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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화된 시간 속 문장들
_주선미, 김은우, 권선희, 김명리
박철영(시인,문학평론가)
매번 고민하지 않아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의 변화를 무엇으로 막을 수 있을까? 한편으론 떠나보낸 계절이 아쉽기도 하지만, 그것도 행복한 여유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 계절에 아랑곳하지 않고 살기 위해 오직 한 곳만 바라보며 달려가는 사람들을 일반인이라고 하자. 그런 부류에 휩쓸리지 않고 갈 길을 가다가도 멈추며 무언가에 골똘한 사람을 시인이라 말해도 억지는 아니다. 똑같은 환경을 살아가며 주어진 삶보다 무한 사유의 늪으로 빠져들어 해찰을 일삼는 사람을 간혹 만나게 된다. 작은 틈이라도 있으면 그 간극을 뛰어넘지 않고 허공의 시간 현상을 세계로 치환해 바라보려 한다. 높고 푸른 하늘 아래 풍성한 가을을 맞으며 지난 날의 상처를 생각하고 아픈 여름을 떠올리는 사람, 통꽃을 떨군 이별을 찰나의 공간으로 인식하고 지연되는 현재 속 심연을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리려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시 다가올 겨울과 지나간 계절을 안타까워하는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 시인이다. 하지만, 그런 시인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계절은 되돌아가지 않고 앞으로만 나아간다. 이제 또 한 계절을 보낸 소회를 문장으로 재현하여 현재의 시각으로 바라보려 한다. 아직은 숨이 차겠지만, 좀 더 시간이 지나고 나면 거칠던 숨마저 잦아지고 자신만의 골방에 들어 방문을 걸어 잠그고 긴 침묵으로 빠져들 것이다. 그 침묵의 시간은 그만이 소유할 수 있는 무한한 상상력을 사유로 환원하는 시간이다. 소리 소문 없이 왔다 흘러간 시간에 무심하려 해도 그마저 쉽지 않다. 그것은 신기를 받으라는 무병 앓이처럼 어느 순간 몸 안으로 들어와 똬리를 튼 시인만의 문장 앓이다. 부양해 준 사람 하나 없이 혼자 앓다가도 훌훌 털고 일어나야만 하는 탈혼으로 일체가 된 신탁을 받아 적어야 한다. 시를 쓴다는 것도 정갈한 마음으로 굿판을 준비하는 무당과 다르지 않다. 육신이 몹시 지쳤는 데도 할 일은 해야 하기에 미뤘던 허기가 일시에 엄습해온다. 그것은 배고픔과 영혼의 허기가 동시에 몰아닥쳐 탈진에 가깝다. 무엇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가슴 속 욕망이 집착한 염결성의 결정체다.
먹을 것을 찾다가
라면을 끓였다
간단히 꾸린 살림이라 김치도 없고
아침에 끼적거리다 말았던
김치찌개 냄비째 상에 올려놓았다
냉장고 문을 열어
차가운 곳에 유폐시켰던 밥 한 덩이 꺼냈다
며칠째 모른 척했다고
삐친 애인처럼 독이 올라 곤두서 있다
뜨거운 라면에
다독다독 풀어 밥 한술 뜨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주인이 실종된 번지에
뿌리 없는 언어들
검푸른 형용사로 자라났으나
마음에 두지 않았다
조금만 더 힘내자고,
쓰러지지 말자고,
서로 등 기대고 스크럼을 짰다
무엇을 이룬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모두 내려놓고 빈 마음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어디서 놓지마라 한다
