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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121. [역경의 열매] 김소엽 (1-25) 아들 잃은 어머니, 하나님 만난 뒤 눈물이 감사로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전 3:1∼7).
전도서의 기록이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극동방송에서 '하나되게 하소서'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을 무렵 국민일보로부터 '역경의 열매'를 집필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당시 나와 함께 일하던 기독여성 문인들이 역경의 열매를 썼으나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 나이 쉰도 안 된 마흔 중반에 간증을 한다는 것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뿐이라 일흔이 넘으면 쓰겠다고 했는데, 그 약속대로 일흔이 넘어 이제 말할 때가 된 것이라 생각하고 조심스런 마음으로 이 글을 집필하게 됐다.
나는 세상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교회와 함께했고 하나님과 함께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모태신앙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태어날 무렵은 일제 말기 일본제국주의의 압박이 심했던 때였다. 내가 살고 있던 충남 논산 양촌면 석서리 산골에는 30여호가 오순도순 살고 있었지만 집집마다 가난에 찌들어 보릿고개를 넘기기가 아주 힘들었다.
게다가 대전중학교 장학생으로 다니던 오빠가 방학 때 집에 왔다가 뽕나무에서 떨어져 척추를 다치는 사고를 당했다. 이후 오빠는 5년여를 고생하다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으니 어머니는 매일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페니실린만 있었어도 살 수 있었는데, 오빠가 떠난 뒤 페니실린이 나왔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유교사상이 강하게 젖어 있던 시기여서 아들을 잃어버린 것은 어머니에게는 온 우주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거다. 이렇게 참담했던 시기에 복음은 어머니에게 새로운 천국 소망이 됐고 이는 절대 신앙으로 자리할 수밖에 없었다.
1907년 양촌에 세워진 감리교회 신원희 전도사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인 어머니께서 하나님을 만나고부터는 한탄이 찬양이 되고 눈물이 감사로 변했다. 단아한 모습으로 안경을 끼고 성경을 상 위에 올려놓고 읽으시는 어머니 모습이 내 뇌리에 각인돼 있고 주일이면 어른은 어른끼리 처녀는 처녀들끼리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일열 종대로 서서 논둑길을 따라가다 강을 건너고 그리고 소래개재를 넘어 찬송가를 부르며 양촌감리교회를 갔던 모습이 지금도 아련히 천국행렬처럼 머리에 남아 있다. 그때 주로 불렀던 찬송가는 '예수 사랑하심은'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등이었다.
그러나 교회에 가면 어린이들에게는 주일학교 찬송을 따로 가르쳐 주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는 찬송이 있다. "조그마한 주먹이라/ 너희들이 흉보지만/ 이래봬도 어림없다/ 단단하다 튼튼하다/ 나는 나는 이 주먹을/ 기운차게 휘둘러서/ 삼천만민 위하여서/ 줄기차게 싸우련다."
지금도 잊을 수 없었던 또 하나의 기억은 풍금이었다. 어떻게 그런 나무상자 속에서 그렇게도 은혜로운 소리가 울려퍼질 수 있는지, 너무나도 황홀해서 풍금 주위를 떠나지 못하고 맴돌았던 기억이 새롭다. 풍금소리와 찬송가로 나의 유년은 은혜로 덮였고 하나님의 축복이 어머님의 기도처럼 내 머리위에 넘쳤다.
정리=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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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1944년 충남 논산 양촌 출생,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연세대연합신학대학원 기독교교육학과 졸업, 미국 미드웨스트대 명예문학박사, 호서대 교수 역임, 현 대전대 석좌교수, 한국문화예술총연합회장, 신촌성결교회 권사. 저서로는 시집 '그대는 별로 뜨고' '지난날 그리움을 황혼처럼 풀어놓고' '마음속에 뜬 별' '하나님의 편지' '그대는 나의 가장 소중한 별' 등 10여권과 수필집 '사랑 하나 별이 되어' '초록빛 생명'등이 있다. 극동방송 '하나되게 하소서', CBS '새롭게 하소서'를 진행했고 현재 CTS에서 '영상시'를 낭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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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인정 많기로 소문난 분이셨다. 춘궁기가 되면 광문을 열고 사람들에게 쌀과 보리를 나눠주어 사람들이 자루를 들고 줄을 서서 퍼주는 곡식을 받아들고 연신 절을 하며 돌아가곤 했다. 또 한 달에 두어 번 쌀 한 가마가 들어갈 만큼 큰 시루에 떡을 만들어 동네에 돌리곤 했다. 언니와 나는 떡을 돌리는 일을 좋아했다. 어른들은 떡을 받아들고 고마운 마음을 빈 접시에 담아 보내면서 "예쁘기도 하지"라고 칭찬을 해줬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머니의 인정 덕분에 우리 마을은 복음이 잘 전해졌고 그 덕에 우리는 6·25전쟁 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동아일보를 창간호부터 구독하신 분이라 시사에 아주 밝으셨는데 6·25가 나기 1주일쯤 전에 이미 전쟁을 예견하시고 다리가 아파 대전도립병원에 입원한다는 핑계로 고향을 떠나셨다. 그러면서 우리들에게는 전쟁이 나면 흑석리에 사는 당고모 집으로 오라고 어머니와 밀약을 해놓고 떠나셨다.
아버지의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6·25전쟁이 발발했고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공회당에 끌려가 김일성 충성 노래를 배우고 있었다. 그때 일하는 아줌마가 "애기씨, 큰일났어요. 빨리 집으로 오래요"라면서 나를 업고 나갔다. 밖에 나오자 밤 풀벌레 울음소리가 노랫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다.
희미한 달빛 아래 집 마당에는 없던 말뚝 두 개가 박혀 있었다. 그중 하나에는 17세 된 언니가 매어 있었고 다른 하나에는 어머니가 묶여 있었다. 내가 아줌마에게 업혀 들어서자 누군가 아줌마 팔을 총대로 쳤고 나는 나동그라졌다. 내 심장이 아줌마 등에서 '쿵쾅쿵쾅' 소리를 내며 땅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인민군이 어린 나에게 총을 겨누며 고함을 쳤다. "늬이 아비 어디 갔는지 바로 대지 않으면 다 죽여 버린다." 나는 그때부터 심장병을 앓게 됐다. 얼마나 무섭고 떨었는지…. 어느새 우리집은 반동분자로 낙인 찍혔다. 아버지께서 면장을 지내셨고 지주였고 어머니는 예수쟁이였기 때문에 미국 앞잡이라고 몰아세웠다. 겉으로 보면 우리는 부르주아였으니 숙청 대상 1호였던 것이다.
인민군들이 방들을 뒤지고 모시를 쌓아 둔 헛간, 이곳저곳을 칼로 쑤셔댔고 천장에 대고 총을 '빵빵' 쏘았다. 어린 내가 본 이 난장판을 그 무엇으로 말하겠는가. 그때의 공산당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내 일생을 지배했다. 나는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저 마귀들을 하나님 무찔러 주세요. 엄마를 살려 주세요. 하나님 제발…"이라며 되뇌었다.
일단 그날 밤 무리들은 철수했다. 한밤중에 우리집 머슴이 왔다. 오늘 밤 탈출하지 않으면 내일 공회당으로 끌려나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온 가족을 공개 처형한다는 정보를 알려줬다. 우리는 서둘렀다. 겨우 몇 가지 옷과 식량 조금, 이부자리를 안고 혹시나 개가 짖을까봐 동네 길로 못 가고 산을 돌아 동구밖으로 나갔다. 거기에 달구지를 매어 놓고 머슴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식구들은 야반도주를 하는 데 성공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것이다. 이미 다른 머슴들은 다 빨갱이가 되어 곡괭이, 삽을 들고 지주들을 쳐 죽였다는 소문도 자자했다. 이 난리통에도 우리 집 머슴은 가족을 도왔고 다 같이 살 수 있었다. 모두 하나님 은혜와 사랑으로 어머니가 베푸신 인정 때문이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시 7: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
***[역경의 열매] 김소엽 (3) 여름밤 멱 감은 후 꼭 안고 기도해주시던 어머니…
한국전쟁 이후 우리 가족은 대전으로 이주했다. 나는 삼성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어머니는 우리가 은행동에 거주하자 가까이에 있는 선화감리교회를 나가셨다. 그 당시에는 종을 직접 쳐서 울리기 때문에 새벽기도 종소리가 언제나 가까이 들릴 정도로 교회는 집에서 가까웠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불행이 찾아왔다. 어머니께서는 6·25전쟁 때 당한 고문 등의 후유증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 세상을 떠나셨다. 청천병력 같은 일이었다. 풀이 죽어 어깨가 처지고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엄마를 그리워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중 학교와 주일학교에서 '어머니날'에 백일장을 열었는데, 글제가 똑같이 '어머니'였다.
나는 어머니와 강가에서의 추억을 그대로 옮겨 실었다. 유년시절 어머니와 나는 집 앞에 있는 강가에 나가서 멱을 감았다. 여름 밤 별이 쏟아지는 강가에서 멱을 감고 나온 나는 엄마 품에 안겼다. 엄마 살내음은 언제나 치자향 같았다. 엄마는 나를 안고 기도를 해주셨다. 눈을 떴을 때엔 별들이 길게 선을 그으며 떨어지고 있었다. 주먹만큼 큰 별들이 머리 위로 쏟아질 듯 가까이 떠서 반짝이고 있는 게 두렵기까지 했다. 나는 엄마에게 왜 별들이 저렇게 떨어지느냐고 물었다.
"이 세상 살면서 하나님 말씀에 준행하고 착하게 잘 살면, 죽고 난 후에도 밝은 별이 된단다. 하지만 이 세상 살면서 남을 괴롭히고 거짓말하고 하나님 말씀 잘 듣지 않으면, 나중에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을 때 '임마 넌 이곳에 올 자격이 없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발길로 차서 우주 밖으로 떨어뜨리면 저렇게 별똥별이 되어 떨어진단다."
어머니는 하나님 말씀을 동화로 써서 내게 들려주셨다. 중학교에 가서 별에도 수명이 있어 수명을 다하고 난 후 운석이 되어 우주 밖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배웠음에도 내게 영원한 진실은 어머니께서 말씀으로 들려주신 그 동화가 진리로 남아 지금도 나의 인생길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면서 비틀거리고 넘어질 때가 왜 없겠는가. 그럴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워주고 나의 길을 비춰주셨던 어머니의 등불이 지금도 나를 인도하고 계신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이셨던 채홍구 선생님은 나를 위로해주고 싶으셨는지 그 글을 조회시간에 낭독하게 했다. 그때만큼 떨어 본 적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처음으로 나의 존재감을 인식했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담임선생님이 던진 한 마디 칭찬, "앞으로 훌륭한 시인이 될 거야." 나는 이 말을 붙잡고 일어섰다. 또 시인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담임선생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훌륭한 시인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때 학교에서 장원한 시는 발표된 적이 있어서 주일학교에서 장원했던 시를 적어본다.
