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테의 돈으로 세상 읽기 72
돌아오시라
의대 증원을 반대하는 전공의들의 집단행동이 도를 넘고 있다. 의과대학 교수들도 사직서를 내겠다고 정부를 겁박한다. 한시가 급한 환자들은 발을 구른다. 병원을 떠난 의사들은 자신의 직분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정부는 타협적 관행에 일관해 온 무기력함을 이번에 끊어내야 한다. 법에 따라 엄정히 처분하기 바란다. 여기에 더해 숨이 넘어가더라도 기꺼이 고통을 감내하겠다는 시민의 의지가 보태지기 바란다. 그러지 않고서는 의료개혁은 난망하다.
의료 서비스는 공공재이며 사적재인 이중성을 갖는다. 당연히 가격기구가 작동하지 않는 시장실패의 영역이다. 많은 시민이 전공의들의 파업을 차가운 시선으로 보는 이유도 투쟁의 본질이 사적 이익을 앞세운 밥그릇 싸움이라고 생각해서다. 너그럽게 보아도 의과대 학생들까지 집단행동에 나서는 모양은 공급 카르텔이란 비난에서 비껴가기 어렵다.
의대 증원 문제는 의료개혁의 첫 단추다. 앞으로 10년(2035년) 후가 되면 의사 수가 15,000명 정도 부족하다는 정부 주장이다. 인구감소를 반영한 수치인지는 차치하고 소득향상과 노령화가 진행될수록 양질의 의료 서비스 요구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지금처럼 5분도 의사 얼굴을 마주하기 힘든 현실에서 이대로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모든 직업이 그렇듯 의사라고 고충이 왜 없겠는가. 왜곡된 의료수가와 의료현장의 여러 가지 문제점도 지적되고 있다. 하지만 언론 보도를 보면 명문대학들로 일컫는 SKY의 2024년 수시 합격자 중 30%가 등록을 포기했다고 한다. 그 이유가 의대를 가기 위해서라는 분석이다. 의사가 가장 선망하는 직업이란 증거다. 최고의 두뇌들이 강남에 모여 얼굴을 뜯어고치고 있다면 그것도 문제다. 정부는 의대 증원만이 아니라 의료체계 전반에 대한 점검을 통해 개혁에 나서야 한다. 아울러 점진적인 의대생 증원을 고려하고 의료교육에 질적 저하를 초래하는 문제가 없는지도 세밀히 검토해야 한다.
인간에게 내재 된 폭력성은 주먹과 총칼만으로는 부족하다. 우크라이나와 중동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전쟁은 집단폭력의 확장형이다. 살생권을 쥔 자들은 부녀자 강간을 자비로 여길 정도다. 불행히도 핏물로 얼룩진 역사의 비극은 좀체 멈출 것 같지 않다. 폭력에 대한 담론이 끝없이 이어져야 하는 현실이 우리를 절망케 할 뿐 이대로라면 인류의 항구적 평화는 요원하다.
폭력에 맞서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달리 정의되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을 주문했다면 예수는 용서의 거름망으로 폭력을 걸러 내라고 권유한다. 마하 트라 간디는 무저항을 저항의 도구로 삼아 위인이 되었다. 하지만 자비의 경전을 펼치고 용서의 노래를 불러도 광포한 폭력을 감내하기엔 우리의 감정은 바다만큼 넓고 깊지 못하다. 복수가 복수를 불러 파국을 맞더라도 지금까지 역사는 함무라비 법전에 의탁해왔다.
실질적으로 병마와 폭력을 치유하는 일은 의사의 몫으로 남는다. ‘나는 환자를 위해 내 의무를 다하는 데 있어 나이, 질병, 장애, 교리, 인종, 성별, 국적, 정당, 종족, 성적 지향, 사회적 지위 등에 따른 차별을 하지 않는다.’ 1948년 세계의사회 총회에서 채택된 '제네바 선언' 중 일부다. 나는 위협을 받더라도 인간의 생명을 그 시작에서부터 최대한 존중하며, 인류를 위한 법칙에 반하여 나의 의학지식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구절도 있다.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석한 의사의 책무는 생명에 대한 존중과 박애와 직업윤리로 가득 차 있다.
폭력은 영화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영화 <인 어 베러 월드: In a Better World>에서는 우리가 어처구니없는 폭력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아들이 학교폭력에 시달리는 의사 안톤은 더욱 가혹한 폭력과 마주한다. 아프리카 난민촌에서 무료 봉사하던 안톤에게 실려 온 임산부는 배가 갈라져 있었다. 반군 폭도들이 태아의 성별을 알아맞히는 내기를 벌여 저지른 만행이었다.
아무리 선한 의지를 갖는 의사라도 원치 않는 치료를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안톤은 폭도의 두목 빅맨이 다리가 썩는 병으로 찾아왔을 때 고민에 빠진다. 임산부의 배를 가르는 악마에게 베푸는 의술이 인류를 위한 법칙인지 혼란스러웠다. 그는 결국 주민의 반대에도 빅맨의 다리를 치료해준다. 아군을 죽인 적군의 부상병에게 붕대를 감아주는 위생병의 모습도 전쟁영화에서는 빠지지 않는다. 의사의 직업윤리는 사형수의 목에 걸린 생선 가시를 빼내 주도록 명령하고 있다.
성직자와 법관과 의사들은 사람의 생명을 다룬다.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다스리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그들을 존경하는 이유도 생명의 존엄 때문이다. 의사들은 혀가 말리도록 아픈 인간의 고통을 평온으로 돌려놓는다. 만약 그들이 없다면 지구는 지옥의 병실을 훨씬 넓혀야 할 것이다. 생명을 구해온 의사들마저 불신과 혐오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환자의 손을 잡고 따뜻한 눈빛으로 제네바 선언을 되뇌는 의사가 그립다. 이제 아픈 이들에게 돌아오시라.
In a Better World란 영화가 말한다. 안톤이 빅맨의 다리를 치료했다고 더 나은 세상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악마까지도 구원의 대상이 될 때 인간의 존엄은 지켜진다. 수술실의 무영등이 꺼질지라도 제네바 선언에 밑줄 그으며 환자를 지키겠다는 의사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생명을 살리는 사람들이 광화문 거리에 모여있으면 아픈 이는 갈 곳이 없다. 병원을 떠나는 이유가 무엇이든 의사들이 수술실의 메스를 버린다면 그것은 또 다른 폭력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