욕심을 채우라 독촉한다
내 배후에 누군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주선미, <밤 열두 시 라면을 끓이는 이유> 전문 (《시와사람》, 2022년 가을호)
보이지 않는 문장을 끌고 다닌 하루가 길었던지 피로보다 먼저 찾아온 배고픔이다. 허겁지겁 집 들어와 먼저 눈에 띈 것이 라면이다. 매사에 게으름 안 피우고 부지런히 일해도 끝없이 밀려오는 일거리란 것이 특별하지도 않지만, 그것을 해내야만 하는 고단한 삶이 현대인의 모습이다. 그래도 어찌하리 시인도 알지 못한 시가 냄비에서 온도를 높이며 달아오르고 있다. 주섬주섬 챙기는 동안 냉장고 속 김치와 “차가운 곳에 유폐시켰던 밥 한 덩이”를 꺼낸 그 순간 울컥하는 서글픔이 번져온다. 뜨거웠던 밥알이 곧추서 뾰로통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다. 마치 차가운 밥 덩이가 “삐친 애인처럼 독이 올라 곤두서 있”는 것처럼 냉장고 안 분위기가 냉랭하다. 널 한시도 잊은 적 없다고 한참을 다독여줘도 쉽게 풀어질 것 같지 않은 차가운 오해다. 하루 종일 인기척 끊긴 방 안에서 귀를 쫑긋대며 기다렸을 고립의 시간을 떠넘기고 간 내 잘못이 크다. 이제나저제나 바닷일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다 울다 지친 해거름 산마루를 타고 온 그림자에 놀라 눈물 흘리며 한없이 서럽기만 했던 나의 유년이다. 어머니가 환한 웃음을 띠며 금방 돌아올 거라고 집 잘 지키고 있으라며 손 흔들며 좁은 골목을 빠져나갔던 모습을 닮은 나였다. 아득한 바다, 그곳이 화자가 여직껏 헤매다 지쳐 돌아온 어머니의 바다란 것을 이제 알았다. 어머니 물 때 따라 갯벌에 나갔다 파김치가 되어 돌아올 때처럼 어쩌면 그리 엄마를 빼닮은 건지 그래서 더 서러운 밤 깊어 홀로 차린 밥상머리다. 정제문 들어서자마자 주섬주섬 챙겨 허기진 배를 채우시고 하던 ‘밥 좀 먹었더니 이제 살 것 같다’는 어머니의 말. 그 말이 갑자기 목젖을 타고 넘어온다. 그렇게나 신신당부한 어머니의 말씀이었건만, 집 잘 지키라는 말, 그 말을 한 바퀴만 돌려놓고 보면 몸 잘 챙기고 살라는 가슴 찐득한 속말인데 제 몸뚱어리 하나 간수도 못해 힘들어하는 이 죄스러운 마음을 어찌하면 좋을까? “뜨거운 라면에/ 다독다독 풀어 밥 한술 뜨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는 방 안 홀로 청승 깊은 나를 다독인다. 고독감이 빈방을 가득 채울 때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 유기한 시간을 고스란히 되돌려 받는 밥 한끼가 참 서럽기만 하다. 할 수 있는 말은 외롭더라도 조금만 더 참아달라는 말로 빈궁을 제하지만, 빈방을 채워줄 이는 내 말고 누구겠는가. 나를 스스로 유폐하고 유기하면서도 긴 하루 못다 한 일이 아직도 남아 “주인이 실종된 번지에/ 뿌리 없는 언어들/ 검푸른 형용사로 자라났으나/ 마음에 두지 않았다”라고 속없는 말을 내뱉지만, 아득한 옛날 독기 서린 말을 시퍼런 비수처럼 내 가슴에 던졌어도 상처하나 없던 어머니의 말씀도 꼭 저랬다. 시간 속에 갇혀봐야만 제대로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아는 법이어서 늦은 밤 퍼진 라면으로 한 끼를 채우는 삶의 투혼이 시의 시간으로 환원해왔다. 시인들의 최대 관심사는 시적인 삶에 있다. 아무나 느낄 수 없는 언뜻 보면 평범한 일상이다.