멱을 감고 나와 치자향내 나는
엄마 품에 안기면
내 머리위에 손을 얹고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어머니
하나님 말씀 잘 듣는 착한 아이
밝은 별 되어 반짝이네
거짓말하는 나쁜 아이
별똥별 되어 떨어지네
하늘에는 별들이 꿈벅꿈벅
땅에는 반딧불이 반짝반짝
***[역경의 열매] 김소엽 (4) 시인 꿈 이루려 사범학교 마치고 다시 대학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교회를 더 열심히 다녔다.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서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조창석 목사님이 선화감리교회(현 하늘문교회)에 시무하셨다. 나는 주일학교에서 성탄절을 맞아 '고요한 밤 거룩한 밤'에 맞춰 무용을 하고 연극도 하면서 외로움을 달랬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았다. 주님은 내게 더 없는 요람이요 평강의 품이었다. 하나님 때문에 나는 어머니를 잃고도 학업에 정진하며 모범생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권유로 대전사범학교 전기 시험을 보았다. 사실 떨어지기를 바랐으나 수석으로 합격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사범학교를 다니게 됐다. 그곳에서 시의 첫 스승인 한성기 선생님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사범학교에서 3년간의 교육은 나의 기본적인 인간의 틀을 세우는 좋은 전인교육이었다. 그러나 3학년 여름방학이 되자 초조해졌다. 일반 고교에서는 대학 입시 전형을 위한 특별교육에 들어갔지만 사범학교에서는 입시 과목인 영어, 수학보다는 교육사 교육철학 아동심리 예체능 과목 위주로 교과과정이 짜여 있었다.
여름방학의 어느 날, 나의 정체성과 장래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싸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중 새벽 교회 종소리가 울려 퍼졌고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교회로 향했다. 강대상 앞에 꿇어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의 어깨에 크고 부드러운 손이 얹혀지는 것을 느꼈다. 눈을 떠보니 조 목사님이셨다. 목사님은 이유를 물으셨다.
"훌륭한 시인이 되기 위해서 대학에 진학하고 싶습니다." 목사님은 내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셨다. 그리고 이사야 41장 10절의 말씀으로 용기를 더해주셨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나는 확신을 갖고 인동에 있는 영어학원으로 달려가서 영어구문론반에 등록했다. 구문론은 영어 문법을 알기 쉽게 도식으로 풀어 두 달 만에 영문법을 완성하는 속성반이다. 이를 반복해서 2번을 하고 한 번 더 복습한 게 내 영어 실력의 전부였다. 이 실력으로 나는 고려대 무시험 전형에 합격한 것을 뒤로 하고 이대 영어영문학과에 도전했다.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의 말씀대로 내가 훌륭한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대학에 가서 좀 더 많이 배워야 했다. 나는 국문과가 아닌 영문과를 택했다. 외국문학을 많이 알고 배워야 국문학의 지경을 넓혀 좋은 시를 쓸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당시 이화여대 문리대 영어영문학과는 들어가기 어려웠다. 지방 고등학교 출신들은 각 도나 시에서 한 명쯤 붙을 정도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입시제도가 바뀐 것이다. 지금까지 영어·수학·국어·국사·과학 5과목 주관식 출제가 그 해에 전 과목 객관식 출제로 바뀌었다. 사범학교 교육을 받은 나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나는 지금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순전히 내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시기 위해 입시제도까지 바꿔 이화여대에 들어가게 하셨음을….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시 116:1∼2)
***[역경의 열매] 김소엽 (5) "하나님 도와주세요" 간절한 기도에 대여장학금이
우리 집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지만 첫 학기 등록금만 대주면 나머지는 장학금으로 해결하겠다고 아버지와 약속을 하고 대학에 입학했다. 사실 아버지는 대학에 보내지 말라는 새엄마와 밤새 싸우셨고 우연히 내가 그 소리를 들었다. 거기에 대고 등록금을 요구할 수 없었다. 당장 2학년부터는 장학금을 받아야 했다. 나는 과 사무실을 여러 번 찾아가 장학금을 신청했지만, 나처럼 장학금을 받아야 하는 어려운 학생들이 많아 번번이 떨어졌다.
등록기간이 마무리되고 추가 등록을 한 주 앞둔 상태였다. 대강당 큰 채플홀에 엎드려 엉엉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어렵게 들어온 학교를 중도에 포기할 순 없었다. 이석곤 과장 선생님을 찾아갔다. 과 사무실로 가면 조교 언니가 들여보내주지 않기 때문에 직접 동대문에 위치한 선생님 댁으로 갔다. 선생님은 나를 보자 깜짝 놀라셨다.
"선생님, 저는 이번에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짐을 싸들고 고향으로 가야 합니다. 도와주세요." 그리곤 무조건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선생님은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위해 기도해주셨다. "하나님, 이 학생이 대학을 무사히 졸업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고 우리 대학을 졸업한 후에 하나님이 쓰시는 귀한 자녀가 되게 축복하소서."
그렇게 기도를 마친 선생님은 한참을 눈을 감고 계시더니 말씀하셨다. "그래, 너는 무언가 될 놈 같다. 정 장학금이 안 되면 내가 사재라도 털어서 이번 등록금을 대줄 테니 걱정 말거라." "할렐루야!" 순간 그렇게 외쳤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다. 나는 하나님의 기적을 다시금 체험했다.
큰 산을 넘은 것처럼 감사했다. 그런데 그 다음주 게시판에 방이 붙기를, 문교부에서 대여장학생을 뽑는다는 것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공부를 하고 싶어도 등록금이 없어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내린 특례법이었다. 과장선생님은 당연히 나를 추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사재를 대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문리대 특대상 장학금이 5000원이었고 등록금은 한 학기 8700원이었는데 대여장학금은 1만5000원이었으니 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문리대에서 단 2명의 대여장학생 중 내가 들어간 것은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렇게 해서 나는 4학년 졸업 때까지 1년에 3만원씩 장학금을 받으며 학비를 내고도 돈이 남아 책을 샀고 생활비까지 보탤 수 있었다.
나는 기도하면 이뤄주시는 하나님을 더욱 사모하게 됐다. 하나님은 입시제도까지 바꿔주셔서 대학에 입학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고, 등록금이 없는 내게 장학금을 주셔서 무난히 대학을 졸업할 수 있게 해주셨다. 졸업 1년 후 이 장학제도는 폐지됐고 1년 후부터 한 달에 500원씩 환수하겠다는 것도 다 탕감해 주었으니 이 제도야말로 나를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예비하신 것으로밖엔 생각할 수 없다.
나는 국가에 빚을 진 사람이다. 나아가 하나님께 단단히 빚잔 자 되었으니 그 은혜를 갚으며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나는 나라와 하나님께 빚진 자로서 조국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갈 의무를 가진 사람이 됐다. 앞으로도 이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면서 '빚'을 갚도록 할 것이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
***[역경의 열매] 김소엽 (6) 도스토옙스키 탐독 후 "나는 죄인입니다" 고백
당시 이화여대 영문과 학생들은 경기·이화여고 출신이 주류를 이뤘다.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은 거기에 끼지 못해 소외되기 십상이었다. 나는 오히려 초동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지방 출신의 설움을 달랬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닐 때는 교회 성가대로 봉사했다. 교회는 언제나 따뜻했고 어머니 품 같았다.
초동교회 성가대는 성탄절이면 성도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성가를 불렀고 우리는 성도들로부터 감사 선물을 받았다. 한번은 장로님이 새벽에 성가대원 모두를 집으로 불러 떡국을 끓여주기도 했다. 2층 넓은 마룻방에 꾸며진 성탄트리에 반짝이는 전구들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지금도 그날의 정겨움이 눈에 선하다. 그때 성가대에서 함께 봉사했던 단짝 김남순은 파키스탄에 선교사로 갈 결심을 하고 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파키스탄에 내전이 발생해 비자가 나오지 않는 바람에 남순이는 선교사의 꿈을 접어야 했다. 사실 친구가 먼저 가서 자리를 잡은 후 나를 부른다고 했는데, 그 모든 꿈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한편으론 유학준비도 하고 있었다. 대전 사범학교를 다닐 때 나는 적십자 대표를 맡았었다. 적십자 사무실 옆에 피바디 오피스가 있었다. 당시 피바디 사절단이 교육지원 프로그램을 갖고 한국에 나와 있었는데, 사범학교를 우선 지원하게 되어 우리학교에 나와 있었다. 나는 그곳을 통해 미국 유학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름방학에 사무실을 찾았을 때는 이미 담당자가 다른 곳으로 가버린 뒤였고 그 연락처를 아는 교장 선생님마저 전근을 가는 바람에 소식이 끊겼다.
앞이 꽉 막힌 것 같은 좌절감을 느꼈다. '유학을 가는 게 나의 길이 아닌가. 그럼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그때 문득 깨달았다. 내게는 시인의 꿈이 있지 않은가. 그때부터 학교 도서관 2층 잡지실에 자리를 잡고 현대문학과 기독교사상을 매월 통독하며 브루너 몰트만 니버 등 여러 신학자들을 만났다. 또 시인이 되려면 세계문학전집은 통독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정음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일은 나 스스로에게 지우는 의무였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당시 이해하기에 너무 난해한 부분이 많았다. 스토리를 따라가며 읽다보면 글이 난삽해 무슨 말인지 몰라 읽다가 팽개쳐 버렸다.
그 책을 대학을 졸업하고 10년 후 대학원에 진학해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통해 나는 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진짜 기독교 신자인 줄 알았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고 세례교인이었으며 한 번도 교회에 빠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모두 죄인이었어도 나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언제나 의로웠고 착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늘 칭찬 속에 자랐고 모범생이었으니 내 속의 교만이 나를 덮고 있었던 것조차 몰랐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고 작중 인물들의 죄성을 통해 비로소 나의 죄를 보기 시작했다. 밤새워 그 작품을 읽고 또 읽었다. 책이 눈물에 젖도록 심취하며 은혜를 받았다. 러시아적 기질의 첫째 드미트리의 하나님을 모르는 자기 의로움의 선, 둘째 이반의 반신의 합리적 이성주의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죄, 셋째 알료샤의 수도원에 갇힌 믿음이 나의 죄로 통합되기 시작했다. 내가 얼마나 강퍅한 사람이었던가. 그렇게 죄인 된 나를 깨닫는 데 30년이 넘게 걸렸다. 비로소 내가 기독교에 입문한 것이다. 나의 논문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나타난 죄와 구원의 성서적 이해'였다. 그러나 나의 학위는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증서였다.
***[역경의 열매] 김소엽 (7) 연신원 2년의 깨달음 "문학작품도 큰 복음 도구"
다른 사람들은 산기도를 가거나 부흥집회를 통해 죄인임을 고백한다. 또 새벽기도회나 목사님 설교를 통해 죄인임을 깨닫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예수님이 나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 달리셨다는 이 간단명료한 사실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데 30년이 넘게 걸렸다.
내가 죄인인 것을 모르니 통회 자복하는 회개가 없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어도 수천번 넘게 들었을 내용이 한번도 가슴을 때리지 않았던 것은 나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참 다채롭고 오묘하다. 목사님의 설교도, 부흥집회도 아닌 책을 통해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렇게 복음의 첫 단계를 밟았으니 그분의 은혜가 어찌 오묘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문학작품이 훌륭한 기독교 교육의 자료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도스토옙스키의 전 작품을 통독하며 그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와서야 비로소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다는 고백을 그가 쓴 일기를 통해 알게 됐다. 그 책이 '제2의 바이블'로 불릴 만큼 유럽의 지성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니체 바흐 프로이드 루소 바르트 등 문학, 음악, 신학, 심리학, 교육, 철학 할 것 없이 각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19세기의 거장을 만나게 됐다.
