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회 총무 컬럼
고창죽산박씨 종친회(판정 일파) 이사회(종친회장 박동업)가 지난 3월 29일 광주 신라각 모텔과 시제를 지내는 박메와 판정 묘역에서 열렸다. 이날 이사회에는 동업 회장을 비롯하여 동전, 주경 부회장, 동강 동근 병로 일태 석순 덕환 동창 경석 인선 복건 홍배 등이 참석(위임장 제출 포함)하였고, 이 자리에서 묘역조성 안건에 대해 결의했다. 납골묘역 조성은 고창 죽산박씨 종친회(판정일파)가 이미 수년 전부터 숙원으로 여겨오던 터여서 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문명이 발달하고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많은 오늘날 할아버지 윗대의 조상에 관심을 갖기는 쉽지 않다. 판정 일파도 마찬가지여서, 50대 후반에서 60·70대의 일부 종친들(이사회)만이 조상에 관심을 갖고 있다. 사실 이들도 없는 시간을 내서 겨우 이사회를 하고 시제를 지낸다. 그러니 조상의 묘역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일을 아무런 생각도 없는 다음 세대에게 기대할 일이 아니다. 이사회에서 납골 묘역 조성을 서둘러 결의한 이유가 이것이다.
우리 판정 일파는 17대조이신 첨추공(휘:배근) 할아버지로부터 비롯된다. 묘소는 박메 선산의 가장 위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첨추공 할아버지의 옛날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커다란 봉분에 위엄이 여전하다. 예전에 윗대 어르신들은 이곳까지 올라와 시제를 모셨으나 지금은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박메마을 초입 벌안에서 합동으로 모시고 있다. 사진으로 보는 것처럼 이곳 벌안에는 10여 기의 봉분이 있는데, 어느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 밑에 있는지 거의 모른다.
묘역이 이렇게 방치된 까닭이 뭘까. 첨추공 할아버지의 후손이 미약했기 때문이다. 손이 귀하기도 했거니와 세상에 나가 크게 가문을 일으키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판정 일파는 문정공 할아버지를 잇는 종가에 해당한다. 문정공은 1465년(세조 11년)에 향년 50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평균수명으로는 어쨌는지 몰라도 사실 생애가 짧았다. 공의 형님이신 문헌공(휘 원형)은 70을 넘기며 장수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문정공의 맏아드님(휘 승양), 다시 그 맏아드님(휘 한곤)으로 이어지면서 문정공의 증손이신 첨추공으로 이어진다. 첨추공이 맏이이고, 임곡 일파의 선조인 사직공(휘 양근)이 그 아우가 되신다. ‘문정공 증손 첨추공’이라는 표현에는 숨은 뜻이 있다. 문정공파의 종권이 포함돼 있다는 것이다. 문정공 후손의 어느 지파에서도 ‘문정공 증손’이라는 표현을 족보에 쓰지 않는다. 종권이 우리에게 있으니 문정공할아버지가 남긴 것은 모두 고창 일파의 것이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문정공 할아버지 유산이나 묘역을 판정일파에서 관리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사정을 밝혀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무슨 이유에서였건 현실적으로 문정공의 유산은 첨추공의 후손인 고창 일파에 있지 않다. 수백 년이 그렇게 흘러갔다. 첨추공 아래로 몇 대를 벼슬은커녕 명이 짧은 독신, 혹은 형제로 겨우겨우 대를 잇다가 5대조 무렵에야 수가 불어나면서 오늘에 이른다. 사실 판정일파가 굳이 진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없거나, 알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일 수도 있다.
첨추공은 박메 마을을 성립하신 분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박씨 성을 가진 첨추공이 마을을 열었다 하여 마을 이름을 박산 혹은 박메라고 했으리라는 설이 유력하다. 족보에도 기록이 있다. 첨추공의 아버님(휘 한곤)이 함평 현감으로 내려왔다가 인연을 맺었고 첨추공이 물고기가 하늘로 오르는(어등산) 상서로운 곳이어서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기록돼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러나 후손들이 융성하지 못한 채로 이곳에서 명맥을 잇다가 7~8대조 무렵부터는 흥덕과 판정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그래서 판정 종토(문답)의 소유권자로 8대조(휘 성광), 7대조(휘 경신)가 아직 문서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선조들은 비록 안빈낙도, 한미하게 사셨으나 묘역을 유지하고 제사를 모실 수 있는 종토를 남겨두었다. 박메 일대, 박메 초입의 산수동 일대, 판정의 임야와 전답, 아산과 장성 등 여러 곳에 종중 자산이 있는 것. 박메에서 지내는 시제는 모두 할아버지 할머니를 통틀어 15분을 모시는데, 그 종토를 붙이는 묘지기가 음식 등을 준비한다. 판정에서 지내는 시제는 모두 11분을 모시며 종친인 성환이 음식을 준비한다. 6대조(증통훈대부, 휘 경신:병목안 묘소)가 남긴 종토는 산지촌 앞에 있다.
그렇다면 2015년 현재로부터 2030년, 2080년이 될 때까지 우리 후손들이 어떻게 묘역 관리를 하고 시제를 모실까. 종친회 이사회에서 중점 논의된 것이 이것이었다. 즉 납골묘역 혹은 납골당 조성으로 어렵지 않게 의견이 모아진 것이다. 그리고 사업 추진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종토의 일부를 매각하는 데에도 뜻을 모았다.
종토 매각은 이사회 결의, 이사들의 연명 날인이 있는 위임장이 있어야 가능하다. 종친회 총무가 이사들에게 위임장 연명 날인과 인감증명서를 가져오라고 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이렇게 수합된 위임장(연명부)과 인감은 동업 회장에게 전달되고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된다.
언제 어디를 팔게 될지는 모른다. 매수자가 바로 나설지도 의문이다. 그러니 언제부터 시작하여 언제 사업이 마무리가 될 지 알 수 없다. 남에게 매각되기 전 종중의 누군가가 종토를 매입한다면 쉽겠으나 그 또한 불투명한 것이 사실이다.
현재 판정 종친회 소유의 종토는 광산구 박매( 전,답, 임야), 위의 산수동(임야), 판정(임야, 답, 전), 아산면 묘역, 장성 묘역 등 여러 곳에 분산돼 있다. 납골당을 조성하게 되면 이 토지 중에서 묘역으로 조성돼 있는 장성, 아산면의 땅 등 상당한 토지를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납골당 조성사업이 순조롭게 마무된다면 동자항렬, 즉 2015년을 사는 우리 세대가 할 일은 대체로 마친 셈이 된다. 이후 다시 토지를 모두 처분하여, 물론 값이 좋을 때의 이야기지만 커다란 빌딩이라도 한 채 마련하여 그 세를 받아 조상묘역을 관리하고 후손들의 학비 정도라도 지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2015년 시제를 지내고 나서, 납골묘역 조성을 위한 의견들을 들어보고 나서 가져보는 생각이다.
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다. 이사들의 인감, 위임장 날인 등이 그것이다. 아직 제출하지 않은 이사들께서는 총무의 안내를 따라줄 것을 제안한다. 서둘러 광주로 이 서류들을 전달해야만 사업 가닥을 잡을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