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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회(復興會)와 부흥사(復興師) (누가복음 12:49)
칼빈부흥사회가 이 세상에 태어난 지, 만 두 달 됐는데 첫 실행위원회 첫 특강입니다. 회원 한분 한분, 사모님 한분 한분을 환영합니다.
김동호 목사님이 지금부터 30년 전, 충북노회 내 청주시 청석교회를 개척했을 때, 한 집사님 댁에 심방을 갔을 때다. 집사님이 “목사님! 3대 독자 우리 집안에 며느리가 시집온 지 2년이 넘었느데 아직 애기가 없습니다. 내년 이 맘때에 우리 집에서 꼭 애기 울음소리가 나도록 기도해주세요” 그래서 내년 이 맘때 꼭 아들 낳게 해 달라고 목사님은 간절히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며느리는 부끄러워서 아멘을 못했는데 시어머니가 아멘! 아멘!하고 대답을 했다. 여러분! 1년 후에 누가 애기를 낳았을 것 같습니까? 제가 전화로 확인했다. 이 기도를 받고 얼마 후, 이 집사님 가정이 이사를 갔다. 그런데 글쎄 아멘! 아멘!한 시어머니가 아들을 낳았다쟎아요. 그래서 내가 그때 태어난 아들이라고 최기학 전 총회장님에게 간증하더랍니다. 아멘은 일단 해놓고 봅시다.
1. 여러분! 부흥회를 왜 개최해야 하는가?
(1) 한국교회를 치유하고 회복할 기회이기 때문에 부흥회를 개최해야 한다.
2022년 올해는 기독교가 1885년 대한민국에 전래된 지 137년째 되는 해다. 그런데 137년 동안 지켜오던 한국교회는, 코로나 사태 2년 반 동안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1) 성전 예배, 공예배를 잃어버렸다. 지난 9월 25일 주일, 서울 영락교회에서 총동원 출석 전도 주일을 개최했습니다. 김운성 담임 목사님이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사람을 제외하고 다 모이자고 대대적으로 독려했는데 안 보이던 교인들도 꽤 모였답니다. 그런데 교역자들이 확인해보니 교인 가운데 70% 정도 출석했더랍니다. 이게 한국교회의 현주소입니다. 비대면 예배가 뭡니까? 지난 정부가 방역 기간에 기독교를 너무 심하게, 무지하게 공격했다.
2) 각종 기도회, 각종 집회를 잃어버렸다. 요즘 철야기도회, 심야기도회 잘 모이는가? 기도의 야심(野心)을 잃었다.
3) 교육, 전도, 선교, 심방을 잃어버렸다. 선교사님들 설 자리가 없어 진퇴양란이다. 심방하는가?
4) 청년회, 중고등부, 아동부, 유치부, 교회학교를 잃어버렸다. 다음 세대를 잃었다는 것은 억장이 무너질 일이다.
5) 연합사업, 예산, 교세를 잃어버렸다. 연합사업 잘하고 있는가?
6) 그렇게 중요한 열정을 잃었다.
이렇게 잃어버린 것을 치유하고 회복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부흥회다. 그래서 부흥회를 개최해야 한다.
(2) 교인들의 심령에 꺼져 가는 성령의 불을 다시 붙일 수 있기 때문에부흥회를 개최해야 한다.
코로나 사태 2년 반 동안, 교인들의 심령에 불이 꺼졌다. 불이 꺼진 증거가 무엇인가?
1) 마음이 불안하고 쫒아오는 사람도 없는데 두려워한다.
2) 매사에 자신감이 없다.
3) 열심, 열정이 식는다.
4) 마땅한 의무조차도 감당하기 싫어한다.
5)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고난받기 싫다.
6) 쉽게 시험에 빠진다.
7)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
8) 회개, 전도, 성령의 열매가 없다.
9) 기도의 열기가 식는다.
10) 교회 분위기가 냉랭해진다.
11) 목회자의 목회 의욕이 감퇴한다.
12) 교회 성장이 정지된다. 이런 때에 꼭 필요한 게 무엇인가? 부흥회다.