그 당시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는 뜨거운 지성의 열정이 넘쳐나는 은준관 박사와 갓 미국에서 학위를 마치고 돌아온 김중기 박사, 독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김균진 박사 등이 계셨다. 또 대학원장 문상희 목사님의 열정으로 삐걱대는 목조 대학원 건물은 온통 다 타버릴 것 같았다. 대학원생들은 그런 스승님을 모시고 1980년대 데모의 주동이 됐던 연세대의 교정에서 최루탄을 마시면서 공부했다. 특히 대통령의 시해사건, 전두환 대통령의 취임과 군사정권에 항쟁하는 학생 데모의 소용돌이 속에서 학생들이 유치장에 갇히면 문 목사님은 구국지사처럼 찾아가 학생을 구해오기 일쑤였고 대학원생들은 목조건물 채플에 모여 눈물을 흘리며 나라를 위해 기도하곤 했다.
그때의 순수한 열정과 지성으로 나라를 생각하며 진정 크리스천으로서 할 일이 무엇인가를 놓고 고민했다. 본 회퍼를 거론하며 상황윤리를 논하기도 했다. 우리가 열띤 토론을 했던 연신원 건물이 그 후 허물어지고 지금은 새 건물이 들어섰지만 연신원 본관 건물에는 우리 선배들의 눈물의 기도가 베어 있던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이어서 건물이 허물어진 것이 여간 섭섭한 일이 아니다.
나는 윤동주의 동상 앞을 돌아 연신원 건물을 들락이며 2년 동안 열정을 태워 공부했다. 이 시기가 신앙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너무나 좋은 시기였다. 사실 철학성과 종교성을 더해야 좋은 시를 쓸 수 있겠다는 생각에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던 것이다. 그러나 의도와는 다르게 하나님께서는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만나게 해주셨고, 그 작품을 통해 내가 죄임임을 깨닫게 해주셨으며, 나로 하여금 문학작품이 얼마나 큰 복음의 도구가 되는지를 알게 해주셨다. 또 가진 달란트를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만이 사명임을 알게 해주셨다.
이로 인해 나의 후반부 인생은 이와 궤를 같이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계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인도해 주셨다. 윤동주의 서시를 좋아했다. 참으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삶이되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런 주옥같은 시를 남길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김소엽 (8) 장미꽃 만발한 6월, 교정에서 만난 '나의 사랑'
사범학교를 나온 나는 대학에서 교직과목을 택해 졸업 때는 2급 정교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리고 재단이 영락교회인 보성여자중·고교에 영어교사로 부임했다. 미션스쿨이기 때문에 매일 아침 교무회의는 예배로 시작했다. 당시 김정순 교장선생은 영락교회 장로로 아주 멋쟁이셨다.
내가 부임해서 첫 월급을 타기 얼마 전 아버지께서 세상을 뜨셨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막내 딸 시집가는 것도 못보고 저 세상으로 가시다니…. 무엇보다도 첫 월급을 아버지 손에 쥐어 드릴 기회를 잃은 아쉬움이 월급을 탈 때마다 두고두고 내 가슴을 아리게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생활지도주임으로 계셨던 김영숙 선생님(후에 보성여중 교장이 되심)은 "결혼을 하면 정말 아름다운 기독교 가정을 이룰 수 있을 텐데…"라며 마치 좋은 사람을 소개해주실 것 같으면서도 뜸을 들이시고 그렇게 1년을 보냈다. 위로 언니들은 모두 결혼했고 부모님도 안 계신 나를 주변에서는 예쁘게 보았는지 선 자리가 많았다. 하지만 인연은 다른 데 있었다.
장미꽃이 교정에 만발한 어느 해 6월, 강의를 마치고 2층 계단을 내려오는데 누군가 나를 응시하는 것 같아 현관 쪽을 바라보았다. 영화배우 그레고리 펙보다 더 잘 생긴 육사 장교가 멋진 사관 장교복을 입고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마치 박제가 된 기분으로 그 자리에 섰다. 순간 그 사람이 김영숙 선생님이 소개한 분이라는 걸 직감했다. 귀까지 빨개진 얼굴을 한 채 교무실로 뛰어들어 왔다. '콩닥콩닥'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일주일 뒤 굵은 바리톤의 음성이 나를 찾고 있었다. 그는 '골든 트레저리(Golden Treasury)'라는 영시집이 필요한데 빌려줄 수 있냐고 물었다. 안 될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 책을 들고 종로서적 옆 양지다방으로 날아갔다. 그의 서글서글한 눈매는 바다처럼 깊고 그윽한 사랑을 담고 있었다. 그는 이것 저것을 물었는데 주로 교회생활에 관한 것들이었다.
"교회 다니십니까? 어느 교회를 다니십니까?" "교회는 언제부터 다녔습니까?" "중생의 경험이 있습니까? 언제 그런 경험을 했습니까?" "부모님도 교회에 다니십니까? 직분은 무엇입니까?"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을 어떤 것입니까?"
쏟아지는 질문에 유치원생처럼 또박또박 대답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은근히 화도 났지만, 그 청년이 산처럼 흔들림 없는 믿음과 바다처럼 깊은 사랑을 간직한 것처럼 느껴져 나의 가슴은 계속 설레고 있었다. 이렇게 우리는 3년쯤 만났고 1972년 6월 10일 조종남 박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충무 바닷가의 충무호텔로 신혼여행을 떠난 그날 밤, 남편은 편지 한 통을 주었다. 사랑을 고백한 내용이려니 하고 편지를 펼쳤는데, 그런 내용은 하나도 없고 성경구절만 가득 적혀 있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 31:3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벧전 3:1∼7) 남편 양영재(전 연세대 영문과 교수) 장로는 그야말로 예수님에게 사로잡힌 '믿음의 사람'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소엽 (9) 시아버지 양석봉 목사, 세계 최초로 경목제도 입안
'당신의 사랑의 포로가 되었다'는 직접적인 고백을 기대했던 나는 성구만 가득한 그의 편지에 실망했다. 화가 난 나를 보듬으며 그는 말했다. "언젠가는 당신에게 귀한 결혼 선물이 되길 바라오."
신혼여행을 마치고 시댁에 들렀을 때, 시어머니는 "영재는 내가 예수님 다음으로 믿는 아들이니 네가 남편 뜻을 잘 받들어 본이 되는 믿음의 가정을 이루어라"고 말씀하셨다. 시아버님은 가훈에 대해 설명하셨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는 말씀을 잘 지켜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라." 그 가훈 때문일까. 아버님은 유쾌할 뿐 아니라 유머까지 넘치셔서 언제나 집안을 화목하게 이끄셨다.
시아버지 양석봉 목사님은 강경상고를 거쳐 일제시대 때 한국인으로는 드물게 은행에 입사하신 분이다. 은행 월급이 많아 아버님은 사는 것 역시 넉넉했다. 그러나 어린시절 김익두 목사님의 부흥설교를 듣고 은혜받아 아버님은 목회자의 꿈을 꾸셨다. 은행원으로 혼자 호의호식하며 사는 게 양심에 가책이 됐고 결국 그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뒤늦게 가장의 몸으로 1931년 서울신대에 입학하셨다. 전도단에 들어가 전국을 누비며 정남수 김익두 이성봉 목사님 등과 함께 장막전도를 펼쳤다. 평양 원산 신의주를 넘어 만주 용정의 국자가까지 가서 전도를 했다.
나팔, 북으로 사람들을 모아놓고 아버님은 트럼펫도 부셨다. 부흥집회를 통해 결신자가 많이 나오면 그곳에 교회를 세웠다. 31년 만주에서부터 전남 진도 섬에 이르기까지 10여년간 아버님이 세운 개척교회가 30여곳에 이른다. 34년 문준경 전도사(6·25때 순교)와 함께 전남 신안군 임자도에 세운 임자교회도 그중 한 곳이다. 35년 서울신대 졸업 후 아버님은 꺼져가는 삼례교회로 파송받아 교회를 크게 부흥·발전시킨 후 다른 목사님에게 인계하고 다시 전주교회를 개척했다. 이후 평택교회 백암교회, 서울 신수동교회에서 시무하셨다. 아버님은 일제 말기, 탄압에 의해 교회는 폐쇄되고 잠시 수감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복음전파를 멈추지 않았다.
6·25 때는 교회 마루를 뜯어내고 지하실을 파서 3개월간 숨어 지내기도 했다. 그때 김유연 박형규 목사를 만나 잠깐 동안 함께 숨어 지내기도 했지만 그 두 분은 북으로 끌려간 후 소식이 없다. 9·28 수복 때는 한 인민군 장교가 교회로 들어와 아버님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그는 자신도 황해도의 한 교회 신자였다고 했다. 아버님은 그를 숨겨주고 함께 기도를 했는데, 동네사람의 신고로 들통이 났다. 아버님은 당시 서툰 영어로 미군을 설득해 총살을 면하도록 했고 그 인민군 장교는 거제도의 포로수용소로 보내졌다.
아버님은 초대 군목으로 활동하다 4대 군종감이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복음을 전하셨다. 포로들 중 하나님을 믿고 후에 목회자가 된 사람이 104명이나 됐는데, 그중 한 명이 바로 아버님이 지하실에 숨겨줬던 사람이다. 그가 후에 부여의 홍산교회에서 목회했던 이일수 목사다. 아버님은 당시를 회상하며 "정말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였다"고 고백했다.
무엇보다 아버님의 큰 업적은 군종감 시절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해 국가 행사 때 기도로 시작하게 했다는 것이다. 또 육군사관학교에 교회를 세웠고, 군목 대령 예편 후에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경목제도를 입안토록 했다. 90세까지 시골 구석구석을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전도한 시아버지 양석봉 목사님은 99년 92세의 일기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죽도록 충성하고 봉사하셨다.
***[역경의 열매] 김소엽 (10) "한편의 詩를 남기더라도 영혼 울릴 시를 쓰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기 때문에 훌륭한 시부모님을 모시게 된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알고 감사했다. 더욱이 예수님 닮기를 힘쓰는 남편을 짝으로 주신 시부모님께 고마운 마음을 가졌다. 남편은 사소한 생활에서부터 예수님 사랑을 실천해 가는 사람이었다. 함께 시장에 가면 꼭 장을 본 모든 물건을 들어주는 짐꾼이었고 집에서는 자상한 남편이었다. 이를테면 밥 짓는 내 곁에서 마늘을 깐다든지 파를 다듬으며 하루 지낸 일을 이야기했다. 무엇보다도 남편은 학교에 출근하면 꼭 성경말씀을 하루 양식으로 삼았다. 말씀을 묵상한 뒤 집으로 전화했다. "여보 성경 몇 장 몇 절 펼쳐 봐. 오늘 주신 양식이야"라며 함께 말씀을 나눴다.
