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도의 견인 1 로마서 8:31-3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7:1 “하나님이 사랑하기로 하여 유효적으로 부르시고 성령으로 깨끗하게 하신 자들은 전적으로나 궁극적으로 은혜의 상태에서 타락될 수 없다. 오히려 최후까지 보존되어 영원히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일단 참 그리스도인이 되면 두 번 다시 아주 타락하여 멸망하는 일은 없고, 비록 일시적으로 죄에 빠져 들어가는 일이 있다 해도 결국에는 다시 돌아와서 반드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전적인 타락으로 인하여 도저히 천국의 소망을 가질 수 없는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무조건으로 선택하시고, 선택을 받은 우리 성도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구원의 은혜가 정말로 천국으로까지 우리를 인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혹시 성도들 중에서는 ‘내가 만일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타락하면 천국에 가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걱정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의 견해가 있는데 하나는 칼빈주의의 ‘성도의 견인’이라는 것으로 한번 선택된 성도는 절대로 지옥에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의 견해는 알미니안 주의로서 천국에 가질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이 더 좋아 보입니까?
앞에서 ‘제한 속죄’ ‘유효적 은혜’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한 속죄는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은혜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한 자, 즉 세상 사람들 중에 일부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구원하시려고 택한 자는 반드시 구원의 은혜가 적용이 되는 것을 가리켜 ‘유효적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천국 구원을 얻기까지의 그 과정에서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는 앞의 4가지를 완성시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려고 택한 자를 부르시고, 그 부르신 자를 반드시 영화롭게 하는 것을 성도의 견인이라고 합니다. 성도가 영화롭게 되는 것은 천국에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천국에 들어갈 것을 믿습니다.
이 세상에는 정말로 잘못된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런 것들이 교회와 성도를 얼마나 괴롭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모두 제 욕심이나 잘못된 생각 때문에 잘못된 길을 가기도 하고 편법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저희들 서로 속이고 속고, 또 교회와 성도에게도 그렇게 합니다. 물질적인 것만 그런 것이 아니라, 거짓된 교리로 현혹하는 이단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교회를 공격합니다. 여기에 넘어가는 성도를 보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면서 내 스스로나 혹은 다른 성도의 모습에서 믿음이 식어질 때가 있고, 교회를 떠날 때가 있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럴 때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는 교회를 욕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을 향하여 손가락질을 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부끄러운 모습이지만 사실 그렇게 욕을 먹는 것이 당연한 만큼 잘못된 행동이나 말을 하는 경우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같은 성도끼리도 돈 앞에서는 모든 사랑과 신뢰가 무너지고 맙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를 상대로 장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장사는 정당한 상거래를 의미하지 않고 교회를 상대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려는 경우를 말합니다. 자신의 입장에 따라서 성도나 교회를 이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사람을 가리켜 정말로 성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불신자보다 더 못한 삶을 사는 경우도 얼마든지 찾아 볼 수가 있기도 한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교회에 다닐 때에는 정말 열심히 봉사를 잘 하였는데, 어느 날 보니 불신자가 되어 있고, 오히려 교회를 핍박하고 욕하는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속칭 주님을 믿다가 타락한 자들은 어떻게 될까요? 이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올 수가 있을까요? 아니면 그대로 교회를 떠나서 지옥에 떨어질까요? 그리고 이들이 성도였는데, 어떻게 불신자로 돌아가 버릴 수가 있을까요? 정말로 이들이 다시는 회복할 수 없고 지옥에 들어가고 말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입장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는 이들이 참 성도일 경우, 또 하나는 가짜 성도일 경우입니다. 참 성도일 경우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택한 자로 ‘제한 속죄’와 ‘유효적 은혜’를 입은 자를 말합니다. ‘가짜 성도’라고 하는 것은 일시적으로 마음이 이끌려서 교회에 나오기는 했지만, 때가 되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버릴 사람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하여 진실한 참 성도와 가짜 성도에 대하여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는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라고 마태복음 13:18-22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을 보면, 사람들이 잘 때에 마귀가 와서 좋은 땅에서 자라고 있는 곡식에다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고 했습니다. 이들 가라지는 교회 안에 들어와서 온갖 이설로 성도를 유혹하는 이단으로 사단의 무리를 말합니다. 농부가 농사를 짓는 땅은 교회입니다. 이 교회에 가라지 즉 사단의 무리들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에 다닌다고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확실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고르고 뽑은 성도는 이 세상의 온갖 권세와 힘으로부터 공격을 당한다고 해도 절대로 넘어지지 않고 멸망을 당하지 않습니다. 설사 성도가 되어서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런 저런 죄와 악한 습관들이 있을지라도 절대로 구원에서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바로 ‘성도의 견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래 신앙과 회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런 선물을 주시는 것은 그것을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임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자들은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도록 예정되어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목적을 반드시 실행하십니다. 따라서 선택된 자들은 그가 어떠한 형편에 처해 있든지, 그의 신앙의 정도가 어떻든지 그런 것에 전혀 관계없이 마귀는 절대로 그들을 하나님의 수중에서 빼앗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단 참 성도가 된 사람들은 그 안에 영생의 원리 즉 ‘성령’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처럼 성령께서 그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그들은 이미 잠재적으로 거룩한 것입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많은 시련에 연단이 되어야 하고 또 자신들은 미래의 실상에 대해서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안에 시작된 일이 결국에는 완성될 것이라는 것과 현재 그들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이 바로 생명의 표시이며 승리의 약속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은 무엇일까요? 