시작하면 멈출 줄 모르는 토론
함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때때로 복잡한 속내를 털어놓기도 하는
우리는 서로를 개입하지 않기 위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
정해진 곳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끝나지 않은 서사
누군가 최대한 멀리 가서 길게 머무르는
여행에 대해 이야기할 때
누군가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지만
갑자기 와버릴지도 모르는
그날에 대해 이야기 했다
각자의 색에 색을 덧입힐 때
뱉은 말이 다시 돌아오기도 하고
분분한 의견과 의견이 충돌하는
우리는 늪에서처럼 한발한발 깊어져서
들여놓은 발을 뺄 수가 없다
너무 가까워서 잘 보이지 않는
서로를 버리지 못한 채
좋은 날들이 계속되기를 기원하는
-김은우, <동인들> 전문 (《미래시학》, 2022년 가을호)
그러나 시적인 삶이 꼭 별개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어서 콕 집어 말할 수 없다. 김은우 시인의 ‘동인들’이란 시를 통해 그런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다른 시간은 몰라도 ‘동인들’과 함께한 시간 만큼은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이다. 좀 더 고상한 모습으로 시인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싶고 그 자리에서 나눈 대화처럼 일상을 그렇게 산다는 듯이 말이다. 요즘 사람들은 다양한 취미 생활을 효과적으로 해나가기 위해 동호인끼리 모임을 결성한다. 모임의 취지에 따라 운영하는 방법이 조금씩 차이는 나겠지만, 날짜를 잡아 취지에 맞는 행사를 한 뒤 식사를 한다거나 곁들여 술잔을 나누며 즐거웠던 일들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그러고도 아쉬움이 남았다면 자리를 옮겨 커피를 마신다며 흔히 2차를 갈 것이다. 그렇지만, 김은우 시인이 갖는 ‘동인들’이란 의미를 한정하고 있어 시를 쓰는 사람들 위주로 갖는 모임인 것 같고 그러다 보니 “시작하면 멈출 줄 모르는 토론/ 함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때때로 복잡한 속내를 털어놓기도 하는” 꽤나 진지한 이야기가 오가고 끝없는 ‘말’들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진행될 것이다. 문학이란 시인마다 세계를 갖고 있는 것이어서 “우리는 서로를 개입하지 않기 위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며 나름의 존중이 필요한 것으로 함부로 그 선을 넘지 않으려는 배려도 필요하다. 간혹 좋은 취지로 상대방의 문학 담론을 의제로 다루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 일이 있을 땐 거친 언사가 오간다거나 하여 불편해진 경우도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각종 SNS를 통해 올라오는 문학인들의 주의 주장을 들여다보면 긍정적인 기능을 잘 활용한 사람도 있지만, 순 기능을 자신의 홍보 수단이나 타인(시인)에 대한 험담이나 거친 언사로 시비를 거는 일이 간혹 발생한다. 삶의 전부이거나 부분일 수 있는 문학이지만, 대체로 그런 도발은 상대방을 자극하는 감정싸움으로 번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아무리 글을 쓰는 시인이라 해도 세상사에 몸담고 살아가는 또 하나의 범인凡人이기에 그런 일은 여기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 하지만, 김은우 시인의 ‘동인들’은 진지한 관계 속에서 끈끈한 모임이란 것을 보여준다. “정해진 곳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끝나지 않은 서사/ 누군가 최대한 멀리 가서 길게 머무르는/ 여행에 대해 이야기할 때”라는 분위기로 봐서 서로 간 관심사를 세세히 나눌 수 있는 관계인 것이다. 우선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경청을 한다는 것과 멀리 떠나서 한동안 볼 수 없을 것에 대한 이유를 밝히는 사람의 말에 집중한다. 