그는 칸트보다 정확하게 오후 6시면 퇴근해 저녁식사를 한 후 어김없이 가정예배를 드렸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평생 야행성으로 살아온 나와 엇갈리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그는 새벽예배를 거르지 않았고 하루를 기도로 시작했다. 여행 필수품으로 성경을 챙기는 그는 하나님 제일주의의 절대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다. 다정다감한 그는 학교에서 좋은 곳에 가서 회식을 하면 그 주일이 다 가기 전 나를 불러내 함께 점심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가장 예쁜 모습으로 차려입고 가서 함께 점심을 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중 딸 서윤이가 태어났다. 남부러울 게 없는 잉꼬부부에다 딸까지 주셔서 너무 행복했다.
그러나 그레고리 펙보다 잘생긴 그의 외모는 5년이 지나니 볼품이 없어지고 전임강사 월급의 박봉을 쪼개 쓰다보니 나는 친구들과 비교하며 불평하기 시작했다, 남편의 처신을 보니 매사 약간은 모자란 듯 보였다. 말석이라 직장에서 시간표 편성을 담당하던 그는 다른 교수님들에게 좋은 시간을 다 빼어 주고, 자신은 남는 시간을 '땜빵'하듯 월요일 첫 타임이나 토요일 시간을 맡았다. 그러다보니 주말에 대한 기대도 없었다.
결혼 전 찍은 사진만 보더라도 그는 키가 커서 뒷줄에 서는 것이 이해는 됐지만 매일 앞사람에게 얼굴이 가려 제대로 된 사진이 거의 없었다. 하도 답답해 "당신은 사진 하나도 제대로 찍은 게 없다"고 타박했다. 남편은 "그게 어떻소? 나는 좋은데…"라며 반응했다. 정색을 하며 "그 말이 정말이냐"고 따지듯 묻는 내게 남편은 "사진을 뭐 나보려고 찍소? 봐요. 내 친구가 내 앞에서 얼마나 버젓하게 잘 나왔나"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참 어의 없는 남자였다.
축구를 볼 때도 우리는 어긋났다. 골이 들어간 순간 신나서 박수를 치는 나와 달리 남편은 슛을 하도록 볼을 몰아 준 어시스트 플레이어에게 큰 박수를 보냈다. 좌우간 어긋난다 싶으니까 매사가 다 나와 달라 보였다. 그런 그에게 나의 일생을 맡긴 실망스러움에 한동안 우울증에 빠졌다.
나에게는 평범한 아낙이 아닌 훌륭한 시인이 되려는 꿈이 있지 않았던가. 어느 날 정신이 버쩍 들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일생을 달려왔는데 내가 저 사람에게 빠져 여기까지 왔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실 꿈을 접은 게 아니었다. 대학 졸업 후 대가로 불리는 미당 서정주, 박두진, 구상 선생님을 찾아다니며 시를 배우지 않았던가. 등단을 하자. 나는 드디어 78년 한국문학을 통해서 등단했다. "여보 한 편의 시를 남겨도 좋으니 영혼을 울릴 만한 시를 남기시오." 시의 깃발을 휘날리는 나에게 남편이 한 말이다.
***[역경의 열매] 김소엽 (11) 예수닮은 남편 좇아 내가 변화되니 세상 행복이…
결혼하고 5년은 꿈처럼 행복했다. 그러나 한 남자의 부인이요, 한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는 데 만족하지 못한 나는 자아실현을 위한 갈망과 영적 고갈상태로 혼란을 겪으며 불만에 휩싸였다. 이때 연세대 신학대학원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하면서 종교성과 철학성을 더해 좋은 시를 쓰고 훗날 교수가 되기로 다짐하며 그 힘든 시간을 극복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내가 죄인임을 알고 회개하니 세상이 달라보였다. 꽃들이 웃고 나무들이 춤을 추며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까지 좀 모자란 듯 보였던 남편이 참 근사해 보였다. 정말 괜찮은 사람이었다. 아니 유아적 신앙을 가진 내게, 또한 미성숙한 인격의 소유자인 내게 그는 너무 과분한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나의 연약함을 아시고 어쩌면 나에게 모자란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성숙된 인품과 깊은 신앙을 가진 그를 짝지어 주신 게 아닐까. 이 모든 게 하나님 은혜였다.
기적은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리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장님을 눈뜨게 하는 것만이 아니다. 내가 달라짐으로 세상을 180도 다르게 볼 수 있다는 바로 그 점이 기독교의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달라지자 평화가 찾아왔다. 방황은 사라지고 남편이 존경스러웠다. 남편의 말에 순종하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내 위주의 삶에서 비로소 남편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려하기 시작했고, 그의 권고에 따라 성경공부도 했다. 당시 신촌성결교회 홍성철 전도사님이 로마서를 가르쳤는데, 우리는 처음으로 로마서를 배우기 시작했다. 말씀이 꿀송이같이 느껴졌다. 정말 해 아래 의인은 하나도 없지만 하나님 은혜로 우리가 값없이 의롭다 칭함을 받고 의인의 반열에 서게 된 '이신칭의'의 장인 로마서를 공부하며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눈을 떠 갔다.
이렇게 내가 변화되니 남편과의 대화가 달라졌다. 단답형의 대화가 영적 대화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주일에 주신 말씀을 어떻게 하면 생활에 한 부분이라도 적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고,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닮아 갈 수 있을까를 의논했으며, 어떻게 하면 교회 중심의 생활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교회에서 30분을 넘지 않은 거리에 있고, 교회 성가대를 초청할 수 있을 정도의 넓은 마루가 있으며, 후에라도 시부모님을 모실 수 있는 평생 살 집을 마련했다.
이러는 동안 남편은 신촌성결교회 장로가 됐고 나는 집사 직분을 받았다. 학교에서는 학생들로부터 존경받는 교수요, 동료간에는 신뢰받는 교수였다. 교회에서는 남녀노소 누구나 예수님 닮은 그의 모습을 좋아했다. 이제 남편을 통해 하나님 뜻을 이루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이런 시점에서 남편은 미국 프린스턴대 교환교수로 가게 됐고 온 가족이 함께 떠났다. 당시 딸 서윤이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낯선 환경이었지만 6개월이 지나자 귀가 트이면서 제법 미국 환경에 빨리 적응해나갔다.
성실한 남편은 매일 대학 연구실로 출근했고 나는 프린스턴 신학교 기독교교육학과에 수강생으로 등록해 세 식구가 모두 학생 같은 분위기에 젖어 공부했다. 주일에는 대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마침 그곳에 나채운 목사님(후에 장신대 대학원장으로 은퇴)이 설교목사로 잠시 시무할 때였다. 우리는 성가대에 함께 봉사하며 참으로 신앙생활 자체를 즐기면서 지냈다. 그곳 장로님들도 모두 박사님들이었는데, 주일마다 돌아가며 우리 가족을 초청해줘 신앙공동체 속에서 아름다운 교제를 나눴다.
***[역경의 열매] 김소엽 (12) 미국서의 당찬 포부 "하나님 나라 한국을 알리자"
미국생활은 모든 것이 새롭고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나는 국제부인회에 들어가 한 주에 한 번씩 우리나라 문화를 소개했다. 앞서 일본인이 재패니스 팬케이크를 소개했는데 주변 반응이 시큰둥했다. 나는 불고기, 잡채, 빈대떡을 알렸다. 다들 맛있다며 국제 학생들에게 점심시간에 대접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한국인 교수 부인들과 밤새워 음식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저렴한 가격에 식사를 판매했다. 모두들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맛있다고 했다. 그렇게 음식을 만들어 판 수익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보태 어렵게 공부하는 한국 유학생들을 돕기도 했다.
또 서윤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5월 30일을 '한국의 날'로 정해 전교생에게 한국을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뉴욕의 대사관에 연락해 우리나라를 알릴 수 있는 영상 자료를 얻으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1980년대 초 세계인들이 보는 한국이란 6·25전쟁을 겪고 고아와 과부들이 많은 아주 못사는 나라였다. 그런데도 당시 한국을 홍보할 만한 영상물이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나는 자유민주주의를 주창하며 세워진 대한민국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자 빠르게 부흥·성장했음을 전했다. 특히 1900년대 초 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 몸소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준 헌신들이 바탕이 됐음을 고마워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대한민국을 축복해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우리 가족과 함께 했던 교수 부부들도 잊을 수 없다. 당시 프린스턴대 교환교수로 오신 분들은 우리 가족을 비롯해 시립대 안재영 교수 부부, 건국대 이주영 교수 부부, 동아대 성대동 교수 부부까지 네 가정이었다. 모두 독실한 크리스천들로 대학교회를 함께 다니며 즐겁게 신앙생활을 했다. 그곳에서 만난 나채운 목사님은 후에 장신대 교수가 되어 '광나루문학'을 창간했고 지금까지도 우정을 쌓아오고 있다. 나 목사님은 한국문인선교회의 지도 목사로 큰 울타리가 되어주신다.
한번은 이들 교수님 가정이 모두 모여 한겨울에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기 위해 '무모한 도전'에 나선 적이 있다. 스노타이어도 끼지 않은 채 우리들은 여행길에 올랐다. 그런데 중간에 폭설을 만난 게 아닌가. 곳곳에 사고 난 차량들이 보였다. 움직이는 차들이 거의 없었다. 쏟아지는 눈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폭설을 뚫고 눈 덮인 나이아가라 폭포를 끝내 보고야 말았다. 그리고 다시 밤새워 13시간을 운전해 프린스턴대로 돌아왔다. 이어 함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인도해 주심으로 여행을 무사히 마쳤음을.
돌이켜보면 이때가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결혼생활 중 '이 시간들이 없었으면 어땠을까'를 상상해 보면 더욱 그렇다.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남편과 단둘이 떠난 유럽여행 역시 잊을 수 없다. 셰익스피어 생가를 둘러보면서 스코틀랜드에서 가졌던 추억이 아련하다. 대문호의 생가 앞 잔디밭에서 펼쳐진 즉흥 콘서트는 우리 부부를 위해 만들어 놓은 공연 같았다. 노부부들이 손을 잡고 벤치나 잔디밭에 앉아서 공연을 감상했다. 남편은 나에게 아름다운 노부부들을 보면서 말했다.
"여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 아오? 백발의 노부부가 저렇게 손잡고 함께 사는 것이오. 우리도 그렇게 삽시다." 의미심장하게 내게 던진 그의 말. 그러나 사랑하는 내 남편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역경의 열매] 김소엽 (13) "하나님 하나님, 제 남편에게 과로사라니요?"
미국 교환교수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우리 가정은 그야말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남편은 학교에서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업무에 지쳐가고 있었다. '연세춘추' 주간을 맡았는데, 1980년대 초에는 연세대가 학생운동의 중심지였다. 밤새워 기사를 쓰고 인쇄가 다 끝날 때까지 지켜있지 않으면 순식간에 기사를 바꿔치기하는 바람에 대학신문이 나오는 날은 밤샘 작업을 해야 했다. 게다가 연세상담소 소장까지 맡아 남편은 밤늦게까지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강의 역시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책임감이 강한 남편은 어느 한 가지 일도 대충 넘길 수 없었기에 많이 힘들어했다.
