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시작인가?
출처 : 다함께 참여하는 정신병원인권 모임
-상념
최근 어머니가 지병이 있는 가운데 치매 초기증상으로 정신이 없었다.
정신병원인권도 중요하지만 가정사에 일들과 나의 지병으로 여러 가지 오고가는 잡념에 나의정신건강이 더욱더 괴로워 도대체 이런 난관을 앞으로 어떡해 헤쳐 나가야 할찌, 눈앞이 캄캄하기만하다.
나는 애당초 우리나라 정신보건개혁만 바랬지, 더 이상 바라는건 없었다.
2018년3월 현재기준으로 1년전인가 모르겠으나, jtbc기자라고 하면서 나한테 접근해서 취해하자고 했다.
카페나 블로그를 보고 인상에 깊었던 모양이다. 질문요점은 “과거에 정신병원피해자들을 여러번 만났냐고 물었고, 나는 거짓말을 시켰다,
국회나, 국가인권위만 방문하고 피해들을 직접만난적은 없고 조언만 했다“고 그랬다.
사실은 언론에 나오기 싫었기 때문이다. 물론 피해자들을 과거에 여러번 만나러 지방에서 서울까지 가긴했지만, 사실은 결정적인 도움을 주진 못했다. 하기야 국가인권위도 해결못하는 문제를 내가 해결한다는 것, 자체가 거짓말이고 또한 남의 이목을 끌지않고 조용하고 묵묵하게 살다가 사라지는 목적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자에게 정신과약물의 위험성을 많이 강조했다.
물론 그전에도 기자들에게 여러번 취재요청이 있었지만 알게 모르게 변명하면서 사양했고 앞으로도 언론에 나올자격도 없지만 인위적으로 코멘트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최근 가정사에 고통을 받으면서 무수히 많은 과거 일들을 회상하고 뉘우치고 수많은 잡념에 사로잡혀 과거에 추억에 사로잡히면 콧날이 시큰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울때가 있었다.
[1980년대 중반쯤 내가 고2, 고3 무렵 친구들과 나는 나이트클럽에 무진장 다녔다. 정확하게 말하면 콜라텍이다. 그당시 20대 중반에서 후반은 주머니가 넉넉해서 맥주를 시켰지만,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 또래 친구들은 주머니사정 때문에 천원만 주면 콜라를 한병시키고 즐겁에 콜라텍에서 즐겼다.
그리고 다방에는 뮤직박스라고 DJ가 인기가 있었고 DJ에게 해당 노래를 신청하면 들려 주곤했다. 현재 고통을 회피하고자 과거추억을 떠올리면서 고통을 회피하고자 하니, 또다른 과거에 슬픔이 뜨오른다.
먼저 숙경아, 준희야, 태희야 등, 미안하다.
숙경이 너는 연인관계로 사귀진 않았지만 십수년이 지난후에 먼 친구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나를 못잊어 소식을 알려고 수소문을 한다고...
솔직히 나는 그당시 “숙경이 속마음을 몰랐고, 눈치를 채지 못한 오빠가 미안하다”
그리고 준희야 80년중반 무렵에는 우리나라는 유교적 가부장적 사상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함부로 프로포즈를 못해고 순진한 너가 나에게 “오늘밤 술로 같이 하자고 솔직하게 접근했고 오빠는 멍청해서 샤양한 후에 너는 한없이 울었다”고 후에 알았다.
그리고 태희야 80대 중반, 다방에서 한참 지나간 60대 중반 70대 초반 유행했던 문주란에 동숙의노래, 공항에 이별을 DJ에게 신청해서 들을 때 눈치 못챘다.
오빠한테 배신감을 느꼈다는 마음에 “오빠를 칼로 찔러죽이고, 너도 죽는다, 라고 한 사실을 후에 알았고, 그리고 그 노래를 들었다”고 헤어진지 한참후에 알았다.
숙경아, 준희야, 태희야 그당시 사실은 오빠는 너희들이 너무 과분했고 남자자질이 부족해서 그렇단다.
숙경아, 준희야, 태희야, 다시한번 미안하다. 훗날 오빠가 정신병환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지금이라도 알았으면 과거를 잊어주길 바란다.]
나는 지금 가정사에 일들과 나에 지병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위로하고자 과거를 회상하니, 또다른 슬픔과 후회, 괴로움이 교차한다.
이미 내가 다른 글로써 언급했지만 나는 준비되어있다.
어머니가 1년 살지, 5년을 살지, 10년을 더사실지 모르겠으나, 어머니를 책임져야 하길래, 내신세를 쉽게 포기못하는 현재 상황이 나는 더욱더 괴롭다.
그리고 숙경, 준희, 특히 태희를 위해서 블로그에 동숙의 노래와 공항의 이별을 올린다.
동숙의노래가 그런 뜻이있는 노래인지 최근에야 알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