유가 아닌 존재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서로 공통점이 있다고 본다는 점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이런 시각에서 평가하고 계승하려고 하고 있다.
프롬의 사상을 굳이 어떤 계열에 넣는다고 한다면 신(新)마르크스주의라고 할 수 있겠다.
(국민윤리) 교과서에 소개된 바와 같이 신마르크스주의는 소련식 공산주의, 관료주의,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왜 비판했는가) 하는 것이다. 프롬의 (소유냐 삶이냐)를 읽어보면 어렵지 않게 그 까닭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 소유양식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사유재산제도가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범주에 속하는 제도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사실은 인류사(人類史) 전반을 통해 볼 때 통상적인 법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외에 속한다. 그리고 자본과 자본재라는 의미로서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왜 대다수가 자신이 마치 재산 소유자라도 되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가? 선진 산업사회의 중하층 시민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재산획득과 유지, 그리고 재산증 대에의 열정을 충족시킬 것인가?
그에 대한 해답은 소유의 영역을 확장시켜 그 속에 처자식, 친구, 연인, 건강, 여행, 예술품, 하나님, 자기자아 등을 포함시키는 데 있다. 우리의 자아는 우리의 소유 감정의 가장 중요한 대상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여러 가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몸, 우리의 이름, 사회적 지위, 소유물 ‘지식을 포함한’, 우리가 우리자신에 대해 지니고 있는 이미지, 우리가 타인들이 우리자신에 대해 가져 주기를 바라는 이미지 등의 여러 가지가 모여 우리의 자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아 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보다는 자아가 우리 각자의 소유물로 느껴지며 이 물건 ‘즉 소유물이 되어 버린 자아’가 우리의 자아 정체감의 바탕이 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여기서 또 고려해야 할 사항은 재산의 집착형태이다. 옛날에는 우리가 소유한 물건은 소중하게 보관하게 간수되었다. 물건 구입 ‘보존’을 위한 구입이었으며, 1세기의 표어가 ‘오래된 것은 아름답다’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에는 보존이 아니라 소비가 강조되고 있으며 사람들은 무엇이건 그 물건에 싫증을 내게 되고 ‘낡은 것’을 처분하고 최신 모델을 사고 싶어 안달이 난다. 오늘날의 표어는 ‘새로운 것이 아름답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생존의 소유양식의 본질은 사유재산의 본질로부터 나오고 있다. 소유양식은 다른 모든 사람을 배척한다. 이런 행동 양식은 모든 인간과 일체의 사물을 죽은 어떤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의 권력에 복종하는 것으로 변형시켜 버린다.
‘나는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문장은 주어인 ‘나’와 목적어인 대상 사이의 목적어에는 영원성이 있는가? 나는 죽을 것이고, 내가 소유하게끔 보장해주는 사회적 지위를 잃을 수도 있다. 목적어도 영원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이다. 무엇을 영원히 소유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영속적이고 파괴되지 않는 실체라는 환상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내가 어떤 대상을 소유지배하는 것은 삶의 과정에 있어 오직 찰나적 순간에 불과하다.
경제분야와 정치분야에서 소유와 평등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주제로서 다루어져 왔다. 그런데 소유와 마찬가지로 평등에 대해 광적인 집착을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억눌린 충동, 즉 소유욕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주의를 요한다. 각자의 몫은 다른 어떤 사람의 몫과도 정확하게 똑같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평등에 관심을 쏟는 사람들은 그 이면에 질투심을 강하게 느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경제학 철학 초고’에서 이런 태도를 소위 ‘천박한 공산주의’라고 불렀다. 이런 유형의 공산주의는 앞서 말한 질투심이 절정에 달한 상태이다. 사실은 사치와 가난이 둘 다 없어지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평등이란 서로 다른 집단이 질적으로 서로 다른 경험을 할 정도로 소득의 격차가 나서는 안된다는 의미로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다. 존재양식이란 무엇인가?
존재양식의 근본적 특성은 능동적이라는데 있다. 그러나 외적 활동이 바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내적 활동, 인간의 힘을 생산적으로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능동적이라는 뜻이다. 이런 능동성의 경험은 말로 완벽하게 표현하기 어렵다. ‘존재함’은 신비주의자들이 자주 쓰는 말을 빌리자면, 자신을 ‘텅 비울’것을, ‘가난하게 할’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타고난 생산적인 본능을 발휘하기 위한 조건이다.
여기서 쓰이는 ‘생산적’이란 말은 예술가나 과학자처럼 창조적일 수 있는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생산적 활동은 내적인 활동 상태를 나타낸다. 생산적인 사람들은 자신이 접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능동성을 ‘자유로운 의식적 활동’이라고 불렀다. 그에게 있어서는 노동이 인간의 능동성을 대표하여 인간의 능동성이 삶인 것이다. 반면에 자본은 축적된 것, 과거, 죽은 것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것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본과 노동간의 투쟁이 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마르크스에게는 산 것 ‘노동’이 죽은 것 ‘자본’을 지배해야 하느냐 아니면 죽은 것이 산 것을 지배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에게 있어서 사회주의란 산 것이 죽은 것을 삶 쪽으로 끌어들인 사회를 의미했다.
현대인은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게으르고, 수동적인 본성을 타고났으며, 물질적 이득, 배고픔 또는 벌에 대한 공포 따위의 자극을 받지 않으면 일이나 그밖의 어떤 것도 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이런 독단적인 생각이 우리의 교육방식과 작업방식을 결정짓고 있다.
사실은 생존의 소유양식이나 존재 양식이나 모두 인간의 잠재적 본성이다. 살아남기 위한 우리의 생물적 충동은 소유양식을 조장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기심과 게으름만이 인간에 내 재해 있는 유일한 성향은 아닌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수많은 과학적 증거에 의해 입증된 바와 같이, 타인과의 관계를 맺고, 이기심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려는, 깊이 뿌리내린 타고난 욕망을 갖고 있다. 서로 모순되는 이 두 가지 경향은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서 갈등을 일으킨다. 결국 두 경향 중 어느 한쪽의 경향이 우세하도록 결정짓는 것은 사회구조, 그 가치관 및 규범이다.
논제> 인간이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억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논술하라. (800자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