결국 남편이 쓰러지고 말았다. 병원에서 온갖 검사를 하는 8일 동안은 피곤도 풀리고 아주 좋았다. 그는 퇴원을 재촉했다. 우리 부부는 하나님께서 잠시 쉴 틈을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며 병원 문을 나섰다. 그는 집에 돌아오자 나를 넌지시 바라보며 말했다.
"여보, 내가 당신에게 꼭 할 말이 있소." 그는 쑥스럽게 웃으면서 "내가 한 가지 잘한 일이 있소. 그게 뭔지 아오? 내가 당신하고 결혼한 거." 그러면서 하염없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이 사람이 새삼스럽게 무슨 말을 하는 건가'라며 넘겼다. 그러나 그 말을 하고 불과 사흘, 남편은 병원에서 준 간에 좋다는 알약을 아침, 저녁으로 13알씩 복용하면서부터 기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더니 사흘 만에 피를 쏟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우리나라 40대 과로사의 한 명에 남편이 들다니…. 그는 과로로 쓰러지고 2주 만에 손 쓸 겨를조차 없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하늘이 무너져내리고 땅이 꺼짐을 느꼈다.
"하나님, 이럴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살아 계시다면 이건 아닙니다. 당신이 진정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면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도저히 남편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전혀 죽음에 대한 준비도, 대비할 마음의 여유도 없이 졸지에 당한 일이라서 나는 정말 어안이 벙벙해 하나님께 항변만 했다. 이제까지 유년시절의 무조건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했고 청소년기에 나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을 찬양했으며 그 후 축복의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나는 얼토당토않게 불의를 자행하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었다. 이제 막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주님의 성실하고 충성스러운 종을 하나님의 일을 준비만 시켜놓고 하기도 전에 불러 가시는 처사란 있을 수 없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허공을 치면서 하나님께 항변했다. 이런 불의의 하나님을 나는 더 이상 믿을 수 없었다. 나는 보물을 강물에 빠뜨린 것도 같고 진흙탕에 빠뜨린 것도 같은 상실감과 허탈함에 싸여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오직 하나님께 버림 당한 기분이 되어 참담함이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이런 나에게 정진경 목사님이 찾아오셨다. 목사님은 "김 집사, 나도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어. 하나님께서 왜 양 장로를 그렇게 빨리 하늘나라로 불러 가셨는지 나도 모르겠어. 그러나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끝까지 믿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가 그 뜻을 알도록 간구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어?"라고 말씀하시면서 시편을 읽어볼 것을 권면했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하나님께 항변하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만 되뇌었다.
***[역경의 열매] 김소엽 (14) 남편 잃고 찾은 충무 바닷가서 주님은 '海心'을
하나님께 항거하며 반역하니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깨지고 어긋나게 됐다. 하나님과 어긋나 버리니 그 자리가 바로 지옥이었다. 살아 있는 것이 고통이고, 하늘을 보기도 땅을 딛기도 부끄러웠다. 그런데 하나님을 부인하니 앞으로 살아갈 날의 시간의 무게가 한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지옥에서는 시간의 무게를 느낀다는 걸 나는 그때 깨달았다. 그러니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나도 따라 죽고 싶었다.
가버린 남편을 두고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내 몸이 음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몸은 수척해져갔다. 결국 링거를 꽂고 생명을 이어갔다. 구역 식구들이 잣죽, 깨죽을 들고 왔지만 참담함에 먹을 수 없었다. 장로님, 권사님들이 위로차 찾아오면 정말 만나기 싫었다. 문도 열어주지 않았다. 어머니 같은 이옥희 전도사님도 여러 번 찾아오셨다. 기도도 안 나왔고 찬송도 부를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우리 신촌성결교회 교우들이 양영재 장로를 살려 달라고 릴레이 철야 기도를 했다고 한다. 더 큰 반항심이 생겼다. 그런 교우들의 기도조차 들어주지 않은 매정하신 하나님, 차라리 무익한 이 여종을 데려가시고 남편을 이 땅에 두어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많은 일을 이루시지, 어떻게 예고도 없이 그를 데려가셨단 말입니까. 하나님을 원망하고 또 원망하고 분노하고 있었다.
나는 어찌 할 바를 몰라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충무 바닷가 신혼여행지를 찾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마귀의 속삭임을 들었다. "바다에 빠져 죽으라." 출렁이는 파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파도가 수없이 일렁이며 밀려오고 밀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바다는 파도를 칠까'란 생각이 들었다. 육지에서 버리는 모든 오물, 폐수, 나의 때를 씻은 물 무엇이든 종국에는 바다로 흘러간다. 그러나 바다는 거부하지 않고 그 모두를 받아들인다. 그래서 바다인 거다. 만약 바다에 해심(海心)이란 게 있다면, 그 더러운 물이 흘러들어 왔을 때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그러나 그 오폐수를 받아들인 바다는 스스로 일렁이고 뒤섞여서 그 더러움을 삭히고 다시 그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 엄연한 진실 앞에서 경성함에 이르렀다.
하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소금, 소금이 되라고 하셨다. 나는 내 앞에 놓인 고난에 대해 화를 내고 거부하고 반항하고 있는데 바다는 묵묵히 그 고통을 인내하며 도리어 고통을 삭혀 소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나는 바다만도 못한 존재였다. 내 앞에 놓인 고난에 순종하며 그 고난을 소금으로 만들어내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여기에서 건져올린 시가 바로 '바다에 뜬 별'이다. 이 시는 복음성가로 많이 불리기도 했다.
부서져야 하리/ 더 많이/ 부서져야 하리
이생의 욕심이/ 하얗게/ 소금이 될 때까지//
무너져야 하리/ 더 많이/ 무너져야 하리
억만 번 부딪쳐/ 푸른 상처로/ 질펀히 드러눕기까지//
깨져야 하리/ 더 많이/ 깨지고 또 깨어져
자아와 교만과 아집이/ 물보라가 될 때까지//
씻겨야 하리/ 더 많이/ 씻기고 또 씻겨
제 몸 속살까지/ 하늘에/ 비춰야 하리//
그래서 비로소/ 고요해지리/슬픔도 괴롬도/ 씻기고 부서져/ 맑고 깊은/ 바다 되리
그 영혼의 바다에/ 맑고 고운/ 사랑의 별 하나/ 뜨게 하리
***[역경의 열매] 김소엽 (15) 초교 5학년 딸 "아빠의 못다한 삶 내가 이을게요"
'바다에 뜬 별'은 사실 목숨을 담보로 영감을 받아 쓴 시였다. 나의 이런 경험이 시로 탄생하기까지는 2년여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계속 나만 버림받았다는 느낌과 남편을 떠나보낸 아쉬움에 심한 슬픔과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 어느 날, 딸 서윤이가 학교에서 오더니 강하게 말했다. "엄마, 이젠 그만 슬퍼하세요. 제가 있잖아요. 제가 아빠 뒤를 이어서 교수가 될 테니 저를 미국에 유학보내주세요."
나는 깜작 놀랐다. 이제 겨우 초등학교 5학년인 딸이 그렇게 당돌하고 단호하게 말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린 나이지만 아빠를 잃고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는 엄마를 어떻게든 위로하고 소망을 안겨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내 머릿속에 전기가 확 켜지는 느낌이었다.
'그렇지. 나에게는 남편이 사랑의 열매로 남겨준 딸이 있지 않은가.' 비로소 든 생각이었다. '그동안 왜 내가 서윤이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을까.' 남편을 잃은 슬픔이 너무도 커서 아이조차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남편의 사랑에 빚진 자인 내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우리 딸을 신앙 안에서 잘 기르는 것이었다. 물론 아이를 기르시고 키우는 분은 하나님이 분명하지만 딸의 교육과 양육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첫째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어린 딸을 홀로 유학 보내는 것은 무리였다. 딸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공부를 하더라도 나중에 대학을 졸업하고 박사를 할 때 보내주겠다." 혹여 정체성에 혼란을 겪을까 염려됐다. 무엇보다 남편도 옆에 없는데 딸마저 미국으로 떠나보내면 내가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딸의 의지는 단호했고 도저히 그 뜻을 꺾을 수 없었다.
결국 딸은 고1 때 홀로 유학을 떠났다. 때마침 LA 근교에 있는 리버사이드에 큰시숙이 계셔서 그곳으로 보냈다. 그리고 나는 늘 하나님께 서윤이를 지켜달라고 기도했다. 그 시절에는 한시도 기도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다행히 서윤이는 좋은 목사님을 만나 신앙으로 무장된 믿음의 딸로 잘 성장했다. 어린 나이에 유학을 간 서윤이는 외롭고 힘들어 지칠 때마다 찬송과 기도를 하는 충실한 신앙생활로 모든 난관을 극복했다. 지금도 미국에 살고 있는 딸과 수없이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며 이런 시를 썼다.
딸에게-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어린 널 홀로 남겨두고
떠나오는 어미 심정은
공중에서
내려다보이는 저 구름바다
첩첩 구름밭을 헤치고
쏟아지는 눈물은 소나기 되어
아마도 태평양이 불었을 게야
눈두덩이 빨갛게 붓고
아린 심장 가슴 녹이며
공중에서 목놓아 부른 하나님은
아마도 더 가까이 계실 거라고 믿으며
열 시간 넘게 기도로 이별을 달랬지
내 인생은 수없는 이별 연습
너와의 인연이 얼마나 소중했으면
나중 진짜 이별 위해
이토록 아린 이별 연습을 하게 하시는 걸까
태평양을 오가며
슬픔과 희망으로 삶을 짜 올린
연민한 내 인생길에서
너는 언제나
아름다운 들꽃으로 피어나
나에게 위안과 안식이 되었지
***[역경의 열매] 김소엽 (16) 미망의 나를 깨운 시편… 내 문학 행로의 등대로
장미가 피는 6월에 그를 처음 만나 장미꽃밭에서 결혼을 하고 13년을 함께 살다가 무엇이 그리도 급한지 그는 장미가 다 지기 전에 서둘러 천국으로 가버렸다. 문리대 학교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동료 교수, 제자, 친인척 등 많은 사람이 참석해 마지막 가는 그의 길을 애도했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 찬양이 슬프고 아리게 연세대 교정에 울려퍼졌다.
한 달 후 학교에서 연구실을 정리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제 모든 인연이 끝난다는 허탈감에 더욱 마음이 애석했다. 5층 연구실 문을 열려고 남편이 남긴 열쇠 꾸러미를 보는데, 나와 서윤이가 매달려 웃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의 체취가 곳곳에 배어 있었다. 특히 책상 위에는 그가 마지막 펴놓고 읽었을 커다란 성경책이 보였다. 아침마다 학교에 오면 기도하고 성경을 펼쳐 읽었을 그를 연상하면서 말씀을 읽어보았다. 시편 102편, 103편이었다.
거기에는 이런 탄원 구절이 있었다.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시 102:1) "내 날이 연기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숯같이 탔음이니이다"(시 102:3) "그가 내 힘을 중도에 쇠약하게 하시며 내 날을 짧게 하셨도다 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주의 연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시 102:23∼24).
그런가 하면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시 103:15∼17)란 구절도 있었다.