본문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 가운데 하나는 불을 던지러 오셨다.(눅 12:49) 초대 교부 익나티우스(Ignatius)는 “그리스도를 가까이하는 것은 불을 가까이하는 것이라”라고 했다. 이렇게 어려운 마지막 때에 부흥회를 개최하여 찬송의 불을 다시 붙이고, 기도의 불을 붙이고, 감사의 불을 붙이고, 전도의 불을 붙이고, 사명의 불을 붙이고, 참다운 헌신의 불, 치유의 불, 회복의 불을 붙이기 위해서 부흥회가 필요하다. 강단마다 심령마다 부흥의 불을 다시 붙여야 한다. 이 일을 감당해야 할 일꾼이 누군가? 바로 칼빈부흥사회 회원들이다.
2. 존 칼빈(Jean Calvin)은 어떤 사람인가? 어떤 부흥회를 인도해야 하는가?
“오! 주님, (주님께서 원하시면) 제 심장이라도 지금 즉시, 그리고 진실한 마음으로 드리겠습니다.” (Cor meum tibi offero, Domine, prompte et sincere)
(주님! 제 심장을 도려내어 희생 제물로 주님께 바칩니다.)
(1) 존 칼빈(Jean Calvin, 1509.7.10.~1564.5.27. 만 55세)은 지금부터 513년 전,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북부 누아용에서 주교구 공무원이었던 제라르 코뱅(Gérard Cauvin)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름이 영어로 존 칼빈(요한 칼빈), 프랑스어 고유명사로는 장 칼뱅이다. 칼빈은 목사, 신학자, 종교개혁자, 장로교 창시자다. 칼빈은 12살에 가톨릭교회에 헌신하겠다고 삭발(削髮)까지 했다. 칼빈은 프랑스 파리에서 신학을 하고, 아버지의 권유로 오를레앙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면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웠다. 삭발까지 한 칼빈이 왜 가톨릭을 떠나게 됐는가? 1533년 강연 원고에 에라스뮈스와 마르틴 루터의 말을 인용했다고 가톨릭에서 이단(異端)으로 몰자 은신을 해야 했다. 칼빈은 이를 계기로 초대교회를 꿈꾸며 로마 가톨릭교회를 떠나게 됐다.
뭘 좀 잘못했다고 너무 지적하고 나무라면 결국 내 곁은 떠나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탈북자 간증을 들어봐도 한결같이 조국이 나를 버리니 나도 조국을 버리고 탈북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너그러움이 좀 부족한 것 같습니다. “내 영혼아! 조금만 더 너그러워지자.”
강단에서나, 부흥회 때, 교인들의 잘못을 금방 비나하지 말라. 부자를 욕하면 부자가 못되고, 큰 교회를 욕하면 큰 목회는 못하는 것이다.
(2) 그런데 칼빈이 복음주의적 태도를 보이자 스위스 제네바 의회와 갈등이 컸다. 칼빈은 나중에 목숨의 위협까지 받았다. 그때 제네바 의회는 칼빈에게 부활절 성찬절 때 무교병을 사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칼빈이 이에 항의하자 제네바 의회는 부활절 다음 날인 1538년 4월 25일 제네바를 떠나라고 명령한다. 칼빈은 결국 제네바에서 추방(追放)당했다.
아이폰으로 전 세계 휴대폰 시장을 선도한 미국의 스티브 잡스(Steve Jobs, 1955-2011. 10.5, 56세)도 본인이 창업한 회사, 애플에서 쫓겨난 적이 있다. 주력 상품의 실패 책임을 물어 1985년 잡스를 몰아냈다. 췌장암으로 죽자 불교식으로 비공개 장례식을 치렀다.
부흥사가 꼭 환영만 받고 대접만 받은 것은 아니다. 오해도 받고, 비난, 공격도 받는다.