갈라디아서 5:16,17을 보면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진리와 비진리가 우리 마음속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 속에 계신 성령과 악령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알미니안처럼 참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도 멸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오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가, 내일은 악마의 아들이 될 수도 있으며, 자기 마음이 변하는 대로 이렇게도 되었다가 갑자기 저렇게도 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또한 인간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의롭게 되어, 성화가 되었다가도 구원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어버린 자기 자신의 의지와 행위에 의해 버림을 당하여 영원히 멸망을 당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주권적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의 구속을 받은 자녀들이 이처럼 타락하여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중생할 때 일어나는 변화의 성질은 근본적인 변화이며, 초자연적인 변화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영혼이 영적으로 살게 됩니다. 이 때에 영혼에 부여된 새 생명은 불멸의 것입니다. 이 변화는 내적 성질에서 이루어진 변화이므로 인간의 지배영역 밖에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에 속한 것이므로 어떠한 피조물에게도 그 성질의 근본원리를 변화시킬 자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변화를 역전시켜 새 생명을 잃게 할 것도 있는 것 역시 하나님의 초자연적 행동 밖에는 없습니다. 중생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의 부자 관계를 상실할 수 없는 것은, 마치 육신의 자녀가 그 부모와의 관계를 상실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이 타락하여 멸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중생할 때 영혼에게 부여되는 영적 생명의 원리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 성도의 견인의 주관자
바울은 성도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하였습니다(롬 6:14). 우리는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잘잘못에 따라 처리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죄가 우리의 멸망의 원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11: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롬 4:15을 보면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법이 없는 곳에서는 죄가 더 이상 인간에게 형벌을 받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은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자기 행위로 구원을 이루려고 하려고 하는 것은 율법 전체를 행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완전히 복종하여 구원을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2-3을 보면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고 하였습니다.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곧 율법을 지키는 것이며, 행위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곧 구약을 따르는 것으로, 율법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그 백성에 대해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사랑이 성도의 구원의 보증입니다. 이 사상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값 없이, 아무런 대가 없이 주시는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붙잡는 것 보다 훨씬 더 굳고 확실하게 우리를 붙잡아 줍니다. 또한 그 사랑은 사랑을 받는 대상에게 있는 그 어떤 매력에 근거한 것도 아닙니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로마서 5:8을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 ‘우리의 공로를 근거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권적 은혜로 영적 생명에 들어간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는 그 상황 속에서입니다.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음의 주이며, 온전케 하시는 이입니다. 모든 주권이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주관하시고 계신다는 것은 곧 우리의 구원은 이미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전 과정은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고 인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시작이나 계속이 우리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철회하시고 그 조치의 방법을 변경하시지 않는 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율법 아래에 다시 두지 않는 한 우리는 멸망할 수 없습니다.
로버트 L. 댑니는 “믿는 자를 유효적으로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이요 과분한 사랑이다.(렘 31:3, 롬 8:30) 이 사랑이 불변인 것처럼 결과 또한 불변이다.”고 하였습니다. 결과는 그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계속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택함을 받은 자에게 중생의 은혜를 주실 때 그 사람 속에 무슨 볼만한 것이 있거나 공로가 있어서 그것 때문에 은혜를 주신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그 후에 그의 속에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해서 그것이 동기가 되어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철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처음에 그 은혜를 죄인에게 주실 때에 그 죄인이 전적으로 부패한 자요,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거스리는 자라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그가 회심한 후에 다시 망언의 죄, 불신실의 죄를 범한다고 해서 그것이 원인이 되어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그의 마음을 바꾸셔서, 주시던 은혜를 철회하실 수도 있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도로서 신앙을 성장케 하도록 인도하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연단을 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 선택의 사랑을 죄인에게 주시려고 작정하신 이유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지 믿는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믿는 자의 마음이나 행위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을 궁극적으로 변경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사 54:10 롬 11:29).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하나님의 사랑은 그 대상이 갖고 있는 어떤 것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신비스러운 것으로, 성령의 은혜로써 그 대상을 꾸미시고 모든 성결의 아름다움으로 옷 입히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공로에 의존하는 것으로 추측하게 만드는 오해에 지나지 않습니다. 루터도 “하나님의 예정은 견고하고 확실하므로 그 예정의 필연적 결과도 변동될 수 없는 것으로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너무 연약하여 만일 구원이 우리 손에 맡겨진다면 거의 아무도, 아니 전혀 아무도 구원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사탄에게 사로잡힐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성결에 대한 견인과 구원의 보증이 우리의 연약한 성질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는 것에 대하여 더욱 감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이 구원은 이미 확증되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