남편은 마치 자신의 영혼은 하나님께 갈 것을 미리 알고 이런 구절을 읽은 것인가. 나는 혼란스러웠다.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우리는 흔히 말하며 호칭하기를 주저하지 않지만 정말로 그런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가. 그의 인자하심을 끝까지 믿고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다면 그가 하신 일에 나는 순복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런 하나님께 반항하며 저항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정진경 목사님께서 말씀 밖에는 위로 받을 곳이 없으니 그래도 말씀으로 치유받아야 한다면서 시편 읽기를 간곡히 권하셨던 생각이 났다. 나는 남편이 마지막 읽었을 시편을 읽고 또 읽으며 나도 모를 이상한 영감이 내 곁에 다가옴을 느꼈다. 다윗의 탄원과 탄식과 그의 인간적인 부르짖음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여 읽고 또 읽었다.
그러던 중 가슴에 꽂히는 구절을 만났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4). 내가 무엇이관대 신촌교회 성도들이 나를 위해 잣죽을 쑤어 오고 내가 무엇이관대 믿음의 친구 이건숙 사모, 나연숙 권사가 나를 위해 울어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도해 주는 것일까. 신촌교회 어머니 같으신 이옥희 전도사님의 기도가 비로소 메아리치며 내 귀에 들려왔다. 그리고 서서히 성경 구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전율한 구절은 시편 22편에 와서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 22:1). 이 구절은 내가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허공을 치며 수천번도 더 외쳤던 구절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소엽 (17) 남편 떠난 지 100일, 그의 무덤 위로 쌍무지개가
나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꺼져가는 몸을 이끌고 벽제에 있는 남편 묘소를 찾았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아무리 통곡을 해도 그 사람은 다시 살아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마치 다시 돌아올 것만 같고 죽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나님을 원망하다 못해 돌이킬 수 없는 그의 죽음이 의사의 잘못인 것도 같고, 나의 잘못인 것도 같아 죄책감을 씻어 낼 수 없었다.
사람의 몸속 어디에 그렇게도 많은 눈물이 숨어 있을까.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운전을 하면서도 줄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밤에는 앞차의 브레이크 등이나 마주 오는 차의 불빛이 눈물에 어려 운전이 어려웠고 내 눈은 짓물렀다.
그가 가고 난 후 100일이 된 어느 가을 날, 큰 조카 세영, 딸 서윤이와 함께 산소를 찾았다. 방금 지나간 소나기로 산소는 젖어 있었고 내가 심어 놓은 장미꽃이 진 자리에 코스모스가 피어 슬프게 흔들리고 있었다. 예배를 마치고 뒤돌아서 맞은편 산을 보았을 때 우리를 중심으로 쌍무지개가 높이 떠 있었다.
이게 웬 일인가. 마치 하나님께서 나를 위로해 주시려고 징표를 주신 것 같았다. 홍수 이후 '다시는 너희를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고 징표를 주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다시는 슬픔을 주지 않겠다'는 징표를 주신 것 같았다. 무엇인지 모를 하늘의 소망을 주신 것 같아 큰 위로가 됐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그가 피와 땀을 다 쏟으시고 난 후 육체의 고통을 참다못해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부르짖은 그 대목이 바로 시편 22편에 있었다. 그간 내가 부르짖은 그 대목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외쳤던 것이다. 나는 비로소 깊은 묵상에 들어갔다. 그 외아들의 절규를 들었을 때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마음이 찢어지게 아팠을까.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겪었을 아픔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아들이 피와 땀을 다 흘리고 완전히 순명하시기까지 그 몇 시간의 고통은 억겁의 세월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못하실 일이 없는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그 외아들을 희롱하는 로마 병정과 바리새인들 앞에서 보란 듯이 예수님을 살릴 수도 있었는데, 왜 그리 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셨을까. '왜, 왜입니까?'라고 나는 외쳤다.
"우리 신촌교회 성도들과 신앙의 동지들이 남편을 살려 달라고 기도했을 때 왜 당신은 침묵하셨습니까. 아프리카의 아무 죄 없는 어린이들이 하루에도 수십명씩 굶어서 죽어나가고 있는데 당신은 뭐하십니까. 의인이 고난 받고 피 흘리는 것을 당신은 왜 기뻐하십니까. 왜 당신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당신의 신실한 종을 준비만 시켜놓고 그렇게 빨리 데려가셨습니까. 도대체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
나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이 되고 있었다. 그 심문관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 하고 있었다. 이런 반항을 가르고 조용히 찾아오신 침묵의 하나님은 바로 우주적 아픔의 고통을 감내하시는 하나님으로 내게 오셨다. 아들의 마지막 절규에도 끝까지 침묵하신 하나님, 침묵 속에 들어 있는 엄청난 하나님 사랑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외아들을 산제물로 바침으로써 우리에게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 위에서 증거하게 하신 것이다.
십자가란 하나님의 우주적 아픔과 아들 예수님의 온전한 순종이 만나서 이뤄낸 더할 수 없는 찬란한 사랑의 꽃인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소엽 (18) 가택연금 DJ도 감명 받았던 '그대는 별로 뜨고'
십자가가 아니었던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었겠는가. 예수께서 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이야기는 교회를 다니면서 수백 번도 더 들었던 이야기다. 그럼에도 나는 그 사실을 머리로만 알았다. 내가 죄인인 것을 아는데 30년이 걸렸다면 내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깨닫기까지 40년의 세월이 걸린 것이다. 진정 가슴으로 내가 그 진리를 받아들인 것은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슬픔의 강을 건너고 고뇌의 산을 넘고 나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절규했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에 응답지 않은 하나님의 무한 아픔, 예수님이 완전히 순명하기까지 하나님의 침묵, 나는 그 속에 엄청난 사랑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 발견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히 5:8∼10)
예수님조차도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니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셨을 뿐 아니라 온전히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구원의 근원, 즉 구세주가 되었다는 것이다. 십자가로 주어지는 상급은 부활로 이어진다. 십자가가 아니었던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십자가가 없었던들 어떻게 부활이 주어졌겠는가.
'내가 무슨 잘못이 있기에 나만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라고 분하고 억울해 어찌할 바를 모를 때에 베드로전서 2장 19절 이하의 말씀을 주셨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또 4장 12∼13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응답하셨다.
이렇게 말씀 안에서 위로 받으며 나의 분노와 반역은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렇게 차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 갔다. 그러면서 나의 아픔을 시로 풀어냈다. 남편의 2주기에 한 권의 시집으로 묶어 '그대는 별로 뜨고'라는 시집을 문학세계사에서 펴냈다. 87년 6월이었다.
때마침 가택연금 상태인 김대중 선생에게 온 세상 이목이 집중해 있었을 때 조선일보 기자가 찾아가 무엇으로 소일하는지를 물었다. 그 기자는 선생의 대답을 기사로 전했다. 독서로 소일하고 있다는 선생은 특히 김소엽 시인의 시집 '그대는 별로 뜨고'를 감명 깊게 읽었다고 했다. 이 한 줄의 기사가 나가자 나의 시집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하나님은 참 알 수 없는 분이시다. 남편의 월급으로 매달 살아가던 나는 당시 많이 힘들었다. 사실 딸과 함께 살 길이 막막했는데, 하나님은 예기치 않은 상황을 통해 역사하셨다. 시집 인세를 받아 몇 년 동안을 또 살게 인도하셨다.
나는 추모 시집에 '죽음은 마침표가 아닙니다'라는 시로 죽음을 정리했다.
죽음은/ 마침표가 아닙니다//죽음은/영원한 쉼표// 남은 자들에게는/끝없는 물음표//
그리고/의미 하나/이 땅위에 떨어집니다/어떻게 사느냐 하는/따옴표 하나//
이제 내게/남겨진 일이란/부끄럼 없이 당신을 해후할/느낌표만 남았습니다
***[역경의 열매] 김소엽 (19) 기독 여성문인들 간증연극… 1억5000만원 대박
남편이 떠나고 살 길이 막막했다. 6개월을 누워만 있다 보니 은행 대출 이자도 못 갚아 당장 집이 경매로 넘어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때 육군사관학교 상담교관 시험에 합격해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근무시간은 오후 1시부터 밤 10시까지였지만 계속되는 생도들의 상담 요청에 밤 12시가 되어서야 퇴근했다. 젊고 패기 넘치는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면서 나의 슬픔도 조금씩 치유되는 것 같았다. 순수한 열정을 가진 생도들로부터 많은 위로와 도전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중학생이었던 딸은 늦은 나의 귀가 때문에 어두운 집에 홀로 남아 사춘기를 보내야 했다. 늘 그것이 마음에 걸렸던 나는 결국 사표를 냈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남편의 2주기 추모 감사예배는 나의 신앙고백이었다. 고통 가운데 기도로 올려진 시집이 감사하게도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한 마디에 베스트셀러가 됐고, 매월 받는 인세가 살아나가는 데 큰 보탬이 됐다.
또 한편에선 당시 함께 교제해온 기독여성 문인들의 기도와 격려가 힘든 시간을 이겨내는 힘이었다. 여성 문인들과는 1980년부터 성경 공부를 같이 했다. 김자림 윤남경 정연희 임성숙 김녕희 이건숙 나연숙 박강월 이진화 김부희 정화신 등과 함께 신성종 이재철 목사님으로부터 말씀을 배웠다. 10년 가까이 성경 공부를 해오다 우리는 간증극을 한번 올려보자고 의기투합했다. 그리고 작가들이 각자의 간증을 써냈다. 그 내용을 토대로 김자림 나연숙씨가 극본을 만들었고 여성 문인들이 모여 기도하면서 몇 달 동안 연습해 '하늘의 종소리'라는 간증극을 호암아트홀 무대에 올렸다.
반응은 대단했다. 당시 사람들이 "연극배우들이 다 굶어죽겠다"고 말할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1주일 동안 매회 눈물을 흘리며 연기했다. 그 순간만큼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각본대로 움직이는 세상의 무대에 선 배우들이었다. 반응이 좋자 이듬해인 1989년 '죽으면 죽으리라'는 제목으로 내용을 전면 보완·수정해 다시 호암아트홀에서 공연했다. 이때 모은 수익금이 무려 1억5000만원이나 됐다.
그 가운데 제반 경비를 제외하고 1억2000만원을 종잣돈으로 '주부편지'를 발행하게 됐다. 가정이 바로 서야 나라가 살고, 가정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사회도 건강해진다는 여성 문인들의 생각에서였다. 내용과 표지 콘셉트를 정하는 데 나 역시 많은 의견을 전달했다. 그렇게 탄생한 '주부편지'는 오늘날까지 많은 이웃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돼주고 있다.
이 때부터 많은 일들이 밀려왔다. 극동방송의 간판 프로그램인 '하나되게 하소서'를 공부영 PD와 함께 진행했고 청소년 선도 잡지인 '주변인의 길' 편집고문으로 활동했다. 또 지성인을 겨냥한 '낮은 울타리', 해외 기독 교양지인 '광야'의 편집을 맡아 바쁜 일정을 보냈다.
90년 딸 서윤이의 의지를 더 이상 꺾지 못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이후 눈코 뜰새 없이 바쁘게 지냈다. 낮에는 서울신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고 주말에는 교회에서 간증예배를 인도했다. 밤에는 주로 원고를 썼다. 몸은 바빴지만 별로 돈 되는 일은 없었다. 하나님의 일은 대부분 무료 봉사가 많아 딸의 유학비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KBS에서 밤 11시부터 2시간 동안 생방송으로 진행한 '밤과 인생 이야기', 기독교방송의 '새롭게 하소서'는 어려운 나의 생활에 큰 보탬이 됐다.