그 멀리 떠난다는 ‘여행지’를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긴 여행 일 수도 있다. 어찌 되든 간 그 여행이란 것은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것이고 계획한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와야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도 발생한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그만의 사정이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지만/ 갑자기 와버릴지도 모르는/ 그날에 대해 이야기 했다”는데 구체적인 말을 아끼지만, 생에 대한 비밀을 살짝 들추는 듯하다. 막연하지만, ‘그날’이란 의미는 많은 사유를 추정케한 시가 갖는 개연성을 넓혀준다. ‘누군가’로 지칭한 그 사람은 ‘나’일 수도 있고 그곳에 함께한 또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어서 ‘그날’은 막연하지만, 먼 훗날로 밀쳐두고 싶다. 화자가 속한 모임의 세월도 상당하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만큼 친밀한 ‘동인들’이어서 세상 잡다한 화제들을 꼬리에 꼬리를 물 듯 끄집어 내 분분한 대화를 펼쳐간다. 문학적인 주제란 것이 특별하지도 않을뿐더러 긴 대화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화젯거리가 올라온다. 그만큼 문학 자장이란 범주는 넓고 깊다. “각자의 색에 색을 덧입힐 때/ 뱉은 말이 다시 돌아오기도 하고/ 분분한 의견과 의견이 충돌하는” 것으로 봐서 오늘은 헤어질 때가 된 듯하다. ‘동인들’ 개개의 구성원이 제각각의 세계를 견지하고 그것을 추구하며 산다. 문학이란 세계 속에 갇혀 있다보면 ‘동인들’이 가질 수 있는 인식의 세계를 변별성으로 보지 않고 동류의식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 인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많은 시간이 지난 뒤 문학적인 결과물로 나타나며 차이(간극)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날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작은 갈등은 깊지 않아서 ‘좋은 날’이 또 왔으면 하는 바람이 깊어 쌓아온 정을 빌미로 만나 그동안의 밀린 ‘말’을 털어놓을 것이다. 그렇게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는 것이 인생이고 시라는 문장으로 의미를 새겨가는 사람들이 시인이다. 때로는 가슴 아픈 시간으로 되돌아가야 할 때도 있다.
아버지는 풍배 타고 고기를 잡았다
물칸 넘치게 싣고 돌아오면
튼실한 놈들만 골라 간독에 넣고 소금을 후렸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어둠 속에
차곡차곡 쟁여 넣던 물고기들
목숨이니 어디서든 붙어살겠지
저승도 살 곳이라 다들 가는 것이라며
큰형을 잃은 여름, 비린 생에도 간을 쳤다
끓는 속내와 솟구치는 부아를 간독에 재우고
돛을 세워 바람을 타고 별을 읽고 돌아왔다
눈바람 배를 묶어 더는 나갈 수 없는 겨울
세간 부수는 날에도 차마 아버지, 간독은 건들지 않았다
병에 들자 여러 날 곡기를 끊고
다들 돌아오지 않는 걸 보니 아주 좋은 곳인가보다
그곳으로 건너가실 때도 간독은 두고 가셨다
혼자 남은 어머니는 간이 잘 밴 아버지를 내다 팔았다
참 깊고 어두운 속내였다
*간독: 바닷가 사람들이 물고기를 염장하던 아주 커다란 독
-권선희, <배꽃나무 블라우스> 전문 (《대구경북작가회의 시선집》, 2022년 가을)