경상남도 M시 MJ교회, 한 때 목사 장로 간에 팽팽하게 갈등을 겪고 있을 때, 초청을 받고 부흥회를 인도하러 서울에서 내려간 목사님이 있었다. 교회에 도착한 첫날 상견례를 하고, 저녁 식사가 끝난 후, 한 장로님이 물었다. “우리 교회 분위기 알고 오셨지요? 누구 편을 드실랍니까? 목사만 떠나면 우리교회는 편안해 집니다.” “편은 누구 편을 들어요? 나는 말씀만 전할 겁니다.” “아니, 담임목사가 초청했는데, 목사 편 들것 아닌가?”하고 옥신각신하다가 한 장로가 강사 뺨을 내리쳤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 것이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는 부흥회를 인도할 수 없다고, 강사는 가방 들고 서울로 올라가버리고 말았다. 1년이 지났다. 교회 분위기는 더 악화됐다.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그런데 그 강사님은 뺨 한 대 얻어맞고, 시작한 부흥회가, 얼마나 은혜스러웠는지, 문제 해결의 단추를 끼웠다. 이 부흥회가 그 교회 문제를 해결하는 챤스가 되었다.
(3) 그런데 칼빈과 개혁자들이 제네바를 떠난 뒤로 갈수록 방종과 타락에 물들어가는 제네바를 이제는 더 두고 볼 수 없다고 제네바 의회는 칼빈에게 다시 돌아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칼빈은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어찌 또 그 십자가를 짊어진단 말인가?”라며 한사코 거절했으나, 결국, 삼고초려(三顧草廬)에 끝에 1541년 9월 13일 다시 제네바에 도착하여 제네바의 교회를 이끌었다. 칼빈은 1555년 3월부터 1556년 7월까지 1년 4개월 동안 신명기에 대해서 200번 설교하기도 했다.
(4) 당시,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은 신약성경을 읽다가 가톨릭의 교리적 문제를 발견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중보자가 없다며 부패한 가톨릭교회에 대해 개혁을 외쳤다. 곧 교황청의 탄압으로 설교를 금지당하고 추방당해 쫓겨 다니며 이리저리 떠돌이 신세로 설교하다가 1532년, 제네바에 도착했다. 파렐은 베른의 강력한 보호 아래에 설교를 이어나갔고, 제네바 의회에서는 개신교 원칙에 따라 가톨릭 미사를 폐지하고 성상과 성물들을 성당에서 제거했다. 그러다가 칼빈이 제네바에 도착했음을 알고 급히 칼빈이 머물던 여관으로 달려갔다. 20년 선배 파렐은 칼빈에게 종교개혁에 동참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칼빈은 학자로서 조용히 은거(隱居)하며 지내고 싶다고 거절했다. 그러자 파렐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한, 나는 하나님께서 칼빈의 휴식과 공부를 저주하시길 바란다.”라고 불같이 소리쳤다. 그러자 칼빈은 마치 높은 보좌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처럼 듣고 공포에 떨며 식겁하자 자기 뜻을 거두고 종교개혁에 동참했다.
부흥사 주위에도 파렐같은 선배, 동역자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선배, 동역자가 강권하면 수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
(5) 독일의 마르틴 루터는 1525년 전직 수녀인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했다. 반면에 칼빈의 결혼이 궁금하시지요? 칼빈은 가톨릭 신부들의 독신주의를 공격하면서도 막상 본인은 연애나 이성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내성적인 공부, 벌레였다. 주변에서 강권하는 중매결혼도 거절하다가 결국, 1540년, 하급 귀족 가문의 딸, 이델레트 드 뷔르와 결혼했다. 당시 칼빈은 31세의 심각한 노총각이었고, 아내 이델레트는 40세였는데 병사한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자녀도 둘이나 있는 미망인이었다. 그런데 둘 사이의 자식들은 전부 다 어린 나이에 병사했고, 부인 이델레트 또한 결혼생활 9년 만인 1549년 병사했다. 이때 가톨릭 사람들은 이단 수괴 칼빈에게 하나님이 내린 천벌이라고 욕하고 씹었다.
부흥사는 외로운 것이다. 하나님이 내린 천벌이라고 욕하고 씹을 때 칼빈은 얼마나 외로웠겠는가? 칼빈부흥사 회원들 상호 간에 형제간처럼 친밀해지기를 바란다.