***[역경의 열매] 김소엽 (20) 주님께 받은 새 소명 "문화선교 일꾼이 돼라
1990년대 초 KBS 라디오 프로그램 '밤과 인생 이야기'를 2시간 동안 생방송으로 진행하고 방송국을 나서면 새벽 1시. 여의도의 밤공기는 싸늘했다. 근처 포장마차에서 따뜻한 우동 한 그릇으로 배를 채우고 급히 마포 집으로 와서 밀린 원고를 쓰고 나면 훤하게 동이 터오른다. 일터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았다.
92년에는 기독교방송 '새롭게 하소서'도 맡게 됐다. 고은아 권사가 개인 사정으로 진행을 그만두게 되면서 방송국에서 진행을 맡아 달라고 연락이 온 것이다. 첫 시집의 인세가 거의 줄어들 때가 되니 하나님은 방송 일을 통해 생활을 이어가게 하셨다.
나는 당시 극동방송과 기독교방송에서 간증 칼럼을 진행하면서 믿음의 형제·자매를 많이 만났다. 그들이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자리에서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왔는지, 또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 고통과 고난의 자리에서 어떻게 일어서게 됐는지를 볼 수 있었다.
사업은 파산하고 자녀들마저 잃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다시 소망을 갖고 재기한 사람들을 하나님은 만나게 하셨다. 건강을 잃은 채 처절하고 참혹한 상태에서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난 사람과의 만남도 이끄셨다. 그들의 참담하고 쓰라린 상황과 비교하면 나의 아픔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눈을 씻고 세상을 다시 보니 나보다 처절하고 어려운 사람이 의외로 많았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 주변에 이렇게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았단 말인가. 나는 그동안 도대체 무엇을 보며 살아왔단 말인가.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와 같은 미숙아였구나.' 이제까지 저 세상으로만 보였던 죽음 너머의 세계, 그 피안의 영적 세계까지도 하나로 통합되는 새로운 하나님 질서의 세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무렵 정진경 목사님은 나에게 끊임없이 문화선교의 중요성을 언급하셨다. "앞으로의 세상은 문화가 지배할 것입니다. 기독문화가 바로 서야 청소년들의 정서가 바로 잡히고 온 세상이 제대로 돌아갈 것입니다. 김 권사가 총대를 메 주세요."
목사님은 수차례 말씀하셨지만 나로선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 목사님께서 나를 보자고 하시더니 구체적인 방안까지 마련해 책임을 맡기셨다. 구상은 원대했다. 우선 내가 글 쓰는 사람이니 문인선교회를 창립하고, 차츰 미술 음악 무용 연극 사진 건축 국악 방송 연예 등 각 예술 분야에서 기독문화를 지향하는 '기독문화예술총연합회'를 설립하는 것이다. 목사님은 이 단체를 통해 올바른 기독문화 예술을 창달하고 정착시키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씀하셨다.
마침내 92년 한국기독교문인선교회를 비롯, 미술 음악 무용 등 부문별로 순차를 두고 12개의 기독예술단체가 창립됐다. 그리고 94년 김삼환 목사님을 이사장으로 총재에 곽선희 목사님, 고문에 정진경 목사님을 모시고 '한국기독교문화예술총연합회'를 창립했다.
21세기를 사는 요즘, 급변하는 문화의 시대를 맞고 보니 당시 시대를 꿰뚫어 보신 정 목사님의 영적 혜안이 존경스럽다. 지금 생각하면 슬픔에 빠진 나에게 사명을 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시키심으로 슬픔에서 나를 구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그분의 깊은 뜻을 이제 와서야 헤아리게 된다. 정 목사님은 나의 영적 아버지였고 나를 딸처럼 사랑해 주셨던 잊을 수 없는 분이다.
***[역경의 열매] 김소엽 (21) 문화선교 19년… 복음 담은 '힐링 예술'로 승화
문화선교의 사명을 갖고 뛰는 크리스천 문화·예술인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황금찬 나채운 전규태 이성교 유승우(문학), 박인수 오현명 김자경(음악), 육완순 조승미 박명숙(무용), 정재규 김병종 최병상 유명애(미술), 박상균 유경선(사진), 김기승 홍덕선 조용선(서예), 문고헌 강계식 강만희 박종철(연극), 김정철 이현삼 최병창(건축), 임동진 한인수 정영숙(연예), 황대식(국악), 신영균 이기원 정종화(영화) 등 일일이 이름을 다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예술가들이 분야별로 의욕을 갖고 사역했다.
문인선교회에서는 해마다 국민일보와 기독신춘문예 공모를 통해 많은 기독 작가들을 발굴했다. 또 치유시집을 발간해 병원, 소년원, 교도소 등 소외지역에 시집을 무료로 전하며 시와 친미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미술인선교회에서는 기독미술대상을, 서예인선교회에서는 해마다 대한민국서예대상 및 전시회 등을 통해 그리스도를 전한다. 음악인선교회에서는 자선음악회를 연 수익금으로 중국 옌볜 등 해외에 반주 악기를 보내고 찬양제를 통해 하나님을 전하고 있다.
이처럼 각 분야에서 자기가 받은 달란트대로 영적 사랑과 복음을 전해오기를 19년. 황무지나 다름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우리들은 문화선교의 역군으로 열심히 소명을 다할 것이다. 그러나 교단과 교파를 초월해 활동하다 보니 문화 선교비가 들어오지 않아 고전을 면치 못해 안타깝다. 대형 교회는 나름대로 홍보부를 두어 개교회주의로 나가고 있고, 중형 교회들은 교회건축에 힘을 쏟다 보니 예산이 없다. 작은 교회들은 교회를 유지하는 것도 힘든데 누가 초교파적인 문화단체에 선교비를 내 줄 것인가.
점차 선교활동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나는 이 일을 하면서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 행사는 다 정해 놓고 후원해 주기로 약속한 교회는 펑크를 내기도 하고, 예술인들이 재능기부를 하는 것도 힘든데 회원들이 내는 회비로만 행사를 진행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다 보니 나는 이 사역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개인 출자를 많이 하게 됐다. 나에게 들어오는 원고, 강의 등을 최선을 다해 해냈다. 낮에는 대학 강의와 방송, 밤에는 밤을 새며 원고를 쓰고, 주말에는 간증예배와 특강으로 잠을 줄여가며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몸을 혹사하다보니 무리를 겪기도 했다. 주변의 질시도 많이 받았고, 때론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베드로전서 2장 19∼20절 말씀으로 위로를 받았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하나님 일을 하다가 당하는 고난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위로를 주신다.
나는 이러한 고난들에 대해서 때로 휘청거리고 쓰러지기도 했지만 말씀으로 이겨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건져 올린 시 '오늘을 위한 기도'는 최용덕 선생이 작곡해 복음성가로도 많이 불려지고 있다.
***[역경의 열매] 김소엽 (22) "한국교회 질적 성장 돕자" 실천신학대 설립 앞장
나는 세계 여러 나라를 날아다니며 간증과 특강을 인도했다. 특히 호주 시드니장로교회에서 주일예배 인도 중 내가 좋아하는 윤동주의 '서시'를 낭송했는데, 마침 그 예배에 윤동주의 여동생 윤혜원 권사 부부가 참석했었다. 그 만남을 오래도록 잊지 못한다.
또 LA영락교회에서 집회를 마친 뒤 영문과 동기동창인 최영자 권사도 만났다. 텍사스 오스틴에서 기독교한인방송에 출연했는데 방송을 보고 보성여고에서 함께 근무했던 박화자 선생 부부가 나를 찾아온 것이다. 이 또한 얼마나 반가운 만남인가. 뿐만 아니라 홍정길 김진철 목사님과 함께 참석했던 로마 코스타 집회에선 수많은 젊은이들의 뜨거운 기도 열기에 큰 감동을 받았다. 로마 교회에서 간증을 마치고 제자를 만났던 일 등 하나님은 기적 같은 만남을 계속 이어주셨다.
그 무렵 정신없이 어지는 강연으로 몸이 조금씩 지쳐갔다. 뉴저지 교회에서는 예배 후 갑자기 심장 통증이 느껴졌다. 당시 담임인 김성중 목사님은 시카고에서 심장센터 소장으로 일하는 심장전문의였다. 나는 바로 목사님 댁에서 응급처치를 받을 수 있었다.
국내에서도 명성교회 소망교회 충현교회 신촌성결교회 충신교회 등 1000여 교회 이상을 다닌 것 같다. 또 육사수련생도수련회 전국교장수련회 청소년수련회 LA지성인모임특강 MBC 명사특강 애틀랜타문화원 등 수많은 문학 강의와 특강 등으로 친구들과 차 한 잔 나눌 새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렸다.
바쁠수록 나는 말씀을 보고 기도하는 데 더 집중했다. 특히 은준관 박사님이 이끄는 'TBC(Total Bible Curriculum)' 성서 연구를 3년 동안 공부했다. 시청각 교재를 모두 동원해 성서만 공부하는 대학원 수준의 과정이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느꼈을 법한 성령 체험을 했다.
탁영환 장로님과 함께 성서모임의 대표를 맡았던 나는 정말 은 박사님의 성경공부를 통해 처음으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서적 배경과 근동지방의 당시 상황을 종합해서 배웠다. 예수님의 말씀을 구원사적 맥락에서 공부했다. 이렇게 말씀을 배우고 나니 겨우 성경의 한 끝자락을 알게 된 기분이었다. 이 힘은 그 당시 많은 일을 소화해내는 영적 에너지가 됐다.
또 그때 은혜 받은 우리들은 한국교회가 타락해가는 이유 중 하나는 성경을 제대로 배우지 않고 신학교만 졸업하면 전도사를 거쳐 목사 안수를 주는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수준 높은 기독신자들을 키울 수 없다는 데 뜻을 같이하고 성경을 제대로 가르칠 대학원대학의 필요성을 외치며 종자돈을 모았다. 이렇게 해서 실천신학대학이 세워지게 됐다. 한국교회가 잘되려면 미국처럼 정규 대학을 졸업하고, 소명 받은 소수의 사람들이 신학을 하고 성경공부를 제대로 한 뒤 목회자가 돼야 한다. 그렇게 될 때 한국교회가 질적 성장을 다시 한번 이룰 것으로 기대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님은 말씀으로 오신 분이기 때문에 말씀을 모르고는 누구도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다. 세상의 박사학위를 따려고 해도 30년을 넘게 공부해야 하는데, 하물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영의 세계, 하나님을 아는데 우리는 얼마나 노력하고 공부했는가.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나는 생애 중 가장 보람 있는 시간을 바쁜 가운데 보냈다.