권선희 시인은 동해 푸른 파도가 쉼 없이 밀려오는 ‘호랑이 꼬리’라고 하는 ‘구룡포’에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구룡포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물론 나와 일면식도 없는 관계지만, 풍문으로 들어서 안다. 필자도 서울에서 내려와 포항에 삶터를 잡고 청춘과 더불어 신혼 때 찾아갔던 추억이 있다. 당시만 해도 구룡포는 포항에서 버스를 타고 30여 분을 가야 했다. 한참을 달리다 보면 해병 초소가 나왔고 고개를 몇 번 더 넘어서면 푸른 바다가 보였다. 전형적인 포구로 물고기를 저장하는 건물이 큼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한쪽 바닷가에 둘러앉아 그물을 털어 물고기를 손질하는 아줌마들의 왁자지껄한 말과 고기를 사러 온 사람들로 시골 장터처럼 북적였다. 지난 날을 떠 올리듯 화자의 가슴에 간직한 ‘아버지’의 과거는 가슴이 아프도록 찡하다. 고향의 추억 속 “아버지는 풍배 타고 고기를 잡았다/ 물칸 넘치게 싣고 돌아오면/ 튼실한 놈들만 골라 간독에 넣고 소금을 후렸다”며 어부로 살아 온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한다. ‘풍배’를 통해 가족의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아버지의 삶은 그만큼 바다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성장한 뒤에도 화자는 그 당시 일들을 잊을 수 없다. 아버지가 몰고 나간 ‘풍배’란 고깃배를 상상으로 말할 수밖에 없지만, 돛을 단 작은 조각배를 일컫는 말일 것이다. 그만큼 열악한 ‘풍배’를 타고 먼바다까지 나가 고기를 잡아야 했던 아버지는 생명의 위험까지도 가족을 위해 감내하신 것이다. 아버지의 시간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편한 것만은 아니다.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시시때때로 묻어오는 그리움이란 것의 무정함은 어쩔 수 없다. 깊숙한 구들장 밑에서 오랫동안 데워진 온기처럼 식지 않는 사랑 가득한 정 때문이다. 과거란 시간을 한 꺼풀씩 벗기다 보면 참았던 슬픔과 비애 같은 생의 순간들이 고스란히 들쳐지고 아버지의 시간도 그 속에 오롯하게 존재한다. 바다의 거친 파도가 조그만 ‘풍배’를 덮칠 듯 덤빌 때의 불안은 상상할 수 없다. 아버지의 ‘풍배’는 마치 망망대해에 떠 있는 나뭇잎처럼 위태로웠을 것이다. 그렇게 바다에 나가 잡아 온 고기를 묵묵히 그물에서 발라내 크기별로 선별해 내다 팔만 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따로 소금을 뿌려 ‘간독’에 쟁이시던 ‘어머니’로 기억되는 또 하나의 바다가 집 안에 있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아둔 물고기가 ‘간독’ 속 아버지의 시간으로 절여질 때 도무지 재워지지 않는 슬픔은 “저승도 살 곳이라 다들 가는 것이라며/ 큰형을 잃은 여름, 비린 생에도 간을 쳤다/ 끓는 속내와 솟구치는 부아를 간독에 재우고/ 돛을 세워 바람을 타고 별을 읽고 돌아왔다”는 아버지다. 그럴 때마다 밀려온 슬픔을 아버지의 ‘간독’에 묵묵히 묻어두던 어머니였다. 어느 때부터 더는 간독에 고기를 쟁일 일마저 없게 된다. 아버지의 몸이 상해 ‘풍배’를 끌고 바다로 나갈 수 없게 된 것이다. 눈바람이 세차게 쳐도 더는 돛을 펼칠 수 없는 아버지의 ‘풍배’는 바다가 보이는 곳에 묶여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날이 지속되면서 그나마 유지해온 세간살이들이 들려 나갔고 가세가 기울었지만, 아버지의 ‘간독’만은 그 자리에 그대로였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유산 같은 힘든 세월을 마저 홀로 견디며 살아내야만 했던 어머니였다. “혼자 남은 어머니는 간이 잘 밴 아버지를 내다 팔았다/ 참 깊고 어두운 속내였다”는 과거 속 아버지의 시간은 슬픔을 견딘 사랑으로 절여져서일까? 어머니는 아버지의 ‘간독’을 열었고, 그리움처럼 애써 외면한 그 ‘간독’ 속 물고기를 내다 팔아 조금이나마 절박한 곤궁을 견딜 수 있었다. 오래전 기억을 떠올리는 화자의 머릿속에는 왜 그리 ‘간독’이 생생한 지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저 먹먹할 따름이다. 바다가 푸른 것은 세상의 슬픔을 죄다 받아들여 그런 것이라고 모 시인이 말했던 것처럼 아버지의 바다는 ‘간독’ 속에 절여져 더는 슬픔도 될 수 없는 삶의 현재이고 화자가 살아가야 할 미래의 시간으로 얼굴을 내밀 것이다. 화자의 가슴으로 끝없이 밀려오는 푸른 파도가 못다 이룬 아버지의 바다 같은 사랑이란 것을 조금은 알겠다.