(6)칼빈은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준 부인 이델레트의 죽음에 크게 슬퍼했다. 부인이 임종할 때 칼빈은 울면서, 전 남편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도 내가 책임지겠다고 했으나 죽어가는 부인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 아이들은 이미 하나님에게 맡겼으니 당신은 하던 대로 하나님의 일에만 집중하라.”라고 오히려 남편을 책망했다. 부인 이델레트도 칼빈 못지않게 신앙적으로 열정적이었고 칼빈이 하는 일에 몸과 마음으로 100% 지지한 부인이었다. 칼빈은 내 인생에서 가장 친한 친구요, 살아생전에 사소한 일이라도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한 적이 없었다고 나중에 부인을 회고했다. 칼빈은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고 매일 공부만 하느라 건강에 신경 쓰지 않아 앉아있는 것도 힘들 정도였고 칼빈은 가족사적인 측면에서 매우 불우한 삶을 살았다. 한편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맥주를 즐겨 마신 것처럼, 프랑스 출신의 칼빈은 포도주를 즐겨 마셨다고 한다.
좋은 예를 들어야 하는데... 서울 광진구에서 목회하던 어떤 목사님이 은퇴할 무렵, 사모님이 우리 산 밑에 조용한 곳에서 집을 구하고 노후를 보내자고 했다. 그래서 그동안 목사 남편 만나 고생한 사모님 말대로 은퇴하고 나서 조용한 산 밑에 집을 사서 이사를 갔다. 하루는 사모님하고 사소한 일로 심하게 다퉜다. 사실 사모님 성깔도 대단했다. 화가 치밀어 오른 목사님이 밖으로 나왔다. 늦가을이라 그런지 마당에 나뒹구는 나뭇잎을 빗자루로 쓸어모았다. 소각을 시키고 싶어서 불을 붙였는데 바람에 불길이 날려 산기슭에 불이 붙었다. 놀란 목사님이 그 불 끄다가 그만 타져 죽었다. 그 목사님 장례식 때 그 사모님이 가슴을 치면서 통곡을 했다. “내 영혼아! 지금보다 조금만 더 잘하자!”
(7) 칼빈은 성격이 독선적이고 금욕적이며 신정정치를 강조했다. 칼빈 당시 스위스 제네바에서 도박이나 음주는 중죄였고, 모든 술집은 철거됐다. 세례식 때 하품을 하거나 예배 도중에 졸면 구속했고, 모든 축제는 폐지했다. 식당에서는 기도를 올리고 성경을 읽기 전에는 음식을 주문할 수 없었다. 원리 원칙적으로 싸움이나 예배 결석이 허용되지 않았다. 가벼운 도박이나 길가에서 노래 부르는 것, 필요 이상으로 맛있는 음식 먹는 것을 금지할 정도였다. 상품 가격을 과도히 올려서도 안 된다. 이런 사항들을 위반할 때는 최소 구류나 최대 사형, 추방 등의 무거운 형벌을 부과했다. 당시 도둑질한 자는 산채로 끓는 기름에 집어넣어 죽이는 잔인한 형벌을 가했고, 칼빈이 인도하는 예배에 두 번 빠졌다고 사형을 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분위기는 성경에서 중요시하는 용서(容恕)와 관용(寬容)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8)칼빈의 신학이다. 기독교의 권위는 성경에 있고 로마 교황청에 있지 않다. 루터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구원받는 기준은 가톨릭교회가 말하는 선행의 기준에 있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칼빈의 주된 사상은 예정설이고, 성경관은 기본적으로 성경 무오설이다. 성경의 권위는 성경 밖에서 찾을 수 없으며, 성경은 인간의 구원 문제를 다루는 데 이미 완전성을 갖추고 있으므로 그 어떤 부가적 해석이나 별도의 계시가 필요하지 않다. 신비체험이나 은사주의, 꿈에서 하나님에게 별도의 계시를 받았다거나 어떤 예언을 한다거나 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9) 칼빈 사상의 다섯 가지 솔라(Five Solas)다. 다섯 가지 솔라는 마틴 루터의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을 받아들였고 츠빙글리의 오직 그리스도를 추가하여 개신교 교리의 핵심을 이루었다.
1) 오직 성경!(Sola Scriptura)
2)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3) 오직 은혜!(Sola Gratia)
4) 오직 믿음!(Sola Fide)
5)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10) 칼빈주의 5대 강령이다. 5대 강령은 앞글자를 따서 튤립(TULIP) 교리라고도 한다.
1) 인간의 완전한 타락(Total Depravity).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죽은 상태이며 구원에 관한 한 전적으로 무능력하다.