***[역경의 열매] 김소엽 (23) 癌과의 사투속에도 "주님 일은 결코 미룰 수 없다
몸을 너무 혹사했던 것일까.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암 진단을 받았다. 그동안 내 몸에 너무 소홀했다. 제때 먹여주지도, 재워주지도 않고 돌보지 않았다. 몸은 하나님이 주신 성전인데 그 몸을 혹사하고 지냈던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됐다. "하나님께서 나를 쉬게 만드시려고 이런 기회를 주셨구나." 예상외로 마음이 담담했다. 바로 입원하라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각종 검사 후 월요일 아침에 수술이 잡혔다. 그런데 그 주일에 교회 간증 집회가 잡혀 있었다. 나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길 수 없었다. 주일날 간호사 몰래 옷을 갈아입고 나가 예배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 어떤 때보다 은혜로운 예배였다. 물론 간호사에게 혼쭐은 났지만 지금 생각해도 참 잘했다 싶다.
다음날 새벽 6시. 정진경 목사님과 김상원 대법관님이 오셨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말씀으로 위로해 주셨다. 그때 주신 말씀이 시편 50편 15절이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이 새벽에 내가 가장 존경하는 두 분이 오시다니…. 나는 너무나도 감사하고 행복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다. 그러고 나니 마음에 평안이 왔다. 침대에 누워 수술실로 가는 나를 붙잡고 언니가 울고 있었지만 나는 편안했다. 오히려 언니를 위로했다. 육친의 진한 사랑이 전해왔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오후 2시 회복실에서 눈을 떴을 때 살아있는 내 모습이 대견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 덤으로 사는 인생이오니 내 남은 생애가 주님께 영광되게 하소서." 감사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수술을 받으며 했던 가장 큰 고민은 매일 두세 번씩 미국에 있는 딸과 통화를 하는데, 어떻게 모르게 수술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수술실 들어가기 전 딸과 통화를 하면서 오늘은 전화를 받지 못할 일이 있다고 집에 전화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여긴 딸은 잠도 안 자고 수없이 전화를 해댔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안절부절못하며 잠 한숨 못자는 딸의 성격을 알기에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목소리 톤을 높여 전화를 받았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목소리만 듣고도 다 안다고, 딸은 "엄마, 왜 어디 아파요?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세요?"라며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런 딸을 야단쳐 따돌렸다. 사실을 알면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학업도 중단한 채 한국으로 뛰쳐나올 게 뻔하기에 숨길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항암 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다 마친 8개월 후 미국에 있는 딸에게 갔다. 다 빠진 내 머리를 보고 대성통곡하던 딸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정말 가슴 저리게 딸을 사랑한다.
2005년 11월 21일에 수술을 받았고 12월 20일부터는 항암 치료에 들어가야 했다. 그런데 나는 해마다 연말에는 미국에 건너가 고어헤드선교회 주최로 한국 고아를 위한 모금 행사를 10년째 하고 있었다. 당시에도 이미 포스터에 이름이 나갔고 집회가 여러 곳 잡혀 도저히 취소할 상황이 안 됐다. 의사 선생님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2주를 늦춰 이듬해 1월 3일부터 치료받겠다고 했더니 선생님은 "생명보다 더 중한 일이 무엇이냐"며 안 된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 수술 후 2주 만에 미국으로 날아갔다. 뉴저지의 극장에서 열리는 행사를 비롯해 소망교회 전하는교회 뉴저지장로교회 늘푸른교회 그레이스성결교회 등 미국 순회 집회를 마치고 12월 30일 귀국했다. 그리고 2006년 1월 3일부터 항암 치료를 받았다. 치료 중에도 군복음신문 칼럼과 집회는 모두 지켰다. 그런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셨다. 그리고 5년 후 깨끗함을 인정받았다. 할렐루야!
***[역경의 열매] 김소엽 (24) 눈물과 기도로 키운 딸 "믿음의 사위 어때요?
서윤이가 미국 남가주대학에서 석사과정을 할 때 홍남표 목사님이 인도하는 성경공부 모임에 나가고 있었다. 목사님은 석·박사 코스 학생들을 대상으로 매주 금요일 오후 성경을 가르치며 예배를 인도하셨다. 내가 그 모임 강사로 초청을 받았다. 50∼60명의 학생들이 준비찬송을 하고 있었다. 찬양을 리드하는 한 남학생이 내가 작사한 '부서져야 하리'란 곡을 기타로 치며 찬양했다. 그 학생에 대한 인상이 좋았다.
나는 서윤이를 낳고부터 늘 믿음의 배우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목사님 장로님 총장님 교수님에서부터 재벌가 자제에 이르기까지 참 많은 곳에서 혼담이 오갔지만 서윤이는 단호하게 '노' 했다. 믿음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오직 믿음만 보는 딸의 신앙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딸은 언제나 아빠처럼 신앙 좋고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을 만나 자기를 신앙적으로 이끌어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런 아이가 그때 기타를 치던 청년 신모세를 배우자 감으로 엄마에게 소개한 것이다. 결국 나는 딸을 믿고 또 딸의 지혜로움을 잘 알기에 의견을 존중해 결혼을 허락했다. 서윤이는 2003년 정진경 목사님의 주례로 신촌성결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남편과 교회봉사를 함께 했던 장로님들이 나오셔서 중창을 불러주셨고 두 사람을 축복해 주셨다. 오랜 시간 잊지 않고 우정을 간직해 준 그분들에게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결혼만 시키면 책임이 끝날 줄 알았는데…. 믿음 좋은 신랑감만 달라고 기도했지, 돈 많은 신랑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은 게 후회되기도 했다. IMF가 세계를 강타하자 미시간대학에서 석·박사 과정을 끝낸 사위 모세는 설 자리가 없었다. 기계공학을 전공한 사위에게 자동차, 항공사 등이 망해가는 디트로이트시는 절망적이었다. 게다가 모세는 "어머니 저는 기계를 대하고 평생 산다고 생각하니 정말 끔찍해요"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정말 큰일났다 싶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도 경쟁사회에서 헤쳐 나가기 힘든데, 하물며 하기 싫은 일을 평생 한다면 무슨 행복과 성과가 있겠는가. "그러면 자네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자네 꿈이 무엇인가?"
모세는 대학시절 의료선교단과 함께 동남아 일대를 돌며 선교활동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기 꿈은 의사가 되어 의료선교를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나는 서슴지 않고 "이 세상에는 길이 없는 것이 아니고 뜻이 없는 거라네. 열심히 기도하고 간구하면 주님 안에서의 선한 꿈이 반드시 이뤄질 거야"라고 격려했다.
이후 사위를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응답해 주셨다. 사돈인 신석균 목사님과 사모님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지금도 손녀 록이의 친 할아버지와 외증조할아버지가 목사님이라는 것이 그렇게도 감사할 수가 없다. 사위는 지금 의대를 졸업하고 치과의사로 일하고 있다. 또 아빠의 뒤를 잇겠다며 15세에 홀로 미국 유학을 떠났던 딸은 유학 생활의 어려움을 신앙으로 극복하고 마침내 커뮤니케이션과 심리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시간대 연구 교수로 재직 중이다. 딸 네 부부는 두 달 된 예쁜 손녀 신록(Loc Lily Shin)과 함께 내 칠순 잔치를 치르기 위해 올 초 미국에서 나왔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눈물의 간구를 모두 응답해주셨다.
***[역경의 열매] 김소엽 (25·끝) “주님, 죽음의 그날까지 영혼 울릴 詩心 주소서”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요즘같이 각박한 세상에 제자와 후배 동료들이 마음을 모아 ‘고희기념문집’을 내주었고 이강철, 김예소리씨가 나의 시를 직접 낭송한 CD음반을 만들어 봉정해 주었다. 우리나라 전통 인쇄기법인 활판인쇄로 시 100편을 담은 시선집 ‘그대는 나의 가장 소중한 별’, 문학평론가의 논평과 시인들의 평설, 박사학위 논문을 함께 묶은 ‘논총집’까지 총 3권이 한꺼번에 출간돼 지난 1월 7일 서울 프레지던트호텔에서 출판감사예배를 드렸다.
신촌성결교회 이정익 목사님의 은혜로운 설교로 시작된 출판감사예배에는 200여분이 오셔서 축하해 주셨다. 축사를 맡아주셨던 곽선희 목사님, 황금찬 선생님, 유재건 장로님을 비롯해 김삼환 목사님, 김동길 박사님, 이어령 전 장관님, 정근모 장로님, 김동선 강일구 홍성표 총장님 등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는 분들이 직접 참석하거나 영상으로 자리를 빛내주셨다. 특히 신촌성결교회 장로중창단과 순서를 맡아 주신 분들, 그리고 무엇보다 기념문집을 만드느라 고생해준 편집장과 간행위원장 신성종 목사님을 비롯한 간행위원들, 문단 선후배, 동료, 친지, 친구들에게 큰 감사를 드린다.
나는 이들이 옆에 있었기에 살 수 있었다. 이런 고마움을 딸이 대신 전해주었다. 서윤이는 그날 감사예배에서 “어린 시절 엄마를 두고 떠나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여러분이 우정과 사랑으로 엄마를 보살펴 주셔서 여기까지 온 것 같다”며 “그 우정을 인생 끝날 때까지 지켜 달라”고 인사했다. 28년 전 아빠의 뒤를 이어 교수가 되겠다던 딸이 인고의 세월을 신앙으로 극복하고 남편과 두 달 된 딸을 안고 귀국해 감사인사를 하는 모습이 대견스러웠다. 또 사위는 아들 노릇을 하며 내 곁을 든든하게 지켜줬다. 이런 우리 가족을 하늘나라에서 보고 있는 서윤이 아빠도 미소 짓겠지. 마치 “당신 고생했어. 잘 살았어. 고마워”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돌아보면 내 인생길 골목마다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고 인도해 주셨다. 그동안 명예문학박사학위도 받게 해주셨고 호서대 교수로 정년퇴임하고 고향인 대전대학에서 문창과 석좌교수로 봉직하게 인도해 주셨다. 기독교문화대상 윤동주문학상 한국문학상 이화문학상 등 많은 상도 받게 해주셨다. 나는 상을 받을 때마다 “한 편의 시라도 영혼을 울릴 수 있는 시를 쓰라”고 격려해준 남편의 말을 잊지 않고 늘 채찍으로 삼고 있다. 이제 남은 과제는 한 편이라도 그런 시를 쓰고 문화예술선교회를 좀 더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나의 일생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도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다. 다만 창조주 되신 하나님께 전부를 의탁하고 순종할 뿐이다. 살아도 죽어도 다 주님의 은혜이다. 역경의 열매를 마무리하며 시 한 편을 하나님과 사랑하는 이웃에게 바치고 싶다.
꽃이 피기 위해서는
꽃이 그냥 스스로 피어난 것은 아닙니다/ 꽃이 피기 위해서는/ 햇빛과 물과 공기가 있어야 하듯이
꽃이 저 홀로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꽃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벌과 나비가 있어야 하듯이
꽃의 향기가 저절로 멀리까지 퍼지는 것은 아닙니다/ 꽃의 향기를 전하기 위해서는/ 바람이 있어야 하듯이
나 홀로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닙니다/ 기도로 길을 내어주고/ 눈물로 길을 닦아 준 귀한분들 은덕입니다
내가 잘나서 내가 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벼랑 끝에서 나를 붙잡아주고 바른길로 인도해 주신/ 보이지 않는 그분의 섭리와 은총이 있은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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