사람들은 해마다의 가을이
집 앞으로 찾아와
한 잎 낙엽으로 뒹군다고 말한다
아니다 백 년 만에
백만 년 만에 당도하는 가을도 있다
가을은 가을 속에서만 붐비는 까닭에
사람의 가을이 들어설
입추立秋의 여지가 없다
마음의 단청은 사시사철 붉고
목발의 깃발은 저 홀로 고요해서
가을은 기다림의 천 척 높이
허공에서 더 먼 허공으로
애꿎은 버즘나무 이파리만 날리고 있다
-김명리, <바보의 가을> 전문 (《사이펀》, 2022년 가을호)
산과 들이 화려한 색감을 띄우고 너나없이 아름다움을 발할 때 가을이 던지는 사유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천착한 시 한 편을 골라 들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을은 계절의 변화로 인해 식물의 성장이 멈추면서 본질은 그대로인 변이 현상의 한 과정일 뿐이다. 가을에 대한 보편적 인식에 그렇지 않다는 화자의 주의 주장도 이유가 있다고 본다. 먼저 “사람들은 해마다의 가을이/ 집 앞으로 찾아와/ 한 잎 낙엽으로 뒹군다고 말한다”며 ‘뒹군다고 말한다’라는 어감에서 그것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는 인식의 차이를 나타낸다. 사실 ‘가을’이란 것은 그토록 의미 없이 찾아왔다 훌쩍 가버린 것이 아니란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으로 찾아오기까지의 심오한 계획부터가 상상할 수 없는 곳에서 시작되었고, 그것을 실행하는 데 있어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찾아온 것이 아니라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정확히 맞춰 온 치밀한 계획의 이행이란 것이다. 산과 들의 나무나 초목은 그대로 그곳에 있었을 뿐 찾아온 것은 과거의 오랜 의지란 것을 알려주고 있다. 낙엽으로 ‘뒹군다’는 의미에 자의성이 깃들어 있어 그것 또한 떨어진 낙엽으로 봐선 억울할 수 있다. 가만있고 싶어도 바람이 가만두질 않았기 때문이다. 시에서 말하고자 한 것의 함의는 그저 그렇고 그런 가을이 아니라 매우 깊은 의도로 기획되어 당도한 가을이라는 것이다. 그것의 시간은 일 년이나 십 년이 “아니다 백 년 만에/ 백만 년 만에 당도하는 가을도 있다”라는 것으로 자연의 심오한 순환에 대한 순리를 깨닫게 된다. 계절의 변화는 천체의 운행 주기를 어김없이 맞춰 오는 것이다. 그 안에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과 겨울이 상존하기에 단지 색감이 붉다 하여 ‘가을’만이라고 말할 수 없다. 봄 속에도 붉은 가을이 있을 수 있고 여름의 짙푸른 녹음과 한 겨울 벌거벗은 나뭇가지에도 단풍 이파리처럼 붉게 물든 기운이 들어있을 수 있는 데 사람들은 너무 피상적으로만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찌 계절 속 가을에만 국한될 수 있는가를 반문하고 있다. 이제 화자의 무의식 속에 존재한 또 다른 가을에 대한 인식을 드러낸다. “가을은 가을 속에서만 붐비는 까닭에/ 사람의 가을이 들어설/ 입추立秋의 여지가 없다”며 보다 확장된 범주를 드러낸다. 보는 단풍이 주는 즐거움만이 아니기에 가슴으로 생명이 품은 우주적 원리를 천착하며 생명의 유한성이 어떠한 경로로 변이 되며 그것의 유한함이 주는 생의 비의가 인간의 삶 속에서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숙고하며 그 안에 깃들어 있는 화려한 색감 이외의 고요로 다독인 침묵 같은 어둠의 시간이 얼마큼 들어있는가를 과연 알고 있는가를 묻고 있다. 