2)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하나님은 남녀노소, 지위고하,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하나님 자신의 전적인 주권과 감추어진 뜻대로 창세 전에 택자의 선택과 비택자의 유기(버림)도 예정하셨다(칼빈주의 이중예정). 믿음은 하나님이 선택한 결과이다.
3) 제한된 속죄(Limited Atonement).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은 선택자만을 위한 것이다. 제한 속죄교리는 칼빈주의의 심장부다.
4) 저항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 선택된 백성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뿌리칠 수 없고 거부할 수 없다. 구원받는 믿음을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에 죄인은 안 믿을 수 없다. 인간이 문을 닫을지라도 하나님이 선택한 자녀라면 예수님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마음속에 들어가신다.
5)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s). 하나님께서는 선택한 당신의 백성을 반드시 구원하신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선택자는 믿음을 잃지 않으며 반드시 구원받는다.
(11) 칼빈의 주요저서로 그리스도교 강요(綱要), 로마서 주해가 있다. 성찬은 영적 임재설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고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은혜를 강조했다. 위클리프나 후스가 타락한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상부 구조에 타격을 가한 종교개혁의 선구자적 인물들이라면, 루터는 그 상부 구조물의 잔해를 청산하고 말씀 위에 토대를 둔 새로운 구조물을 짓는 작업을 시작했고, 그 새로운 건물을 완성하는 책임은 예민한 지성인 칼빈에게 맡겨져 완수됐다. 칼빈은 천 년 이상 말씀에서 벗어나 왜곡된 길을 걸어가던 가톨릭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도록 방향을 전환한 종교개혁을 완성시켰다.
칼빈부흥사회! 그 이름만 들어도 설레이지 않던가?
(12) 칼빈은 1556년부터 쇠약해져 1558년 말에 열병에 걸려 이듬해 초까지 심하게 앓았다. 병상에서 일어난 직후 설교를 하던 중 목소리에 경련을 일으키며 격렬한 기침으로 발작을 일으켰다. 허파의 혈관이 터졌고, 꾸준히 쇠약해졌다. 결국, 1564년 2월 6일 성 피에르 대성당에서 한 설교가 그의 인생 최후의 설교가 되었다. 4월 25일 유언장을 작성하고 자신의 가족과 콜레주에 소액을 남겼다. 며칠 후 교역자들이 그를 찾아와 작별을 고했다. 칼빈은 1564년 5월 27일 만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는 제네바에 묻혔으나 너무나 많은 사람이 무덤을 보러 오자 새로운 종류의 성인 숭배 사상을 배양했다는 비난을 받을까 봐 무덤의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은 채 아무 표지도 없는 무덤에 묻혔다.
3. 부흥회가 뭔가?
부흥회는 목회학적인 입장에서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1) 부흥회는 잠든 심령을 깨우는 각성(覺醒)운동이다.
(2) 부흥회는 병든 심령을 치료하는 치유(治癒)운동이다.
(3) 부흥회는 죽은 심령을 살리는 소생(蘇生)운동이다.
(4) 부흥회는 더러운 심령을 회개케 하는 회복운동이다.
(5) 부흥회는 성령으로 충만케 하는 영성(靈性)운동이다.
(6) 부흥회는 말씀과 은사(恩賜)를 통한 신앙 훈련운동이다.
(7) 부흥회는 교회를 양적으로 질적으로 성장시키는 교회 성장운동이다.
(8) 부흥회는 목회자의 목회를 돕는 목회 협력운동이다.
(9) 부흥회는 교회를 개혁시키는 교회 개혁운동이다.
4. 부흥사란 어떤 사람인가?
부흥사란 부흥회를 인도하는 강사를 말한다. 부흥사는 갖가지 종류의 부흥회를 연중무휴(無休)로 인도해서 수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불신자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 개인의 신앙을 성장, 성숙시키며 교회를 부흥시키게 한다. 그러므로 부흥사로서 갖추어야 할 요건을 제대로 갖추어 불붙이는 부흥회를 인도해야 한다.
불 꺼진 강단과 심령에 불붙이는 부흥회, 한국교회를 회복시키는 부흥회, 사도행전 29장을 써 내려가는 부흥사가 되도록 일어서서 두 손 들고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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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남은 시간도 행복이 넘쳐 나시길 기원 합니다.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