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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프로이트의 예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어린 시절의 상처로 평생을 아파하는 어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별반 낯설지 않다. 작가 김형경이 쓴 정신분석 상담서 『천 개의 공감』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책에 나오는 상담자 중 많은 수가 어린 시절의 기억이나 부모 때문에 받은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해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주변에서 이런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케임브리지 대학원을 졸업한 명석한 친구에게 어린 시절에 동생만 편애하던 부모님 때문에 아직도 매사에 자신이 없고 삶이 힘겹다는 고민을 들었던 적이 있다. 세계적인 대학을 졸업한 지성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친구의 마음속에는 사랑을 갈망하는 어린아이가 울고 있었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도 그랬던 모양이다. 죽어 가는 아이를 그린 뭉크의 그림 〈아픈 아이〉는 뭉크가 1885년 이래 그린 연작 ‘아픈 아이’의 네 번째 작품이다. 별로 즐거운 주제도 아닌, 아픈 아이의 그림을 이토록 열심히 그렸다니 뭉크는 정말로 음울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침대에 기대앉은 소녀의 퀭한 표정과 공허한 눈빛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진하게 드리워져 있다. 아이의 손을 잡은 채 고개를 떨어뜨린 어머니는 이미 아이의 죽음을 마음으로 받아들인 듯, 벌써 검은 옷을 입은 채다.
이 그림이 담은 정경은 뭉크가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죽음에 익숙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어머니와 한 살 위의 누나 요한나 소피는 각각 뭉크가 여섯 살 때와 열 살 때 결핵으로 죽었다. 세상을 떠날 당시에 어머니의 나이는 불과 서른이었다. 그리고 4년 후에, 어머니 대신 동생들을 돌보던 소피마저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나 버린 것이다.
이런 배경을 알고 나면, 〈아픈 아이〉에서 저절로 떠오르는 것은 소피의 임종 장면이다. 여섯 살이면 아직 죽음이라는 상황을 받아들이기에는 이른 나이다. 그러나 열 살 때 맞은 누나의 죽음은 막 사춘기에 접어든 예민한 아이의 기억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던 게 분명하다.
좋은 집안에서 자라나 오슬로 빈민가에서 의사로 일하던 뭉크의 아버지는 아내와 큰딸의 죽음을 겪으며 사납고 매정한 성격으로 변해 버렸다. 그는 어머니를 잃은 어린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도 않고 자신의 병원에 방치해 놓았다. 그리고 예민한 나이에 어린 뭉크는 병원이란 공간에서 환자의 임종을 늘 지켜보았던 것이다. 이 트라우마는 뭉크의 일생에 짙은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유명한 〈절규〉가 주는 이미지처럼, 몹시 예민한 성격이었던 뭉크는 평생을 신경쇠약과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하며 살았다. 그러고 보면 한 사람의 일생에서 어린 시절이란 얼마나 중요한 기간인 것인지.
〈아픈 아이〉가 테이트 모던에 전시된 데에는 흥미로운 뒷이야기가 있다. 이 그림의 원래 소유주는 독일 드레스덴 시였다. 드레스덴 시는 1928년 이 그림을 사서 시립 미술관에 전시해 놓았다. 그러나 1938년 나치스는 뭉크의 그림을 ‘퇴폐예술’로 단정 짓고 독일에 있는 뭉크의 모든 그림을 베를린으로 가져와 경매에 부쳤다. 이때 노르웨이인 화상인 하랄 할보르센(Harald Holst Halvorsen)이 뭉크의 그림을 가능한 한 많이 사서 모두 오슬로로 가져갔다. 그리고 1939년 토마스 올센(Thomas Olsen)이 이 중에서 〈아픈 아이〉를 다시 사들여 테이트 갤러리에 기증했던 것이다. 그림의 운명으로 보면 이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할보르센이 산 그림 중 상당수가 다시 나치스의 손에 들어가 파괴되었다. 1940년 노르웨이가 독일군에게 함락되었기 때문이다.
〈아픈 아이〉에서 아이의 손을 잡은 채 슬픔에 잠겨 있는 여인의 모델은 뭉크의 이모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 그림을 보며 검은 옷을 입은 이 여인이 이미 세상을 떠난 뭉크의 어머니가 아닐까 하는 상념을 떠올렸다. 뭉크의 어머니는 죽기 전, 여섯 자녀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써 둘 만큼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뭉크는 그런 어머니를 떠올리며 누나의 곁에 이미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 넣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섯 살에 어머니를 잃은 뭉크는 어머니의 얼굴까지는 기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고개를 푹 숙인 여인의 모습은 기억할 수 없는 어머니에 대한 화가의 그리움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런던미술관 산책, 전원경, 시공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