현재처럼 화려한 색감의 시간으로 다가오기 위해 감수한 여정 속 험난했던 세월과 그 세월로 함축된 시간보다 더 먼 세계의 시간을 알고 있는가를 또 묻고 있다. 그런 이후에도 화자의 몸을 건너온 한 편의 시가 의미하는 가치와 세계에 담긴 심원 속의 근원에서 길어 올린 존재에 이른 비원까지를 알고 있는가를 재차 묻고 있다. 시적 대상으로 다가온 계절 속 아름다움은 그저 현재의 위치에서 그들만의 생명선으로 이뤄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저 웅혼한 지리산 천왕봉을 넘어온 비, 바람과 더 먼 태백의 능선을 타고 온 진눈깨비와 금단의 땅이 되어버린 금강과 백두를 넘어 우리의 조상들이 횡단해 온 유라시아의 건조한 초원을 가로질러 온 영혼을 품은 가을이다. 그것이 어찌 일 이년에 간단히 이루어질 수 있으며 설령 그렇게 보인다 쳐도 그것의 근원은 ‘백년 전’을 너머 ‘백만 년 만에 당도한 가을’인 것이다. 그런 가을을 보며 단순히 감상으로만 허비해선 안 될 다시는 못 올 가을인 것이다. 이제 그 앞에 숙연하도록 경건한 자세로 신 앞에 서듯 소중한 가을을 맞이할 수 있었음에 감사해야 한다. “마음의 단청은 사시사철 붉고/ 목발의 깃발은 저 홀로 고요해서” 마음의 깊은 심연을 통해 사유한 세상의 진면이 보이기 시작할 터, 우리가 보고 있는 사물 속에 깃든 색감은 생명의 기운을 품고 있어 사시사철 붉은 것이라는 화자의 의식을 환기하여 ‘목발’에 걸려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의 의미를 천착하게 한다. 가을이 갖는 색감과는 무관한 무정물에 불과한 ‘목발’과 ‘깃발’의 고요한 시위를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이라고 말한다. 가을의 정열이 색감보다 강하게 그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시적 함의다. 누군가의 투혼을 담아 목발에 매단 깃발은 우리가 알고 있는 가을의 색감보다 더 붉은 인간의 보편적인 존재 인식과 실존에 대한 고뇌이기에 뜨거운 함성이 깃들어 있음을 안다. 결국 찾아온 가을은 특정한 사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주 만상에 적용된다는 시적 세계를 인식으로 보여준다. “가을은 기다림의 천 척 높이/ 허공에서 더 먼 허공으로/ 애꿎은 버즘나무 이파리만 날리고 있다”는 시의詩意에 대하여 앞서 말했던 것처럼 또 다른 곳으로의 이행을 준비하고 있다. 현재를 실체로 보여준 가을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각인된 본성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어서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상상하며 나아간다. 화자는 풍경 앞에 서서 새롭게 다가올 오랜 과거 속 가을을 상상하고 있다. 그 시간은 기다림의 ‘천 척’ 높이를 가진 우주의 무한공간이고 차이라는 공간에 존재한 ‘허공’의 ‘허공’이고 우리의 의식을 성찰하게 한 과거의 의지였다. 그 시간 속을 함께 건너며 고단했던 밤 하늘의 별과 달을 품은 영혼같은 가을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변화의 순간을 소중한 시간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계절도 잠시 휴식을 취한 때가 있다. 그 시기를 간절기라고 한다. 이제 쉼표를 찾아봐야할 때가 된 것이다.
네 편의 시의 세계를 들여다보며 사유로 번져온 심상과 깊숙한 곳으로부터 발현한 문장 속 깊은 시심에 빠져들어 말이 길어졌다. 그 또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